참말로 좋은 날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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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지점에 미래가 놓여 있다. 나는 항상 그렇게 믿는다. 겹침점이든 누빔점이든 어떤 용어를 사용하든 상관없이 그 간극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조망하며 가치를 부여하고 미래를 예견하기도 한다. 물론 소설이 미래지향적이거나 희망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읽는 사람에게 주어질 미적 가치와 감수성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것이므로.

어떤 소설가를 좋아하는 것은 독자들의 선택이다. 무엇을 좋아하는가도 마찬가지다. 나의 경우 일단 소설의 특징을 뚜렷하게 결정하는 문체가 확실하지 않으면 내용이 목에 걸린다. 환상적인 이야기와 재밌는 입담은 소설가의 기본이다. 그러나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소설가도 많이 있다. 개인적으로 성석제의 소설은 문체가 먼저 보이고 내용은 그 다음이다. 자기만의 색깔을 지닌 소설가는 행복하다. 성석제가 그런 경우다. 그의 소설 <참말로 좋은 날>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하나의 틀로 규정할 순 없지만 성석제의 소설이다. 그러나 조금 달라졌다.

7개의 단편을 모아놓은 이 소설집은 성석제를 미래를 예견한다. 만약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작가라는 전제하에. 재치와 농담 속에 진한 페이소스를 담아내던 그가 조금 변화한 듯 보이는 것은 이전과 다른 몇 가지 요소 때문이다. 그 요소들이 새롭게 등장시킨 신무기는 아니다. 이전의 소설들에서 보여줬던 모습들의 변화 양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과거에 대한 기억들이다. 고전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말한 것처럼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시대가 달라지고 세상이 변했지만 생활의 모습과 패턴이 달라져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가끔 지나버린 시간들을 되짚어 보는지도 모르겠다. <집필자는 나오라>는 박태보라고 하는 인물을 통해 인간이 가진 ‘숭고한 삶’의 가치를 되묻고 있다.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굳게 믿고 지킬 수 있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할 것이다. 생존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을 찾아 헤매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특별한 경우지만 박태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일상과 현재의 극단을 드러낸다. 사회적 관심을 떠나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소설 장르다. 그런면에서 성석제도 당연히 자유로울 수 없는 부분이다. 80년대를 정점으로 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소설들은 그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와 이 소설집에서 가장 뛰어난 <저만치 떨어져 피어 있네>에 주목한다. 한 개인과 가정이 확대된 모습이 그대로 그 사회의 자화상이다. 법과 규칙 바깥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안쪽에 서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우리들 모두의 몫이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시혜적 차원이 아니라 그것이 나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다가 어느 대목에서 어떤 방식으로 눈물을 흘리거나 가슴이 먹먹해지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것도 개인차이겠지만 위의 두 단편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삶의 모습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 속에서 인간이 배제되고 법과 규칙들이 선행할 때 생기는 불안과 고통은 당연히 지금 현재 우리들의 모습이다. 내용은 당연히 책을 읽고 판단할 문제이겠지만.

이 소설가 아니면 안되겠다 싶은 소설 중의 하나가 <고귀한 신세>와 <악어는 말했다>이다. 로버트 드 니로가 주연했던 영화 <숨바꼭질>을 보다가 10분 만에 결말을 예견했던 것처럼 <고귀한 신세>는 시작 부분에서 결말을 상상했더니 그대로다. 일상에서 만나는 뻔한 이야기라는 뜻은 아니다. 산다는 것을 이렇게 유쾌한 비극으로 담아낼 수 있는 것은 만만찮은 소설가의 내공이 필요하다. 특히 <악어는 말했다>는 지루한 술자리 장면이라는 내용없는 지루함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군데 군데 드러나는 재치와 마지막 한 마디가 인관 관계의 단면을 희극적으로 풍자한다.

우선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이 소설의 미덕이라면 성석제는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는 이야기꾼이다. 아쉬운 면이 있다면 이제 긴 호흡의 장편을 통해서도 만나고 싶다. 깊이과 넓이를 더할 수 있는 작가의 장편을 기다려 본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잠들 때까지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음같은 말들 속에 진저리를 쳐 본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성석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어렴없이 공감할 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소설에 대한 오독이라 할지라도. 홍수 처럼 쏟아지는 풍성한 말의 잔치와 그물처럼 촘촘한 법의 규칙들 속에서 살아남는 인간과 한 쪽 구석으로 밀려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좀 더 귀기울이고 관심을 갖게되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나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그 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 때문인지도 모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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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그가 나를 떠났다 - 2005 페미나상 상 수상작
레지스 조프레 지음, 백선희 옮김 / 푸른숲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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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때문에 자살하는 인간은 없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자살을 했을 것이다. - P. 107

다소 도발적인 주인공의 고백이 이 소설의 내용을 압축한다. 어떤 고전 소설을 인용하든 사랑에 관한 가장 확실한 정의는 없다. 규정지을 수도 결론 내릴 수도 없다. 그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과거는 물론이고 현재도 미래에도 사랑에 관한 소설은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그것을 또 읽는다. 이번에는, 이 작가는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이야기하는지가 궁금하다. 그래서 연애소설을 읽는다. 비록 그것이 시간 낭비일지라도.

레지스 조프레가 쓴 <스물 아홉, 그가 나를 떠났다>는 우선 제목이 독자를 사로잡는다. 나이에 관해서라면 연령을 불문하고 다들 한마디씩 하고 싶어진다. 특히 스물 아홉은 더 그렇다. 내 경우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아직도 핸드폰 벨 소리로 쓸만큼 지겹게 듣고 있으며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삼십세>를 읽으며 스물 아홉을 보냈다. 누구에게나 나이에 관한 충격이 한번쯤은 온다. 이 소설이 스물 아홉에 관한 소설은 아니다. 나이와 무관한 소설을 제목으로 뽑은 출판사 편집자의 능력에 일단 감탄한다. 원제(Asiles de fous)는 불어라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이 소설은 혼합 시점을 사용한다. 서른 한 살의 남자 다미앙은 평소와 다름없이 영국으로 출장을 떠난다. 그리고 느닷없이 다미앙의 아버지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낡은 수도꼭지를 교체하고 아들을 대신해 스물 아홉 지젤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아들의 물건과 옷가지를 챙기며 끊임없이 쏟아놓는 독백들을 진저리를 치며 들어야 하는 지젤은 이 믿기 어려운 상황이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이후 진행되는 이야기나 줄거리는 거의 없다. 지젤의 시점으로 이별의 순간과 남자친구의 아버지에게 대신 이별을 전해 듣는 과정을 서술하는 것으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다미앙의 아버지가 진술한 후 남자친구의 어머니 입장에서 아들과 남편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다음은 다미앙이 술 취한 상태에서 어머니와 상황을 묘사한다. 다시 지젤의 입장으로 돌아와 소설은 마무리된다.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고백과 독백 형식이다. 대화 장면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이 독자들을 향한 독백이든 내면의 고백이든 상관없이 마치 판소리 사설처럼 요설적이고 직설적이서 말의 홍수 속에 갇혀 버리는 느낌이다. 미끈한 비유와 은근히 비꼬는 방식으로 소설이 아니면 맛보기 어려운 즐거움을 전해준다. 영화와 소설의 형식상 차이는 이런 소설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영화로 만들기 어려운 소설이다. 어쨌든 스토리 위주의 소설은 아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사랑 자체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지 않다. 사랑을 둘러싼 상황만 주변을 언급한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따져보는 알랭 드 보통식의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 특히 중산층 가정의 허위의식과 위선 -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성을 실감나게 한다.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자녀들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통제는 그대로 폭력이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타자화되지 못하고 혈연관계 그 이상을 넘어 설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비극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사랑할 때 가족을 고려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스물 아홉 ‘지젤’이라는 평범한 여자가 겪는 일상과 사랑은 누구나 한 번 쯤 겪었을 법한 이야기다. 사랑을 하면 이별을 하게 된다. 그 이별의 과정도 각자 다르겠지만 이런 특별한 이별을 통해 그리고 이후의 관계에 대해 지젤은 사랑을 이렇게 말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사랑이란 거의 있을 수 없는 감정이다. - P. 145

당신들에게 진실을 말하자면 사랑은 정말이지 우리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 고심해본 적이 없으며, 무신론자들이 신용카드를 잃어버렸을 때 무심코 ''오, 하느님''을 외치듯 그저 기계적으로 사랑을 말할 뿐이다. - P.241


그녀에게는 미래가 있다. 지나버린 시간들과 주어진 현재를 넘어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희망’이라는 마약의 다른 형식이다. 꿈꾸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 그래서 우리는 한 해를 뒤돌아 보고 다가올 2007년을 어떤 형태로든 ‘미래’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미래를 걱정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행복한 마음으로 미래를 기다렸다. 마치 멋진 기억을 되새기듯. - P. 257


06123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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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30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이란 거의 있을 수 없는 감정이다'
사랑이란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일 뿐 가슴 속에 감정이 있어 그걸 증명할 수는 없죠.
그리고 입에서 내뱉는 사랑이라는 말조차도 그게 진짜인지 말하는 동안,듣는 동안 확신이 안 설 수도 있어요.
모호한 감정들을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을 보고 있게 만드는 수단으로 보여질 수도 있구요.
스물 아홉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었어요.
남자든 여자든 새로운 나잇대에 접어든다는건 그만큼 기대보다는 두려움과 책임이 생기니까요.
저한테 스물아홉은 그다지 크게 다가오지 않았지만 서른 아홉때는 서른즈음에를 끼고 살 정도로 혼란스러운 해였어요.
생각을 많이하게 하는 책이네요.
 
바람의 사생활 창비시선 270
이병률 지음 / 창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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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을 밀면 한 장의 먼지 낀 내 유리창이 밀리고
그 밀린 유리창을 조금 더 밀면 닦이지 않던 물자국이 밀리고

……

밀리고 밀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이름이 아니라
그저 무늬처럼 얼룩처럼 덮였다 놓였다 풀어지는 손길임을

갸륵한 시간임을 여태 내 손끝으로 밀어보지 못한 시간임을
- ‘무늬들’ 중에서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감각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일종의 마술이다. 그래서 난 시인들을 마술사라고 부른다. 그리움의 두께와 무게를 유리창에 낀 먼지로 보여준다. 밀어내도 잘 밀리지 않는 미련과 아쉬움을 시인은 물자국으로 표현한다. 손끝으로 만져보지 못한 내밀한 시간을 견뎌본 사람들은 안다.

이병률의 시집 <바람의 사생활>은 손을 베일만큼 날선 감수성으로 벼려져 있다. 생활 속에서 만져지는 모든 감각들이 살아나고 시간의 두께를 벗어난 언어들은 살아 숨쉰다. 우리들 마음이 가 닿는 곳과 가 닿지 않는 곳을 보여주고 보여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들에 대한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신(神)과의 약속을 발설할 것 같지 않던 당신은
지금 그 시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백스물 아흔 여든두 살 쭈글쭈글한 얼굴로 돌아가자 말했다
허나 내가 지켜야 할 약속은
검고 고요한 저 소실점을 향해 가는 일
- ‘봉인된 지도’ 중에서

그때 오래전부터 당신이 나를 미워했다는 사실이 자꾸 목에 걸립니다

혼자이다가 내 전생이다가 저 너머인 당신은

찬찬히 풀어놓을 법도 한 근황 대신 한 손으로 나를 막고 자꾸 밥을 떠넣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 ‘저녁의 습격’ 중에서


시집을 읽다가 문득 눈길을 멈추고 심호흡을 가다듬는 구절이 나오면 사방은 정막하다. 시인의 보여주는 소실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득하기만 하다. 목구멍으로 밥을 떠넣는 모습이 보인다. 현실 속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시간들과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들이 어떻게 비춰지는 것일까? 시인의 눈에 투영된 모습들은 ‘낯설게 하기’가 아니라 ‘아프게 하기’이다.

언어에 대한 감각적 유희와 다른 언어를 통한 사유와 사고의 확장은 시인의 손을 떠나 독자의 몫이 된다. 해박한 이론과 관념적 이해가 아닌 호흡과 숨결을 만나게 된다면 행복하다. 어떤 독자라도 웃으며 그 시와 손을 잡을 수 있으면 된다. 이병률의 시는 바로 그런 시가 아닐까?

아무것도 그 무엇으로도

눈은 내가 사람들에게 함부로 했던 시절 위로 내리는지 모른다

어느 겨울밤처럼 눈도 막막했는지 모른다

어디엔가 눈을 받아두기 위해 바닥을 까부수거나 내 몸 끝 어딘가를 오므려야 하는지도 모르고

피를 돌게 하는 것은 오로지 흰 풍경뿐이어서 그토록 창가에 매달렸는지도 모른다

애써 뒷모습을 보이느라 사랑이 희기만 한 눈들, 참을 수 없이 막막한 것들이 잔인해지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비명으로 세상을 저리 밀어버리는 것도 모르는 저 눈발

손가락을 끊어서 끊어서 으스러뜨려서 내가 알거나 본 모든 배후를 비비고 또 비벼서 아무것도 아니며 그 무엇이 되겠다는 듯 쌓이는 저 눈 풍경 고백 같다, 고백 같다

아무것도 그 무엇으로도 말할 수 없는 부분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면서 쉽게 규정될 수 없을만큼 대단한 것도 아니다. 눈발을 통해 비명 소리가 재워지고 뒷모습이 희미해지며 들리지 않게 고백하고 만다. 하얀 눈으로 뒤덮힌 아침, 창밖의 나뭇가지에 쌓인 흰 눈의 무게만큼만 무거워지고 싶은 나의 이기심을 돌아본다. 그 시절 위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일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 배후를 알고 싶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야 하는 일에 대한 시인의 선언은 ‘봄날은 간다’이다.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시간이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당신’이라고 명명된 존재는 봄날과 함께 사라질 수 밖에 없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당신이 건설한 제국에 대한 두려움으로 읽히는 이 시 너머에 오롯이 앉아 있는 너의 모습을 본다.

당신이라는 제국

이 계절 몇사람이 온몸으로 헤어졌다고 하여 무덤을 차려야 하는 게 아니듯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찔렀다고 천막을 걷어치우고 끝내자는 것은 아닌데

봄날은 간다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인 나를 잊는다 하여 불이 꺼질까 아슬아슬해할 것도, 피의 사발을 비우고 다 말라갈 일만도 아니다 별이 몇 떨어진 별은 순식간에 삭고 그러는 것과 무관하지 못하고 봄날은 간다

상현은 하연에게 담을 넘자고 약속된 방향으로 가자 한다 말을 빼앗고 듣기를 빼앗고 소리를 빼앗으며 온몸을 숙여 하이면 기억으로 기억으로 봄날은 간다

당신이, 달빛의 여운이 걷히는 사이 흥이 나고 흥이 나 노래를 부르게 되고, 그러다 춤을 추고, 또 결국엔 울게 된다는 술을 마시게 되더라도, 간곡하게

봄날은 간다

이웃집 물 트는 소리가 누가 가는 소리만 같다 종일 그 슬픔으로 흙은 곱고 중력은 햇빛을 받겠지만 남쪽으로 서른세 걸음 봄날은 간다


061218-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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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18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의 시와 님의 글이 잘 어울렸어요.
또 한편의 시를 읽는 느낌이에요.

sceptic 2006-12-19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끄러운 멘트를...-_-
 
모로코의 낙타와 성자
엘리아스 카네티 지음, 조원규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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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표지와 디자인

하드 커버의 책은 두 종류다. 적은 분량을 벌충하거나 선물용으로 보기 좋게 만들기 위해서. 또 하나는 두고두고 오래 볼 수 있는 소장 가치가 있거나 두꺼운 분량을 잘 지탱하기 위한 방법일 수 있다. 엘리아스 카네티의 <모로코의 낙타와 성자>는 전자에 해당된다. 황금빛 햇살이 눈부신 사막과 낙타, 사람들의 모습이 음영으로 처리된 감각적인 사진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낙타의 길게 늘어진 목을 연상시키는 제목의 제자도 멋스럽다.  제목이 <성자가 된 청소부>를 떠올리게 하지만 무관한 책이다.

2. 주관적 평가

그러나 돈을 주고 이런 책을 사는 것은 각자의 선택이겠지만 나는 절대 사지 않겠다.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디자인에도 불구하고 사지 않을 수 없는 매력이 없다. 누군가 그렇게 표현했듯이 ‘나무에 대한 예의’가 없는 책이다. 구매 등급 ★★

3. 내용과 의미

노벨상을 탔다고 해서 책을 사보거나 경외감을 갖는 것은 위험하다. 모든 문학상이 그렇듯이 노벨상이 주는 권위와 객관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노벨상을 거부한 작가들에 대한 생각도 일조한다. 노벨상을 수상한 엘리아스 카네티가 쓴 모로코의 마라케시에 기행 수필 정도로 볼 수 있는 책이다. 아주 오래된 도시의 이국적 풍경들에 대한 감상과 작가 특유의 사유가 나타나 있다.

영화 촬영을 위해 1954년에 모로코를 찾은 작가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그들의 삶에 대한 애정과 공감이라기보다 이국적인 것들에 대한 관찰에 치중하고 있다. 자신의 입장에서 세상을 해석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카네티도 주머니에 돈을 들고 다니며 자신이 살아왔던 세계관 속에서 그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철저하게 여행객, 혹은 관광객의 입장으로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문화적 우월감으로까지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지만 진지한 성찰과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내용에 공감할 수 없다. 모로코에의 낯선 풍경, 특히 낙타와 관련된 일화로 시작되지만 그것 이상은 얻지 못했다. 문명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그들의 삶이 단순히 희망적이지도 강한 생명에 대한 애착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번역된 문장이 전해주는 아름다운 울림도 없다. 극히 주관적인 것이 책에 대한 인상 비평들이겠지만 적어도 내겐 메마르고 서걱이는 불협화음으로만 들린다. 특히 1968년의 책을 2002년에 다시 출판할 정도의 의미를 찾는 것은 더더욱 힘들었다.

어떤 문화든 그들 고유의 삶에 방식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그들 나름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들이 있다. 그것들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많다. 현재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세상에 대한 고정된 눈을 점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특히 문명에서 조금 벗어나 자연의 소리에 귀기울이며 있는 그대로를 소중히 간직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은 경건함으로 다가온다. 현대인의 삶을 생각하는 것은 우리들 스스로의 눈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는 아련한 시선이다. 그 시선을 거꾸려 돌려 문명 밖의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 책은 오히려 이 문제에 대해 반성하게 한다. 우리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의 대상일 뿐이다.


061214-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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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14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벨상 수상하면 주가가 올라가는 건 사실이에요.
저같은 사람들이 눈여겨 보기 때문이겠죠.

짱꿀라 2006-12-15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책 아주 괜찮은 책입니다. 인식의 힘의 리뷰도 정말로 멋지구요. 감사합니다. 저는 그냥 책만 읽고 덥어 두었는데 다시 한 번 책을 보고 리뷰를 써야 할 듯 하네요.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시고요.

sceptic 2006-12-16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연님, 노벨상이 주는 의미가 크지는 않은거죠?

santaclausly님 저는 이 책의 내용도 의미도 잡아내지 못했습니다. 별 감동없는 책이었습니다. 님도 즐겁고 행복한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비로그인 2006-12-18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벨상은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을 화재의 인물로 만들고 상금도 주잖아요.
시선이 집중된다는 것만큼 의미도 크겠죠.
노벨상 받은 작품이 다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요.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문학과지성 시인선 323
마종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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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당신

내가 채워주지 못한 것을
당신은 어디서 구해 빈 터를 채우는가.
내가 덮어주지 못한 곳을
당신은 어떻게 탄탄히 메워
떨리는 오한을 이겨내는가.

헤매며 한정없이 찾고 있는 것이
얼마나 멀고 험난한 곳에 있기에
당신은 돌아눕고 돌아눕고 하는가.
어느 날쯤 불안한 당신 속에 들어가
늪 깊이 숨은 것을 찾아주고 싶다.

밤새 조용히 신음하는 어깨여.
시고 매운 세월이 얼마나 길었으면
약 바르지 못한 온몸의 피멍을
이불만 덮은 채로 참아내는가.

쉽게 따뜻해지지 않는 새벽 침상,
아무리 인연의 끈이 질기다 해도
어차피 서로를 다 채워줄 수는 없는 것
아는지, 빈 가슴 감춘 채 멀리 떠나며
수십 년의 밤을 불러 꿈꾸는 당신.

마종기의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에는 켜켜이 먼지 묻은 시간들과 세월의 흔적이 많이 묻어난다. 낡고 오래된 것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기 쉽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들은 그렇게 특별한 모습이 아니다. 비루하고 누추한 모습으로 다가서기도 하고 신산스런 표정으로 물끄러미 우리를 바라보기도 한다. 그래도 이렇게 책을 읽고 내일을 기다리고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것은 ‘당신’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을 꿈꾸는 모든 사람들이 이 시집의 1부를 보며 짓는 다양한 표정을 상상한다.

방 안 가득 무거운 편견이 가라앉고
멀리 이끼 낀 기적 소리가 낯설게
밤과 밤 사이를 뚫다가 사라진다.
가로등이 하나씩 꺼지는 게 보인다.
부서진 마음도 보도에 굴러다닌다.
이름까지 감추고 모두 혼자가 되었다.
우리는 아직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 ‘이름 부르기’ 중에서

너를 만난 피부에서만 땀이 났다.
감추어놓은 절망이 터져나온 연옥,
소금의 단호한 결정체가 물이 되었다.
돌 속에 흐르는 땀까지 뽑아
돌 속에 살아 있는 고백까지 뽑아
떠나는 너에게 묘비명으로 보낸다.
- ‘땀에게’ 중에서


방 안에 가득한 무거운 편견이 가장 견디기 힘들다. 한 사람이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것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친구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방식대로 규정하고 타인을 객체화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무수한 비극들! 그들이 서로 부르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묘비명’을 보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낭패감.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시 읽기는 즐거움보다는 고통이 더 클 때가 있다.

출판 시장의 졸렬함과 시인과 소설가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신문 기사를 읽다가 문득 손에 든 시집의 작가를 떠올린다. 그 오랜 시력(詩歷)과 연륜을 떠올리며 책장을 넘기다 서글퍼진다. 젊은 시인의 시를 읽은 지 오래됐다는 생각 때문이다. 시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말보다 독서도 안전함과 편안함을 선택했다는 말이다. 그 선택은 그만큼의 감동을 돌려준다. 그 감동이 어떤 형태이든.

알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너를 떠나지 않았다.
지난 며칠 왠지 밤잠을 설쳤을 뿐이다.
얼굴과 머리는 늙어 낙엽으로 날리지만
한 평 침대에 누운 저 꽃 잠 깨기 전에
재갈 물린 세월아, 모두 잘 가거라, 잘 가거라.
- ‘귀향’ 중에서


세월에 재갈을 물릴 수 있다면 절대로 풀어주지 않겠다. 떠난 적이 없다는 말은 만난 적이 없다는 말이 된다. 세월의 흐름에 대해 말할 나이가 아니지만. 먼 훗날 그 순간을 기억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런 세월과 사랑을 묶어낸 것이 이 시집이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여전한 삶에 대한 거리감은 여유과 객관적 거리에서 나온 것 같다. 아니, 삶에 대한 거리감이 아니라 생에 대한 관조라고 해야 하나. 그의 시에 묻어나는 무게는 결코 만만치 않다.

그가 기다리는 ‘당신’ 이 누구이든 모두가 기다리는 ‘당신’이듯이.

알래스카 시편 1

1

네가 올 때까지는
물소리밖에 없었다.
높은 빙산이 녹아 흐르는
연둣빛 물소리밖에 없었다.
네가 오고 나서야 비로소
분홍빛의 밝고 진한 잡초 꽃들이
산과 골을 덮으면서 피어났다.
그리고 바람이 늦게 도착했다.

분홍 꽃들이 바람과 춤추고
가문비나무들은 그늘 쪽에 서서
장단에 맞추어 몸을 흔들었다.
왁자하던 꽃들이 잠잠해지자
저녁이 왔다. 정말이다.
네가 여기 올 때까지는
물소리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움직이는 것은
물소리밖에 없었다.

2

당신은 머리를 잠시 들어
주위를 살폈을 뿐이라고 하지만
당신이 와서야 파란 하늘이 생겼다.
정말이다. 지난날의 솜 덩어리들
하늘 밑에 구름도 생겼다.
잡초 꽃들이 고개 한 숙인 것 같은데
양쪽으로 분홍빛 길이 만들어졌다.

저 높은 끝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
누구도 걸어보지 않은 길로
당신이 화해를 하자며 다가왔다.
정말이다. 잡은 당신의 손이
따뜻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내가 걸어가야 할 남은 길이
옛날같이 다정하고 확실하게 보였다.


061127-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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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1-27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나게 하는 시를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종기 시인이 너무 좋아하거든요. 잘읽고 갑니다.

sceptic 2006-11-28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할 때 의미가 있겠지요. 읽고 난 후의 느낌이야 제각각이구요. 행복한 날들 보내세요.

비로그인 2006-11-28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된 것에는 자신만의 추억을 곁들여 미화하기 쉽지요.
그래서 새로운 것에 선뜻 손이 가지 않을지도 모르구요.
많은 것을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sceptic 2006-11-28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관적 해석이 가장 극대화되는 장르가 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낯설고 새로운 것에 대한 변화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겠죠. 자꾸 손이 가는 이유가 '익숙함'때문이라면 좋은 것만은 아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