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문학과지성 시인선 323
마종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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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당신

내가 채워주지 못한 것을
당신은 어디서 구해 빈 터를 채우는가.
내가 덮어주지 못한 곳을
당신은 어떻게 탄탄히 메워
떨리는 오한을 이겨내는가.

헤매며 한정없이 찾고 있는 것이
얼마나 멀고 험난한 곳에 있기에
당신은 돌아눕고 돌아눕고 하는가.
어느 날쯤 불안한 당신 속에 들어가
늪 깊이 숨은 것을 찾아주고 싶다.

밤새 조용히 신음하는 어깨여.
시고 매운 세월이 얼마나 길었으면
약 바르지 못한 온몸의 피멍을
이불만 덮은 채로 참아내는가.

쉽게 따뜻해지지 않는 새벽 침상,
아무리 인연의 끈이 질기다 해도
어차피 서로를 다 채워줄 수는 없는 것
아는지, 빈 가슴 감춘 채 멀리 떠나며
수십 년의 밤을 불러 꿈꾸는 당신.

마종기의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에는 켜켜이 먼지 묻은 시간들과 세월의 흔적이 많이 묻어난다. 낡고 오래된 것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기 쉽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들은 그렇게 특별한 모습이 아니다. 비루하고 누추한 모습으로 다가서기도 하고 신산스런 표정으로 물끄러미 우리를 바라보기도 한다. 그래도 이렇게 책을 읽고 내일을 기다리고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것은 ‘당신’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을 꿈꾸는 모든 사람들이 이 시집의 1부를 보며 짓는 다양한 표정을 상상한다.

방 안 가득 무거운 편견이 가라앉고
멀리 이끼 낀 기적 소리가 낯설게
밤과 밤 사이를 뚫다가 사라진다.
가로등이 하나씩 꺼지는 게 보인다.
부서진 마음도 보도에 굴러다닌다.
이름까지 감추고 모두 혼자가 되었다.
우리는 아직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 ‘이름 부르기’ 중에서

너를 만난 피부에서만 땀이 났다.
감추어놓은 절망이 터져나온 연옥,
소금의 단호한 결정체가 물이 되었다.
돌 속에 흐르는 땀까지 뽑아
돌 속에 살아 있는 고백까지 뽑아
떠나는 너에게 묘비명으로 보낸다.
- ‘땀에게’ 중에서


방 안에 가득한 무거운 편견이 가장 견디기 힘들다. 한 사람이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것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친구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방식대로 규정하고 타인을 객체화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무수한 비극들! 그들이 서로 부르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묘비명’을 보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낭패감.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시 읽기는 즐거움보다는 고통이 더 클 때가 있다.

출판 시장의 졸렬함과 시인과 소설가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신문 기사를 읽다가 문득 손에 든 시집의 작가를 떠올린다. 그 오랜 시력(詩歷)과 연륜을 떠올리며 책장을 넘기다 서글퍼진다. 젊은 시인의 시를 읽은 지 오래됐다는 생각 때문이다. 시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말보다 독서도 안전함과 편안함을 선택했다는 말이다. 그 선택은 그만큼의 감동을 돌려준다. 그 감동이 어떤 형태이든.

알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너를 떠나지 않았다.
지난 며칠 왠지 밤잠을 설쳤을 뿐이다.
얼굴과 머리는 늙어 낙엽으로 날리지만
한 평 침대에 누운 저 꽃 잠 깨기 전에
재갈 물린 세월아, 모두 잘 가거라, 잘 가거라.
- ‘귀향’ 중에서


세월에 재갈을 물릴 수 있다면 절대로 풀어주지 않겠다. 떠난 적이 없다는 말은 만난 적이 없다는 말이 된다. 세월의 흐름에 대해 말할 나이가 아니지만. 먼 훗날 그 순간을 기억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런 세월과 사랑을 묶어낸 것이 이 시집이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여전한 삶에 대한 거리감은 여유과 객관적 거리에서 나온 것 같다. 아니, 삶에 대한 거리감이 아니라 생에 대한 관조라고 해야 하나. 그의 시에 묻어나는 무게는 결코 만만치 않다.

그가 기다리는 ‘당신’ 이 누구이든 모두가 기다리는 ‘당신’이듯이.

알래스카 시편 1

1

네가 올 때까지는
물소리밖에 없었다.
높은 빙산이 녹아 흐르는
연둣빛 물소리밖에 없었다.
네가 오고 나서야 비로소
분홍빛의 밝고 진한 잡초 꽃들이
산과 골을 덮으면서 피어났다.
그리고 바람이 늦게 도착했다.

분홍 꽃들이 바람과 춤추고
가문비나무들은 그늘 쪽에 서서
장단에 맞추어 몸을 흔들었다.
왁자하던 꽃들이 잠잠해지자
저녁이 왔다. 정말이다.
네가 여기 올 때까지는
물소리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움직이는 것은
물소리밖에 없었다.

2

당신은 머리를 잠시 들어
주위를 살폈을 뿐이라고 하지만
당신이 와서야 파란 하늘이 생겼다.
정말이다. 지난날의 솜 덩어리들
하늘 밑에 구름도 생겼다.
잡초 꽃들이 고개 한 숙인 것 같은데
양쪽으로 분홍빛 길이 만들어졌다.

저 높은 끝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
누구도 걸어보지 않은 길로
당신이 화해를 하자며 다가왔다.
정말이다. 잡은 당신의 손이
따뜻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내가 걸어가야 할 남은 길이
옛날같이 다정하고 확실하게 보였다.


061127-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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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1-27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나게 하는 시를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종기 시인이 너무 좋아하거든요. 잘읽고 갑니다.

sceptic 2006-11-28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할 때 의미가 있겠지요. 읽고 난 후의 느낌이야 제각각이구요. 행복한 날들 보내세요.

비로그인 2006-11-28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된 것에는 자신만의 추억을 곁들여 미화하기 쉽지요.
그래서 새로운 것에 선뜻 손이 가지 않을지도 모르구요.
많은 것을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sceptic 2006-11-28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관적 해석이 가장 극대화되는 장르가 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낯설고 새로운 것에 대한 변화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겠죠. 자꾸 손이 가는 이유가 '익숙함'때문이라면 좋은 것만은 아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