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말로 좋은 날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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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지점에 미래가 놓여 있다. 나는 항상 그렇게 믿는다. 겹침점이든 누빔점이든 어떤 용어를 사용하든 상관없이 그 간극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조망하며 가치를 부여하고 미래를 예견하기도 한다. 물론 소설이 미래지향적이거나 희망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읽는 사람에게 주어질 미적 가치와 감수성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것이므로.

어떤 소설가를 좋아하는 것은 독자들의 선택이다. 무엇을 좋아하는가도 마찬가지다. 나의 경우 일단 소설의 특징을 뚜렷하게 결정하는 문체가 확실하지 않으면 내용이 목에 걸린다. 환상적인 이야기와 재밌는 입담은 소설가의 기본이다. 그러나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소설가도 많이 있다. 개인적으로 성석제의 소설은 문체가 먼저 보이고 내용은 그 다음이다. 자기만의 색깔을 지닌 소설가는 행복하다. 성석제가 그런 경우다. 그의 소설 <참말로 좋은 날>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하나의 틀로 규정할 순 없지만 성석제의 소설이다. 그러나 조금 달라졌다.

7개의 단편을 모아놓은 이 소설집은 성석제를 미래를 예견한다. 만약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작가라는 전제하에. 재치와 농담 속에 진한 페이소스를 담아내던 그가 조금 변화한 듯 보이는 것은 이전과 다른 몇 가지 요소 때문이다. 그 요소들이 새롭게 등장시킨 신무기는 아니다. 이전의 소설들에서 보여줬던 모습들의 변화 양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과거에 대한 기억들이다. 고전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말한 것처럼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시대가 달라지고 세상이 변했지만 생활의 모습과 패턴이 달라져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가끔 지나버린 시간들을 되짚어 보는지도 모르겠다. <집필자는 나오라>는 박태보라고 하는 인물을 통해 인간이 가진 ‘숭고한 삶’의 가치를 되묻고 있다.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굳게 믿고 지킬 수 있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할 것이다. 생존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을 찾아 헤매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특별한 경우지만 박태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일상과 현재의 극단을 드러낸다. 사회적 관심을 떠나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소설 장르다. 그런면에서 성석제도 당연히 자유로울 수 없는 부분이다. 80년대를 정점으로 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소설들은 그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와 이 소설집에서 가장 뛰어난 <저만치 떨어져 피어 있네>에 주목한다. 한 개인과 가정이 확대된 모습이 그대로 그 사회의 자화상이다. 법과 규칙 바깥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안쪽에 서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우리들 모두의 몫이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시혜적 차원이 아니라 그것이 나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다가 어느 대목에서 어떤 방식으로 눈물을 흘리거나 가슴이 먹먹해지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것도 개인차이겠지만 위의 두 단편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삶의 모습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 속에서 인간이 배제되고 법과 규칙들이 선행할 때 생기는 불안과 고통은 당연히 지금 현재 우리들의 모습이다. 내용은 당연히 책을 읽고 판단할 문제이겠지만.

이 소설가 아니면 안되겠다 싶은 소설 중의 하나가 <고귀한 신세>와 <악어는 말했다>이다. 로버트 드 니로가 주연했던 영화 <숨바꼭질>을 보다가 10분 만에 결말을 예견했던 것처럼 <고귀한 신세>는 시작 부분에서 결말을 상상했더니 그대로다. 일상에서 만나는 뻔한 이야기라는 뜻은 아니다. 산다는 것을 이렇게 유쾌한 비극으로 담아낼 수 있는 것은 만만찮은 소설가의 내공이 필요하다. 특히 <악어는 말했다>는 지루한 술자리 장면이라는 내용없는 지루함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군데 군데 드러나는 재치와 마지막 한 마디가 인관 관계의 단면을 희극적으로 풍자한다.

우선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이 소설의 미덕이라면 성석제는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는 이야기꾼이다. 아쉬운 면이 있다면 이제 긴 호흡의 장편을 통해서도 만나고 싶다. 깊이과 넓이를 더할 수 있는 작가의 장편을 기다려 본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잠들 때까지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음같은 말들 속에 진저리를 쳐 본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성석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어렴없이 공감할 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소설에 대한 오독이라 할지라도. 홍수 처럼 쏟아지는 풍성한 말의 잔치와 그물처럼 촘촘한 법의 규칙들 속에서 살아남는 인간과 한 쪽 구석으로 밀려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좀 더 귀기울이고 관심을 갖게되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나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그 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 때문인지도 모르다.


070105-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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