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 무덤 창비시선 272
엄원태 지음 / 창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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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향한 내 이 물컹한 그리움에도
어디엔가 숨겨진 송곳,
숨겨진 드릴이 있을 거다

내 속에 너무 깊어 꺼내볼 수 없는 그대여
내 슬픔의 빨판, 어딘가에
이 앙다문 견고함이 숨어 있음을 기억하라

- ‘갯우렁’중에서

 나이 오십이 넘어 남자의 후반생을 살아가는 시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간결하다. 상황이 달라지고 생이 흔들리면 갈라지고 푸석푸석한 쇳소리가 난다. 몸은 소모품이다. 한 생을 살다가 힘겹게 벗어놓고 가야할 무겁고 지겨운 지상에서의 갑옷이다. 몸이 늙고 병드는 과정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생을 유지하기 위해 병원을 찾는 사람은 생을 어떻게 바라볼까?

 사치스런 고통과 시련들은 각자에게는 가장 큰 아픔이다. 생을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들은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다만 시인의 입장에서 그의 시선을 따라가며 사물을 통해 바라보는 생의 감각을 느껴본다.

 물컹한 그리움도 그리움이고 송곳이나 드릴처럼 날카로운 그리움도 있을테지만 겉으로 드러난 부드러움 속에 견고함이 숨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는 쉽게 간과한다. 있는 그대로의 외형만으로 그것, 혹은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지극히 당연한 연상법.

1

깊고 둔중한 고통이 등허리를 지나가며
내게 말한다, 겸허하고 깊어질 것,
자신에게 절실할 것,

나는 네게 말하마,
고통마저 태워버린 너에게

내 아파서 너를 아프게 하는 게 더 아프구나!

- ‘불탄 나무’중에서

 불탄 나무는 이미 나무가 아니다. 생의 고통 속에서 길어올린 시편들 속에 엄원태의 감각은 살아 움직인다. 정지된 사물들에 대한 통찰과 평범하지 않은 시선들은 현실에서 부딪히는 감각들에게 신선함을 부여한다. 자아 성찰적인 잠언과도 같은 ‘겸허하고 깊어질 것, 자신에게 절실할 것’이라는 말은 피상적인 말놀음이 아니라 직접 경험한 생의 고통으로 다가온다. 불에 타버린 나무는 이미 고통스럽지 않으나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더 심란하다.

 그래서 현실에서 중심을 잡고 사는 일은 쉽지 않다. 그 마음의 결들은 중심없이 흘러가고 뒤틀리고 굴곡진다. 몸의 중심만큼이나 마음의 중심은 더더욱 힘겹다. ‘꿈’이나 ‘사랑’이 그 마음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은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2

내게도 이를테면 중심이 하나 생겼다
내가 품어 키운 꿈이라 해도 좋고
뒤늦은 사랑이라 해도 좋다
내 몸이 네 몸이 아닌 지경,
그 지경이란 몸만이 알 수 있는 거다
마음이라고 하기엔 너무 흔해빠진 거니까

다만 너를 떠나지 않고
온전히 내게로 되돌려주는 것,
그건 이미 네가 아니다
그걸 어떤 중심이라 말하지 않는다면 거짓이다

- ‘어떤 중심’중에서

 해 저문 겨울만큼이나 을씨년스런 풍경을 떠올려 본다. 삭막하고 메마른 하늘은 어쩔 수 없다. 손닿지 않는 것들에 대한 미련은 떨치기가 어렵다. 저녁 일곱 시 - 빛에서 어둠으로 전화하는 그 순간들, 시간들에 대한 상념이 예사롭다. 하루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비유된 너의 마지막 눈빛이 그러했다. 시인이 보았던 그 눈빛은 남은 생에 대한 미련인지 너에 대한 그리움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내 남은 생의 시간들을 짐작해 볼 뿐이다. 엄원태의 <물방울 무덤>의 마지막 시.

저녁 일곱시

저녁의 창문들은
제 겨드랑이를 지나간 바람이나
이마 위로 흘러간 구름들을 생각하느라
골똘하게 고요하다

나도 하루종일
어떤 생각이란 것에 매달린 셈이다
한동안 뜨겁게 나를 지나간
끝내 내것 아니었던 사랑에 대해서라면
할말이 그리 많지 않다

이 푸른 저녁 공기는
어떤 위안의 말도 전해준 바 없지만
나는 이미 충분히 위로받은 것이다
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흰 죽지 새의
쭉, 경련하듯 뻗은 다리의 헛된 결기를 보면 안다

저녁 일곱시
하루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벌겋게 타오르던 노을이
쇠잔해져 어둠이 사그라지는 것만 봐도 안다
마지막 네 눈빛이 그러하였다


070307-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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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혹은 시적 양심 살림지식총서 271
이은정 지음 / 살림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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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눈빛 때문에 두 번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상적인 감동이겠지만. 김수영의 눈빛과 정호승의 눈빛이었다. 사진과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허상이라고 단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형형한 눈빛에서 뿜어나오는 서늘함을 잊을 수가 없다.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그 혹은 그녀의 눈빛을 평생 간직한다면 나는 문학, 특히 시를 처음 접할 때 두 시인의 눈빛과 마주친 강렬함을 기억한다.

 특히 김수영은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면서도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상징이 되어간다. 그것은 이미 죽은 시인에 대한 경외감이 만들어낸 허상과 맹목일 수도 있다. 그래도 그가 말하는 세상과 삶에 대한 냉소는 여전히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처럼.

 김수영의 대표작이나 그의 시세계를 대표하는 시는 아니지만 ‘사랑’이라는 시가 있다.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거대한 뿌리, 1977>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 시를 다시 읽어본다. 이은정의 <김수영, 혹은 시적 양심>에 언급되지 않았으나 오래된 기억 속에서 끄집어 낸 시다. 불안한 그의 얼굴은 선명하게 각인되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다. 그 얼굴은 누구나 가슴 속에 숨어 있다. 아니 어둠 속에서 아직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로 해서’ 사랑을 배웠건 그렇지 않건 상관없이 말이다.

 이은정의 김수영론은 양극에 놓인 주제를 중심으로 그의 시를 이야기하고 있다. 개진과 은폐, 방과 거리, 정지와 속도, 적과 사랑, 시인과 속인이 그것이다. 한 사람의 시를 양극에 세워두고 비교하거나 평가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해 보인다. 시인의 추구했던 시는 극단적이지 않으며 몇 가지 분류법으로 재단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면면과 특징들을 집어내는 저자의 방법이 낯설지는 않다. 왜냐하면 김수영이 살아냈던 시대와 김수영의 삶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시는 시대정신을 반영한다는 지극히 고전적인 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시대정신’에 가장 치열했던 시인 중에 한 사람이 김수영이기 때문이다. 그의 온몸시론이 주는 울림은 여전히 유효하며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답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한마디로 시를 정의할 순 없지만 김수영처럼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극명하고 자신있게 주장했던 시인도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시는 언제나 끊임없는 모험 앞에 서 있다’는 에필로그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흔들리는 시대 상황에서 시인이 걸어야 했던 형극의 길을 온몸으로 견뎌냈던 치열함과 열정은 ‘자유’의 이름으로 기억된다. 시적 자유와 생활인으로서의 자유, 모든 억압과 구속으로부터 영혼의 자유를 갈망했던 김수영의 시는 한국 현대시의 정수이다. 그의 시는 물론이고 산문이 보여주는 울림은 영원하다. 손때 묻은, 웃돈 주고 구입했던 김수영 전집 초판본의 먼지만큼 세월이 쌓여가지만 그에 대한, 그의 시에 대한 경건함은 깊어만 간다.


070305-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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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소설 외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59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책세상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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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서 가장 불효했던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난센스 퀴즈의 답은 에밀 졸라.

 소설보다 먼저 드레퓌스 사건 당시 <나는 고발한다>는 선언문을 통해 행동하는 양심과 지식인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던 그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프랑스 문학과 지성사에 빛나는 별들 중에 가장 문제적인 소설가 중 한 사람이었던 에밀 졸라는 <목로 주점>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책세상’에서 나온 <실험소설 외>는 ‘실험소설’과 ‘소설에 대하여’, ‘비평에 대하여’, ‘공화국과 문학’을 포함하고 있다. 그의 소설에 대한 견해과 문학 정신의 뿌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글들이 묶여 있다.

 계몽 철학의 시대를 거쳐 도달한 19세기는 다양하고 중요한 문예사조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자연주의’는 낯설고 새롭다. 기존의 문학에 대한 통념이 사라지고 자연과학적 방법을 문학에 접목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과격하기까지 하다. 자연과학적인 실험과 관찰의 방법을 그대로 문학에 적용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 ‘실험소설’은 과학과 문학의 만남을 필연적이라고 강변한다. 클로드 베르나르의 ‘실험의학 연구 입문’을 읽고 깊이 감명받은 에밀 졸라는 의사를 소설가로 바꾸어 놓으면 그대로 자신의 주장이 된다고 말한다. 작가의 개성과 생각을 이렇게 강렬하고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은 용기에 해당한다.

 우회적인 방법은 안전하지만 개성이 없다. 에밀 졸라의 선명한 주장이 담고 있는 위험성만큼이나 매력적이고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소설에서 직접 적용했지만 그의 시대는 길지 않았다. 그를 따르는 소설가가 많지 않았고 문학적인 성취가 뛰어난 작품이 뒤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는 순환하고 역사는 반복된다.

 작가는 의사처럼 사회의 메커니즘을 파악해서 처방전을 내놓아야 한다는 주장은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놀라운 주장이다. 작가의 역할과 문학의 효용에 대한 지루하고 역사적인 논의와 관련해서 이렇게 명쾌하고 자신있는 주장을 했던 사람이 있을까 싶다. 뚜렷한 목적의식과 작가의 소명의식은 작품으로 발현되어야 한다. 에밀 졸라는 구체적인 작품들을 통해 그것을 실천한다.

 졸라의 ‘실험소설’에서 주장하는 핵심적인 주장은 다음의 문장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타인의 행동을 타인의 다른 행동들을 통해 검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일정한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고찰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실험적 방법에 의존한다.(클로드 베르나르, 실험의학 연구 입문)” 내가 앞서 말한 모든 것은 과학자의 문장인 이 마지막 세 문장에 요약되어 있다. - P. 25

고전주의적, 낭만주의적 문학이 스콜라 철학과 신학 시대의 문학이었던 것처럼, 실험소설은 한마디로 우리 과학 시대의 문학이다. 이제 응용과 윤리라는 중요한 문제로 넘어가자. - P. 37

 인물들의 태도나 행동은 자연과학적인 실험과 관찰, 즉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한다. 현상으로 나타난 결과는 반드시 원인이 있으며 그것을 찾아내고 밝혀 나가는 것이 소설의 역할이라고 에밀 졸라는 주장한다. 소설을 읽는 목적과 대하는 태도가 독자마다 다르겠지만 현대 소설은 에밀 졸라에게 일정 부분 빚지고 있는 부분이 많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소설가들에게 내면화 되어 있는 부분들을 읽어낼 수 있다면 에밀 졸라의 영향력을 확인하게 된다.

 현실의 문제를 재현하고 우리의 처한 상황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돕는 역할을 소설은 할 수 있다. 그것을 개성적으로 표현하는 일이 작가의 역할이며 사명이다. 그의 주장이 과격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낭만주의와 계몽주의 소설이 보여주지 못했던 새로운 영역을 보여준다.

 그러나 자연주의로 분류되는 그의 주장이 가진 문제점은 사실주의와의 변별점이다. 현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해야 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면서 자연주의는 보다 과학적이고 인과적인 관계에 무게를 둔다. 실험과 관찰이라는 과학적 방법에 철저히 기대고 있지만 이전의 소설들이 보여주지 못했던 사실적이고 치밀한 완결성을 보여준다. 명확하게 분류할 수는 없지만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의 경계를 가르는 것이 초점은 아니다.

 <실험 소설 외>는 에밀 졸라의 소설과 비평 그리고 문학에 대한 생각들을 명확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또한 역자 유기환의 해설은 에밀 졸라의 생애와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에 도움을 준다. 가보지 않은 길을 누군가 먼저 걸었다면 그 결과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무관하게 용기와 박수를 보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자신의 신념에 기댄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더더욱.


07022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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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랜덤 시선 16
김경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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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웅 시인으로부터 “한국어로 씌어진 가장 중요한 시집 가운데 한 권”이라는 찬사를 받은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단 한 줄에 기대어 시집을 샀다. 우연히 만난 젊은 시인에 대한 평가 때문에 책을 사는 일이 드문데 무모할 정도의 평가에 호기심이 동했다. 게다가 ‘랜덤하우스중앙’에서 발간한 시집이었으니 뒤적거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종의 편견이지겠지만 창비나 문지, 실천문학사나 민음사 등 몇 개의 출판사는 시집을 선택하는 데 있어 내게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편식과 편견은 귀차니즘과도 연결되어 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돌아다니며 찾아 나서는 게 귀찮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좋은 책을 놓칠 기회도 많아진다.

 김경주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는 너무 거창한 평가와 기대 때문에 편안한 읽기가 불가능했다. 시집 전체를 훑어내거나 단편들 속에서 명문을 찾아내거나 하는 재미를 잃어버렸고 초조한 마음으로 읽어나갔다. 특이한 경험이었다.

외롭다는 것은 바닥에 누워 두 눈의 음(音)을 듣는 일이다 제 몸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외로움이란 한 생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사랑이다  - ‘우주로 날아가는 방1’중에서

외로움이라는 인간의 표정 하나를 배우기 위해 산양은 그토록 별자리를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바바게스트 하우스 창턱에 걸터앉은 젊은 붓다가 비린 손가락을 물고 검은 물 안을 내려다보는 밤, 내 몸의 이역(異域)들은 울음들이었다고 쓰고 싶어지는 생이 있다 눈물은 눈 속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한 점 열이었다  - ‘내 워크맨 속 갠지스’중에서

 다소 당황스럽다. 외로움에 대해 직설적으로 말하는 시를 오랜만에 만나는 기분이다.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서정시라지만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느냐 하는 것이 시인의 능력이라지만 ‘외로움’이라는 단어 자체가 불러일으키는 파장 자체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그러므로 외로움이란 한 생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사랑이다’라는 선언 앞에서 무력해진다.

 인간의 본질적인 외로움에 대해 토해내는 시인들의 말이 이제는 진부할 만큼 감동과 울림이 없는 이유는 삭막해진 가슴 때문이거나 감정을 드러내는 일 자체가 사치스러운 상황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시각적 이미지나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되는 시대에 외로움이나 고독이 설 자리는 많지 않아 보인다. 근원적인, 가장 밑바닥에 자리잡은 감정들에 대해 말해야 하는 ‘서정시’의 시대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인지는 시인들만의 몫은 아니다. 전업작가로, 특히 시인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시를 길어 올리고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끌어내는가에 대한 관심과 개인적인 호기심을 넘어서 문학에 대한, 혹은 시에 대한 전망이 안개 낀 유리창과 같아 보인다.

 김경주의 첫 시집은 주목받을 만한 첫 시집은 그만한 찬사가 어울리든 아니든 ‘생활’ 속에서 마주치는 것들에 대한 촘촘한 그물망과 마주하게 된다.

어쩌면 벽에 박혀 있는 저 못은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깊어지는 것인지 모른다

이쪽에서 보면 못은
그냥 벽에 박혀 있는 것이지만
벽 뒤에 어둠의 한가운데서 보면
내가 몇 세기가 지나도
만질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못은
허공에 조용히 떠 있는 것이리라

-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중에서

 일상을 벗어나서 우주나 존재론적 측면에서 인간에 대해 접근하는 시들에게 주어진 사명과 김경주의 이 시집에 드러난 접근 방식은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한국어의 의미와 영역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 끊임없이 실험하게 될 시인의 목소리는 이후에도 계속되리라 믿는다. 극찬과는 무관하게 묵묵히 그리고 자신의 길이 무엇이라는 생각도 없이 걸어가는 과정 속에서 보여주는 이야기들을 들어볼 참이다.

‘이 무시무시한 신인의 등장은 한국 문학의 축복이자 저주다’라고 평가를 받은 시인이 도대체 다음에 어떤 시를 써야 하는지 의문스럽다. 권혁웅 시인의 평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도 독자들의 몫이겠지만 프로스포츠 신인왕 2년차의 징크스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시인의 몫이다. 첫 타석에서 홈런을 쳤다고 박수치는 소리에 어리둥절하지 않기를. 한 동료시인의 주관적 박수소리에 매몰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07022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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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여기 머문다 - 2007년 제31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전경린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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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수상하는 문학상은 단 한 명에게 수상을 안겨주어야 한다. 당연한 규칙이지만 많은 것을 함의한다. 당해연도에 발표된 소설들의 편차와 무관하게 습관적으로 누구에겐가는 상을 안겨야 한다. 이것이 문학상의 가장 큰 딜레마이다. 매년 수상하는 작품들이 높은 문학적 성취를 이룩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매력적이고 뛰어난 작품이 나온 해도 있고, 기대 이하의 작품이 수상하기도 한다. ‘올해의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은 없습니다’라고 발표할 만한 용기(?)는 없을까? 문학상의 권위를 떠나 수상작이 출판사에 안겨줄 경제적 이익과 수상자가 안게 될 명예를 생각하면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서른 한 번째 이상 문학상, 전경린의 <천사는 여기 머문다>가 나왔다. 책꽂이 한 켠에 스물 한 권째가 꽂혔다. 이상 문학상과 함께 세월이 흘러간다. 시간의 흐름은 문학상에 권위를 부여하고 특별한 의미를 갖게한다. 하지만 매년 작품집을 대할 때마다 느끼는 감동과 감회는 부침이 심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겠지만 별 감동도 큰 울림도 없었다.

 남녀간의 사랑과 이별 속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상처는 일상적이다. 매일 벌어지는 일이고 인류가 존재하는 한 계속될 일이다. 비극적인 상황 인식이지만 달라지지 않고 다른 형태로 변이될 뿐이다. 여성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감정의 결들은 미세한 떨림과 섬세한 울림으로 표현된다. 섹스에 탐닉하고 상대를 속박하는 결혼관계가 결국 파경을 몰고 오고 머나먼 이국에서 섹스없는 백색결혼을 고민하던 주인공에게 빛의 환영이 보인다. 그녀에게 사랑과 결혼은 무엇인가를 점검해야한다. 아니,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확인해 보아야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이 지닌 내용을 너머선 문학적 성과에 있다. 수상 선정 이유에서 여러 명의 심사위원들이 밝히고 있지만, 그것이 이해되지 않거나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공감과 이해는 거리가 멀다. 엘리트 소설과 대중 소설의 벽을 허물었다는 이태동의 평가보다는 허무과 열기를 내뿜고 있는 작품이라는 평가가 온당하다. 보는 시각에 따라 혹은 태도에 따라 작품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만장일치로 한 작품을 선정하면 핵복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독자의 평가도 달라진다. 어쨌든 전경린의 ‘천사는 여기 머문다’ 미흡하는 쪽에 과감하게 한 표 던진다.

 내용과 관계없지만 우수상 수상작의 순서를 등단순서로 한 것은 엽기다. 이전처럼 가나다순이 합리적이다. 군대도 아니고 문단 짬밥 순으로 우수상 수상작 순서를 정하다니 어이가 없다. 문단 권력은 이렇게 작은 곳에서 싹이 트고 내면화된다. 그들만의 서열과 위계가 자리잡아가는 과정이 이렇게 스치듯 비춰진다.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나?

 한창훈의 ‘아버지와 아들’이 내뿜는 사투리의 힘. 입말이 보여주는 구수함과 부자 간의 대화가 생활의 일부로 녹아들어 감칠맛이 난다. 김연수의 ‘내겐 휴가가 필요해’는 발상이 기발하며 무거워질 수 있는 주제를 소도시의 도서관을 중심으로 주인공을 오히려 에피소드 형식으로 처리하는 방식을 취한다. 가벼움과 무거움의 적절한 배치가 흥미롭다.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는 젊은 작가의 발랄함이 그대로 묻어나면서도 인간의 ‘관계’에 대한 고백이 날카롭고 진지하다. 심사위원들이 주목했다는 권여선의 ‘약콩이 끓는 동안’이나 편혜영의 ‘첫번째 기념일’은 밋밋하게 다가왔고, 천운영의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는 감각에 의존하고 있어 작위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문학상 수상 작품집으로 유일하게 매년 구입하는 책에 대한 느낌도 생각도 매년 달라진다. 시간이 흐르고 생각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소설과 문학상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한 작가의 문학적 성과와 미래에 대한 격려가 내포된 것이 문학상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쏟아지는, 혹은 명멸하는 숱한 단편들 중에서 매년 옥석을 가리는 작업의 힘겨움과 독자들과의 약속 사이에서 분명한 자세를 보았으면 좋겠다.

 새로운 시작과 함께 지난 해의 문학적 성과를 기억하는 책으로서 의미를 가진 책이지만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기엔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다. 그냥 읽고 쓴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입맛과 손맛이 씁쓸한 것은 나 혼자 느끼는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다.


070209-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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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魔 2007-03-04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이 책을 읽으신 소감이 저와는 틀리기에 이 주소를 제 블로그에 링크합니다. 저도 다른 분들의 시선을 통해 제 시야를 넓힐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벌써 21권째라니... 존경스럽습니다. 전 이제 겨우 5~6권째인듯 싶은데요.. by http://samma.org

sceptic 2007-03-05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세월이 많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간다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