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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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젖은 들풀 냄새가 배어 나오는 봄비가 내리는 밤이다. 빈 공간을 채우던 적막이 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창밖을 떠돌고 있다. 무엇을 바라겠는가. 살아 있다는 안도감과 하루하루 바쁜 생의 언저리에서 이렇게 늘 잠깐의 여유로 책장을 넘길 수 있다는 행복 이외에 또 무엇이 필요할까. 책 속에는 길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인생의 정답을 찾으려는 헛된 노력만 하지 않는다면 끊임없이 현실 세계의 존재감 정도는 전해준다.

  감히 ‘사랑’에 대해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귀기울여 들어볼 자세는 되어 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처럼 이야기해도 나는 진지하게 바라볼 자세는 되어 있는 것이다. 그 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이라는 작품은 1982년 처음 구상되었고 2004년에 출판되었지만 그것은 무의미하다. 작가는 모든 작품을 모든 순간에 구상한다. 존재하고 사유하는 모든 대상은 어떤 형태로든 작가에게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되고 표현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읽어내고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것을 읽고 받아들이는 것 또한 독자의 몫이듯이.

  ‘사랑’처럼 진부한 단어가 또 있을까. 이 진부한 ‘사랑’이야기를 마르케스는 어떤 의미로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는지 나는 그 행간을 짚어 볼 수밖에 없다. 소쉬르의 표현을 빌자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언어의 소리와 의미-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을 느낄 수 없어 번역소설은 늘 2% 부족한 감상을 전제로 한다고 믿는다. 나는 마음을 열고 늙은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어본다. 여든을 바라보는 그가 나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귀기울여 들어볼 뿐이다.

  단편도 장편도 아닌 150페이지 분량의 다소 어색한(?) 길이와 빛바랜 나무 등걸같은 활자의 색은 책을 읽는 내내 낯설다. 민음사의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라틴 아메리카의 낯선 지명과 가보지 않아 상상하기 힘든 더운 날씨와 분위기를 느낄 수 없어 아쉬움은 남는다. 온몸에 습기가 달라붙는 더위인지 바싹마른 고온인지 알 수 없고, 사회 문화적 배경에 대해 속속들이 알 수 없어 그들이 느끼는 감정과 전달 방식이 생생하게 다가오지 않아 답답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들처럼, 일테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나 <농담>, <불멸>처럼 장편이 전해주는 작가의 목소리를 잡아내기 힘들어 개인적으로 버거웠던 소설이다.

  90세 생일을 맞이한 노인이 포주 카바르카스에게 전화를 걸어 여자를 부탁한다. 평생을 창녀들과 함께 살아온 주인공에게 얼마남지 않은 생에 대한 선물로 처녀를 주문한 것이다. 14세의 소녀를 맞이한 주인공은 손도 대지 않은채 하루 밤을 보낸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단추 공장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는 소녀는 잠이 들어 주인공을 기다렸던 것이다. 주인공은 소녀에게 ‘델가디나’란 이름을 붙여주지만 그의 본명도 사는 곳도 알지 못한다. 주인공의 이름도 독자들은 알 수가 없다. 익명성이 모호함 때문일지 모르지만, 그는 독특한 생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 신문 칼럼니스트로서 명망있는 늙은이로 그려지지만, 특별한 인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가 느끼는 생에 대한 고독과 비애 때문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소녀의 무의미한 몸짓이 보여주는 생의 신산스러움 때문이다.

  소설 전편에서 두 인물의 대화는 드러나지 않으며 노인의 심리와 내면의 독백을 통해 소녀에 대한 감정이 사랑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무덤덤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선입견으로 14세 소녀에 대한 90세 노인의 사랑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이 소설 읽기는 실패하고 만다. 나이를 잊고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최초로 느끼는 열정과 그것을 통해 느끼는 생의 의지를 읽어내면서 나는 또다른 삶을 들여다 본다.

  “나이는 숫자가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고” 말하는 주인공의 독백은 죽음을 목전에 둔 극단적인 나이를 통해서 오히려 극명하게 인간의 존재 방식과 삶의 의미를 되묻고 있다. 그렇다면 14세 소녀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이 남는다. 그를 위한 소품에 불과한 것인가. 소녀가 그에게 느끼는 감정과 변화는 대단히 주관적이고 일방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간접적인 방식으로만 드러난다. 그곳에는 여전히 대화가 없다.

  언어가 사랑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소설을 읽는 이유와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때로 고통스럽게 때로 힘겹게 소설을 읽는다. 문학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정말로 ‘진부’한 의미를 찾을 생각은 없다. 다만 “섹스란 사랑을 얻지 못할 때 가지는 위안에 불과하다오”라고 전하는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대가의 소설속 주인공이 남긴 한 마디가 제 나름의 의미를 갖고 한 조각 퍼즐이 되어 내 생의 어디쯤엔가 끼어 들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스럽겠다.

  여전히 비소리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


2005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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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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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이다. 더 이상 이 책을 평가하는 것 지나친 주관으로 여겨진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라는 다소 서정적인 제목으로 장영희 교수의 칼럼 모음집을 읽었다.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라는 제목으로 3년간 신문에 연재되었던 내용을 책으로 묶었다. 객관적으로 좋은 책이다. 눈부신 햇살이 아침 창을 두드릴 무렵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향 좋은 커피 한 잔과 함께 책장 넘기는 소리를 즐기고 싶은 사람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하드커버와 그림을 곁들여 멋을 낸 것도 맘에 들지 않았고 수필 형식이라고 하지만 대부분 미국과 영국 문학 중심의 책 선정도 맘에 들지 않았다.

  1급 장애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서강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중․고 교과서 집필, 번역가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저자의 치열한 삶의 모습에는 갈채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며 혹은 일상 생활에서 겪은 소소한 경험들이 작품들과 밀착되거나 생동감있게 엮이지 못하고 인식론적 접근으로만 그친데 대한 아쉬움이 많다. 저자가 신문의 칼럼 형식으로 원고지 10매의 제한된 분량과 시간적인 압박을 받았음을 고려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머리를 식힐(?) 책으로 고른다면 문안하겠다.

  수필 형식의 책을 돈주고 사서 아깝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같은 일을 반복한다. 동질감을 나눌 수 있거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글들을 만나 기쁜 마음으로 책장을 덮을 때가 많지 않다. 편협된 가치관이나 주관적인 세상에 대한 잣대가 작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타인의 생각들을 모두 수용하기 어렵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 가를 가르친다”는 윌리엄 포크너의 말로 3년간의 칼럼을 마무리하는 저자는 유방암 치료후 척추암으로 투병중이다. 보다 깊이 있는 그녀의 글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편안하고 유려한 문체는 쉽게 읽힌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건강한 모습으로 새로운 내용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나쁜 신문 <조선일보>에 연재된 칼럼이었다면 사지 않았을 것이라는 편견과 무관하게, 좀 더 꼼꼼하게 책을 고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200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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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 장정일 단상
장정일 지음 / 행복한책읽기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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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에 대한 명상>으로 장정일을 처음 만났다. 이후 <길안에서 택시잡기>까지가 장정일과의 인연이었다. 그의 소설을 읽지 않은건 산문에 대한 편견이 아니라 ‘아무 뜻 없’이 손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도 사실 이웃 블로거(시라노의 酒冊잡기)의 리뷰가 아니었다면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장정일은 40이 넘었다. 10여년을 훌쩍 넘긴 세월이었으니…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 필화 사건으로 언론에 보도될 때도 소설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었다. 편견때문이 아니라 시를 통해 그의 성향과 사유의 방식들을 지나치게 드러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두 권의 시집이후 시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혐오로 점철된 그의 발언 들은 차라리 애처롭기까지 했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의 말을 전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다.

  이 책은 그야말로 雜文 모음이다. 그렇다고 절대 글이 잡스럽지는 않다. <생각生覺>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형식은 혼란스럽다. ‘아무 뜻도 없어요’는 지난 몇 년간 쓴 단상들을 펼쳐놓고 있으며, ‘신작시’ 7편, ‘전영잡감’이라는 영화평 10편, ‘삼국지 시사파일’이라고 쓴 칼럼과, ‘나의 삼국지 이야기’로 이루어진 책이다. 그래서 사실 단상으로 꽉 채워진 것보다 뒷부분의 글들은 부록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과 단상 속에서 촌철살인의 한마디 한마디를 풀어낼 수 있는 것이 작가의 능력이라면 장정일은 차고 넘친다. 왜냐하면 정말 오랜만에 책을 보며 혼자 낄낄거리고 키득거렸으니까 말이다. 주변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볼 정도였다. 나만 그랬을까? 개인적으로 통쾌하고 직설적이며 정곡을 찌르는 글들이 고플 때가 많다. 쓸데없이 돌려 말하거나 젠체하거나 점잖빼는 글들에 신물이 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사안에 대해 다르겠지만 장정일은 일정부분에 적합한 문체를 지니고 있다. 그 부분을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글 중에 ‘성조기’라는 표현을 비판한 부분이 나온다. 읽다가 책꽂이의 국어사전을 얼른 꺼내 찾아보았다. 나도 무심코 써왔던 표현이라 가슴이 뜨끔했기 때문이다. 한자로 ‘星條旗’로 별과 세로 줄이 그려진 깃발이라는 뜻으로 미국 국기의 외양을 표현한 것 이외에 다른 뜻을 찾을 수 없으나 장정일은 미국 국기를 ‘성조기’라고 표현하는 것은 친미(親美)를 넘어 숭미(崇美)에 해당한다고 흥분하고 있다. 나는 장정일보다 미국을 더 싫어한다. 그런데도 이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혹시 장정일은 ‘星條旗’를 ‘聖條旗’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었다.

  그의 글을 읽다가 온 몸이 경직되고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며 한참동안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삶의 자세를 다시 한번 가다듬게 하는 글을 만났다. 당연한 말이면서 실제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듣게 되는 통렬함이여. 직업병 때문인지 몰라도 밑줄을 쫙 그어놓은 부분은 다음과 같다.

  “짐승은 배울 수 있지만 아무래도 깨달을 수 없고, 인간은 어쩌다 깨달을 수는 있지만 결코 배우지는 못한다.” 하므로 교육에 관해서는 단 한가지 원칙만 유효하다. 선생은 절대 학생에게 ‘주입’하지 말고 ‘암기’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 배움은 다 쓸데없다. 어떻게 하면 “깨닫게 해 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교육이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25주년 기념일이다. 이 날을 기억하는지 하늘도 눈물을 흘리고 있다. 민주화 영령들의 평안을 진심으로 기원하며 오늘 나의 삶의 자세를 가다듬는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 브레히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2005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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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에 아픈 사람 민음의 시 120
신현림 지음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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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표지를 열자, “21C 말에는 즐거운 블루스를 출 수 있을까? - 96年 가을에.”라는 파란색 볼펜의 글씨가 한 줄 선명하다. 신현림의 오래된 시집을 꺼내본다. 비닐 코팅된 표지는 괜찮지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책 윗부분은 벌써 누렇게 변색되기 시작했다. 잊었던 그녀의 시편들이 살아 움직이는 옛날 시집을 뒤적이며 <세기말 블루스>를 통독한다. 첫시집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고 외치던 그녀는 2년만에 <세기말 블루스>를 추자고 덤볐었다. 미술을 전공하려다 그녀의 표현대로 ‘4수끝에 편안하게(?)’ 국문과에 입학한 그녀는 여전사의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었다. 나도 20대였고,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지고 싶은 정도가 아니라 세상을 끝장내고 싶었던 시절이었고, 세기말과 상관없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지독히 몸을 떨어야했던 시절이었다.

     자화상

  울음 끝에서 슬픔은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

  울음은 사람이 만드는 아주 작은 창문인 것

  창문 밖에서
  한 여자가 삶의 극락을 꿈꾸며
  잊을 수 없는 저녁 바다를 닦는다 - <세기말 블루스, 1996>중에서

마지막 페이지를 끝으로 10년 가까이 시를 버렸던 그녀가 돌아왔다. 그녀는 짐짓 나이를 먹지 않은 듯 예전의 나를 기억해 달라는 듯,

  가난과 설움을 넘어
  흐느껴라, 노래하라, 타올라라
  허기진 생활의 멜로디여
  아슬아슬한 나날의 쌀자루여
  낡은 육신의 그물을 던지는 나와 너여 - ‘흐느껴라, 노래하라, 타올라라’ 중에서

  라고 <해질녘에 아픈 사람>을 시작한다. 그러나 “무섭게 흐르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 시간/ 달리는 바다는 달리지 않는 바다/ 시간이란 아예 없는 겁니다/ 최대의 재산인 꿈이 있을 뿐이죠”라는 신파가 시작된다. “슬퍼하지 마세요. 세상은 슬퍼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니까요”라거나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낄 때/ 비로소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무엇이든 다시 시작하리라”고 말하는 대목들을 읽다가 울컥 짜증이 밀려온다. 시를 읽는 행위는 정교한 언어에 대한 최고의 상찬이라고 믿는다. 시간이 남아돌거나 사춘기 소녀의 취향으로 겉멋을 내기 위한 현학취가 아니라면 누가 이 시대에 시를 읽는가. 신현림은 지독하게 고생을 했는지는 몰라도, 시에 대해 고민은 하지 않은 흔적이 역력하다. 긴 시간의 공백이 주는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어차피 시가 개인의 내밀한 고백의 형식이라는 변명은 할 수가 없다. 그것이 보편성을 담보하지 못했을 때 감당해야할 무게는 만만치가 않다. 싱글 맘 시리즈의 시편들은 점입가경이다.

  “그는 밥 속에 헝그리 정신을 비벼 넣고 싱글 맘으로 희망의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여성의 슬픈 등에 꽃을 피운 이 시집을 우울한 육체 위에 한 땀 한 땀 새긴 영혼의 자서전”이라고 평한 천양희 시인의 생각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 헝그리 정신을 비벼 넣으면 희망의 폭풍이 되는가? 배고픈 싱글 맘은 저절로 눈물과 페이소스가 뒤섞인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페미니스트가 되는가? 비극과 비장이 뒤섞여 춤을 추고 시의 형식을 빌어 신세 한탄에 가까운 일기가 되어 버렸다. 그녀의 시에 대한 관심과 애정만큼이나 매정하게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퍼렇게 날선 감각과 세상에 대한 삐딱한 시선, 대담하고 솔직한 화법이 주는 신선함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남았나 다시 찬찬히 들여보지만 별로 건질게 없다. 실망이다.

  인간의 가장 응축된 언어 형식으로서 시가 가지는 미덕은 읽는 사람마다 미감이 다르겠지만 일단 애정을 가지고 시를 대하는 나같은 독자가 가끔씩 지독한 혐오를 내뱉는다는 것은 염려스러운 일이다. 10년전에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지고 끝냈어야 했다. <세기말 블루스>가 10만부가 넘게 팔렸었다. 부담이 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는 이제 그만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또다시 그녀의 시집을 사는 일은 없겠다. 치열한 세상살이와 민감하고 도전적인 의식들로 사진을 찍고 에세이를 써내는 것이 훨씬 더 큰 울림과 감동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2005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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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봉감별곡 : 달빛아래 맺은 약속 변치 않아라 국어시간에 고전읽기 (나라말) 5
권순긍 지음 / 나라말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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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영원한 주제일 수밖에 없는 남녀 간의 사랑은 진부하다는 표현을 할 수가 없다.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으며 늘 새로운 형태로 전달되고 해석되어 감동을 전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관점으로 ‘단순’하거나 ‘뻔한’ 이야기로 치부될 수 없는 우리 고전소설의 아름다움은 당대의 가장 소중한 진실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춘향전이나 운영전보다 훨씬 애절한 사랑노래가 <채봉감별곡>이 아닌가 싶다. 소극적, 수동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운명과 사랑을 지키려 노력했던 춘향이나운영이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모순된 당대 현실과 제도를 온몸으로 거부한 채봉이야말로 우리 고전문학사의 가장 현대적 개념에 근접한 여인상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달빛 아래 장필성과 김채봉은 한 눈에 반하게 되고 서로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긴 시간동안 시련을 극복하고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게 된다.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는 당시의 매관매직에 의한 뿌리 깊은 사회적 부패 현상과 기생제도에 대한 인권문제 등은 조선 후기 사회에 나타난 민중들의 분노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고난을 겪은 사랑일수록 더 값지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채봉이가 보여주는 눈물겨운 투쟁(?)과 적극적인 운명 개척의 정신이다. 소설의 전면에서 허판서의 첩으로 살게 될 운명을 거부하고 아버지를 구해내며 자신의 사랑까지 지켜나가려는 채봉의 적극성은 봉건시대 한국적 여인상이 지닌 미덕 아닌 미덕을 거부한다.

  평양감사의 업무 보조로 일하던 어느날 가을 달빛에 젖어 써내려간 ‘추풍감별곡’이라는 가사의 이름에서 ‘채봉감별곡’이라는 소설 제목이 연유하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소설속의 장편 가사 ‘추풍 감별곡’은 당시 민중들의 애절한 사랑노래를 읽을 수 있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눈앞에 온갖 것이 모두 다 시름이라
  바람에 지는 낙엽 풀 속에 우는 짐승
  무심히 듣게 되면 관계할 바 없건마는
  이별의 한 간절하니 소리소리 수심이라
  굽이굽이 맺힌 시름 어찌하면 풀쳐낼고
  아해야 술 부어라 행여나 시름 풀까
  잔대로 가득 부어 취토록 먹은 후에
  석양산길로 을밀대 올라가니
  풍경은 예와 달라 만물이 쓸쓸하다 - ‘추풍감별곡’ 중에서


  이 시리즈의 또 하나의 특징은 책 중간중간에 끼어 있는 정보쌈지이다. ‘조선시대의 사랑’, ‘기방풍경’, ‘19세기 매관매직의 실태’, ‘고전소설 속의 여인들’, ‘평행기행’ 등 쉽고 재미있는 정보 페이지를 삽입해서 간단하지만 알면 더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소설 속 배경지식들을 덤으로 얻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전국국어교사 모임 ‘나라말’ 출판사에서 고전읽기 다섯 번째 시리즈로 출간된 <달빛 아래 맺은 약속 변치 않아라>를 받아 들고 반가운 마음에 단숨에 읽었다. 이 책의 일러스트레이션을 맡은 김은정씨를 비롯해서 전편을 번역했던 조현설, 신동흔 선생님등과 마지막 출판위원회를 열었던 지난 여름이 생각났다. 대학로에서 늦도록 술을 마시고 광화문에서 심야좌석을 탔던 기억이 새롭다. <함께 여는 국어교육> 여름호가 도착했으니 진짜 여름이 시작된듯 싶다. 반가운 선생님들의 글들과 고민들이 반갑다.

  우리 고전에 대한 이해와 깊은 애정은 한국문학에 대한 뿌리와 바탕을 이룬다. 정확한 해석에 의한 판본이 없어 쉽고 재미있는 우리 고전이 고전(苦戰)을 면치 못하거나 과소 평가되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정확하고 재밌는 시리즈를 기대하며 숨어 있는 고전읽기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으면 싶다.



200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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