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문 문학과지성 시인선 302
김명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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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게 가라앉은 회색빛 하늘은 가끔 시간을 돌아보게 한다. 미래 지향적 시간이 아니라 현재나 과거의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내 안에 나를 가두기 위해 시를 읽는다. 김명인의 <파문>은 시간의 흔적 기관처럼 미래가 아닌 과거를 돌아보고 사물의 현상들을 꼼꼼히 짚어보고 있는 시인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첫 시집 <동두천(1979)>과 <머나먼 곳 스와니(1988)> 이후 오랜만에 만나는 그의 시는 세월과 나이를 입고 있다. 시간 앞에 장사 없는 법이다.

  사물에 대한 투명한 시선이 차갑고 선명하다. 표현 미학의 한 정점을 이룬 듯 군더더기 없는 표현과 깔끔한 언어는 단연 돋보인다.

흐르는 물에도 뿌리가 있다
江을 보면 안다, 저기 ”U, 긴 뿌리
골짜기 깊숙이 묻어두고
줄기째, 줄기로만 꿈틀거려 여기 와 닿는 (‘흐르는 물에도 뿌리가 있다’ 중에서)

누가 순식간에 기웠을까 연두에 회장 둘린
군데군데의 산벚꽃
햇살 옮겨 구름 무늬 펼치는
신록 다채 저 초록 新衣를 보아라
환하게 드러나려다 감춰지는 실밥! (‘봄 산’ 중에서)

  흐르는 시간과 세월을 이겨낸 사물들과 그것들을 읽어내는 시인의 관점은 새롭거나 독자의 시선을 낯설게 하지는 못한다. 모든 시가 즐겁고 신선하게 독자에게 다가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도 독자들은 여전히 두근거림과 미묘한 떨림을 기다린다.

  치열하고 뜨거운 열정을 좋아하거나 투박하고 거친 시선을 즐기거나 대상을 선택하는 것은 물론 독자의 몫일 것이다. 시인도 독자를 위해서(?)만 시를 쓰는 법은 없다. 하지만 편안하고 개인적 언어에 함몰된 시어들이 감동을 이끌어 내지는 못한다.

  언제나 벗어나지 못하는(?) 서정시의 딜레마! 그래서 혹자들은 시를 쓰거나 읽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시의 본질은 인간의 영혼을 치유한다. 커다란 규모로 덮치는 해일은 아니지만 작고 사소한 것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 가득한 따스함을 즐기거나 내밀한 시인의 고백에 공감하거나 영혼의 울림에 동참한다. 그것이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관심의 대상과 무관하게 독자들은 ‘감동’을 원하는 것이 아닐까?

  사회적 진실을 은폐한 채 덤덤하게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백성들을 위하여, 혹은 개인적 진실을 외면하는 이 땅의 모든 사랑을 위하여 시는 여전히 존재한다. 시의 기능과 본질에 대해 숱한 논의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시인들은 여전히 시의 의미를 되묻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 믿음으로 나는 여전히 시집을 펼쳐 들 것이다.


2005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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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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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대에 이루어졌던 문학적 성과는 ‘노동문학’으로 대표될 만큼 문학의 저변 확대라고 말할 수 있다. 억압과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문학운동은 엘리트 문학을 벗어나 노동자, 농민을 기반으로 한 본격적인 민중 문학의 출발이었다. 박노해와 백무산으로 대표되는, 특히 시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나타냈다. 이후, 레닌 동상의 철거와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대한 역사적 실험이 끝나고 거대 담론이 사라진 자리에 90년대에는 여류 소설가들의 약진이 돋보였다. 남성 우월주의와 사회적 억압을 거부하는 ‘불륜’이 넘쳤났다. 한 시대를 한마디로 정리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지만 분명한 특징 중의 하나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21세기의 화두는 ‘여성, 환경, 생명’이라고 정리한 이윤기의 말은 이제 분명한 의미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젊은 소설가 정이현은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 그녀의 첫 번째 소설집은 8편의 단편이 실려있지만 분명한 특징들로 우리에게 신선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모든 소설의 주제는 진부하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늘 아래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무엇이 있을까? 다만 그것을 담아내는 형식과 표현의 문제로 귀착된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시간이 흐르고 삶이 진행되면서 사회가 변하고 삶의 양상은 복잡해지고 있다. 그 틈새를 예리한 눈으로 포착하는 작가의 눈을 빌어 우리는 즐겁게 들여다보면 그만이다. 그 간극을 메우지 못해 불안해하는 많은 사람들과 억지로 틈을 벌리는 사람들의 중간쯤에 정이현은 서 있다.

  우선 시선을 따라가 보자. 그녀는 전통적 소설의 문법인 시점을 일부러 거부하고 있지는 않지만 편안하지 않다. 소설과 내부와 외부에서 끊임없이 독자를 끌어들이고 타인의 시선을 전제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기 때문이다. 서양 연극의 제 4의 벽의 원리처럼 대개의 경우 소설의 인물들은 짐짓 독자의 시선을 외면하거나 침묵을 전제로 행동하고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그렇다고 작가가 판소리의 창자처럼 청자를 염두해 두거나 대화형식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독자들은 사소한 일상의 문제들은 은밀히 공유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고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는 묘한 매력을 지닌다.

  이 책의 인물들은 모두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대개의 경우 현대적 의미의 여성이다. 10대 소녀에서 당당한 커리어우먼까지 지금 이 시대의 여성이 주인공이다. 물론 시대를 뛰어넘어 19세기말 당대의 현재성을 획득한 ‘김연실’을 앞세우기도 하지만. 독신이기도 하거나 동성연애자이기도 하고 거식증 환자일수도 있으며 결혼을 앞둔 지극히 평범한 미혼 여성일 수도 있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한결같이 지금 이 시대를 여자로 산다는 것에 대해 묻고 있는 듯하다. 피해의식으로 가득찬 여성이나 자의식의 과잉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울부짖는 여성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모두 발랄하며 이 시대의 제도나 형식들을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않는다는 특징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공통적이지만 개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을만하다. 새로운 인물형의 창조가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면 소설들은 모두 생의 단면을 통해 그녀들의 삶의 방식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면 될 듯하다.

  또 하나 이 소설에서 주목할 만한, 그리고 가장 큰 장점은 아이러니와 냉소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전의 여성을 다룬 소설들이 개인적 상황과 사회의 억압 구조 속에 매몰되어 있었다는 면에서 이 소설의 인물들이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 정이현은 그녀들에 대한 시선을 차갑고 냉정하게 거두어 들인다. 의도적인 방식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온기 없는 시선은 독자들의 동참에 호소하는 면이 있다. 그녀들에게 공감하거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낯설게 바라보거나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삶의 부조리를 전하는 듯하다. 결혼에서 사랑보다 더 큰 가치를 믿는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주인공이나 지극히 일상적인 결혼의 과정을 가장 실감나게 그려낸 ‘홈드라마’에서 작가는 가볍고 발랄한 형식으로 그들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다른 단편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그것도 깊은 여운과 생의 단면을 찌르는 날카로움이 없다는 치명적인 아쉬움이 남는다. 아직 시작뿐이라는 말로는 갈음하기 어려운 단조로움과 단단하지 문장 구성은 보완되리라 믿는다. 소설가를 등급 매길수 있다면 새로운 소설이 나오면 경우에 따라 선택해야겠다는 등급을 내린 소설가다. 그래도 여전히 신선하고 새로운 소재와 나름의 독특한 방식으로 세상을 읽어내는 시선을 유지한다면 시간이 그녀의 소설을 말해 줄 것이다.


2005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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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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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적 상상력의 부재이거나 인간에 대한 심층적 탐구를 위해 작가들이 한번쯤 거쳐가는 통과의례가 역사적 사건이다. 소설과 역사는 많이 닮았다. 사실(fact)보다 진실(truth)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역사보다 소설을 본다. 허구적 세계에서 진실을 보다니! 하지만 역사는 승리자와 가진자의 논리일 뿐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면 그 대안으로 우리는 역사적 상상력과 그 곳에 숨어있는 진실찾기 게임에 몰입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김연수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는 바로 인간 역사의 부정에서 출발한다. 아홉 편의 단편들이 모두 동일한 방식과 주제로 묶이지는 않지만, ‘뿌넝쇠(不能說)’를 비롯해서 ‘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등에서 보여주는 작가의식은 분명한 지향점을 보여준다. 기록된 역사의 오류를 우리는 진실이라 믿으려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것을 부정하고 ‘말할 수 있는 부분’과 ‘말해질 수 없는 부분’에 대해 탐구한다. ‘역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거짓말이 들통나는 게 아니라 들통난 것들이 거짓말이 된다’는 조르주 뒤비의 말을 인용하며 작가는 그 의식의 단면을 드러낸다.

  인간의 역사는 모두 부정될 수 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혹은 사관(史觀)에 따라 얼마든지 새롭게 해석 가능한 역사를 소설로 풀어내는 것은 어쩌면 작가가 가져야할 당연한 문제의식인지도 모른다. 무론 김연수의 소설들은 선이 굵은 흐름을 짚어내거나 구태의연한 ‘가정법’을 쓰지 않고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기를 시도한다. 한 영화를 만드는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에 의해 여러 버전이 나오듯이, 김연수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수많은 버전을 상상해내는 작가다.

  단순한 상상력의 차원에 머무는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진실과 책속에 담겨있는 것이 사실이라는 맹목적 믿음에 대한 거부가 작가의 믿음이다. 무엇이 진실일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입장과 견해로 사실을 판단한다. 하지만 그 관점과 생각의 틀을 만들어 준 교육이나 이데올로기의 틀을, 관습적이고 맹목적인 사유 방식을 뒤짚는데서 김연수의 소설은 출발하고 있다. 아마 이것이 작가를 도드라지게 하는 역할을 하는 듯 싶다.

  이 소설집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인간 관계에 대한 소통 방식이다. 과연 인간은 소통 가능한 존재인가하는 질문에 답하는 대표적인 단편이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을 들 수 있다. 이 작품들은 인간의 존재 방식을 묻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은 대부분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가족과 친구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단초가 된다. 그러나 그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고 믿는 많은 사람들에게 작가는 진지하게 묻는다. ‘의사 소통에 문제가 없습니까?’라고.

  의사 소통의 가능성에 대한 불신은 많은 작가들이 다루어 온 주제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인간 관계의 ‘소통’이라는 말은 본질적인 이해와 믿음을 이야기한다. 오랜 시간과 자매라는 설정 속에서도 찾아지지 못하는 관계의 진정성이라면 낯선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두 말이 필요없다. 타인에 대한 이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운 것이 되고 만다.

  이렇게 작가는 세계 인식에 대해 부정적이다. 김영하의 발랄함이나 김경욱의 죽음에 대한 관심, 정이현이나 박민규가 보여주는 현대 사회의 단면들 속에서도 유독 김연수의 작품에 주목하게 하는 요소는 바로 이 부정적 세계 인식에 대한 나름의 해석이다. 하지만 확실한 대안과 정의는 물론 없다. 소설에 답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은 모두 독자의 몫일테니까.

  다만 이후 김연수가 보여주게 될 소설에 대한 관심과 미래는 밝아 보인다. 지독하고 철저한 독서에 의한 내용의 신뢰감과 소설적 상상력 또한 은근한 매력이며 단순한 현학취에 그치지 않고 내용의 깊이를 더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지속적인 내공이 쌓여 좋은 작품이 나올 것으로 기대되는 좋은 작가를 만났다는 느낌이다.


2005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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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304
장석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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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시는 유효하다. 시대와 세대를 초월할 수 있는 장르는 소설이 아니라 시다. 문학의 보편성을 전제로, 공시적 측면에서 당대의 진실을 담아내는 역할이 소설에게 주어졌다면 시는 통시적 측면에서 敍情을 바탕으로 한다. 다양한 문예사조와 시대의 유행을 넘어 시의 본령을 이루는 것이 서정시다. 여전히 장석남은 서정시를 쓰고 있다.

  이제 불혹의 나이에 들어 지칠(?)법도 하건만 여전히 그는 ‘사랑’을 노래한다. 낯간지러운 설렘과 그리움이 아니라 누더기진 삶에 대한 사랑 말이다. 그래서 읽는 사람을 아프게 한다. 귀 밑을 스치는 바람이 가을을 알려주고 이따금 하늘을 올려다보면 막막하기만 하다. 하늘이 푸르고 높다고해서 세상이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므로.

  삽십대의 한복판에 서 있는 소설가 김연수가 그의 시를 해설하고 있는 방식 또한 흥미롭다. 전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젖은 눈>,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을 중심으로 애정어린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모든 시집의 해설들이 그러하듯이 일반적인 독자들과는 거리가 먼 분석적이고 해석적인 비평이다. 오히려 그의 시선은 외면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그저 장석남이 펼쳐 보이는 세상에 대한 낯선 시선들을 따라가며 편안하게, 때론 불편하게 그의 시들을 가슴에 담아보면 그만이다. 서시에 해당하는 그의 ‘얼룩에 대하여’를 두 번 읽고는 시집을 덮었다가 다음날 다시 폈다. 가슴이 먹먹했기 때문이다. 결국 독자와의 소통과 반응 속에서만 시는 제자리를 찾고 다시 살아나 언어의 의미를 살려내고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삶의 진정성을 전해준다.

 얼룩에 대하여

   못 보던 얼룩이다

   한 사람의 생은 이렇게 쏟아져 얼룩을 만드는 거다

   빙판 언덕길에 연탄을 배달하는 노인
   팽이를 치며 코를 훔쳐대는 아이의 소매에
   거룩을 느낄 때

   수줍고 수줍은 저녁 빛 한 자락씩 끌고 집으로 갈 때
   千手千眼의 노을 든 구름장들 장엄하다

   내 생을 쏟아서
   몇 푼의 돈을 모으고
   몇 다발의 사랑을 하고
   새끼와 사랑과 꿈과 죄를 두고
   적막에 스밀 때

   얼룩이 남지 않도록
   맑게
   울어 얼굴에 얼룩을 만드는 이 없도록
   맑게
   노래를 부르다 가야 하리


너무 이른 생에 대한 선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이를 가늠하며 시를 읽을 수는 없다. 어느 순간이든 삶을 대하는 태도는 모두 다 다르기 때문이다. 장석남의 시집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는 우리에게 묻지 않고 ‘미소’에게 묻는다. 어디로 가시려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미소를 어디로 떠나보내고 사는지. 어디에서 미소를 찾고 있는지.


200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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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건강법 - 개정판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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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톡한 소설을 만났다. 밀란 쿤데라 이후 몰입할만한 외국 작가를 만나지 못했다. 번역과 정서의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휘와 문장에서 느껴지는 섬세한 느낌들이 주는 문체가 내용과 어울려 전체로 다가와야 하지만 쉽지 않다.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를 일부러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겉도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부분의 외국 소설은 나에게 그렇게 읽힌다. 번역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아멜리 노통브의 <살인자의 건강법>은 그런대로 좋은 평가를 내릴만하다.

  우선 내용 자체가 주는 신선함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를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작가의 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선언적 의미로 읽힌다. 주인공인 타슈의 입을 통해 문학에서 오용되거나 독자들이 읽어내고 싶어 하는 비유와 상징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냉소가 시원하다. 공간의 이동도 시간의 흐름도 이 소설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인터뷰를 통한 기자와 작가 사이의 대화로만 구성되어 있다. 장편소설에서 신경써야할 다양한 인물이나 복잡한 갈등도 간접적인 복선과 암시도 다 필요 없다. 그저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서만 소설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기자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타슈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분석을 통해 그의 전 생애를 밝혀낸다. 유년시절의 지독한 사랑과 추억 때문에 세상과 단절한 채 살아가는 추악한 외모를 가진 늙인이의 진실을 밝혀낸다. 그러나 기자가 밝혀내는 결국 늙은 대가의 숨겨진 삶이 아니라 진정한 ‘문학’ 속에 가려진 진실 찾기 게임이다. 문학적 진실이란 과연 무엇인가? 현실과 문학의 모호한 경계위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즐기는 듯한 이 소설은 작가 스스로가 밝히는 자신의 문학론으로 읽힌다.

  소설은 결국 허위적 진실이다. 허구라는 말도, 진실이라는 말도 모두 맞거나 모두 틀린다. 말장난이 아니다. 소설은 양면성을 지닌 두 얼굴의 사나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비평가나 독자들의 상상력은 자유지만 해석은 위험하다. 현실보다 진지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소설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는 것처럼 소설의 의미 자체를 탐색하는 듯한 이런 종류의 소설 또한 쉽지 않다.

  또 하나의 축은 ‘사랑’이다. 작가 타슈의 어린 시절 절대 사랑이었던 사촌 레오폴딘. 그 사랑은 완벽했다. 탸슈의 입장에서. 성장하기 이전, 그러니까 2차 성징이 드러나기 이전의 상태로 가장 순수한 모습만을 사랑했고 추억하는 현실 속의 환상이다. 그런 환상을 현실에서 지켜내는 방법은 일탈 행위 뿐이다. 살인을 통해 영원한 기억 속에 묻어버린 타슈는 그 후 전 생애를 글쓰기 속에 묻혀 산다. 다소 비현실적인 내용이지만 남녀간의 진부한 사랑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사랑 이전의 사랑을 확인한 후 작가가 보여줄 사랑 얘기가 궁금하다.

  인류의 삶은 지속될 것이고 새로운 작가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다. 그들이 내놓는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나름의 진실은 각각의 목소리를 낸다. 훌륭하고 위대한 문학으로 남겨질 작품은 결국 보편성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물론 대중성과는 다른 문제이다. 특별한 의미와 내용을 담고 색다른 방식으로 다가오는 그녀의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단순한 발랄함이나 재치만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기자와 타슈가 보여주는 대화의 특성은 간결하고 직설적이다. 이전의 다른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타슈의 말들은 현란하고 자유롭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요설들은 작가의 언어에 대한 화려한 요리 솜씨를 보여준다.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능력은 작가로서 가지는 첫 번째 장점이다. 촌철살인의 은유와 풍자, 비틀고 후려치는 어법을 통해 ‘문학’ 자체에 대한 작가의 방법론을 확인할 수 있다.

  다르다는 것은 미덕이다. 특이한 내용과 색다른 방식으로, 무엇보다도 <살인자의 건강법>이라는 주목할(?) 만한 제목으로 일단 독자들에게 주목받고 많은 소설들을 쏟아내고 있는 작가의 다른 작품 몇 편을 더 읽어봐야겠다. 그래야 그녀에 대한 평가는 그 이후의 일이겠다.

 


2005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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