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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창조적 상상력의 부재이거나 인간에 대한 심층적 탐구를 위해 작가들이 한번쯤 거쳐가는 통과의례가 역사적 사건이다. 소설과 역사는 많이 닮았다. 사실(fact)보다 진실(truth)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역사보다 소설을 본다. 허구적 세계에서 진실을 보다니! 하지만 역사는 승리자와 가진자의 논리일 뿐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면 그 대안으로 우리는 역사적 상상력과 그 곳에 숨어있는 진실찾기 게임에 몰입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김연수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는 바로 인간 역사의 부정에서 출발한다. 아홉 편의 단편들이 모두 동일한 방식과 주제로 묶이지는 않지만, ‘뿌넝쇠(不能說)’를 비롯해서 ‘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등에서 보여주는 작가의식은 분명한 지향점을 보여준다. 기록된 역사의 오류를 우리는 진실이라 믿으려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것을 부정하고 ‘말할 수 있는 부분’과 ‘말해질 수 없는 부분’에 대해 탐구한다. ‘역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거짓말이 들통나는 게 아니라 들통난 것들이 거짓말이 된다’는 조르주 뒤비의 말을 인용하며 작가는 그 의식의 단면을 드러낸다.
인간의 역사는 모두 부정될 수 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혹은 사관(史觀)에 따라 얼마든지 새롭게 해석 가능한 역사를 소설로 풀어내는 것은 어쩌면 작가가 가져야할 당연한 문제의식인지도 모른다. 무론 김연수의 소설들은 선이 굵은 흐름을 짚어내거나 구태의연한 ‘가정법’을 쓰지 않고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기를 시도한다. 한 영화를 만드는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에 의해 여러 버전이 나오듯이, 김연수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수많은 버전을 상상해내는 작가다.
단순한 상상력의 차원에 머무는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진실과 책속에 담겨있는 것이 사실이라는 맹목적 믿음에 대한 거부가 작가의 믿음이다. 무엇이 진실일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입장과 견해로 사실을 판단한다. 하지만 그 관점과 생각의 틀을 만들어 준 교육이나 이데올로기의 틀을, 관습적이고 맹목적인 사유 방식을 뒤짚는데서 김연수의 소설은 출발하고 있다. 아마 이것이 작가를 도드라지게 하는 역할을 하는 듯 싶다.
이 소설집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인간 관계에 대한 소통 방식이다. 과연 인간은 소통 가능한 존재인가하는 질문에 답하는 대표적인 단편이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을 들 수 있다. 이 작품들은 인간의 존재 방식을 묻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은 대부분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가족과 친구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단초가 된다. 그러나 그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고 믿는 많은 사람들에게 작가는 진지하게 묻는다. ‘의사 소통에 문제가 없습니까?’라고.
의사 소통의 가능성에 대한 불신은 많은 작가들이 다루어 온 주제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인간 관계의 ‘소통’이라는 말은 본질적인 이해와 믿음을 이야기한다. 오랜 시간과 자매라는 설정 속에서도 찾아지지 못하는 관계의 진정성이라면 낯선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두 말이 필요없다. 타인에 대한 이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운 것이 되고 만다.
이렇게 작가는 세계 인식에 대해 부정적이다. 김영하의 발랄함이나 김경욱의 죽음에 대한 관심, 정이현이나 박민규가 보여주는 현대 사회의 단면들 속에서도 유독 김연수의 작품에 주목하게 하는 요소는 바로 이 부정적 세계 인식에 대한 나름의 해석이다. 하지만 확실한 대안과 정의는 물론 없다. 소설에 답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은 모두 독자의 몫일테니까.
다만 이후 김연수가 보여주게 될 소설에 대한 관심과 미래는 밝아 보인다. 지독하고 철저한 독서에 의한 내용의 신뢰감과 소설적 상상력 또한 은근한 매력이며 단순한 현학취에 그치지 않고 내용의 깊이를 더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지속적인 내공이 쌓여 좋은 작품이 나올 것으로 기대되는 좋은 작가를 만났다는 느낌이다.
2005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