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사생활 창비시선 270
이병률 지음 / 창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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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을 밀면 한 장의 먼지 낀 내 유리창이 밀리고
그 밀린 유리창을 조금 더 밀면 닦이지 않던 물자국이 밀리고

……

밀리고 밀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이름이 아니라
그저 무늬처럼 얼룩처럼 덮였다 놓였다 풀어지는 손길임을

갸륵한 시간임을 여태 내 손끝으로 밀어보지 못한 시간임을
- ‘무늬들’ 중에서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감각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일종의 마술이다. 그래서 난 시인들을 마술사라고 부른다. 그리움의 두께와 무게를 유리창에 낀 먼지로 보여준다. 밀어내도 잘 밀리지 않는 미련과 아쉬움을 시인은 물자국으로 표현한다. 손끝으로 만져보지 못한 내밀한 시간을 견뎌본 사람들은 안다.

이병률의 시집 <바람의 사생활>은 손을 베일만큼 날선 감수성으로 벼려져 있다. 생활 속에서 만져지는 모든 감각들이 살아나고 시간의 두께를 벗어난 언어들은 살아 숨쉰다. 우리들 마음이 가 닿는 곳과 가 닿지 않는 곳을 보여주고 보여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들에 대한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신(神)과의 약속을 발설할 것 같지 않던 당신은
지금 그 시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백스물 아흔 여든두 살 쭈글쭈글한 얼굴로 돌아가자 말했다
허나 내가 지켜야 할 약속은
검고 고요한 저 소실점을 향해 가는 일
- ‘봉인된 지도’ 중에서

그때 오래전부터 당신이 나를 미워했다는 사실이 자꾸 목에 걸립니다

혼자이다가 내 전생이다가 저 너머인 당신은

찬찬히 풀어놓을 법도 한 근황 대신 한 손으로 나를 막고 자꾸 밥을 떠넣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 ‘저녁의 습격’ 중에서


시집을 읽다가 문득 눈길을 멈추고 심호흡을 가다듬는 구절이 나오면 사방은 정막하다. 시인의 보여주는 소실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득하기만 하다. 목구멍으로 밥을 떠넣는 모습이 보인다. 현실 속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시간들과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들이 어떻게 비춰지는 것일까? 시인의 눈에 투영된 모습들은 ‘낯설게 하기’가 아니라 ‘아프게 하기’이다.

언어에 대한 감각적 유희와 다른 언어를 통한 사유와 사고의 확장은 시인의 손을 떠나 독자의 몫이 된다. 해박한 이론과 관념적 이해가 아닌 호흡과 숨결을 만나게 된다면 행복하다. 어떤 독자라도 웃으며 그 시와 손을 잡을 수 있으면 된다. 이병률의 시는 바로 그런 시가 아닐까?

아무것도 그 무엇으로도

눈은 내가 사람들에게 함부로 했던 시절 위로 내리는지 모른다

어느 겨울밤처럼 눈도 막막했는지 모른다

어디엔가 눈을 받아두기 위해 바닥을 까부수거나 내 몸 끝 어딘가를 오므려야 하는지도 모르고

피를 돌게 하는 것은 오로지 흰 풍경뿐이어서 그토록 창가에 매달렸는지도 모른다

애써 뒷모습을 보이느라 사랑이 희기만 한 눈들, 참을 수 없이 막막한 것들이 잔인해지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비명으로 세상을 저리 밀어버리는 것도 모르는 저 눈발

손가락을 끊어서 끊어서 으스러뜨려서 내가 알거나 본 모든 배후를 비비고 또 비벼서 아무것도 아니며 그 무엇이 되겠다는 듯 쌓이는 저 눈 풍경 고백 같다, 고백 같다

아무것도 그 무엇으로도 말할 수 없는 부분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면서 쉽게 규정될 수 없을만큼 대단한 것도 아니다. 눈발을 통해 비명 소리가 재워지고 뒷모습이 희미해지며 들리지 않게 고백하고 만다. 하얀 눈으로 뒤덮힌 아침, 창밖의 나뭇가지에 쌓인 흰 눈의 무게만큼만 무거워지고 싶은 나의 이기심을 돌아본다. 그 시절 위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일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 배후를 알고 싶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야 하는 일에 대한 시인의 선언은 ‘봄날은 간다’이다.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시간이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당신’이라고 명명된 존재는 봄날과 함께 사라질 수 밖에 없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당신이 건설한 제국에 대한 두려움으로 읽히는 이 시 너머에 오롯이 앉아 있는 너의 모습을 본다.

당신이라는 제국

이 계절 몇사람이 온몸으로 헤어졌다고 하여 무덤을 차려야 하는 게 아니듯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찔렀다고 천막을 걷어치우고 끝내자는 것은 아닌데

봄날은 간다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인 나를 잊는다 하여 불이 꺼질까 아슬아슬해할 것도, 피의 사발을 비우고 다 말라갈 일만도 아니다 별이 몇 떨어진 별은 순식간에 삭고 그러는 것과 무관하지 못하고 봄날은 간다

상현은 하연에게 담을 넘자고 약속된 방향으로 가자 한다 말을 빼앗고 듣기를 빼앗고 소리를 빼앗으며 온몸을 숙여 하이면 기억으로 기억으로 봄날은 간다

당신이, 달빛의 여운이 걷히는 사이 흥이 나고 흥이 나 노래를 부르게 되고, 그러다 춤을 추고, 또 결국엔 울게 된다는 술을 마시게 되더라도, 간곡하게

봄날은 간다

이웃집 물 트는 소리가 누가 가는 소리만 같다 종일 그 슬픔으로 흙은 곱고 중력은 햇빛을 받겠지만 남쪽으로 서른세 걸음 봄날은 간다


061218-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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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18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의 시와 님의 글이 잘 어울렸어요.
또 한편의 시를 읽는 느낌이에요.

sceptic 2006-12-19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끄러운 멘트를...-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