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고 줄 꽂아놓고 - 옛사람의 사귐
이승수 지음 / 돌베개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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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친구'라는 영화가 유행했던 때가 있었다. 이후로 조폭 이야기와 드라마가 온 사회를 휩쓸고 지나갔다. 사람들은 삶이 더욱 팍팍해질수록 어려울 때의 친구들을 기억한다. 삶의 바닥을 함께 했던 사람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망을 더욱 확고하게 하려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세상에서 홀로 고립된 섬이 아니라 그들과의 관계망으로 인해 버림받지 않았다는 느낌을 가지며 안도의 한 숨을 내쉰다. 현실이 더욱 이해타산적이 되고 조건이 변하고 지향하는 바가 다르고 몸담은 곳이 달라서 어제의 한 패거리가 오늘은 다른 패거리가 되어갈수록 피하고 싶은 외로움과 고독의 덮침은 두렵다. 확실히 조폭 이야기는 현실적인 이해타산을 어느 정도 넘어서는 우정을 보여준다. 때로는 자신의 목숨마저도 그 '우정'과 '신뢰'를 위해 희생한다. 이런 영화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이러한 조건을 뛰어넘는 우정과 인간적 신뢰에 목말라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로맨스와 추억이라는 좋은 이름을 갖고 있는 이 조폭의 우정은 그 그늘 속에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우리가 살면서 가장 중요한 점인 고독을 회피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저자는 우정이란 성숙한 인격을 지닌 자유로운 영혼들의 대화 또는 만남이라고 말한다. 즉 성숙한 인격은 고독을 감내하는 데서 빚어지는 것이다. 가장 바람직한 우정은 천지간에 홀로 설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 성립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추억을 간직한 친구와의 우정이 위태로운 것은, 그것이 자신의 고독과 대면해야 하는 것을 회피하게 만들고 그 빈 자리를 친구와의 조건없고 맹목적인 이해와 신뢰에 의지하게끔 한다는 것이다. 친구를 사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친구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하고 그 친구를 어떻게 사귈 것인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물론 고독을 함께 나누고 오랫동안 쌓였던 정으로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마음을 읽어서 배려와 신뢰를 주는 친구와의 만남은 언제나 즐겁다. 또한 그런 친구를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보물을 가진 듯하다. 책을 들고서 독서삼매경에 빠져 들다가 문득 깨어 고개를 들면 생각나는 친구가 있고, 깊은 밤 한적하고 조용한 호숫가에서 물안개가 끼어 첩첩이 쌓인 산들이 선경으로 눈앞에 나설 때 달빛은 그 안개 속으로 스며들어 운치를 더할 때 술 한잔과 더불어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면...이 흥이 아쉬움없이 다하련만....소식을 나눈 지 오래되어 어떻게 사는지가 궁금하고 공부는 어떤 진척을 이루었는지 궁금해도 연락할 길 막막할 때 불어오는 바람이라도 그 소식을 전해주면....하고 생각할 때 우리는 그 대상을 향한 깊어진 마음을 발견한다.

  그런 친구를 만나지 못했다 하더라도 한탄만 하고 살 수는 없는 일...때로는 책에서도 그런 친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온전히 싣어 글을 읽으면 내가 그 사람의 마음이 되고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을 앞에 둔 듯이 느끼고 그 시대 속에 그 풍경 속에 나는 어느새 들어가 있다. 내 마음을 비우고 투명하게 하는 순간 그의 마음이 내 마음을 비추고 나는 내 인격으로는 과분한 스승들을 만나게 된다. 때로는 직접적인 질책과 호통을 맞게 되고 때로는 친절하고 배려깊은 조언도 듣게 된다. 그 순간 이미 내 주위에는 많은 친구들이 생겨나고 마음은 넉넉해진다.

  진정한 친구는 스승의 역할을 겸해야 한다고 했다. 벗에게서 스승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면 진정한 벗일 수 없고, 스승에게서 벗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면 참다운 스승이 아니라고 했다. 스승이 벗이 되고 벗이 스승이 되듯이 내가 그가 되고 그가 또한 내가 되는 마음의 공유와 교감이 없다면 그를 일러 어찌 벗이라 부르랴! 나이가 어리다고 함부로 대하지 아니하고 보다 연장자라고 해서 어려워만 하지 않고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어야 비로소 참된 벗이라 이름할 수 있다. 나아가 서로의 모습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비추어내지 못하고 마음을 자신에게로 돌려서 그 안에서 구하지 못하면 이를 두고 어찌 바른 우정이라고 하랴!

  우리는 여태껏 너무 나약한 자신을 외부와의 관계로서 보상받으려고만 살았다. 직시되어야 할 삶과 스스로 걸어가야만 할 고독의 길을 더이상 회피해서는 안된다. 내 삶에서 가장 부족한 것도 이것이다. 내 내부의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한 번도 걸어가지 않은 길을 걸어서 깊은 숲 속 한가운데 자리한 영원한 생명의 나무를 만나야 한다. 그 생명의 나무 뿌리에서 다시 줄기로 가지로 나와 만난 뭇 생명들과의 나눔은 비로소 조건도 차이도 없게 될 것이다. 눈과 귀는 생김새와  그 기능이 다르지만 한 얼굴에 있다는 말이 있다. 나옹선사와 대유학자 이색과의 생사를 가른 만남에서 나는 이를 실감한다. 여기 이색을 모시고 와서 그의 시 한편을 들어보자.

스님께 없는 것은 나의 처자 족쇄요

나에게 없는 것은 금란가사 옷이라오

서로의 잃고 얻음 그 어디서 조절되나

봄바람 속 제비 춤 꾀꼬리 노래라네

 

  저자는 서두에서 "옛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느라 현실을 잊거나, 바람이 들려주는 공간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걸음을 멈추어 설 때가 많다."고 했다. 아주 멋진 말이다. 그가 걸어놓은 줄없는 거문고를 들고서 시공을 거슬러 올라가 우주를 정신없게 만들었던 열 두 만남의 폭발적이고도 조용한 선율을 마음껏 음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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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19 1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달팽이 2006-10-19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바람구두님의 첫 댓글이군요..
짧지만 반가운 글입니다.

파란여우 2006-10-20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버려진(?) 책인데.
몰라요, 달팽이님의 지름때문에 보관함에(거의 파산지경인데..)

달팽이 2006-10-20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허, 여우님 책값 때문에 팔아야 하는 염소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픈데요..

어둔이 2006-10-20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께 없는 것은 두발의 걸음걸이요
어둔이께 없는 것은 지고가는 와옥이라네
인생의 빠르고느림을 그 누가 판단하나
가을햇살 속 누렇게 고개숙인 벼이삭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