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라만상을 열치다 - 한시에 담은 二十四절기의 마음
김풍기 지음 / 푸르메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절기상으로는 동지를 지나 소한을 향해 가고 있다. 지나간 한 해를 둘러보는 나의 눈에는 항상 한해에 묻은 희노애락의 감정과 아쉬움이 담겨 있다. 하지만 저물어가는 한 해의 끝에서 바라보는 마음에는 그 모든 것이 나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새롭게 떠오르는 새해를 구경가지는 못했어도 그 새 해를 기다리고 맞는 마음이야 어찌 남들과 다를바 있으랴. 2007년의 새로움이 아직 식지 않은 하루 하루가 좀 더 마음을 곧추 세우는 것은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한 해 한 해에 묻혀 내 인생의 달도 그렇게 스러져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감때문이리라.

  소한과 대한의 칼끝같은 추위를 온전히 맞고서야 입춘의 천지를 맞이할 수 있듯이 밤이 제일 길다는 동지에서 이미 목련에 맺은 싹이 보인다. 모든 잎을 떨구어버린 헐벗은 저 나무들에서 너나 할 것없이 새싹이 오르고 있는 모습을 동지에서 본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동지에서 일양이 시작된다고 하였다. 음의 극한인 동지에서 하나의 양이 싹트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제 가슴 속 깊이 파고드는 겨울 추위인 소한과 대한을 지나서 매화가 피는 초봄을 향해 가리라. 눈 쌓인 곳에 핀 매화를 보는 것은 더더욱 좋은 것이 아니랴. (아마 한사님은 그것을 기다리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농사의 필요성 때문에 24절기에 따라 자신의 삶을 일구었던 농부가 아니다하더라도 선비들도 24절기의 자연의 순행 속에서 자신의 삶과 마음을 담아내면서 천지의 조화를 일구었던 마음씀이 부러웠다. 우수에 내리는 눈비를 맞으며 봄의 마음을 노래했고 경칩에는 개구리 울음 소리 하나에 온천지가 깨어나는 정신적인 경지를 추구하였다. 곡우에 내리는 비를 맞이하며 우전차를 말려서 찻잔에 담그며 시를 읊었으며 천지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며 춘분을 노래했다.

  아! 봄만 되면 내게 꼭 한번의 몸살로 시작되는 감기는 지난 날의 잃어버렸던 사랑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였다. 그런데 천지의 담긴 기운 역시 봄만 되면 다시 소생하는 자연의 순환 속에 떠나간 님도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을 줄이야. 왜 하필 강가에서 버드나무를 빗대어 이별의 슬픔을 위로했으며, 왜 하필 비내리는 처마 끝에서 하루가 저물 무렵 그대에 대한 깊은 상념은 주체할 수 없이 가슴을 파고드는 지도 우리는 물을 수 없었다. 계절의 순환과 절기에 담긴 옛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서야 비로소 그들의 애틋한 감정이 깊은 정신적 경지가 달리보이게 되는 것임을...

  한시를 읽어내는 것도 이젠 어느듯 감각이 생기기 시작한다. 풀이보다는 원문에서 한자 한자 풍기는 감정과 문맥에 담긴 글쓴이의 마음이 언뜻 비치는 것을 느낄 때엔 한시 공부의 새로운 맛을 알게 된다. 이젠 원문을 먼저 읽어내고 그 속에 담긴 뜻을 추측한 다음 풀이를 보게 된다. 그리고 풀이의 적당함을 생각하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 새롭게 풀이를 해보기도 한다. 혼탁한 정신과 막무가내식의 글공부로 무디었던 마음의 손가락이 시간이 지나 점점 부드러워지고 예민해져서 손가락 사이로 스치는 문장이 가진 감각들을 하나둘씩 읽어가기 시작하면서 책읽는 새로운 즐거움이 생긴다.

  저자는 자신의 어릴 적 경험과 공부하는 마음으로 한시 풀이를 무리없이 잘 해내고 있다. 나아가 옛 시인들의 시에 담긴 그들의 감정과 마음을 고스란히 이해하고 옮겨놓으려는 노력이 잘 보여지고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그 흥을 제대로 느끼게 해준다. 공부란 무릇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많은 해설로서 많은 인용거리를 가져다 놓아도 가슴을 울리지 않는 주석서에 불과하다면 책을 끝까지 읽어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글을 통해 마음을 바로세우고 나아가 자신의 몸으로써 한번 살아보게끔 해주는 책이 있다면 그런 책이야 말로 값진 책이 아닐까? 새해 초에 이렇게 좋은 책으로 나의 리뷰를 시작하게 된 것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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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1-03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디었던 마음의 손가락이 시간이 지나 점점 부드러워지고 예민해져서
손가락 사이로 스치는 문장이 가진 감각들을 하나둘씩 읽어가기 시작하면서
책읽는 새로운 즐거움이 생긴다."

문장 좋습니다. 달팽이님.
한번 더 입속으로 읽어봅니다.



파란여우 2007-01-03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은 글을 통해 마음을 세우고 원문의 뜻에 남다른 의미를 알아채시는
경지에 이르셨군요!!!
한사님이나 달팽이님은 이 엄동설한에 벌써 우전차와 매화를 말씀하시니
겨울 내복을 입고 눈이 덜 내린다고 투덜대는 저와는 역시 계급이 다른거였어요.흑
-매화나무에 눈이라도 내렸으면 바라는 시퍼런딩딩매화 드림-

파란여우 2007-01-03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참, 내친김에 슬퍼만 하면 약이 오르니 자랑질 하나 하고 갑니다.
매화와 우전차는 구경 못했지만 전 오늘 겁나게 기쁜 선물을 받았답니다.
유몽인 선생의 '어우야담'1,2권 세트-돌베게
와우!!!

달팽이 2007-01-03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초부터 벗들의 마음담긴 글을 얻어 기쁩니다.
여우님은 새해에도 책복은 여전하시군요..
가끔 여우님의 책 아닌 책 속에 담긴 친구의 마음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ㅎㅎ

비로그인 2007-01-03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우! 부럽습니다. 파란여우님
어우야담 재밌겠습니다.
얼릉 읽으시고 리뷰 올려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제일 재밌는 대목 한편 곁들여서..)
상,하 두 권인 것 같든디, 아예 상 하로 나누어서 올려 주시면 더욱 좋고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