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경우 독서는 일단 물적 경험의 단계로 시작된다.
수많은 책 가운데 하필 눈이 가서 손이 가는 물적 형태가 있어야 하고 그걸 쥐고 펼치고 가끔은(하고 적어두고 꽤 자주, 라고 고백함) 코를 묻고 냄새도 맡아야 하므로 내게 책이란 일단 사물이어야 하는 것이다. 조금 더 디테일하게 말하자면, 쥐어서 무게를 감각하고 펼쳐서 질감을 확인하고 종이는 몇 그램짜리를 사용했는지 흐음, 하고 페이지를 넘기며 가늠해보고 텍스트 정열 상태를 확인하고 잉크는 신선한 것을 사용했는지 냄새도 맡아보고 인쇄 상태가 짙은지 옅은지…… 까지 확인한다고 말하고 보니 약간 변태 같네 거기다 언제 책장에 손을 베일지 모른다는 긴장감에 짜릿짜릿, 까지 말한다면 정말 변태 같지만 변태라도 상관없으니 짜릿짜릿, 소름이 돋는데 그게 싫지 않고 그게 있어야 진정 읽기 같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겠어요. 하여간 여기까지가 시작이고 보니 다소간 야단스럽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희한하고도 다행인 것은 그렇게 만져서 고른 책 중에 실패한 책이 별로 없다는 거.
본래는 그러므로 <그 책, 읽기에 좋고 만지기에도 좋다>로 콘셉트를 잡아보려고 했으나 책장 앞에 서서 책을 고르는 동안 무슨 영문인지, 겨울밤에 읽기 좋은 책을 추천하자고 마음먹게 되었다.
덧붙이자면, 겨울밤에 읽기 좋은 섹시한 책.
소설로 범위를 좁혔음을 한 번 더 덧붙여둔다.
정키, 퀴어 / 윌리엄 버로스
<정키>를 다 읽고, 더 읽고 싶어 부족해, 라는 마음이 들 때는 <퀴어>를.
조금 더 혼란스럽고 더 어둡고 더 고독하고 덜 위트 있지만 그런 이유로 <퀴어>까지 읽기를 권함.
책 속에서 :
“어른이 되면 아편을 피울래.”
사요나라 갱들이여 / 다카하시 겐이치로
다카하시 겐이치로인데요 뭐, 더 덧붙일 말이 없습니다.
책 속에서 :
“나는 무엇일까요?”
<영문을 모르는 것>이 말했다.
그래서 왔을 것이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이런 종류들은 반드시 “나는 무엇일까요?”라고 묻는 법이다. 당사자도 모르는 것을 어째서 내가 안다는 말인가?
“원칙적으로 자신이 생각해야만 합니다.”
비단 / 알레산드로 바리코
저는 2006년 8월에 출간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라색이 감도는 텍스트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즘은 어떻게 나오는지 모르겠네.
이 책은 겉표지를 벗겨내고 읽기를 권합니다.
책 속에서 :
에르베 종쿠르는 그 후 23년을 더 살았다.
리플리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총 다섯 권 시리즈에 네 번째 권까지 출간되었습니다.
다섯 번째를 기다리고 있지만 세 번째나 네 번째보다는 꼼꼼한 교정을 부탁드려요.
어쨌거나 겨울밤, 따뜻한 털양말 같은 것을 신고 읽기에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미스터 리플리를 냉소하는 사람을 경계하자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위의 내용을 다 지우고 유승호가 리플리를 연기하는 영상을 보고 싶다, 라고 적을까 망설임)
책 속에서 :
그는 자기의 소유물을 좋아했다. 모두 좋아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내주지 않을 소수의 것을 좋아했다. 그런 소유물은 자존감을 준다. 단순한 물건이 아닌 품질 그리고 그 품질을 소중하게 여기는 애정을 준다.
이 책들을 이미 읽었거나 앞으로 읽고 말 독자들에게 어디가 섹시하냐! 라는 항의를 들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 책들이
내게 정말 섹시했다고 우길 작정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덧붙이겠어요.
건강하시기를.
추천인 : 황정은 (소설가)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마더」가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파씨의 입문』, 장편소설 『百의 그림자』, 『야만적인 앨리스씨』가 있다. 한국일보문학상,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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