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기는커녕 제 정신줄을 놓지 않고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다. 제 정신 차리고 사는 것이 너무 피곤해서 가끔은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싶다. 책은 자신을 잊어버리게 하는 가장 좋은 상대다. 잘 만든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 나는 나의 모든 것을 한 곳으로 모으되 그 나는 잊어버릴 수 있다. 나라는 분심을 이겨내는 힘을 모으고 그 힘이 나를 만들고 밀고 가는 것이 독서다. 요컨대 독서란 나를 망각하는 몰아의 과정이자 흩어진 나의 마음을 모아가는 정제의 과정이다.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 김상봉 


서구의 고독한 주체철학을 ‘만남’을 통해 극복하려는 철학자 김상봉이 그리스 비극을 통해 “자유와 숭고 그리고 슬픔이 어떻게 하나의 뿌리에서 자라난 가지일 수밖에 없는지”를 해명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 스스로도 밝히고 있는 것처럼 논증하려는 다른 저작과는 달리 보다 자유로운 형식으로 “세상에 넘치는 슬픔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밝히고 있다. 고통과 슬픔을 통해 우리는 서로 만나게 되고 그 만남을 통해 보편성을 향해 나아가며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고통과 슬픔을 외면하고 ‘즐겨라!’가 지상명령이 된 시대에 고통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쓰레기가 되는 삶들 /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 시대에 삶이 왜 더 이상 예측할 수 없고 기획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있는지를 다룬 책이다. 복지국가는 개인의 위험을 사회화하여 시장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으로 폭력을 독점하였고 국민은 국가에 복종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국가는 시장을 시민으로부터 보호한다. 이 과정에서 불필요해진 사람들은 잉여/쓰레기로 취급받는다. 쓰레기는 권력에 의해 체계적으로 생산되지만 그 원인과 책임은 거꾸로 개인의 무능에서 찾는다. 그가 ‘액체근대’라고 부르는 유동하는 근대에서 우리 삶의 형태가 어떻게 불안정해지고 일회용이 되었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노자 도덕경


아무것도 모르던 청소년 시절에 읽었다가 아직도 설명할 수 없는 뭔가 경이로운 세계로 나를 인도했던 책.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신비한 책이지만 말에 매몰되지 않고 말 너머의 무엇에 대해 시선을 둘 수 있게 해주었다. 특히 11장의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라는 문구는 있음과 없음이 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기댐의 관계라는 혁명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했다.



정치의 약속 / 한나 아렌트 


이 책의 뒷면에서 마가릿 케너번이 말한 것처럼 인간의 복수성에 아렌트가 얼마나 몰입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조차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하나-가운데-둘’이라는 복수적 존재이다. 이런 복수성에 의해 ‘세계가 출현하며, 모든 인간사가 일어나는 곳은 바로 이러한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이다. 정치도 바로 이런 복수성에 의해 일어난다. 우정, 정치, 공동체, 평등 등 아렌트의 핵심적인 개념을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는 책.


장인 / 리처드 세넷 지음


이 시대의 능력이란 오래된 숙련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을 재빨리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회사에서부터 학교에 이르기까지, 경험과 경험을 통한 축적은 귀찮고 쓸모없기까지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세넷은 손이야말로 생각하는 기관이라고 주장한다. 손과 머리는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기술을 적용할 때 생각이 배제된 채 순전히 기계적으로 되는 일이 없듯이, 기능을 닦을 때도 저절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손이란 인간의 맨손과 도구가 하나 되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경이로운 기관이다. 이런 손에 대해 우리는 경이를 느낀다. 능력주의와 나란히 노동이 미학화되는 시대에 장인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이 책이야말로 장인 정신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추천인 : 엄기호 (사회학자) 

울산에서 나고 자랐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폭력적이고 부패한 교사를 만나 교육과 학교에 대한 문제의식에 눈떴다. 전교협 해직교사들의 편지글 모음인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에게》를 중학교 때 읽으며 다른 교육의 가능성을 갈망하게 되었다. 

사회학과에 진학하였지만 학부 시절에는 거의 공부를 하지 않고 가톨릭학생회 동아리 활동에 푹 빠져 있었다.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하고서야 공부를 시작하였지만 곧 국제단체에서 일하자는 제안을 받고 국제가톨릭학생운동 아시아?태평양 사무국에 나갔다. 당시 한창 달아오른 반세계화 현장에 참가하며 주로 대학생들의 사회의식을 고양하는 양성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일을 했다. 

그 후 한국으로 돌아와 하자센터에서 글로벌학교 팀장을 하고 늦은 공부를 마무리하기 위해 문화학과 박사과정에 들어가 신자유주의와 청년 하위문화를 주로 연구하였다. 돌아보면 늘 교육의 언저리에서 살아온 셈이다. 

성장이 불가능한 시대의 페다고지를 만드는 것을 삶의 화두로 삼고 있다. 2013년 박사학위를 마치고 현재는 덕성여대 겸임교수, ‘교육공동체 벗’에서 발간하는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을 하고 있다. 



엄기호 님의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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