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항상 무언가 쓸 것에 쫓기는 나 같은 사람은 더욱 그러하다. 항상 읽어야 할 것을 읽는다. 어떤 책과의 진정한 만남이란 책이 어떤 새로운 만남의 장이 될 때를 뜻한다. 생각지 못한 것과의 만남, 알 수 없는 어떤 것과의 만남 말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필경 길을 잃을 것이고 오던 길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게다. 때로는 종잡을 수 없는 어둠, 때로는 감 잡을 수 없는 형상과 대면했던 책, 그것이야말로 내게 하나의 ‘사건’으로 다가온 책이었다.


 

벽암록 / 원오극근 (장경각 판)

내가 읽었던 모든 책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가장 황당한 책,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문장도 이해할 수 없었으나 다 읽을 때까지 손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던 책이다. 쥐락펴락, 턱없이 웃긴다 싶다가도 어느새 내 머리를 후려쳤다. 어떻게 이런 책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안타까운 것은 󰡔벽암록󰡕을 자처하는 책들이 대개 작품에 담긴 불가해한 문장의 매력을 애써 쉽게 풀어주려 한다거나 원오의 탁월한 문장을 편역자들의 문장으로 대신하려 한다는 점이다. 내가 읽은 장경각 판은 번역의 아름다움도 두드러졌는데, 아쉽게도 절판 되어 쉽게 읽을 수 없게 됐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환한 어둠 속에 있는 책이다.

* 이진경 선생님께서 추천해주신 장경각 판의 '벽암록'이 절판되어 아쉽게도 알라딘 내에서 이미지가 제공되지 않습니다. 다른 버전으로 대체할 수가 없어 이렇게 남겨두는 점 양해 바랍니다.

변신: 카프카전집 1 / 프란츠 카프카

카프카의 소설이 다 그렇지만, 특히나 그의 단편들은 짧은 글 속에 다의적인 이야기를 놀랍도록 응축시킨다. 그래서 카프카는 미래의 시간을 포함해 자신의 시대를 거기 충분히 담았지만, 모든 이야기가 기이하고 비의적인 전설이 된다. 고풍스러움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상한 전설들. 그의 단편에 나오는 한 문장이 그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전설이란 진실의 바탕에서 비롯하는 것이므로 다시금 수수께끼 속에서 끝나야 한다.”

픽션들, 알렙 / 루이스 보르헤스

종종 문학작품을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는데 그때 나는 약간의 심술을 섞어 미련스레 답한다. “짧게 써도 될 걸 길게 써서, 읽기 힘들어요.” 하지만 카프카 이상으로 보르헤스는 이런 말을 하려는 내 입에 주먹을 쑤셔 넣는다. 책 속에서 우주를 뒤져대던 도서관 사서답게, 길지 않은 글에 놀라운 지식과 사유를 쟁여놓았다. 보르헤스는 그런 이야기들로 언제나 우리에게 능청스레 답하지만, 그가 내놓는 답은 항상 그 이상의 물음들이다. 답에서 새로운 물음을 발견하는 즐거움이란!

문학의 공간 / 모리스 블랑쇼

오르페우스는 애써 연인 에우리디케를 찾아냈으나 그녀에게 눈길을 보낸 순간 그녀는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무언가를 진심으로 갈구하는 자의 운명은 이런 오르페우스의 운명과 같다. 그가 마침내 찾아내고자 하는 건 언제나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다시 시작해야 한다. 찾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찾으러 떠나야 한다. 하여 끝없이 떠나야 한다. 그 순간이란 내 안에 있던 ‘누군가’가 반복하여 죽는 순간이다. 시가 찾아온 순간, 시인 안의 누군가가 죽듯이. ‘죽음’의 매력,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이 책처럼 아름답게 알려줄 방법이 있을까?

티카 / 스피노자

기하학적 방식으로 쓰였다는 것은 수학적 명증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겠다. 그에 따라 정의, 공리, 정리, 주석으로 정연하게 정돈되었는데도 이 책만큼 ‘명증하게’ 읽기 어려운 책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려움은 문장이나 글이 어려워서라기보다 그의 사유가 갖는 변종적인 독창성 때문이고, 언제나 생각하던 것만 생각하는 우리 사유의 통념성 때문일 게다. 모든 것을 신으로 보는 존재의 사유에서 기쁨의 윤리학을 거쳐 필연성의 세계에서 얻어지는 자유의 사유가 장대한 것은 단지 우주가 장대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빠빠라기 / 투이아비, 오래된 미래 /  노르베리-호지

생각지 못한 것과의 만남이 읽기 어려운 책과의 만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남태평양 섬나라 사모아의 추장 투이아비가 유럽, 아니 우리가 사는 세계와 만나면서 겪은 놀라움과 이해 불가능성을 담은 『빠빠라기』는 오히려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삶, 이해하기 어려운 삶과 만나게 해준다. 노르베리-호지가 티베트 라다크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발견한 것은 『빠빠라기』와는 반대 관점에서 놀랍고 생각지 못한 것들이다. 여기에 ‘오래된 미래’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는 ‘전근대’라는 시간표를 붙여 우리가 쉽게 묻어버린 것을 우리가 사는 근대의 이후로 옮겨놓는다. 묻어버릴 수 없는 것으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 ‘나우시카’를 봤으니 이 만화책을 읽지 않겠다는 건, 「변신」만 읽고 카프카 작품집을 던져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만화는 만화들이 강박적으로 만들어내는 흔한 인위적 반전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을 보여준다. 또한 만화라면 버리기 어려운 선악의 대립구조를 끌고 가면서도 선과 악을 모두 뒤집어버린다. 오염과 생태적 재앙을 다루는 텍스트의 전제인 깨끗함과 더러움을 수긍하면서도 그것 전체를 역전시킨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화가로서의 천재성만을 지녔다고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 작품집은 만화만으로도 사상가 반열에 오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추천인 : 이진경 (철학자)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서구의 근대적 주거공간에 대한 공간사회학적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에서 활동하며, 박태호라는 이름으로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초교육학부에서 강의하고 있다. 1980년대를 보내면서 이진경이라는 이름으로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을 썼고, 그 책이 허명을 얻은 덕분에 본명은 잃어버렸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시작해 그 첫 결과물로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발표했다. 이후 자본주의와 근대성에 대한 이중의 혁명을 꿈꾸며 《맑스주의와 근대성》,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철학의 모험》, 《이진경의 필로시네마》 등을 썼고, 사회주의 붕괴 이후 혁명의 꿈속에서 푸코, 들뢰즈·가타리 등과 사유하며 《노마디즘》, 《철학의 외부》, 《역사의 공간》,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등을 썼다.


이진경님의 저서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궁금.. 2012-07-13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장경각판의 벽암록을 구하고 싶은데, 방법이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