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혹은 독서 행위는 현실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쳤을 때 심리적 완충제인 ‘환상’을 제공해주는 도구이며, 책 속 인물들의 다채로운 감정을 경험하는 간접적 자기 표현 방법이다. 책 속 인물들의 삶에 미래를 대입시켜보는 생의 예행연습이며, 한 인간으로서 정체성을 만들어갈 때 그 재료나 디딤돌이 되어 준다. 또한 책은 인류가 간직해온 지식, 지혜, 통찰, 신비를 꺼내 쓸 수 있는 거대한 보물 창고이다. 언젠가 맞닥뜨리게 될 죽음의 뒤통수를 미리 잠깐씩 엿보아 두는 방법이기도 하다.
영혼의 자서전 / 니코스 카잔차키스
“시각, 후각, 촉각, 미각, 청각, 지성 -- 나는 내 연장들을 거둔다. 밤이 되었고, 하루의 일은 끝났다. 나는 두더지처럼 내 집으로, 땅으로 돌아간다. 날이 저물었다.” 74세에 사망한 작가가 72세에 쓴 자전적 작품. 사유의 폭이 인류의 집단 무의식에서 거대한 우주까지 넘나드는 작가가 70년 이상 살면서 건져올린 생에 대한 통찰과 지혜가 그득한 작품. 20대에 처음 읽은 이후 가끔씩 아무 페이지나 펼쳐 가만히 읽는다. 별이 쏟아진다.
작은 사건들 / 롤랑 바르트
가우디, 카뮈와 함께 취한 채 거리에서 사망한 예술가군에 포함된 롤랑 바르트가 사망한 후 출간된 유고작. 단상 모음인 ‘작은 사건들’과 일기처럼 보이는 ‘파리의 저녁 만남’이 수록되어 있다. 죽음 이후 세상에 노출될 것을 알았다면 그 원고들을 남겼을까. 냉철한 지성인 페르소나로 살았던 사람이 죽음 이후 드러낸 뜨겁고 끈적한 것들 -- “결과적으로 볼 때 내겐 거리에서 만나는 게이들밖엔 남아 있지 않다.” --에서 다시 인간이 보인다.
문학은 자유다 / 수전 손택
작가 사망 이후 출간된 유고작이지만, 작가가 죽음의 순간까지 준비해왔던 원고라는 점에서 ‘작은 사건들’과 다르다. 하지만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다. 문학평론, 정치비평, 강연 원고들이 실려 있지만 한 인간의 삶의 회고록 같은 느낌으로 읽힌다. “단어를 사랑하고, 문장을 두고 고민하고, 세계에 관심을 갖는 것, 그리고 진지할 것.” 작가에게 주는 충고가 그의 삶과 글 속에 완성되어 있다.
안동 장씨, 400년 명가를 만들다 / 김서령
근대 이전 여성에게는 네 가지 직업이 있었다. 본처, 첩실, 기생, 무당. 그 중 본처라는 직업을 가지고 가정 관리 스페셜리스트로 살았던 한 여성의 삶의 이야기. 부자유한 시대에 비범한 개인으로 태어나, 개인적 비범함을 공동체가 요구하는 평범함 속에 녹여내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음식 디미방’일 것이다. 그것은 “여성이 도에 이르는 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근대와 현대, 여성성과 남성성, 평전과 소설의 경계를 넘나드는 문체가 매혹과 품격을 확보하고 있다.
히틀러 최후의 14일, 요아힘 페스트
‘히틀러의 정신분석’은 미국 정보국이 2차 대전중 정신분석가들을 동원하여 히틀러의 심리와 그의 앞날을 예상해본 책이었다. 그 책에는 공포와 망상에 사로잡힌 인간 히틀러가 잘 묘사되어 있었다. 이 책은 그 책보다 첨예하고 적나라하게 불안한 인간의 내면을 보여준다. 몰락해가는 생이 14일밖에 남지 않았을 때, 불안과 공포라는 괴물에게 쫓기는 인간이 얼마나 냉혹하고 기이한 곳까지 치닫는가 알게 된다. “몰락도 하나의 성취이다.”고 말하는 곳.
추천인 : 김형경 (소설가, 시인)
소설가이자 시인. 1960년 강릉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1983년 《문예중앙》에 시가, 1985년 《문학사상》에 중편소설 《죽음 잔치》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1983년 첫 장편소설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로 제 1회 국민일보 문학상을 수상하며 전업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장편소설 《세월》,《피리새는 피리가 없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성에》, 《외출》, 《꽃피는 고래》를 발표했고, 창작집 《단종은 키가 작다》, 《담배 피우는 여자》, 시집 《모든 절망은 다르다》 등을 펴냈다. 심리 에세이로 《사람풍경》, 《천 개의 공감》, 《좋은 이별》,《만가지 행동》이 있다. 제10회 무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김형경 님의 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