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 박노해 시집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10년 10월
평점 :
한 몇 달 전인가 오랫동안 얼굴들을 보지 못했던 선배들을 만나 소주한잔에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지기가 아쉬워 근처 선배 자취방에 모여 다시금 소주 파티를 벌이다 다들 골아 떨어졌다.
다음날 부시시한 얼굴로 주섬 주섬 일어나,세수를 하고 해장국을 먹으로 나갈려고 하던 중에 선배의 책상위에 마치 옛날 불온 서적 마냥 새빨갛고 두꺼운 책이 한권 있어 무언가 보니 바로 박노해의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였다.뒤적여 보니 모두 시인데 웬만해서 시를 잘 안읽는 나지만 박노해란 3글자를 보니 웬지 읽고 싶어져 선배한테 이거 잠시 빌려간다 말하고 집에서 읽고 며칠 뒤에 돌려 주었다.
박노해란 사람을 지금 20~30대는 잘 알지 못한다.혹 아는 이가 있다면 아마도 학교 다닐 때 몰로토프 칵테일 깨나 던졌던 이들이 아닐까 싶다.박노해란 인물은 한때 대한 민국 운동권에선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박노해는 사제를 꿈꾸던 공단의 노동자였고 그 노동의 고단한 삶의 참다운 해방을 위해 노동자의 애환과 꿈을 그린 시집 80년대 운동권의 애창 시집이기도 한 노동의 새벽을 쓴 시인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박노해는 대한 민국을 전복 시키려 했던 혁명가였다 그것도 무장투쟁을 불사했던 강성 사회주의 혁명가로 사회주의를 천명한 ‘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을 결성했고 그를 쫒는 경찰들을 비웃으며 얼굴없는 시인으로 7년이나 도망다니가다 결국 1991년 체포됐고 사형이 구형됐다.아마도 그역시 사실 세상에 살아서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재판 끝에 무기징역이 확정됐고, 7년 6개월을 감옥에서 보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특별 사면으로 1998년 8월15일에 석방된다.
전태일이 70년대 한국 노동운동의 시작을 알린 인물이라면 박노해는 80년대의 비참했던 노동 현실을 날카로운 벼려진 시라는 칼날을 통해서 그 시를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할 정도로 고단하고 피곤하며 위험한 노동현실을 고발하여 비참한 노동자의 현실을 대학생과 일반인들에게 마치 직접 눈으로 보듯이 알려져 당시 정부에서는 눈에 가시 같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체포이후 7년의 수감 세월뒤 그는 진보 진영에서는 사상 전향서라고 비판한 이른바 준법 서약서란걸 정부에 제출하고 가석방이 된다.이와 관련 유시민은 차라리 조금이라도 미안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면 차라리 좋았을 것이다. 가수 심수봉의 입을 빌리자면 ‘보내주는 사람은 말이 없는데’ 떠나가는 남자가 오히려 큰 소리를 치는 격”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이와 관련해서 “사회주의 혁명만이 인민 해방의 길이라 믿었는데 소련은 붕괴됐고, 길을 잃었다. 치열한 반성이 필요했다. 감옥에서 하루 15시간을 공부하며 정직하게 성찰했다. 길이 보이더라. 지금은 전 지구가 하나로 연결된 마을이다. 늘 전쟁 위에서 신음하는 나라들이 아직 많고, 분쟁지역에는 우리와 똑같은 고통의 동심원이 그려져 있다. 그 고통과 함께 서 있고 싶었다.”라는 말을 남긴다.
그 이후 한때의 혁명가 박노해는 이른바 진보 진영에서는 그 자취를 감추고 시인 박노해 역시 독자들 앞에서 사라져 버린다.하지만 혁명가를 버린 박노해는 현재 나눔문화를 통하여 낮은 곳의 진정한 위로와 평화의 확산을 꿈꾸는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시인 박노해 역시 12년만이 올해 그간의 침묵정진 속에서 육필로 새겨온 5천여 편의 시 중에서 304편을 묶어낸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로 독자들에게 돌아왔다.
그의 시중에 읽으면서 마음에 와 닿아 노트에 적어둔 시 몇편을 올려본다.
<들어라 스무 살에-박노해>
반항아가 살지 않는 가슴은
젊음이 아니다
탐험가가 살지 않는 가슴은
젊음이 아니다
시인이 살지 않는 가슴은
젊음이 아니다
너는 지금 인류가 부러워하는
스무 살 청춘이다
스무 살 폐부 속에 투지도 없다면
스무 술 심장 속에 정의도 없다면
스무 살 눈동자에 분노도 없다며
알아채라, 네 젊음은 이미지나가 버렸음을
들어라 스무 살에
혁명가가 살지 않는 가슴은
젊음이 아니다
<후지면 지는 거다-박노해>
불의와 싸울 때는 용감하게 싸워라
적을 타도할 수 없다면
적을 낙후시켜라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다
돈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크기로 이기는 거다
미래의 빛으로 이기는 거다
인간은, 후지면 지는 거다
웃는 나의 적들아
너는 한참 후졌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박노해>
지금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세계 속에는 어둠이 이해할 수 없는
빛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거대한 악이 이해할 수 없는 선이
야만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정신이
패배와 절망이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이
깜박이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
어디를 둘러 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여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
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고 있다면
저들은 총제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아이폰의 뒷면 - 박노해>
스티브 잡스가 재림했다 아이팟을 넘어 아이폰을 들고 아이패드를 끼고
서울역에서 막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옆자리 그녀가 아이폰 삼매경에 빠져 있다
저기요, 한번 만져봐도 되나요 스윽슥 손가락 하나로 세계의 속옷이 벗겨지고 나는 지금 광대한 지구의 달리는 한 점에 앉아 국경 너머 누구와도 한순간에 접속되어 우린 팔로우 팔로우 빛의 파랑새로 지저귀고 내 작은 손바닥 안에 거대한 지구마을이 들어선다
고마워요, 그녀에게 아이폰을 넘겨주다 반짝, 아이폰의 뒷면을 보고 말았다 정교한 주물과 밀링과 선반 쇠 깎기와 절묘한 합금과 광택과 사출 공정을 거친 거울처럼 매끄러운 아이폰의 뒷면
나는 눈을 감고 스윽슥 아이폰 모니터를 벗기고 들어간다 공돌이로 살아온 내 기억의 속살을 아이폰을 생산하는 수많은 하청 노동 현장을
열다섯도 안 된 중국의 소년 소녀들이 침침한 컨베이어 벨트 앞에 못 박혀 하루 15시간씩 고개 숙여 일하고 있다 월급은 고작 50달러
아이폰 속의 반도체와 하드웨어와 모니터를 만드는 가난한 나라 가난한 공돌이 공순이들 필수 보호장비조차 제공받지 못한 채 첨단의 ‘보이지 않는 살인자’인 전자파와 유독한 화학물질과 방사선을 다루며 헥산 중독과 백혈병과 암에 걸려 스마트하게 버려지는 젖은 눈동자들
스윽슥 몸을 벗기고 젊음을 벗기고 세포막을 벗기고 꿈을 벗기고 마침내 무엇에 접속되고 무엇에 다운되는 걸까
심플하게 디자인된 접속 혁명 첨단으로 편리해진 소통의 네트워크 청정 IT 산업 아이폰의 뒷면 글로벌 팔로우 서비스의 뒷면
우리 시대의 영웅이자 구루인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의 뒷면에서 보이지 않는 살인자들의 세계화를 본다
<삼성 블루- 박노해>
오늘을 역사적인 날
글로벌 삼성 회장님이
대한민국 사법부를 접수한 날
법과 정의와 민주주의를 돈으로 사버린 날
자본권력의 힘을 온 세계에 보여준 날
이제 대한민국은 삼성 공화국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회장님으로부터 나온다
이제 삼성 로고 앞에서는
가슴에 손을 얹고 바라보라
국기에 대한 의례처럼
글로벌 삼성에 대해 경례하라
차갑고 푸르게 일그러진 원
그 안에 하얗게 들어박힌
삼성 앞에서는
하얘져
새하얘져
검은 뇌물도
검은 범죄도
법도 언론도 국가도
하얘져
쌔하얘져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
글로벌 삼성 앞에서는
휴대폰도 컴퓨터도 TV도
얇아져 더 얇아져
진실도 정의도 인간성도
그들은 유령처럼 드나들어
법원도 검찰도 청와대도
언론사도 정당도 대학도
마음대로 들어가 바꿔버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버려
삼성전자의 처녀들은 하얀 우주복을 입고
독한 납용액과 1급 발암물질 벤젠과
날카로운 전자파와 방사선을
복숭아빛 발그란 몸으로 빨아들여
모든 것이 하얘져
핏속까지 하얘져
붉은 피톨도 푸른 눈물도
우리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황유미처럼 박지연처럼
하얘져
새하얘져
저 차가운 삼성 블루
일그러진 돈의 원 안에 들어가면
생명도 양심도 영혼도
우리들 살아 있는 미래도
하얘져
쌔하얘져
이미 실패한 20세기 혁명가의 시에는 아직도 20세기의 붉은 피기운이 힘차게 돌고 있다.삼성 블루라는 그이 시에는 삼성이란 거대한 기업앞에 주눅들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게 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히히 낙낙거리며 애플빠를 자처하면서 아이폰을 쓰고 있는 우리에게 그것은 중국 공장의 비 인간적인 하청에서 나오고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해 주고 있는데(실제 아이폰이 나오는 중국 공장에서는 자살하는 노동자가 속출하다는 기사가 여러 번 난적이 있다),아이폰에 열광하는 우리의 뒷통수를 한방 세게 쳐주고 있다.
어찌보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의 시집에는 그 흔한 서문도 발문도 추천사도 없고 유명한 평론가나 언론의 찬사라는 화려함도 없다.오로지 시인이 십년이상 묵묵히 써온 시들만이 책 한가득 있을 뿐이다.일부에선 그를 변절자라고 욕하지만 시인은 ‘혁명은 거기까지’라는 시로 자기의 생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에는 날카로운 사회에 대한 비판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어렸을 때의 모습이나 가족, 친지들의 이야기나 시인이 중1 때 술 마시고 비틀거리는 모습을 그린 시도 있기에 묵직한 시만 읽기에 답답해진 마음의 부담감을 덜어 주고 있다.
그에 명성에 걸맞지 않게 아니 오히려 잊혀졌는지 그의 이번 시집에 대한 반향은 그리 없는 편이지만 혁명가 박노해가 아닌 시인 박노해로서 돌아온 그의 시집은 분명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여겨진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시를 가나다 순이나 아니면 주제별로 묶어주었으면 한결 읽기가 수월했읕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by cas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