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 교감 완역
이순신 지음, 노승석 옮김 / 민음사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난중 일기는 아마도 대한 민국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읽어 보지는 못했을 지라도 아하 그 책하고 이름은 들어봤을 터인데 박정희 전 태통령이 존경한다고 하면서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존경하는 인물 상위권에 항상 거론되는 바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진중 일기임을 아마도 잘 알것이다.

사실 이 책은 이처럼 대한 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책이지만 실제로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은 이는 아마도 매우 드물 것이다.나역시 이 책을 몇번이나 읽었다가 던졌다가 하며 한번에 읽지 못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 충무공의 난중 일기가 일기 어려운 것은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난중 일기가 긴박한 전쟁 중에 주로 쓰이다 보니 초서-그래서 정조시대에 새로 편찬할적에 오자가 많았다고 한다-로 몹시 흘려 문장은 과감한 생략과 단순하다 보니 아무래도 난중 일기를 번역한 이의 한문 해독 실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자구 하나하나의 뜻만 번역하다 보면 아무래도 무미 건조한 글이 될수 밖에 없어 아무튼 읽기가 지루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둘째,이 책은 여고생이 달달한 사랑에 관한 일기가 아니라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전쟁중에 쓴 글이라는 점이다.그러다 보니 우리가 성웅으로 대하는 이순신이 죄를 다스리는 대목들에 있어서 목을 메단다든지 목을 친다든지 혹은 그 목을 전시한다든지 하는 등 현재의 우리가 이해하자 못하는 대목이 많이 나온다.물론 이것은 당시 이순신의 개인 기준이 아니라 조선 시대의 군법등 어느 정도 기준이 있었겠지만 독자가 당시의 군제나 명령체계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를 하지 않고 서는 이해가 어려운 대목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가랑비가 아침내 내렸다. 경상우수사의 회답편지가 새벽에 왔다. 오후에 광양군수와 흥양현감 을 불러 함께 이야기하던 중 모두 분한 마음을 나타냈다. 전라 우수사가 수군을 끌고 와서 같이 약속하고서 방답의 판옥선이 첩입군을 싣고 오는 것을 우수사가 온다고 기뻐하였으나, 군관을 보내어 알아보았다. 그러니 그건 방답의 배였다. 실망하였다. 그러나 조금 뒤에 녹도만호가 보자고 하기에 불러들여 물었더니, 우수사는 오지 않고 왜적은 점점 서울 가까이 다가 가니 통분한 마음 이길 길 없거니와 만약 기회를 늦추다가는 후회해도 소용 없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곧 중위장(이순신)을 불러 내일 새벽에 떠날 것을 약속하고 장계를 고쳤다. 이 날 여도수군 황옥천(黃玉千)이 왜적의 소리를 듣고 달아났다. 자기 집에서 잡아 와서 목을 베어 군중앞에 높이 매달았다.

셋째는 난중 일기가 개인의 주관적 서술이 적힌 400년전 이야기인데가 짧은 내용으로 전쟁의 수행 과정을 주로 적어 놓다보니 일상의 반복들이 딱딱하고 간결한 문체로 기록되어 있어서 솔직히 현재 독자들에게 커다란 흥미를 유발 시킬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1월 초2일 <계해> 맑다.나라의 제삿날(明宗 仁順王后 沈氏의 제삿날)임에도 공무를 보았다. 김인보(金仁甫)와 함께 이야기했다.
1월 초3일 <갑자> 맑다. 동헌(여수시 군자동 진남관 뒷쪽)에 나가 별방군을 점검하고 각 고을과 포구에 공문을 써 보냈다.
1월 초4일 <을축>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1월 초5일 <병인>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1월 초6일 <정묘>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1월 초7일 <무진> 아침에는 맑았다.늦게부터 비와 눈이 번갈아 종일 내렸다. 조카 봉이 아산으로 갔다. 남원에서 전문(箋文: 임금께 바칠 일종의 글월)을 받들고 갈 유생이 들어왔다.
1월 초8일 <기사> 맑다. 객사에 나갔다가 동헌에서 공무를 봤다.
대체로 이런 식이다 보니 아무래도 읽는 흥미가 떨어질수 밖에 없을 것이다.

<거의 7년 모두 이런 공무와 관련된 내용이다 보니 흥미유발의 요소가 부족하다>

이처럼 난중 일기는 참으로 읽기 어렵다보니 의외로 다 읽지 못한다.하지만 꾸욱 참고 읽다 보면 일기속에세 우리가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만 생각한 이순신의 또다른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이순신은 7년의 전쟁기간 동안 전투가 치열할 적이 아니면 난중 일기를 썼다.아마도 일반인중에도 평생에 걸쳐 일기를 쓰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전쟁의 한 가운데 속에서도 일기를 써나간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있다.
난중 일기가 임진년 1월 1일부터 일기가 시작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난중일기』는 왜군의 내침 징후를 간파한 이순신이 진영에서 보고 들은 여러 가지 사건과 문제들을 남기기 위해 7년 동안 의식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이런점에서 그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장비와 같은 영웅 호걸의 장수가 아니라 어쩌면 제갈 공명 같은 매우 철저하고 꼼꼼한 성격의 사람아 아닐까 하고 생각 할수 있게 만든다.이순신이 어떠한 생각으로 일기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난중 일기가 있음으로써 후대의 사람들이 나라를 구하고 장렬히 산화한 이순신 장군의 진 면목을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난중 일기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불패의 신화를 자랑하는 장군으로서의 이순신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다.이순신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절절한 마음을 표현하거나 기이한 꿈을 꾼 것을 적어 두기도 했고, 거의 매일 어머니의 안부를 묻기 위해 사람을 보내서 확인했으며, 돌아가신 형들의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안부를 걱정하는 면이나, 아들 면이 왜구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비보를 듣고도 장수로서 목 놓아 울지 못해 한적한 집을 찾아목놓아 울며 혼자 그 슬픔을 토로했던 면에서 우리는 왜군을 도륙하던 장군의 풍모가 아닌 자식으로써 아버지로써의 이순신의 모습을 새로이 발견하게 된다.

난중 일기는 숱하게 많은 출판사에서 발행한 바 있다.하지만 지금까지의 난중 일기는 오독되거나 미 해독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 있었다고 한다.이에 우리나라 제일의 이순신 연구자로서 이름 높은 노승석 교수가 초고본에서 문맥과 문헌을 참고하여 91건을 바로잡았고, 전서본으로 29건, 『난중일기초』로 3건, 새로 발견된 일기초로는 58건을 교감하여 수정한 (교감 완역) 난중일기를 발행했는데 이 책은 최근의 성과까지 모두 반영한 가장 완전한 판본이라고 한다.

(교감 완역) 난중일기는 단순한 번역 책이 아니라 일종의 연구서 성격이 짙어 가격이 만만치 않지만 노승석 교수가 세심하게 주석을 달아놓아 책을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이순신과 같이 전쟁을 치른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은 선조에게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가 있고,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편지를 쓴바 있는데 이처럼 자손 만대에 자랑할 만한 분의 일기를 집에 모셔놓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난중 일기를 읽기가 버겁다면 칼의 노래를 읽는 것은 어떨지….

by cas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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