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뿌리와 날개(95년 7월호)에 실린 글로 저자는 '이상우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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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추리소설을 쓰는가?
이상우 (한국추리작가협회 회장)
내가 추리소설을 쓴 것은 60년대 후반 어린이 잡지에 아동용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 처음이다. 추리소설은 어린이의 두뇌 계발에 큰 영향을 준다고 추리연구가들은 말한다.
추리소설은 우선 재미가 있으니까 책을 싫어하는 어린이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고, 재미에 몰두해 소설을 읽는 동안 여러 가지 지식과 습관, 그리고 사고하는 능력을 기르게 된다.
추리소설은 어린이들에게 첫째 모험심을 길러 주어 건전하고 도전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둘째, 관찰력을 길러 주어 사물을 보는 예리한 눈을 가지게 된다.
셋째, 추리력을 길러 학습하는 지혜와 논리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한다.
넷째, 범죄를 저지르면 반드시 잡힐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범죄를 없애기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보여주어 건전한 시민 정신을 기르게 한다.
그 외에도 추리소설이 인성 계발에 끼치는 영향은 많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먼저 마음속에 두고 소설을 쓰는 것은 물론 아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는 동안 추리소설만이 가지는 그 특유의 창작 공식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추리소설을 쓰게 된 동기도 물론 이러한 거창한 교육적 취지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62년 군사 정권 초기 나는 필화 사건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재판을 받고 있었다. 그때 형무소(지금의 교도소) 안에서 겪은 비인간적인 비참한 대우는 회상하기도 싫을 정도다. 그런데 그 때 나를 곤경에서 구해준 것이 추리소설이다.
형무소 안에 갇혀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미결수들은 하루가 한달처럼 길고 지겹다. 이 처참한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미결수들은 별별 몸부림을 다 친다. 나는 감방에 처음 들어간 이른바 신입생이었는데, 감방 신입생이란 밖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는 것이 예사다. 감방 안에는 엄격한 서열이 있어서 처음 들어온 신입생은 완전히 짐승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추리소설을 많이 읽은 덕택에 아주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지낼 수 있었다. 무료한 그들이 셜록 홈즈나 아르센 뤼팽 이야기를 듣는 것은 요즘 안방에서 비디오를 보는 것만큼이나 재미있는 일이었다.
처음 며칠 동안 나는 신나는(?) 감방 생활을 했으나, 이야기의 밑천이 떨어지면서부터 푸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들이 모두 잠자는 동안 추리소설을 창작하며 밤을 새웠다. 이튿날 하루 종일 상영(?)할 작품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감방에 한 달쯤 있는 동안 1백여 편의 추리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다.
나중에 무죄로 풀려난 뒤에, 그때 구상한 추리소설 줄거리를 작품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들어 한 편 두 편 쓰다가 보니 그만 추리작가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추리소설을 쓰게 된 것을 지금도 다행으로 생각한다. 추리소설은 서구 문명의 꽃처럼 되어 있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상징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아직 여명기에 있기 때문에 추리소설의 꽃이 필 공간은 얼마든지 있다.
추리소설이 다른 문학 장르보다 대중성이 강한 것은 그 특유한 작법에 있다고 할 것이다. 추리소설의 역사는 1백 50여 년, 우리나라는 60여 년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인류가 개발한 ‘재미있는 이야기’의 공식이 뛰어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이다.
추리작가들이 흔히 독자들로부터 받는 질문 중에는 ‘추리소설 쓰는 사람은 머리가 좋지요?’라는 것이 많다. 그러나 추리작가라고 해서 특별히 아이큐가 네 자리 숫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우로부터 1백 50여년 동안 많은 추리작가나 평론가들이 ‘재미있는 소설’의 공식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이 공식을 알고 있으면 기가 막힌 플롯을 만들 수 있다는 비결을 실은 추리 작법들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 작법은 재미의 원천을 합리성과 논리성에 두고 있다. 논리적으로 딱 떨어지는 일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고개를 끄덕인 이야기의 줄거리를 재미없다고 말할 사람은 없지 않는가? 최근 대학 입시에 이 추리소설의 논리성이 많이 응용된다고 하는데 거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 재미있는, 이른바 ‘추리 기법’으로 작품을 만든다면 아무리 어려운 문학적 테마라도 부드럽게 소화시킬 수 있다. 나는 80년대 중반 이후 사회적인 갈등, 물질문명의 횡포 등 어려운 문제를 소설에서 다루고 싶은 욕심이 많아 이 테마들을 추리소설에 도입해 보았다. 워낙 둔재라 크게 평가를 받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는 긍지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소설의 작법은 일찍이 일본의 저 유명한 거목 마츠모토 세이초(松本淸張)가 사회파 추리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걸작들을 내 놓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방법으로 크게 성공한 작품들이 많다.
추리소설의 작법이란 간단히 몇 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독자들의 재미있는 독서를 위해 극히 간략한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첫째, 추리소설에는 살인 사건이 있어야 한다. 더러는 꼭 살인을 다루어야 하느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으나 가장 극단적인 관심을 끄는 최후의 범죄가 살인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의문(미스터리)을 제기하여 독자가 끝까지 궁금해 못견디게 해야 한다.
셋째는 탐정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같은 사립 탐정이 없는 나라에서는 경찰관이나 기자 등이 이 역할을 한다.
마지막으로 독자가 탄복하는 기묘한 트릭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독자의 무릎을 치게 하기 때문이다.
소설과 재미, 독자를 잃지 않는 소설로 앞으로도 추리소설만한 장르가 있을까?
(뿌리와 날개/199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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