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의 과학소설
올슨 스콧 카드 (Orson Scott Card)
천리안 <멋진 신세계> undifeli
내 일 늘푸른마음 홍인기
다음의 글은 장편소설 <엔더의 게임(Ender's Game)>, <죽은자를 위한 대변인(Speaker for the Dead)>로 Hugo상(1986,87년도)과 Nebula상(1985, 86년도) 을, 중편소설 <눈에는 눈으로(Eye for Eye)>로 Hugo상 (1988년도)을 수상했으며, 으로 논픽션부문 Hugo상 (1991년)을 수상하는 등, 탁월한 작품활동을 벌이고 있는 SF계의 거장 <올슨 스콧 카드(Orson Scott Card)>가 편집한 일련의 단편모음집들 중에서 첫번째로 나온 <불타는 미래(Future on Fire)>에 실린 <서문 (Introduction)>을 번역한 것이다. 이 글에서 그는 Gardner Dozois와 Terry Carr에 버금가는 유능한 편집자로서 1980년대의 SF를 조망하는 한편, SF란 무엇인가에 대한 충격적이리만치 명쾌한 의견을 개진함으로써 단순한 작품모음집을 뛰어넘는 모음집(anthology)의 새로운 전형(prototype)을 제시하고 있다. 역자는 지금껏 읽어본 SF해설류의 글들 중에서 Ursula K. Le Guin의 및
서문과 함께 가장 읽을만한 서문이라고 생각되어 이 자리를 빌어 소개하는 바이다 (Le Guin의 서문도 가능한한 빠른 시일내에 번역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1925년이다. 당신은 의 편집자로서, 싸구려 잡지의 열성적인 기고자로 잘 알려진 루핀 레디(Ruffin Reddy)라는 사람이 막 보내온 원고를 읽 기 시작한다. 확실히 그는 당신에게 작품을 보내오고 있으므로, 그의 현재 처지보다 훨씬 더 좋은 출판시장에 뛰어들 가능성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왜 그가 이따위 이야기를 쓰는 것이 직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당신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그의 이야기는 1943년 독일에서 시작된다. 세계대전에 하사관으로 참전했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치광이 화가가 어떻게 해서 미래의 독일을 지배하게 되는가에 관한 정말로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이다. 이 미치광이는 전세계적인 공황을 틈타 교묘한 수법으로 수상관저로 쳐들어가서는 반대자들을 몽땅 가두고, 독일제국의사당을 불지른 다음, 좌익이 꾸민 일이라고 뒤집어 씌워서는 다음번 선거에서 승리한다. 그 다음 그는 <라인란트>를 점령하고,오스트리아를 독일에 병합하며, 체고슬로바키아를 점령한다. 영국, 프랑스 또는 러시아 는 총 한 번 쏴보지 못한채 당하고 만다! 이 이야기는 1943년까지 그가 유럽 대부분을 손아귀에 넣게 되고, 동맹국 일본은 태평양과 동아시아에 거대한 제 국을 세우며, 화학공장은 수백 만의 유태인들과 집시들, 그리고 그 밖의 '유용하지 않은 사람들'을 학살하는 죽음의 공장이 된다고 묘사하고 있다.
말도 안돼! 누가 이따위 이야기를 믿겠어! 성숙하고 진지한 독일 지도층은 완전히 미쳐버린 이런 작자가 국가기구를 장악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걸. 독일국민은 종족살해행위를 묵인하지 않을거야. 게다가 지금은 1925년이란 말 이야. 경제적으로 피폐하고, 완전히 무장해제 당한 독일이 프랑스 육군이나 영국해군에 다시금 도전한다는 것은 믿을 수 없어.
뭐라구? 레디란 작자는 프랑스가 2주일 만에 점령당할 것이라고 묘사한다구?
"안타깝게도 우리는 당신의 '쉬켈그루버의 제국(Schickelgruber's Reich)'이 우리의 현재 요구조건에 부합되지 않음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퇴짜를 놓는 당신의 편지는 루핀 레디가 요점을 꿰뚫어 보고 있음을 확실히 해 줄 뿐이다. 그러나 -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해서 - 당신은 밑에다가 개인적인 얘기를 끄적인다. "본인은 당신의 글쓰는 스타일이 마음에 듭니다. 당신이 현실 세계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소재에 좀더 기반을 둔 작품을 써보신다면 우리 독자들이 좋아할텐데요."
과학소설가들은 미래를 예측하지는 않는다 - 예측한다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실제사건의 발발은 항상 참말같지 않은 법이다.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이라구? 그레나다를 침공했다며? 러시아 서기장이 군축을 진지하게 제안하다니? 공산주의 중국에 자본주의가? 팩시밀리 기계? 디지탈 오디오가 비닐제품 레코드판을 실제로 대체하고 있다며? 이봐! 정신차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게다가 우리들 대부분은 어떤 식으로든 "미래"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믿지도 않는다. 선택이 있을 뿐이다. 국민의 의지만이 - 때로는 개인의 의지조차 - 바꿀 수 있는 역사의 지레받침대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알지도 못하는 것을 고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안을 제시한다. 우리는 독자들에게 어떤 선택이 가져올 결과인 미래에서 벌어지는 삶의 경험을 제시해 준다. 바로 지금 우리들이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점이 잠재적으로 SF를 사실주의적인 이야기거리 중에서도 가장 현실성 있게 만든다. 우리는 사물이 어떻게 해서 지금과 같은 상태가 되었는지를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사물이 굴러가는 방식 때문에 결국에는 어떻게 결말이 나게 될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SF를 읽는 이유가 그게 다란 말인가?
부분적으로 그렇다. SF는 바보들이 읽는 것이 아니다. 가장 형편없는 SF조차도 격렬한 지적참여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러한 긴장의 대부분은 정의상 SF가 어딘가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사실이라는 데에서 발생한다. 어딘가 이상한 곳. 아직껏 존재하지 않았고, 지금 현재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SF에 첫발을 들여놓기 위해서 독자는 작품 안에 담긴 이정표와 단서들을 이용하여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영역을 지도화함으로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을 상상해내는 급진적인 행위를 수행해야만 한다. 이러한 과정이 SF에는 너무도 중심적인 것이어서 <급진적인 상상(radical imagination)>이라는 행위에 동참하고 싶어하지 않거나 그럴 능력이 없는 독자들은 SF를 읽지 않는다(또는 읽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런 무능력한 독자들이 SF가 자신들에게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모순되게도 그들은 대개 SF가 "너무나도 비현실적" 이어서 "SF"를 싫어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만다.
너무나 슬픈 일이다. 이러한 무능력자들은 현실세계가 현재상황으로만 이루어진다고 생각들 하면서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현재와 다른 미래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또한 일반적으로 미래를 제어하기 위해 현재를 변화시키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불쌍하게도 그들은 언젠가 미래에서 살아가도록 운명지워져 있는 것이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간에 그들은 저 이상하고도 끔찍한 땅으로 끌려들어 가게 될 것이지만, 급진적인 상상행위를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 또는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 전혀 준비를 갖추지 못하게 될 것이다.
SF독자라고 해서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 정확하게 준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들이 정말로 미래를 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무정부상태가 닥쳐왔을 때 죽여없앨 굶주린 이웃이 정확히 얼마나 될까를 궁리해 대면서 음식과 무기를 사재기해대는 생존주의자들(<역자주> survivalists : 전쟁, 재해 등에서 살아남기 위해 대비하는 사람들) 같은 이들 말이다. 그런 수준의 광신적인 행위 - 암울한 미래에 새로운 봉건주의 시대의 기사계급이 되겠다는 거의 종교적인 서약 - 는 SF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그보다 SF독자들은 많은 미래에 대비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놀랄만큼 새로운 현실을 이해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살아온 수 십, 수 백, 수 천의 다른 시간들에 대해서 말이다. 미래가 어떠한 것이든지간에, 그들은 이미 그 과정을 알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에 대한 친숙한 시각과 새로운 질서 사이의 모순을 인식하고, 그러한 모순들로부터 새로운 인과체계를 외삽하며(<역자주> extrapolate : 미지의 사실을 기존의 사실로부터 추정하는 것), 그 이전의 모순을 포용하고 조화시킴으로써 사물의 존재양태에 관한 통찰력을 재구성하고, 새로운 질서 속에서의 자기자신의 역할을 계발하며, 자신의 새로운 역할과 현실의 새로운 통찰력에 의거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모순, 외삽, 재구성, 자기계발, 행동, 이런 것들이야말로 SF독자들에게는 숨쉬는 것만큼이나 친숙한 것들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현실주의자란 말인가? 업다이크(<역자주> John H. Updike(1932- ) : 미국의 소설가)의 독자들인가, 아시모프의 독자들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묘하게도 SF적인 미래에 대한 사고방식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해내고 있는 작품들은 대형서점의 과학/환상소설 코너를 가득채운 장편소설들 속에 있지 않다. 거의 예외없이 각각의 장편소설은 단 한 가지 종류의 미래의 질서를 창조하고 있으며, 모두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에 관해서 독자들이 친숙해질 수 있도록 수백 페이지로 꾸며져 있다. 여러분은 기이하고도 새로운 세계로 보다 쉽게 빠져들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왜냐하면 변화에 익숙해질 시간이 보다 넉넉하기 때문이다.
단편소설의 경우에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5천 내지 1만 단어 내에서는 작가가 독자들에게 보다 많은 힌트와 도움을 줄 수 없게 된다. 때문에 급진적인 상상은 보다 첨예해지고 훨씬 당혹스럽게 느껴지며 좀 더 고통스러운 것이 된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 많은 수의 SF독자들이 단편소설이 너무 어렵고 너무 도전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것이다. 자신을 SF독자라고 여기는 많은 사람들이 그 때문에 SF잡지나 모음집을 결코 읽으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SF작가들 중에서도 새로운 세대가 SF분야를 재혁신시키는 것은 바로 단편소설부문에서이다. 윌리엄 깁슨의 소설 <뉴로맨서(Neuromance)>로 인해 미국의 유행추종자들이 <싸이버펑크(cyberpunk)>라는 말을 알게 되고, 그것을 무의미함으로 왜곡시키기 훨씬 전부터 싸이버펑크는 브루스 스털링(Bruce Sterling), 윌리엄 깁슨, 그리고 류 샤이너(Lew Shiner)와 같은 작가들의 단편소설들 속에 이름도 없이 존재했으며, 루디 루커(Rudy Rucker), 팻 캐디건 (Pat Cadigan), 그리고 미카엘 스완윙(Michael Swanwick)과 같은 유사한 경향을 가진 작가들까지도 점차 포용하게 되었다. 단행본 편집자들이 그러한 작가들의 소설에다가 수천 달러를 쏟아붓는 것이 안전하다고 느끼기 오래 전에, 잡지편집자들은 그들의 독자들을 놀라게 만들고 때로는 격노케하는 그들의 목소리에 기회를 주어왔다. 그리고 잡지독자층 - SF독자들 중에서도 맨 가장자리에 위치한 - 은 이러한 작품들이 말 그대로 혁명적임을 깨닫고 있었다.
사실 싸이버펑크 혁명은 단편소설 독자가 아닌 이들이 진행중임을 알기도 전에 이미 끝나버렸다. 단행본 편집자들이 굉장한 액수의 돈을 거기에다가 기꺼이 쏟아붓는 것 - 제목으로 뽑아올리고, 뒷편에서 모종의 노력을 기울이는 등 - 이 충분히 안전해지자마자 그것을 혁명적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이미 너무나 친숙하고 안전해져 버리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경우에 딱 맞아떨어질 것이다(예외도 있다 - 80년대 중반에 나온 고 테리 카(Terry Carr)의 ACE 특별판과 Pocket 출판사, Arbor House, 그리고 현재는 Morrow에서 나오는 데이빗 하트웰(David Hartwell)의 편집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위험을 감수하는 단행본 편집자란 주머니가 달린 하마처럼 드문 법이다).
싸이버펑크는 대단한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일어난 혁명은 그것만이 아니다. 명쾌한 통찰력(vision)과 힘찬 재능(talent)을 지닌 신예작가들 각자가 모두 작은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신예작가들 대부분은 물론 이 범주에 들지 않는다. 대부분의 신예작가들은 그들 자신의 통찰력과 재능이 자신들로 하여금 작품을 발표하도록 부추기기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 다른 사람의 통찰력과 재능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에 SF분야에 몸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젤라즈니(Robert Zelazny)나 아시모프(I. Asimov) 또는 앤소니(Piers Anthony)나 톨킨(J.R.R. Tolkien)을 너무나 좋아하는 나머지 "꼭 그렇게" 쓰고 싶어했다. 넘쳐나는 <스타트랙(Star Trek)> 시리즈 소설들이야말로 이에 대한 슬픈 증거이다. - 상상해보라! 진 로덴베리(Gene Roddenberry)의 천박하고 공허한 등장인물들이 그토록 흥미를 자아내기에 그들은 시리즈를 더 많이 써대기를 원하고 있다. 자신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급진적으로 상상하는 대신에 그들은 만족스러워하며 스타트랙이라는 닳아빠진 태피스트리(<역자주> tapestry : 색색의 실로 수놓은 벽걸이나 실내 장식용 비단)의 술장식에다가 레이스 조각을 덧붙이고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스타트랙 소설들은 단지 그러한 증상의 한 가지 예에 불과할 뿐이다. 각양각색의 여러 작가들이 자기자신의 생각과 꿈과 경험에 관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독서목록에 관해서 더 많은 것을 말해줄 뿐인 작품들을 양산해내고 있다. J.R.R. 톨킨과 스티븐 킹(Stephen King) 또는 - 요즘에는 - 윌리엄 깁슨과 같은 작가들을 얼마나 더 흉내내야만 그러한 반복에 신물이 나게 될까?
나는 때때로 작가들에 대한 그러한 동기부여(motivation)가 경멸당해야 마땅한 것인지 아니면 존경받아야 마땅한 것인지 의아해 하곤 한다.
어떤 작가는 출간되는 작품을 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아! 나도 이렇게 쓸 수만 있다면! 어디 한 번 해봐야지! 언젠가 나도 이렇게 잘 쓸 수 있을거야!"
또 다른 작가는 같은 작품을 보고서 이렇게말한다. "기껏해야 이 정도야? 이 따위 녀석들이 책을 낼 수 있다면 아무나 다 할 수 있겠다. 나도 할 수 있어!"
내가 너무 빈정거리고 있나보다. 그러나 급진적인 상상을 행동으로 가장 잘 보여줄 수 있을 성 싶은 것은 두번째 부류의 작가 - 앞으로 SF가 마땅히 그러해야 함에 부응하는 SF를 쓸 작가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두번째 부류의 작가가 부정적이어서가 아니다. - 소설을 쓰는 행위는 긍정적이고도 건설적인 행위이다. 가장 부정적인 작품조차도 그러한 작품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긍정적인 것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에 오직 자신의 작품만이 채울 수 있는 빈 자리가 있음을 두번째 부류의 작가가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공정치 못하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가장 사랑받는 스타트랙 소설의 작가조차도 아직은 그 자신 또는 그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를 작품 속에 집어 넣는다. 어떤 의미에서건 변형(transformation)을 가함이 없이 작품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거에 나온 작품에 어느 정도 의지하지 않고 작품을 집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정도의 문제일 뿐이다. 특정 작가가 일궈낸 변형의 종류에 대해서 독자들이 알아차리거나 좋아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동일한 작가가 어떤독자에게는 모방적이라고 비춰지지만 다른 독자에게는 혁명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SF에도 이정표를 세우는 많은 책들이 있다. 그러나 그 책들을 모두 읽는다쳐도, 여러분은 아마도 SF라는 분야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매 10년마다 단편소설이 그러한 이정표를 세워왔다. 심지어 어떤 유명한 SF작가들조차 - 예를 들어 아이작 아시모프와 같은 -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모든 작품들을 단편의 형태로 써내려갔음을 떠올려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아시모프의 로봇소설들은 그의 로봇단편들에서 자라났다. 파운데이션 시리즈는 일련의 단편 소설들로 시작되었으며, 나중에야 책으로 출판되었다. SF계의 가장 중요한 작가들 중 몇사람은 단행본 길이에 해당하는 작품이라고는 단 한 편도 쓰지 않았다. 예를 들어 할란 엘리슨(Harlan Ellison)과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같은 작가들 말이다.
그러나 "보다 짧은 길이"에 관해서 언급할 때에는, 나는 SF가 다른 쟝르의 소설형태와는 달리 길이에 따라 적용되는 규칙에 꼭 들어맞지는 않는다는 점을 지적해야만 하겠다. SF를 독보적으로 만들어주는 특징 - SF의 기이한 환경 (milieu) - 을 창조해내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독자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 지 모르는 상태에서 어떤 SF이야기에 접근한다. 작가에게는 독자에게 이야기 할 시간이 필요하다. 다른 쟝르에 속하는 작가가 여러분을 보다 친숙한 시간적, 공간적 배경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샌프란시스코... 히피족들... 해쉬베리 (<역자주> Hashbury : 마리화나를 만들어내는 대마열매)"나 혹은 "런던...마차...파라솔" 등과 같은 단서들을 생략할 수 있는 반면에, SF작가는 그렇게 손쉬운 지름길을 택할 수 없게 마련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더 많은 설명이 있어야만 한다. 정치학, 심리학, 지질학, 사회학 등 다방면에서의 새로운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모든 작품들이 서로 틀릴 것이고 때문에 모든 작가들은 최소한 몇마디라도 거기에 지면을 할당해야만 한다.
그 결과 단편SF는 대개가 노벨릿뜨(<역자주> novellete : 단편소설중에서도 약 1만단어 내외로 구성된 작품)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최소주의자(<역자주> minimalist : 목표 등을 최소한으로 억제하려는 사람, 또는 구러시아 사회혁명당 내의 온건주의자들로서 최소한의 강령만을 내세울 것을 주장한 사람들) 들이 2천 단어 안팎으로, 사실주의자들이 4천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이야기가 SF로 씌어질 때에는 7천, 8천, 또는 1만 2천 단어까지 늘어난다. 여백을 채우느라 꾸역꾸역 끼워넣기 때문도 아니고, 쓸데 없이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기 때문도 아니다. 기이한 장소에 온 독자들이 좀더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더 오래 걸리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므로 7천 5백 단어 미만의 단편SF를 쓰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일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가가 아주 탁월하던가 아니면 부주의해야만 한다. 즉 좋은 SF작품을 그렇게 간략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정도의 비범하거나, 그게 아니면 천박한 수준의 환경을 고안해 내거나 훌륭한 환경을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무력하게 설명함으로써 이야기 자체가 좋건 나쁘건 간에 전혀 이야기할 가치조차 없게 만들 만큼 부주의해야 한다는 말이다.
노벨릿뜨 정도의 길이 - 7천 5백 ∼ 1만 7천 5백 단어 - 야말로 단편SF에는 최적의 길이이다. 그보다 더 길면 그 작품은 단편소설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되기가 쉽다 - 그러한 작품은 장편소설적인 성격을 갖게 되며, 독자들은 그러한 작품을 다른 식으로 다루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보다 더 짤아지면 무엇인가 좋은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있다손 치더라도 좋은 SF가 되기는 힘들다고 하겠다.
노벨릿뜨 정도의 길이에서 작가는 실험을 할 수가 있다. 정말로 괜찮은 무엇인가를 쓸만한 길이는 되면서도 장편소설을 쓸 정도의 시간과 지면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노벨리뜨가 실패작으로 끝난다고 해도 장편소설이 실패작으로 끝났을 때처럼만큼 손실이 크지는 않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점은 장편소설에서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 - 작품을 써내려가면서 탐험하고 발견하며 꾸며가는, 즉 자신이 잘 해내고 있다는 느낌을 얻기가 힘들다는데 있다. 그러나 노벨릿뜨 정도의 길이에서는 그러한 어려움이 그리 크지 않다. 노벨릿뜨는 전체적인 파악이 가능하다. 명쾌하게 작품을 바라보는 것이, 즉 실험하고 탐구해 나가면서 자신이 정말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기가 보다 쉬운 것이다.
또한 SF단편은 대부분의 신진작가들이 잡지나 모음집에 접근하기 때문에 SF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여기에는 일종의 순환고리현상이 존재한다. 대개 단편소설은 원고료가 박하고 장편의 경우에는 후하기 때문에 단편소설 작가들은 금전적인 압박감에 시달린 나머지 작품의 길이를 늘리려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는 때때로 참담할 정도이다 - 수많은 탁월한 단편작가들의 첫번째 장편소설들이 과장되어 있어서 후일 돌이켜보면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나 역시 자신의 첫번째 장편소설이 더 이상 출판되지 않음을 기쁘게 여기는 사람들 축에 끼어 있으며, 자신의 첫번째 장편소설에 대해서 진혼곡을 불러야만 하는 사람들을 여럿 알고 있다.
그러나 결국에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보다 긴 작품으로 올겨들 간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 나 자신을 포함하여 - 다시 돌아가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장편소설의 길이가 작가에게는 운신하기에 충분한 활동범위를 주기 때문에, 큰 대자로 뻗고서 누울 수도 없는 단편소설양식으로 되돌아가기란 어렵게 된다. 또한 의식적으로 실험을 시도하고 있거나 노벨릿뜨 정도의 길이를 넘어서게 되면 자연스러운 표현이 나오지 않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더 짧은 작품으로 돌아갈 유인이 거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잡지와 모음집 편집자들은 새로운 작가들을 찾아내고 끌어들이며, 그 다음에는 단행본 편집자에게 빼앗기고 만다. 그러면 그들은 처음으로 돌아가서는 다시 새로운 작가들을 찾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한편 SF단행본 편집자들은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단행본 편집자들처럼 이미 판매가 안전하게 보장되는 작품을 사려고 동분서주하곤 한다. 잡지에 자주 등장한 끝에 신진작가가 안전하고도 친숙해진 다음에라도 - 작품이 혁명적이라고들 인정하는 구석이 있다손쳐도 - 그들의 첫번째 장편소설을 고작 2천 내지 3천 달러에 사들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법이다. 그러나 잡지편집자들은 출판할 수 없는 허접쓰레기들과 특이하고 보기 드물게 새로운 목소리들을 구별해내느라 애쓰면서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고 있다.
뛰어난 단편소설 편집자들은 적어도 그 사업에 눌러앉아 있을만큼은 그러한 차이를 구별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SF가 스스로의 불로장생약을 찾아내는 것은 바로 그러한 특이하고도 새로운 목소리들 중에서이다. SF란 분야가 기이함을 절대적으로 요구하는 분야임으로 인해서 엄격한 SF작가들이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환경을 개발해 낼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계속 계발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새로운 자아(selves)이다. 그들의 작품들(장편소설들)이 새로운 배경 아래 펼쳐질 때 조차도 - 때때로 새로운 등장인물을 통하여 - 독자들은 모든 작가들의 일생의 작품 속에서 보다 미묘하지만 피할 수 없는 유형과 유사성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자기자신의 자아를 꾸준히 계발하려고 애쓰는 작가들조차 피상적인 차원에서만 성공할 수 있을 뿐이다. 작가에 게는 어떤 이야기가 다른 방식으로 씌어진다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근본적인 진실은 작가가 결코 알아차릴 수 없는 방식으로 무의식 저편에 감추어진 채 남아있는 것이다.
그 결과 SF분야가 계속 성장하고 변화하기 위해서는 - 영속적으로 기이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 새로운 피를 수혈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대개 신진작가들이 새로운 통찰력을 가져다 주었음을 알아차리지조차 못한다. 모순되게도 몇 안되는 신진작가들만이 그러한 새로운 통찰력을 진실로 뛰어난 작품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경험과 재주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신진작가들이 그러한 기술을 습득하게 될 즈음이면 그들의 통찰력은 대개 더 이상 새롭지 않은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오직 소수의 작가들만이 독자들을 놀랍게 하고 만족시킬 수 있는 재주를 작가생활 초기에 완벽하게 습득해낸다. 그리고 훨씬 더 적은 수의 작가들만이 작가생활 내내 동일한 수준의 고도의 지성과 기예를 유지할 수 있다. 위대한 작가들조차도 실족하고마는 것이다. 40 년대, 50년대 또는 60년대까지만해도 최전방에서 활동하던 대가들이 그러나 지금은 최고의 작가대열에 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은 누구인가? SF분야에서 이미 오래된 위대한 인물들이 지난 10년동안 여전히 활동하면서 우수한 작품들을 집필하고 있다 -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SF분야를 신선하게 하고 생기를 불어넣은 일은 해놓지 못한채 딱딱한 형식에 안주해 버렸다. 지난 10년간 그들이 탁월한 작품들에 대한 저작권을 지켜나가고 있을지는 몰라도, 한때 가지고 있던 감수성을 잃은 것이다. 그들의 작품은 1980년대를 대표하는 작품들이 아니다.
훌륭한 작가들 중 몇 사람은 단편소설을 결코 써본 적이 없거나 썼다손 치더라도 현재 더이상의 중요한 단편을 쓰지는 않고 있다. 그들이 SF분야에 계속 기고하고 있기는 하지만, 모음집에 실릴만한 길이의 작품들이 아니다.
그리고 너무나 공허하고 모방적이거나 엉망진창이거나 단순히 어리어리한 작품들을 써대는, 때문에 독자들이나 다른 작가들에게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수많은 신예작가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들은 SF를 재개발하는데 보탬이 되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들은 작법을 습득하거나 10년전부터 자신들이 숭배해 마지 않던 작품들을 다시 베껴내느라고 아직도 바쁜 관계로, 그들중 몇 사람은 분명히 중요한 작품, 독자들을 변모시킬 수 있는 작품을 앞으로 쓰게 될 터이지만, 그들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1980년대의 작가들은 때로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도 우리를 온통 변화시키는 이들이다. 몇사람은 그 와중에 유명해졌지만 - 몇몇은 약간 더 부유해지기도 했다 - 나는 유명도를 놓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훌륭하고 중요한 인물들 중 몇 사람은 아직도 상상히 애매모호한 위치에 놓여있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들은 운좋게도 그 작품들을 읽은 이들의 기억에 생생히 살아있다. 그들이 봉화대 곁에 자리를 잡고 청중이 듣고자하는 바가 무엇이건간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써내려 감으로 인해서 우리의 세계는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지간에 여러분은 독자수를 가지고 작가를 판단해서는 안된다. 많은 작가들의 경우 훌륭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가 적지만, 어떤 작가들은 그들의 통찰력이 너무나 기이하고 도전적이어서 그들의 작품을 읽을 만큼의 위트나 의지가 있는 독자가 별로 많지 않은 관계로 독자가 별로 없기도 하다. 어떤 작가들의 경우에는, 칭찬받고 다독거려 주기를 원하지만 도전받는 것은 싫어하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작품을 쓰기 때문에 많은 독자들을 확보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작가들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그들의 아첨에 신이 나기는 하겠지만 자신을 가득 채우지는 못한다. 또 다른 작가들은 그들의 작품이 너무도 힘차고, 진실되며, 명쾌하게 씌어지기 때문에 그러한 대가(master)에 의해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추억, 바로 자신들의 자아를 찾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작가가 얼마나 많은 독자를 갖고 있는가는 단지 독자에 관한 사항만을 말해줄 뿐이며, 작가 자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얘기해주고 있지 않은 것이다.
<불타는 미래(Future on Fire)>는 앞으로 출판될 일련의 작품모음집 중 첫번째 권으로, 여기에 실린 모든 작품들은 1980년대 "최고의" 작품이라기보다는, 내가 보건대, 80년대의 중요단편소설 작가들에 포함되는 이들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이 나만의 기준에 의거한 것은 아니다. 선정된 작품은 감동적이고, 흥분되며, 믿을만할 뿐만 아니라 명쾌하다는 것을 내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좋은(good) 작품들인 것이다. 대학에서 개설되는 문학강좌의 이수자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다시피, 통계조사에 관한 사회학 보고서만큼의 재미밖에 없는 "주요한" 작품들이 많이 있다. 병약한 어린이들에게 강제로 간유를 먹이듯이 대학생들에게 우리는 그러한 주요작품들을 읽으라고 강요한다. 내 생각에는 약같은 소설은 결코 좋은 소설이 아니다. 만약 여기 실린 작품이 일등급에 속하는 훌륭한 작품이 아니라면, 그 작품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누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여러분은 이 책에서 중요작가들의 작품을 읽게 될 것이다 - 그러나 그들의 중요성에 대해서 골치 썩히며 고민할 필요는 없다. 여러분은 여기 실린 작가들이 창조해 낸 세계에서의 삶이 가져다주는 힘과 기쁨을 위하여 읽으면 된다. 여러분은 그들이 여러분을 위해서 마련한 추억을 들이키고는 그들의 철학적 과학적, 그리고 문체적인 혁신일랑은 그냥 미끄러져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면 된다.
그렇게 읽어내려가다 보면 여러분은 자신들이 대가들의 손아귀에 놓여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고, 그런 경우에 여러분은 대개 여기 실린 이런저런 작가에 대해서 이전에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음에 대해서 얼마간 화가 나기도 할 것이다. 이 친구 도대체 어디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거야? 이거야말로 SF에 대해서 내가 항상 바라마지 않던 작품이야! 내가 이런걸 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미처 모르고 있었을 뿐이지! 이러한 이야기꾼들이 중요한 것이다. 그들이 이미 사전에 널리 알려진 문학이론에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작품을 읽어내려가는 동안에 여러분이 바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다른 주의주장이나 타인들이 아닌 바로 당신에게 중요한 것들이기 때문에 정말로 중요성을 갖는 것이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구? 물론 나는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리고 내가 알 수 있으리라고 여기는 모든 것은 그 작품들이 나에게 중요하다는 사실 뿐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 비평가들은 내 의견에 찬동해준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나는 자신이 황야에서 홀로 부르짖는 목소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들을 개인적인 목록으로 - 내가 가장 좋아하는 80년대 작품이라고 -제안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목록을 꾸민다면 다른 종류의 책이 될 것이며 바로 이 책 같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염병할! 나는 여기 실린 작품들 중에서 어떤 작품들은 싫어했다. 그러나 나는 항상 정당한 이유에 의거해서 싫어한 것이다. 그 작품들은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날 생각하게 했다. 날 느끼게 했다. 날 기억하게 했으며, 날 변화시켰다. 그래서 나는 그 작품들이 여러분도 역시 변화시킬 것이라고 감히 믿는 바이다.
내가 누군데 감히 결정을 하는가? 어떻게 내가 감히 어떤 작가가 "주요작가" 라고 말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나머지 작가들을 깡그리 이류로 깎아내릴 수 있는가? 그러나 나는 감히 그렇게 한다. 감히 그렇게 해야만 하기에 - 최소한 누군가가 - 오직 그럴 때에만 보다 현명한 사람들이 나의 선택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고,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나의 통찰력은 보다 명쾌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SF분야의 극소수 평론가들만이 내가 80년대에 읽어내린 단편SF만큼이나 많은 작품들을 읽었기 때문에 나는 감히 그렇게 한다. 몇 안되는 "올해의 최고" 편집자들 - 가드너 도조이스(Gardner Dozois), 아트 새허(Art Saha), 그리고 사망하기 전의 테리 카(Terry Carr) - 만이 있을 뿐이다. 1980년대에 나온 모든 단편소설을 다 읽은 척은 하지 않겠다 - 그러나 지난 10년간 나는 출간되는 거의 모든 작품들을 실제로 읽어왔고, 그런 과정에서 우리의 쟝르를 개발하고 변모시키고 있던 작가들과 친숙해졌다. 비평가로서 나는 리챠드 E.가이스(Richard E. Geis)의 와 그 이후에 내가 만든 부정기잡지인 양측에서 출판인의 입장에 서서 의견을 개진해 왔다. 또한 나는 다른 비평가들이 벌이는 비평활동도 계속 지켜보아왔다.
여기 실린 작가들 중 몇 사람은 나의 친구들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소설을 흠모하게 되고, 즐기게 된 이후에야 그들과 친구가 되었다. 그 작가들 중 대부분은 나와 거의 안면이 없으며, 몇 사람은 내가 쓰는 종류의 소설이나 내가 다른 이들에게 쓰라고 권유하는 종류의 소설에 대해서 상당히 공공연한 적대감을 보이고 있는 이들도 있다. 심지어 몇사람은 이전에 서로가 모두 중요하다고 여기는 문제를 놓고 다툰 적도 있기 때문에, 이 모음집에 실릴 자신들의 작품을 마지못해 보내기도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이 시리즈는 올슨 아저씨의 애독작품 모음집이 결코 아니다. 이 시리즈는 - 내가 이 작가들이나 그들이 대표하는 바를 개인적으로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간에 - 지난 10년동안의 가장 중요한 작가들에 대한 나의 정직한 요약인 셈이다.
이 시리즈가 완성되었을 때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들 중 한 명을 내가 빠뜨리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오히려 여러분이 생판 들어보지도 못한 작가를 포함시키는 경우가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란 바로 여러분이 이 시리즈를 읽고나서도 변하지 않고, 감동받지 않고, 흥미를 느끼지도 않는 일이다. 여기 실린 작가들은 자신들의 상상 속에 살아있는 미래의 불꽃으로부터 돌아왔다 - 그리하여 지금 그 불꽃은 가까이 다가와 여러분 자신을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198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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