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소설의 구조분석에 관하여
On the Structure Analysis of SF
지은이 : Stanislaw Lem
독어 원문 영어 번역: Franz Rottensteiner, Bruce R. Gillespie, R. D. Mullen, Darko Suvin
우리말 옮긴이: 고장원(cmpman@cheil.co.kr)
다음 글은 스타니슬라브 램(어떤 이는 스타니스와프 램이라고도 표기하는데 정확한 폴란드 발음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확히 아시는 분은 제게 메일을 주시길...)의 논문집 <미시세계 Microworld>에서 한 장(章)을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램은 과학소설이 키취문학으로 대접받거나 그 언저리에서 서성이는 현실을 늘 안타깝게 생각해온 폴란드 작가입니다. 그래서 그의 입장은 때론 미국 작가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기도 합니다. 자, 그럼 램의 고뇌를 함께 되짚어가면서 과학소설의 구조를 분석해보도록 하죠.
문학발전의 초기 단계에서는 문학의 다양한 갈래들, 즉 그 유전적인 유형들이 아주 명쾌하게 구분된다. 보다 진전된 단계들로 들어와서야 혼성장르(또는 장르파괴) hybridization 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이질 장르 간의 교배는 늘 금지되고 있어서, '근친상간 금지 incest prohibition' 라 부를만한 문학상의 주요한 규칙, 다시 말해서 유전학적 근친상간에 대한 금기가 존재한다.
문학작품은 일종의 게임으로 여겨져서, 그것이 처음 시작한 규칙들에 입각해 일관성있게 마무리되어야 한다. 게임은 공허해질 수도 있고 뜻깊은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공허한 게임은 단지 내적인 의미론만을 지닐 뿐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게임은 전적으로 그 테두리 안에서 경기하는 대상들 간의 관계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체스판에서, 킹은 그 경기 규칙 안에서는 특정한 의미를 지니지만, 규칙을 벗어나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예를 들어, 이 장기 말은 체스판 너머의 세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문학 게임은 그러한 정도까지 의미론적 진공 semantic vacuum 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문학 게임은 '자연언어 natural language' 를 가지고 하게 되는데, 자연언어는 실제 사물들의 세계에 관한 의미들을 품고 있는 까닭이다. 수학처럼 외계와 전혀 상관없는 의미론을 갖도록 특별히 만들어진 언어만이 공허한 게임이 가능하다.
문학 게임이라면 어떤 것이나 다음 두 부류의 규칙이 있다. 하나는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책을 넘어선 바깥 세상의 의미론적 기능들 semantic functions 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들(리얼리즘)이고, 다른 하나는 경기 진행을 인위적으로라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것들(환타지)이다. 후자의 '환타지' 규칙 fantastic rules 들은 필연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데, 실제세계에서는 일어날 법 하지 않은 사건들을 일어난다고 묘사하는 식이다. 예를 들면 상당히 사실적인 소설에서조차 죽어가는 사람의 생각이 종종 상세하게 묘사되곤 하는데, 죽어가는 사람의 머리 속 생각을 읽어내고 그것을 언어로 다시 만들어내는 일은 불가능하다못해 환상적으로까지 보인다. 그러한 경우에 우리는 단순히 작가와 독자 사이에 하나의 관례 즉 암묵적인 합의를 하고 있는 셈인데,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사실적인 사건발생을 제시하기 위해 비현실적인 수단들(예를 들면 남의 생각을 읽어내기)을 사용하도록 허용해주는 문학 게임의 특정 규칙이다.
문학 게임은 바깥 세상의 의미론적 기능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규칙들이 몇가지 방향을 향한다는 사실로 인해 복잡해진다. 문학 창작물의 주요 유형들은 다양한 존재론들을 암시한다. 그렇다고 해서 고전 동화가 단지 그 자체의 내적 의미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실제 세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실제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동화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신화나 동화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항상 당대 세계의 주민들에게 주어진 운명과 의미론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운명은 신화나 동화의 세계가 사람들에게 존재론적으로 적대적이거나 우호적이지, 결코 중립적이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것은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실제세계와는 다르다. 여기서 말하는 실제세계란 다양한 사물들로 구성되어 있는데다, 별다른 의지가 없고 의미나 메시지 역시 전혀 없으며 우리가 잘되거나 잘못되기를 바라지 않는, 그냥 거기에 있을 뿐인 과정들로 정의된다. 신화나 동화의 세계는 불행이나 행복을 주는 우주로서 건설되었다. 의지없는 세계, 다시 말해서 실제세계가 존재하기에 우리는 그와 다른 신화 / 동화 세계들의 차이점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문학작품들은 동시에 몇가지 의미론적 관계들을 가질 수 있다. 동화의 경우, 그 내적 의미를 실제세계의 존재론적인 자산과의 대비를 통해 이끌어내지만, 악동은 행복하게 살고 착한 부자만 파멸을 맞이하는 마크 트웨인 Mark Twain의 작품들 같은 반(反) 동화 anti-fairy tale 에서는 그 의미가 전형적인 동화의 개념틀을 뒤집어 엎음으로서 달성된다. 다른 말로 하면, 의미론적 관계가 우선적으로 지시하는 바는 꼭 실제세계일 필요가 없으며 대신 유명한 문학적 게임에 대한 유형학 typology 이어도 된다. 게임의 기본규칙은 마아크 트웨인이 했듯이 뒤집힐 수 있으며, 그럼으로서 새로운 세대이자 새로운 규칙틀 그리고 새로운 종류의 문학작품이 창조된다.
20세기에 주류 문학규칙의 진화는 작가에게 새로운 자유를 주는 동시에 새로운 제약을 가했다. 이러한 진화는 사실상 기존 도덕률의 폐기나 다름없다. 일찌기 작가는 하느님과 다를 바 없는 권능을 지니도록 허용되었다. 즉 주인공과 관련된 그 어떠한 것도 작가의 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규칙들은 이미 도스토예프스키와 더불어 타당성을 잃어버렸고 이 세상을 창조한 하느님 같은 전지전능함은 이제 작가 스스로에 의해 금지되었다. 이 새로운 제약들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불완전한 정보에 의지해 행동한다는 점에서 사실적이다. 작가는 이제 우리들 중의 한사람에 불과하다. 그는 더 이상 하느님 행세를 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동시에 그는 반드시 실제세계와 유사할 필요는 없지만 대신 거기에서부터 다양한 일탈들을 보여줄 수 있는 내적 세계들을 창조할 수 있게 허용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일탈들은 현대 작가에게 매우 중요하다. 신화와 동화의 세계도 역시 실제세계로부터 일탈해 있지만, 작가 개인이 그러한 방식을 혼자 창안하지는 않는다. 즉 동화를 집필할 때 작가는 자신이 창안하지 않은 특정 원칙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동화를 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류문학에서 작가는 이제 자신의 개인적이고 사적인 창작물의 유사존재론적 속성 pseudo-ontological qualities 을 그가 묘사하는 세계의 성질로 규정하는 것이 허용된다. 이렇게 묘사된 세계의 실제세계로부터의 온갖 일탈은 반드시 어떤 의미든지 갖게 마련이므로, 그와 같은 모든 일탈의 총합은 하나의 일관된 전략이자 의미론적 의지가 된다.(또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두 종류의 환타지 문학을 갖게 되는데, 하나는 동화와 과학소설에서와 같은 '궁극적인' 환타지 final fantasy 이고 다른 하나는 카프카 Kafka의 경우처럼 '일시적인' 환타지 passing fantasy 이다. 과학소설에서는 대개 지적 능력을 지닌 공룡들이 등장한다고 해서 별다른 숨은 뜻이 있을 리 없다. 대신 그 공룡들은 우리가 동물원의 기린을 보고 감탄하듯 동경하게 되는 존재들일 뿐이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표현상의 의미론적 체계의 부분들이 아니라 단지 경험세계의 부분들로만 의도될 뿐이다. 한편 <변신>에서 의도하는 바는 우리가 인간이 벌레로 변하는 것을 환상적인 경이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카프카가 사물과 그것들의 추악한 변형을 통해 사회심리학적 상황을 묘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세계의 겉모습만이 그처럼 이상한 현상들로 이뤄질 뿐이며, 내부의 핵은 견고한 비환상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이야기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그릴 수 있는가 하면 그 세계를 해석할 수도 있으며(그 세계에 가치를 부여하고 판단하며, 이름을 붙이고 비웃는 등), 또는 대개 위의 두가지 역할을 동시에 하기도 한다.
그 묘사된 세계가 만일 인간에 대해 긍정적이라면 그것은 고전적인 동화의 세계다. 여기서 물리법칙은 윤리학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동화에서는 어느 누구라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물리적인 사고가 일체 일어날 수 없으며, 긍정적인 주인공에게 치명타를 안기지도 않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에게 부정적이라면, 그것은 신화의 세계다. (네 의지대로 해보아라, 그래봤자 너는 여전히 너의 부친을 살해하고 근친상간을 범하는 죄악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할테니까) 또 이도 저도 아니고 중립적이라면, 그것은 실제세계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주류문학의) 사실주의가 당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세계이자, 과학소설 역시 시각은 다소 다르지만 동일한 그 시공연속체 상에서 묘사하는 세계다.
어떤 것을 보여주든지 간에 그것이 원칙상 경험적이고 이성적으로 해명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과학소설의 전제이다. 과학소설에서는 해명할 수 없는 경이로움이나 초월성, 악마 등이 결코 존재할 수 없으며, 일어나는 사건들의 유형도 실제로 일어날 법 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장애물을 마주하게 된다. 즉 사건들의 실제 일어날 법한 유형이란 무슨 뜻인가? 과학소설 작가들은 과학의 전지전능함과 연속체로서의 우주의 무한성을 주장하면서 우리를 속여념기려 든다. 과학소설에서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 눈 앞에서 어떠한 일이든 발생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수학적인 의미에서만 보더라도 사실이 아니다. 물론 수학에서도 어떠한 일이든 일어날 수 야 있지만, 그것은 상당히 다양한 동인들이 무한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학은 내버려두자. 과학소설은 '진정한 과학소설' real science 이 될 수 있는가 하면 '유사과학 소설' pseudo-science 이 될 수도 있다. 과학소설이 카프카의 경우처럼 환타지를 만들어낼 때는 단지 유사과학 소설이 되는데, 이때는 과학소설이 알리고자 하는 내용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어머니 사망, 장례식 월요일"이란 전보 내용과 그 전신 장치의 구조와 기능 사이에는 어떤 유의미하고 총체적인 관계가 있는가? 전혀 없다. 그 장치는 그저 그 메시지를 우리가 송신할 수 있게 해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사람이 벌레로 변하는 예에서처럼 환상적인 자연의 애매모호한 사물들의 의미체계를 지닌 경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치는 사실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전달한다.
적색등을 깜빡이는 대신 건장한 공룡들을 등장시켜서 위기에 직면한 기차를 세우려고 열차 신호를 바꾼다면, 환상적인 사물들을 신호로 이용하는 게 될테지만, 이러한 사물들은 여전히 진실하고 비환상적인 기능을 지닐 것이다. 공룡들이 있고 없고는 진정한 의도나 신호방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살다보면 우리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존재들의 이미지의 도움을 받아 실제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이 있듯이, 문학에서도 우리는 언뜻 보아 불가능해보이는 사건들이나 사물들에 힘입어서 실제문제들을 표현할 수 있다. 과학소설은 그것이 묘사하는 사건이 아예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경우에도, 여전히 의미있고, 사실 알고보면 이성적인 문제들을 지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공간 여행의 사회적 심리학적 정치적 경제적 문제들은 과학소설에서 상당히 현실적으로 그려진다. 거기서 묘사되는 우주선의 기술수준이 영원히 달성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상당히 환상적인 면이 없지는 않지만.
그러나 과학소설 작품 안의 모든 것이 환상적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불가능한 시간여행 패러독스를 지적하기 위해 불가능한 시간여행 장치를 이용할 때처럼, 그 대상들 뿐만 아니라 해당 문제들을 깨달을 기회조차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한 경우, 과학소설은 공허한 게임을 하고 있는 셈이다.
공허한 게임은 감추어진 의미가 전혀 없기에, 그리고 그 어떠한 것도 표현하거나 예측하지 않기에, 그러한 게임은 실제 세계와 전혀 상관이 없으며 그래서 우리를 그저 논리적인 퍼즐이나 패러독스로서, 즉 지적인 묘기로서만 즐겁게 해줄 뿐이다. 그러한 게임의 가치는 익명적인데, 이는 그 게임이 의미론적 관련성을 전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게임은 단지 게임으로서만 가치가 있거나 없을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가 공허한 게임을 평가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단지 그 게임의 형식성을 판별해보면 된다. 공허한 게임은 수많은 규칙을 포함해야 하며, 아울러 우아하고 엄격하며 위트가 있고 예리한데다가 독창적이어야 한다. 그러자니 공허한 게임은 적어도 최소한의 복합성과 내적 일관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말하자면, 그 경기 도중에 경기를 더 쉽게 하도록 규칙을 바꾸는 것은 철저히 금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소설에서 다뤄지는 공허한 게임들의 구십 내지 구십팔 퍼센트는 매우 원시적이고 매개변수가 단 하나 뿐인 매우 소박한 과정이다. 공허한 게임은 거의 항상 단지 한 두가지 규칙에 근거하고 있으며, 대개의 경우 그러한 게임의 창작방법이 되는 것은 뒤집어 보기 규칙 rule of inversion 이다. 그러한 이야기를 쓰려면 한 쌍의 맞물린 개념들의 구성요소들을 뒤집어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 자신들은 인간의 몸이 꽤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외계인의 눈에는 우리가 모두 괴물들로 보일 것이다. 쉐클리 Sheckley의 <당신이야말로 판단기준의 모든 것 All the Things You Are >에서처럼, 인간의 체취는 외계인에게는 독가스나 다름없고 그들이 인간의 피부를 만지자 그들 몸에 수포가 일어난다는 식이다. 우리에게 정상적으로 보이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는 비정상으로 보인다. 쉐클리의 작품들 태반이 이러한 원칙에 입각해 있다. 아주 단순한 종류의 뒤집기로 우연한 착오가 있다. 그러한 착오들은 과학소설에서 매우 환영받는다. 즉 우리 시간대에 속하지 않는 뭔가가 우연히 (시간우편이 잘못 배달되는 바람에) 바로 여기에 출현한다는 식이다.
이러한 뒤집기는 이 세계의 기본 속성을 변화시킬 때에만 흥미진진해진다. 시간 여행 이야기들은 이러한 식으로 창작된다. 즉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속에 되돌릴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다. 한편 지엽적인 뒤집기는 유치하다. (지구에서는 인류가 만물의 영장이지만, 또다른 행성에서는 인류가 지적능력을 갖춘 공룡들의 가축이라든지, 우리의 몸은 원형질로 구성되어 있지만 외계인은 규소로 되어 있다는 따위의 가정들) 지엽적이지 않은 뒤집기만이 흥미로운 결말을 가져올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언어를 의사소통 수단으로 이용한다. 원론적으로 어떤 도구이건 그것은 창안자의 의도에 따라 선용되거나 악용될 수 있다. 그래서 딜레이니 Delany의 <바벨-17 Babel-17 >에서처럼 언어가 노예화 수단으로 쓰일 수 있다는 발상은 세계관과 개념전달 수단이 상호 간에 독립적이라는 가정을 확장시켜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즉, 이 뒤집기의 존재론적 특성 때문에 말이다.
숫처녀의 임신, 0.1초만에 100미터 달리기, 방정식 2 x 2 =7 그리고 스테플던 Stapledon이 가정한 온갖 우주현상에 대한 범신론적 태도: 이것들은 환타지가 되는 4가지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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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상으로는 처녀의 난세포에다 태아를 착상시키는 것이 가능하며, 심지어는 경험상으로 보아도 가능하다. 이러한 조건은 오늘날까지는 아직 겪어보지 않았다해도 장차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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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0.1초만에 100미터를 질주하는 것은 영원히 실현되지 못할 것이다. 그같은 엄청난 재주를 부리자면, 인간의 몸은 더 이상 인간의 살과 피를 가졌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까지 전면 재구성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자연적인 인간이 그처럼 빨리 달릴 수 있다는 전제에 입각한 이야기는 환타지가 되는 것이지 과학소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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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x 2의 결과는 절대 7이 될 수 없다. 이것을 일반화해서 말하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신이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대한 논리적인 증거를 내놓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러한 공리에 입각한 상상력이 풍부한 어떤 문학이 있다면 그것은 환타지이지 과학소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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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플던의 범신론은 일종의 존재론적 가정이다. 그것은 과학적인 맥락에서는 결코 증명될 수 없다. 실험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초월성이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초월적인 것이 아니다. 초월성은 그 정의상 경험적으로 증빙될 수 없으니까 말이다. 경험론에 입각한 하느님은 결코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지식 사이의 경계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위의 모든 조건들이나 그 동일한 순서의 어떤 조건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시물 signal-object 로 쓰인 그와 같은 어떤 조건을 통해 의미론적 성격을 지닌 어떤 내용을 단지 해석하기 위해서만 서술된다면, 위와 같은 분류 논의는 전부 힘을 잃게 된다.
그래서 과학소설에서 기본부터 잘못된 경우는 다양성을 폐기하고 한가지 특징만을 우위에 서게 하는 것이다. 즉 유사과학적인 가설들이나 그 결말들을 위해 신화와 동화를 끌어들이고 염원하는 꿈이나 예언적인 공포 이야기와 접목시키는 일, 얼토당토 않은 것을 합당한 것으로 가정하는 일, 경험론상 실현 불가능한 수단으로 과업을 달성한다는 묘사, 풀 수 없는 문제들이 풀릴 수 있다는 허튼 주장 등이 그러한 예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옛날 옛적의 신화, 동화, 영웅담, 전설, 우화 등이 우주의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로 높이 평가받던 당시의 그러한 절차마저 잘못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아니다. 그것은 시대정신의 소산이다. 암치료제가 없던 시대에 마법은 화학과 동일한 가치가 있다. 둘다 (암을 고치는 데 무용지물이므로) 전혀 쓸모없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동등하다. 그러나 암이 정복되리라는 현실적인 전망이 선다면, 즉시 그 동안의 동등성은 사라질 것이고, 실현가능한 것과 실현불가능한 것은 서로 구분될 것이다. 우리가 바라마지않는 생각과 현실 사이의 간격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이성적인 과학의 존재가 우리로 하여금 당면한 현상을 지배하게 해줄 때 뿐이다. 그러한 지식의 원천이 없을 때는 모든 가설과 신화 그리고 꿈들은 동등해진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이 쌓이기 시작하면, 그것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치할 수 없게 되는데, 이는 그것이 개별 현상들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전반적인 구조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우주여행을 단지 꿈으로만 여기는 시대에는 어떤 기술을 이용한다고 주장하건 간에 별 차이가 없다. 그것이 배, 기구(氣球), 나는 양탄자나 비행접시 중에 어떤 것이든 간에 상관없이 말이다. 그러나 우주여행이 현실이 되는 시대로 들어서면, 그야말로 진정한 방법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줄 만한 것을 더 이상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필요조건들과 제한조건들을 종종 무시하는 과학소설들이 있다. 과학적인 사실들이 모든 타당성을 잃는 수준까지 단순화되지만 않는다면, 그 사실들은 실제세계와는 절대적이고 존재론적으로 다른 세계들 속으로 편입될 것이다. 과학소설은 미래나 외계우주를 그리기 때문에, 과학소설의 세계들은 반드시 실제세계로부터 이탈하게 마련이며, 그것들이 이탈하는 방식들이 과학소설 창작의 핵심이자 의미이다. 그러나 대체로 우리가 보게되는 것은 내일 일어날 일이 아니라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며, 현실이 아니라 동화같은 일이다. 실제세계와 환상적인 세계 간의 차이는 확률적이고 점진적으로 차근차근 일어난다. 그것은 수북한 머리카락이 차차 대머리가 되는 과정과 마찬가지다. 머리카락 백개나 심지어는 천개쯤 빠진다해서 바로 대머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대머리가 되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할 때는 머리카락이 일만개가 빠진 걸까, 일만구백오십개가 빠진 걸까?
이상적인 전체 평균을 대표할만한 사람은 없으므로, '대머리 패러독스' the paradox of the balding head 는 또한 사실적인 소설 realistic fiction 에서도 존재하지만, 이 때 우리는 적어도 하나의 지침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있을 법한 일와 그렇지 않은 일을 분간할 수 있게 해주는 우리 머리 속의 장치다. 미래나 은하제국에 관한 글을 읽다보면 우리는 이러한 지침을 잃어버리게 된다. 과학소설은 독자의 비판 능력을 마비시킴으로서 이득을 본다. 왜냐하면 과학소설이 물리적, 심리적, 사회적, 경제적 또는 인류학적인 사건들을 단순화시킬 때, 그로 인한 왜곡을 즉각적이고 한치의 오차없이 깨닫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읽다가보면 독자는 대개 혼란스러워진 나머지 불만을 품게 된다. 하지만 독자는 그 작품이 나아가야 할 바를 잘 모르고 있으므로, 그는 십중팔구 명쾌하고 예리한 비평의 틀을 짤 수가 없다.
과학소설이 단순히 동화적 허구 이상의 것이라면, 그것은 동화의 세계와 규칙들을 무시할 권리가 있다. 또한 과학소설은 리얼리즘 문학이 아니므로, 사실적인 묘사방법을 무시할 권리 역시 있다. 과학소설의 애매모호한 뿌리는 그것의 존재양식을 수월하게 해주는데, 이는 추측컨대 과학소설이 문학작품들을 통상적으로 판단하는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소설은 비유가 아니다. 하지만 과학소설은 비유가 자신의 과업이라고 보지 않는다. 즉 과학소설과 카프카는 창작의 아주 이질적인 두 갈래다. 과학소설은 사실적이지 않다. 그렇지만 과학소설은 사실적인 문학의 일부가 아니다. 미래? 과학소설 작가들이 미래 예측의 가능성을 얼마나 자주 부인해왔던가! 마침내 과학소설은 21세기의 신화라 불린다. 그러나 신화의 존재론적 특징은 반(反)경험적이며, 기술문명이 신화를 가진다 해도 그 자체가 신화를 구체화할 수는 없다. 신화는 일종의 해석 내지 설명이므로, 우선 설명할 대상을 가져야만 한다. 과학소설은 현대의 신화가 된다 하더라도 도덕률이 폐기된 상태에서 등장하고자 애쓴다.
과학소설에서 질병의 아주 일반적인 증상은 일반문학 서클들의 정서와 과학소설 서클들의 정서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오늘날 현대문학에서는 불확실성, 모든 전통적인 내러티브 기법들에 대한 불신, 신규 창작물에 대한 불만 그리고 새로운 시도와 실험에서 표현을 찾아내려는 대체적인 혼란상이 보인다. 한편, 과학소설에서는 대체적인 만족감과 긍지가 엿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비교 결과는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준다.
내가 보기에, 기술의 진보로 삶의 전영역에 걸쳐 영향을 미치는 위대하고 근본적인 변화들이 생겨나고 지속됨으로서 과학소설은 위기에 몰리게 될 것이며, 이러한 위기는 이미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학소설의 내러티브 구조들은 처음 도입된 이래 계속해서 사용되어온 끝에 경직되고 화석화된 패러다임들이 되어버린 모든 실제 과정들로부터 더욱 더 이탈하리라는 점은 갈수록 명백해질 것이다. 과학소설에는 사회심리학적인 사건들의 매우 복잡한 흐름에 가설을 적용시켜보는 기법이 포함되어 있다. 비록 예전에는 이러한 기법이 웰즈 H. G. Wells를 통해 진가를 발휘한 적이 있었지만, 그러한 방식은 잊혀져 온 끝에 이제는 온데간데 없어져 버렸다. 하지만 이 기법은 다시 배울 수 있다.
과학소설 관계자들 간의 정통과 이단에 관한 논란은 유감스럽게도 별다른 성과가 없는 실정인데, 계속 이렇게 지지부진할까봐 두렵다. 왜냐하면 이치상 새롭고 더 우수하며, 더 세련된 과학소설의 독자가 될만한 사람들이 SF팬들의 인기순위가 아니라 주류문학 독자들의 인기순위에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만일 수준이 매우 높고 아주 세련된 세계문학작품들을 즐겁게 읽어본 적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면(다시 말해서 부지불식 간에 세계명작에 빨려들어가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처럼 가설적이고 존재하지 않는, 굉장히 우수한 과학소설 역시 읽으려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과학소설의 획기적인 개선은 늘 다수 대중 독자들의 방치 아래 놓일 위험이 있다. 작가들이나 독자들이 그렇게 되길 원치 않는다해도, 이 분야에서 긍정적인 변화의 가능성은 적어도 앞으로 몇년 간은 아주 작으며, 사실상 '영'에 가깝다. 이것은 미래학에서 "한 복잡한 경향의 변화" the changing of a complex trend 라 불리는 종류의 현상이 될 것이고, 그러한 변화들은 소수 개인들의 의지와 결단보다는 환경 자체에서 야기된 강력한 요인들이 있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 후기:
걸작 과학소설들조차 그 플롯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중세 문학작품들에서 발견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대단한 신뢰성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 객관적이고 경험적인 측면에서 불가능한 사건들이 비과학소설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해도(7미터 높이의 벽을 뛰어넘는 사나이나 아홉달이 아니라 두달만에 아이를 낳는 여성처럼), 마찬가지로 사변적인 측면에서 불가능한 사건들은 과학소설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디쉬 Disch의 <캠프 집중 Camp Concentration >에 나오는 전혀 불필요한 종말 게임 end-game 처럼) 확실히, 그럴듯함과 그럴듯 하지 않음의 판별은 당신의 비교기준이 일상의 것들일 때가 소설이 가정하는 가설들의 결과를 고려할 때보다 훨씬 더 명쾌하다. 그러나 과학소설에서 그럴듯함과 그럴듯 하지 않음의 판별이 어렵다고는 해도, 그것은 정복될 수 있다. 이 기법은 학습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다. 하지만 선별하는 필터의 결핍이 그에 상응하는 독자평가기준의 결핍을 수반하는 바람에, 과학소설의 바람직한 방향을 위해 작가들에게 가할 압력수단이 전혀 없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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