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힘>의 기관지에서 '세상야사' 코너에 2002년 12월 연재했던 글을 약간 수정했습니다]
1965년 통킹만 사건 이후 베트남전이 한창 진행중이던 1968년 6월, 미국에서 발행된 <인터내셔널 SF>라는 잡지에는 흥미로운 광고가 두 편 실렸습니다.
한쪽 면에는 '우리 서명자 일동은, 미합중국이 베트남에 계속 주둔함으로써 베트남 국민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믿는다'는 제목으로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을 찬성하는 SF 작가들의 서명광고가 실렸습니다. 반대 면에는 '우리는 미합중국의 베트남전 개입을 반대한다'는 서명광고가 마주보며 실렸습니다. 당시 이 광고 두 편을 두고 SF계의 좌우 대결로 보기도 했는데, 처음이자 마지막 SF 작가들의 집단적인 정치적 표현이라는 점에서 흥미를 끕니다. 그리고 당시 서명에 참여했던 작가들은 그 뒤 작품에서도 그 정치적 경향을 거의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합니다.
그 중 참전 진영을 살펴보면 세계 SF 3대 작가 중 1명인 로버트 A. 하인라인이 버티고 있고, <링 월드>의 작가 래리 니븐, 지난번에 하드SF로 언급했던 <중력의 임무>의 할 클레멘트 등이 눈에 띕니다.
반전 진영에는 역시 세계 SF 3대 작가 중 1명인 <로봇>의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가 있고, <블레이드 런너>, <마이너리티 리포트> 등의 원작자 필립 K 딕, <화씨 451도>, <화성 연대기>의 레이 브래드버리, 페미니즘 SF 소설 <어둠의 왼손>으로 유명한 어슈러 K. 르 귄 등이 포진해 있습니다.
참전 진영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로버트 A. 하인라인'입니다. 그는 과학적 엄밀성, 작품 완성도, 대중적 인기 등 뭐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워낙 뛰어난 SF 작가이긴 하지만, 평소에도 그의 작품들은 우익적 경향을 보여주면서 국가주의적이며, 군국주의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우주의 전사(1959, Starship Troopers)>라는 작품은 그런 그의 경향을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게임 <스타 크래프트>의 원형인 영화 <스타쉽 트루퍼스>의 원작 소설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의 소재와 배경은 우주전쟁이지만 미국의 2차 대전과 6.25 참전에 대한 찬양을 담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설 내용을 살펴보면, '군인으로 참가하는 것은 국민의 영광이며, 전쟁에 참가한 자만이 참정권을 부여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던가, 맑스를 비하하는 표현을 여기저기 드러내는데, 군국주의와 반공주의가 만나서 절망의 하모니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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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하인라인의 소설에 대해 1975년 '조 홀드먼'이라는 작가가 <영원한 전쟁(The Forever War)>이라는 소설로 늦게나마 반론을 제출합니다. 하인라인의 전쟁 이데올로기에 맞서 반전을 주제로 하는 이 소설은 <우주의 전사>의 형식과 소재, 배경을 그대로 차용하였음에도 오히려 훨씬 뛰어난 소설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서명광고가 진행될 당시 홀드먼은 베트남전에 참전중이었기 때문에 서명에는 참여하지 못했으나, 파편 100여개가 박히는 중상을 입혔던 베트남전에서 경험한 참혹함과 비인간성, 무의미함을 소설 속에 녹여냅니다. 그 해 최고의 SF로 꼽혀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고, 그 뒤에 시리즈로 발표한 <영원한 자유>, <영원한 평화> 등을 통해 현재도 뛰어난 작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이런배경을 안고 있는 두 소설을 비교하며 읽으면 그 재미가 꽤 쏠쏠합니다.
반전 서명에 참여했던 작가들을 소개하자면, 먼저 하인라인과 마찬가지로 세계 3대 SF 작가 중 한명으로 꼽히는 '아이작 아시모프'부터 소개하는 것인 순서일 것입니다. <로봇> 시리즈로 유명한 아시모프는 다작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생전에 500여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1992년 그가 죽은 뒤에도 그가 채 출판하지 못한 책들이 계속 이어져 나오고 있습니다. 집필 분야도 SF 뿐만 아니라 역사, 신화, 수필, 생물학, 물리학 등 각 분야에 이르고 있는데, 평소에도 늘 대중성을 염두에 두고 쓰는 그의 책들은 다른 SF와 달리 쉽게 읽을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게 초기에 수립해 놓은 몇가지 형식과 원칙들은 아직도 SF에서 교과서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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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 서명 작가 중 한명인 '래이 브래드버리'는 SF계의 시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작가로서 과학적 엄밀성보다는 시적인 문장과 상상력으로 유명한 작가입니다. 시적인 상상력으로 SF를 폭넓게 하고 문학적 성취도를 높이고 있는 작가입니다.
그의 <화씨 451도>는 극우 이데올로기가 판을 치고 매카시 광풍이 몰아치던 1953년에 쓰여진 책입니다. 이 책은 매카시즘이 만들어 낼 세상을 경고하고자 한 것으로 책을 쓰거나 읽는 일이 금지된 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설의 제목인 화씨 451도를 섭씨로 바꾸면 232.7도인데 이는 바로 책이 타기 시작하는 온도라고 합니다. 주인공은 책을 소장하거나 읽는 사람을 색출해서 화염방사기로 그 책들을 불태우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책을 태우는 일에 보람을 느끼지만, 오로지 TV를 통한 집단 최면만 남아 있는 이 세상에 점점 회의를 가지게 되고 어느 날 책을 몰래 숨겨와 읽기 시작하면서 다른 세상을 보게 됩니다. (현재 <화씨 911>이라는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제목은 바로 이 '화씨 451'에서 차용한 제목입니
다. 광고 문구로 '자유가 타는 온도'라고 쓰더군요.)
그의 <화성연대기>는 지구를 망가뜨린 인류가 화성을 다시 '침략'하여 화성의 문화를 파괴하고, 문명을 붕괴시킬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지구인의 화성 탐사를 빗대어 과학만능주의와 천박한 제국주의 속성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여러 단편의 모음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그 서술방법이 아주 독특해서 마치 몽환적인 시집을 읽는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역시 반전 서명에 참여했던 필립 K. 딕은 영화 <블레이드 런너>의 원작자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원작 소설보다 훨씬 유명한 이 영화는 SF 영화계를 그 전과 후로 양분한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뛰어난 영상과 진지한 주제의식으로 인간의 정체성을 묻습니다. 이 영화의 원작은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자 양의 꿈을 꾸는가>라는 제목의 소설이었습니다. 영화는 원작 소설과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었으나 주제의식을 극대화하고 새로운 해석으로 영화적 변형에 성공하여 SF매니아들도 만족했던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얼마전에 개봉했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마이너리티 리포트>에는 딕을 평소 좋아하던 팬들이 상당히 분노했었습니다. 평소 스필버그 스타일대로 가족주의로 범벅된 영화를 만든 데다, 딕이 제기했던 결정론과 자유의지에 대한 고민은 무뎌지고, 중요한 결말 부분은 오히려 뒤집어지는 등 '액션'을 빼고 나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는 껍데기 영화를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는 딕이 평소에 그의 소설을 통해 끊임없이 제기하던 인간의 정체성,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들을 퇴색시켜 버린 것입니다. 얼마전에 필립 K. 딕의 단편집들이 우리나라에도 출판되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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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평론가들 사이에는 만일 SF 작가 중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면 당연히 '어슐러 K. 르 귄'이 첫번째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퍼져있습니다. 그 정도로 르 귄의 소설은 SF계 뿐만 아니라 일반 문학계에서도 그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는데, 그의 소설은 SF와 판타지 소설을 반반씩 섞은 듯한 독특한 형태를 보여줍니다.
그의 소설 중 가장 유명한 <어둠의 왼손>은 SF계에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제시했고, 페미니즘 계열에는 새로운 형식의 소설을 소개했습니다. <어둠의 왼손>은 양성 생식을 하면서도 평소에는 남녀 양성의 구분이 없는 별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들은 26-8일을 주기로 해서 21-2일은 아무런 성도 아닌 상태로 지내다가, 나머지 기간인 5-7일 정도를 남녀 중 하나의 성으로 변해서 관계를 갖게 되는 특이한 우주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부부 관계와 비슷하게 지내기도 하는 이들은 성관계시 그 역할이 자주 변하기 때문에 부부 둘 다 출산 경험이 있는 경우도 있어서, 사회적으로 '성역할'이나 '성정체성'이 사라진 이상을 보여줍니다. 이 별에 외교를 목적으로 찾아간 주인공은 내내 그 성역할에 대한 강박 때문에 상대를 여성으로 대해야할지 남성으로 대해야할지 한동안 혼란스러워 하지만, 곧 '그'도 '그녀'도 아닌 하나의 인간으로서 상대방을 대하는 방식에 익숙해져갑니다.
르 귄의 소설 중 최근 국내에 소개된 <빼앗긴 자들>이라는 소설은 무조건 꼭 한번 읽어볼 것을 권합니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사회과학 SF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1974년 미국에서 히피들로 대표되는 반체제 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에 발표된 소설로서 당시의 시대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한 쪽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행성이고, 다른 행성은 아나키즘적 공산주의가 정착한 행성이 서로 마주보며 돌고 있는 쌍둥이 행성을 배경으로 하는데, 아나키즘적 공산주의 사회에 회의를 느낀 한 물리학자가 반대편 행성으로 가면서 느끼는 여러 가지 모습을 사실감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빼앗긴 자들>을 읽어보면 '사회과학 SF'란 것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느끼실 것입니다.
* 참고 자료
반전, 참전 지지 작가들의 명단 : <영원한 전쟁>,시공사. 강수백 해설 '전쟁의 그늘' 빌림.
+ 이 글에서 언급한 모든 책.
단, 조 홀드먼의 <영원한 자유>, <영원한 평화>는 인터넷의 자료 검색으로 책 내용만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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