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미스테리 하우스의 추리 관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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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는 추리소설이 전혀 중시되지 않는다. 끌로델은 추리소설을 <똥같은 장르>로 치부했다. 아카데미 회원들뿐 아니라 비평가들, 그리고 작가들은 그 장르를 신문소설과 같은 위치에 놓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추리소설은 일종의 인종 차별의 희생물이다. 추리소설은 유색인종이다. 그래서 (일반)문학은 추리소설이 거주할 수 없는 점잖은 구역인 것이다.
사람들이 추리소설을 잡종이나 또는 조금은 기형인 장르라고 생각한다 해서 틀리지는 않다. 사실, 사람들은 그 장르에 어떠한 이름이 주어져야 할지조차도 알지 못한다! 삐에르 베리는 그것을 <수수께끼 이야기 récit de mystère>로 부르기를 제안했다. 어떤 사람들은 또 그것의 영어로 된 이름, 곧 디텍티브 노블 detective novel로 계속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추론행위를 닮았거나(포우의 경우) 아니면 대중소설을 닮은(가보리오 Gaboriau의 경우), 무협소설을 닮았거나(가스통 르루 Gaston Leroux의 경우), 낭만주의 극을 닮은(모리스 르블랑 Maurice Leblanc의 경우), 또한 어떻게 보면 그것과 꼭 같고 어떻게 보면 그것 이상이기도 한 바로 그 빈틈없는 한 판의 장기놀이를 닮은(반 다인 Van Dine의 경우) 그것을 정확히 어떻게 지칭함이 좋을 것인가? 하지만 아주 다양한 그 작품들 사이에는 한 가지 유사 관계가 있음을 사람들은 곧 감득한다. 수수께끼가 곧 추리소설의 특징이다. 그 수수께끼를 설명해주는 추론도 마찬가지로 추리소설의 일부분을 이룬다. 수수께끼와 조사, 바로 그것이 언제나 힘들고 불완전했지만 그 융합이 그럭저럭 추리소설이라 불리는 그 이상한 장르를 탄생시켰던 두 주요 요소다. 하지만 이상한 장르라는 말은 만족스런 말이 되지 못한다. 차라리 <변덕스런> 장르라는 말이 더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수수께끼와 조사는 서로를 배척하는 경향이 있으며, 환상적인 것과 추리적인 것만큼 양립할 수가 없는 것이어서, 추리소설은 항상 한편으로는 엽기소설로 또다른 한편으로는 수수께끼가 사회적 유희로 이끌리기 때문이다. 추리소설은 아주 잘 생존해 오지는 못했다. 단지 정확한 역사적 정황들만이 그 반대적 두 요소(수수께끼와 조사)의 종합을 유발했을 뿐이다. 그래서 또다른 어떤 정황들이 추리소설을 소멸케 하는 것도 또한 가능한 일이다. 18세기의 공포 대중소설에서 유래한 추리소설은 그것의 본질상 스릴러 thriller로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는데, 바로 그 점이 우리가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추리소설이 탄생한 것은 19세기인데, 그것은 더 일찍 생겨날 수는 없었다. 물론 수수께끼에 대한 취향과 과학정신이 최근의 일은 아니다. 레지 메싹은 디텍티브 노블에 대한 자신의 논문에서 고대 그리스인들도 그 두 점에 관심을 쏟았음을 보여주면서 『오이디푸스 왕』이 아마 최초의 추리 이야기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보다 더 큰 오류는 없다. 신화와 질서(체계)는 처음부터 양립할 수 없다. 그 점은 초자연적인 것과 이성이 극도로 싸움질했던 18세기에 더 잘 볼 수 있다. 그 상징적인 예로, 곧 볼테르에 반대하는 까글리오스트로 Cagliostro를 들 수 있다. 그런데 그 싸움은 19세기에도 계속되었다. 과학은 오귀스트 꽁트의 도움으로 실증적이 되어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던 반면 신비학과 마술은 엽기소설을 발생시켰다. 그런데, 추리소설을 태어나게 했던 것은 바로 그 모든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대체로 19세기까지 사람들은 감정과 마음의 직감들에 좌우되기 쉬운 수수께끼 구역, 곧 일종의 사물들의 저편은 이성의 탐구들을 항상 회피할 것이라 생각했다. 삶이 여전히 물질에 속한다고 생각되었던(그리하여 결과적으로 과학에 속한다고 생각되었던) 때부터 모든 형태의 수수께끼는 그 자신의 존재를 상실하고는 일시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외형적인 한 정돈일 뿐인 것이었다. 끌로드 베르나르는 포우를 예고해 주었다. 조사는 대단한 일, 더할 나위 없는 모험, 어두움의 한가운데 빛을 비춰주는 정신의 위업이 되었다. 추리소설이 햇빛을 보기 위해서는 그 조사는 추리로, 그 수수께끼는 한 음모자의 수수께끼가 되는 것으로 충분했다. 마침 비독 Vidocq이 출현했다. 신문소설이 문학에서 새 범주의 독자들의 호감을 얻고 있을 때 경찰도 발전했다. 추리소설의 개화에 유리한 모든 조건들이 결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먼저, 사회적 조건들 : <잡보>가, 다시 말해 일간지(예를 들면, 『리용 통신』)에 의해 기사화된 것과 같은 수수께끼의 범죄(로망스와 기요띤느의 측면을 가진, 연극이 된 참극)가 존재한다. 다음으로, 과학적 조건들 : 흔적과 지문의 연구, 그리고 얼굴의 모양에 따라 마음을 읽는 관상학의 출현 따위가 그것들이다. 독특한 <내용>(곧, 범죄 사건)과 빈틈없는 <형식>(곧, 탐정의 조사), 마지막으로, 연결의 역할을 하는 반모험가이자 반지식인인 탐정. 추리소설은 그렇게 창조되었던 것이다. 추리소설은 상상된 수수께끼와 그 수수께끼를 해명해야 하는 조사를 포함한다. 수수께끼와 조사는 서로를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수수께끼는 불가피하게 어떤 음흉한 사건에 대한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그 수수께끼는 가장 대중적인 문학의 모든 창의성없는 작품들을 낳았다. 조사는 반대로 정신의 가장 귀족적인 능력을 돋보이게 했다. 추리는 항상 체험해 보지 않고 때우기를 바라는 지성의 가장 고매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추리소설은 태어나면서부터 신문소설과 해결이 불확실한 한 문제를 이용해야 했으며, 가장 예민한 주의를 끌면서 신경이 떨리게 해야 했다. 내장적인 동시에 대뇌적인 그 추리소설은 가슴에다 호소할 틈이 없었으며, 우리에게 참된 인물들을 보여줄 틈이 없었다. 이야기와 조사로 이루어진 추리소설은 처음부터 소설이기를 망각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실증적 인식에 대한 집단적이며 (부분적으로) 무의식적인 한 욕망의 문학적 표현이었던 것이다. 사회학적으로 고찰해 볼 때, 추리소설은 처음부터 모든 환상적 힘들에 대항하는 십자군의 상징이다. 확실성이 추리소설을 떠받치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추론이 논쟁에서 이기게 될 그 확실성이 말이다. 아마, 조사가 초기 추리소설의 주요한 부분인 이유도 바로 그것일 것이다. 수수께끼는 멜로드라마의 한 악역처럼 단지 상대역을 하기 위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추리라 불리는 그토록 까다롭고 취약한 데다 위험하기까지 한 그 새도구가 기능하는 것을 보며 싫증을 내지 않는다. 독자들을 열광케 했던 것은 다름 아닌 활동중인 이성의 광경일 뿐이라고만 이해한다면 포우와 코난 도일이 이해했던 것과 같은 추리소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논리는 경이로움을 야기했으며, 추상적이기를 그친 어떤 것이 되었다. 진실의 추구는 그 자체로 한 모험이었다. 요약하면, 탐정이 그의 독자에게 가져다 주었던 것, 그것은 곧 안전과 평온하고 즐겁게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근간의 열광은 뒤팽 Dupin의 추론기술을 발견했던 독자의 감탄이 어떤 것이었던가에 대한 생각을 우리에게 갖게 할 수가 있다.
두 작가 -하지만 매우 상이한 재능을 타고난-, 곧 에드가 포우와 가보리오는 추리소설의 아주 주요한 두 인물(아마추어 탐정 뒤팽과 P.J.의 그 경찰서장)을 창조했다.
에드가 포우와 앵글로 색슨 전통
1841년, 수수께끼적 범죄를 담고 있는 디킨스 Dickens의 소설 『버내비 러지 Barnaby Rudge』가 출판되었다. 에드가 포우는 그 작품의 첫 몇 페이지를 읽고난 뒤 그 수수께끼를 이해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따르게 될 분석 방법을 고찰하여 탐정의 조사에 관한 규칙들과 추리 이야기의 규칙들을 동시에 발견했다. 조사는 반 non모순의 원칙에 근거를 둔다. 필요한 단 하나의 가설을 세우기 위해 모든 불가능한 해결책을 제거한다. 그리고는 그 가설을 확증토록 관찰에 요구한다. 이야기는 조사의 연속적 진행과정을 정확하게 재현한다. 작가는 주제와 직접 관련이 없는 에피소드들은 제거해야 하며, 독자의 유일한 호기심을 이용해야 한다. 그는 끝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다시 말해 명확히 설정된 해결에 기초하여 이야기의 여러 가지 사건들을 상상해야 한다. 그러므로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불합리하지 않거나, 동시에 끔찍하지 않으면 추리소설은 권태로울 위험이 있는 아주 긴 연속된 추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예로, 『모르그가의 살인』을 들 수 있다. 포우는 우리가 지루하지 않게 탐정의 조사를 따라가도록 하기 위해 수수께끼가 우리의 감성과 이성을 몹시 흔들어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대번에 <밀폐된 장소>의 수수께끼를 상상해 냈다. 밀폐된 장소, 그것은 살인자가 들어갈 수 없었던, 하지만 살인을 행했던 보호된 장소, 곧 방위된 장소이다. 밀폐된 장소, 그것은 해결이 불확실한 훌륭한 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연한 스캔들이며 동일 신분 원칙의 실패이며, 마술과 비합리적인 것의 명백한 승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밀폐된 장소, 그것은 또한 분명한 책략, 발생시킬 어떤 효과를 노리는 위조된 무대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소설가의 그토록 치밀하고 재치있는 추론들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를 자문해 볼 수 있다! 그 추론들은 물론 잘 행해져서 완벽하게 효력이 있다! 물론, <진짜> 추론에 관한 문제이다. 다시 말해, 주지의 사실 le connu로부터 미지의 사실 l'inconnu에 이르게 하는 사고의 진행과정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논리란 단지 그 추리소설의 한 측면에 불과할 따름인가? 바로 그 점이 추리작가들이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던 문제이다. 그들은 에드가 포우를 필두로 하여, 현실의 한 수수께끼 -별나게 신비에 싸인 한 잡보- 와 유사한 한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데 힘을 기울인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결말부터 시작하는 데 있으며, 한 수수께끼의 해결에서부터 그 수수께끼의 구체적 사정들로, 해결이 불확실한 문제에서 인물들로 거슬러 올라가는 데 있는 문학적 방법이 역(逆)의 도정을 따라가는 체하는 논리적인 방법과 상반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자신들이 논증을 다루며 근거들을 늘어 놓을 때조차도 끝내 소설을 쓰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어떤 순간에도 자신들이 상상적인 것의 영역을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들이 완전무결한 논리적 창작의 <규칙들>에 복종한다고 생각함으로써 그들은 추리 장르의 <법칙들>을 완전히 알아보지 못했던 것인데, 바로 그 점이 추리소설을 파멸로 몰아넣을 뻔했다.
그 법칙들이 한 세기 동안 추리소설의 현장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의 가장된 데카르트적 측면은 여러 세대의 비평가들과 독자들에게 두 가지 아주 중요한 사실을 숨겼다: 첫째, 추리소설가는 <진짜 탐정>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야기를 써 나가기 전에 그 수수께끼의 해결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독자는 더욱 더 진짜 탐정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저자에 의해 정해진 순서를 따라 자신에게 소개된 사실들과 저자가 미리 그 중요성을 확정지었던 증거들에 바탕을 두고 독서를 하기 때문이다. 작가들과 독자들은 마치 추리물이 하나의 소설이 아니라 진짜 조사인 양 행동했다. 하지만 몇몇 조사들이 실패하는 일이 벌어지는데, 그것은 탐정이 용의자들을 탐지하는 일에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추리소설은 -그것은 근본부터가 하나의 허구물이기 때문인데- 항상 행복한 해결에 이르러야 한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용의자들은 그 정체가 벗겨져야 한다. 달리 말하면, 그들의 성격이 해독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작가들과 독자들은 마치 추리소설의 인물들이 언제나 엄격한 심리적 결정주의에 복종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에드가 포우에 뒤이어서, 그들은 한 인물의 모든 행위들로부터 그 인물의 잠재적 성격을 추론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숙고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사고는 자연만큼 쉽게 읽히게 되어 있다. 원인의 과학이 있는 것처럼 동기의 과학이 있다. 사람들은 뒤팽이 추론을 통하여 그의 한 친구의 일련의 사고를 재구성하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포우와 그의 계승자들은 삶을 재현하고 탐정의 조사의 진실성을 존중하려는 생각을 지닌다. 그런데 이미 그들은 탐정의 조사를 논리적인 동시에 심리적인 한 요술로 교묘하게 대치시켜 버렸다. 포우는 -재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새로운 한 장르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하기도 전에 추리소설의 진부한 표현을 야기했다. 그래서 기교는 조사에서 수수께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수수께끼는 그대로 더 이상 벗어날 수 없을 비현실적인 성격으로 휩싸이게 되었다. 의식하고 있든 그렇지 못하든 모든 추리작가는 공히 해결해야 할 한 문학적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논리가 수수께끼를 파괴하는 것을 막고, 추론이 인물들을 삼켜버리는 것을 막고, 조사가 허구(말하자면 결국 소설)를 파괴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작가들은 수수께끼보다 조사에, 아니면 조사보다 수수께끼에 더 무게를 둠에 따라 아주 두드러진 국가적 기질에 부합하는 두 범주로 나누어진다. 일반적으로 앵글로색슨 추리작가들은 특히 조사의 여러 가지 사건들과 탐정이 놀이를 해야만 하는 일종의 장기 놀이에 흥미를 갖는다. 반대로 프랑스 추리작가들은 추리소설에서 소설적이고 멜로드라마적인 모든 요소(장소, 줄거리, 인물들, 사건의 극적 변화, 줄거리의 새로운 전개들)에 더 민감하다. 포우, 코난도일, 체스터튼에 의해 유명해진 앵글로색슨의 전통과 가보리오, 모리스 르블랑, 심농으로 대표되는 프랑스적 전통이 있다고 말한다 해서 과장된 말은 아닐 것이다. 뒤팽, 셜록 홈즈, 브라운 사제는 이론가, 추론가, 사무가들이며 르꼭 Lecock, 아르센 뤼팽 Arsène Lupin, 매그레 Maigret는 활동가, 직감적인 인물들이다. 앞의 부류의 인물들에게는 기하학적 정신이 있으며, 뒤의 부류의 인물들에게는 섬세함의 정신이 있다. 뒤에 가서 보겠지만, 앵글로색슨 작가들의 추리소설은 크로스워즈 퍼즐의 행위를 향해 발전하는 반면 프랑스 작가들의 추리소설은 오히려 자연주의 소설에 흡수되는 경향을 띠게 될 것이다. 한쪽은 그것이 유희가 되며, 다른 한쪽은 그것이 드라마로 변화한다.
에드가 포우의 계승자가 코난 도일임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1868년에 『월장』을 쓴 윌키 콜린스 Wilkie Collins를 언급하기도 한다. 도로시 세이어스 Dorothy Sayers와 T.S.엘리어트는 이 소설을 그 장르의 모델로 간주한다. 실로 그것은 유사 추리소설의 전형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그 소설은 사랑 이야기와 조사를 서로 혼합하지 않고 병렬적으로 배치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비평가들은 도스토예프스키가 1866년에 『죄와 벌』을 출판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하지만 한 소설이 추리소설이기 위해서는 그 소설의 주요 인물들이 살인자와 탐정인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죄와 벌』에는 수수께끼가 없으며 조사는 무엇보다도 심리분석적인 방식이다. 그저 참고로 1844년 『닉 카터의 모험들』의 이야기를 시작했던 존 러셀 코옐 John Russel Coryell과 『뉴욕의 신비』의 저자 리이브 B. Reeve에 대해 말해 두겠다.
베이커가에 자신의 박물관을 가지고 있는 셜록 홈즈는 아마추어 탐정, 다시 말해 조사의 거장의 완벽한 전형이다. 악만 살아있는 허약한 그 사람은 하나의 두뇌로 일종의 생각하는 기계이다. 그는 안면의 상습 근육경련으로 단지 인간적인 모습을 보일 뿐이다. 그에 뒤이은 모든 탐정들은 그의 모습을 본떠 사고의 <댄디들>, 추리의 브뤼멜 Brummell들일 것이다. 결국 셜록 홈즈는 몇 가지 외형들에도 불구하고 뒤팽처럼 추론적인 인물이다. 틀림없이 코난 도일은 의학을 공부했다. 그는 선생으로 그 벨 박사를 두었는데, 그 스승의 진단은 명가가 높았었다. 그런데 주지하듯이 진단, 바로 그것은 귀납법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대개 단순한 추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코난 도일이 그의 주인공을 벨 박사의 방식으로 추론하게 했던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로카르 Locard 박사는 -『소설 탐정과 실험실 탐정들』이라는 자신의 그토록 예리한 저서에서- 셜록 홈즈는 항상 그의 사고를 과학적으로 해 나간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시도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코난 도일은 아마 자신도 모르게 먼저 독자를 재미있게 해주거나 놀라게 해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본능적으로 추리가 문학의 방식들 중에서 가장 흥미가 있으며 가장 구경거리가 될 만하다는 사실을 이해했던 것이다.
에드가 포우는 대추론가를 생각해 냈었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이해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열광적인 감명을 경험했던 것이다. 드라마는 여전히 난해했다. 그것은 난삽한 것과 불가해한 것의 경계를 내밀어 넓히는 지성의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코난 도일은 재능이 모자라는 동료를 끊임없이 나무랄 수밖에 없는 한 천재적인 탐정을 창조해냄으로써 추리소설의 성질을 크게 변화시켰다. 물론 추리소설은 언제나 수수께끼와 조사를 가진다. 조사는 항상 수수께끼를 파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이로운 모든 것이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코난 도일은 -자신의 논리의 난무 속에서- 추리소설의 원리 그 자체가 무엇인지를 알아챘다. 그는 논리가 한 예술적 요소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그의 고유의 용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예측했다. 추리소설에서 논리는 중요시되지 말아야 한다. 논리는 재미있게 해주기 위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논리는 수수께끼의 적대자이기는커녕 그 적대자의 공범자이다. 경이로운 것을 창조하고, 그 경이로운 것을 사실임직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그 논리이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진실임에도 아주 뒤에 가서야 그것은 분명히 이해될 것이다.
앵글로색슨 추리소설은 양차 대전 사이에 그 황금기를 맞이한다. 흔히 유행하는 작가들이었을 뿐인 그 시대의 유명한 작가들을 모두 열거하는 일은 진절머리나는 일일 것이다. 그 모든 작가들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작가는 체스터튼 Chesterton이었다. 브라운 사제는 모든 사람에게 성 또마 다껭의 조카손자처럼 순진하고 포동포동하며 경솔한 인물로 기억된다. 그에게는 수수께끼와 거짓말, 그리고 악랄한 흉계는 서로 동의어들이다. 세상이 때때로 퍼즐과 닮은 것은 그 세상이 악마에 의해 <깨진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추론하는 것, 그것은 그저 제자리에 깨진 조각들을 다시 가져다 놓는 일이며, 신의 얼굴과 같은 진실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브라운 사제의 이야기들은 형이상학을, 나아가 사람들이 상상적인 것의 가장 심오한 측면들 가운데 한 측면을 포착하고자 할 때 연구해 보면 큰 흥미를 줄 귀신학을 은폐하고 있다.
이어서 아가사 크리스티 Agatha Christie(『열 개의 작은 흑인 인형』), 엘르리 퀸 Ellery Queen(『흰 구두의 신비』), 도로시 세이어즈(『피터 윔시 경의 모험들』), 존 딕슨 카 John Dickson Carr(『밀폐된 범죄의 전문가』), 프랜시즈 일, 머저리 알링햄 Margery Allingham, 앤토니 버클리, 스탠리 가드너 Stenley Gardner(아주 재치가 있다), 마지막으로 그 모든 작가들을 요약하는 반 다인 Van Dine 등의 이름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가보리오와 프랑스적 전통
발자크 Balzac는 추리소설을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쿠퍼 P.Cooper와 라바떼르 Lavater, 뀌비에 Cuvier를 매우 찬미했었으며, 비상할 정도로 소설적인 것의 감각과 음모의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한 음산한 사건』에서 그는 그 장르에 자신의 흔적을 크게 남길 뻔했다! 하지만 그는 수수께끼와 조사 사이의 필연적 관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영향은 사소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길을 모색하고 있던 프랑스의 추리소설을 자료, 인생의 단면, 위험한 장소들의 묘사쪽으로 아주 확실히 유도했다. 흥미있는 일은 앵글로색슨의 추리소설이 처음부터 범죄를 <징벌할 것을> 생각하는 반면 프랑스의 추리소설은 무엇보다도 그 범죄를 묘사하는 것을 주요한 일로 삼는다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주인공이 신사라면, 다른 한쪽에서는 셜록 홈즈의 경쟁자인 신사 도둑 아르센 뤼팽의 최초의 스케치인 한 회개한 도둑(보트랭)이다.
신문소설 또한 항상 예민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으젠느 쉬, 알렉상드르 뒤마, 뽈 페발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양한 사건들을 담은 기괴한 이야기를 유행시켰으며, 영국인들이 공포물 thriller이라고 지칭했던 것, 곧 전율을 주는 이야기를 그렇게 창작하면서 옛엽기소설을 낭만주의식으로 손질했다.
에밀 가보리오는 발작과 신문소설 사이의 합류점에 위치한다. 발작으로부터 그는 장중함과 거만한 말투 따위를 배웠다. 발자크처럼 그는 사회를 묘사하고 명문가들의 비밀을 밝히고자 한다. 하지만, 『쁘띠 주르날』의 연재소설가인 그는 자신의 독자들의 요구에 진정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거의 읽을 가치가 없게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시인해야 할 것이다.
『르루즈 사건』, 『오르씨발의 범죄』, 『문서 113』, 『목에 거는 줄』 따위의 그의 작품들은 잊혀져 버렸다. 하지만 가보리오는 문학사의 고유한 일원이다. 왜냐하면 아주 막연하지만 그는 추리소설도 다만 상상의 작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는 추리소설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야기되는 한 소설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추리소설을 한 증인을 통해 비춰진 멜로드라마로 만들었던 것이다. 심농 Simenon은 추리소설을 한 탐정에 의해 비춰지는 소설을 만들 것이다. 결국 방식은 동일하다. 바로 그 방식이 추리소설을 일신시켜 준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사는 더 이상 구체적인 세부 사실들(알리바이, 밀폐된 범죄 따위)의 수수께끼적 배열과 관계가 없다. 조사는 인물들을 보여주는 경향으로 간다. 수수께끼는 더 이상 사물들 사이가 아닌 존재들 사이에 있다. 수수께끼는 부분적으로 심리적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수수께끼는 존재조차도 하지 않는다. 수수께끼는 간단한 한 외형으로 국한된다. 인물들은 처음부터 <현실과 꼭같은 상황에> 있으며, 독자는 인물들이 생각하는 것, 또는 숨기는 것 따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의혹 속으로 빠져든다. 탐정의 고유 업무는 외형적으로 보아 부조리한 단서들을 이해하기 쉽게 해주기보다는 인물들의 과거를 밝혀주는 것이다. 이야기에는 안과 겉같은 것들이 있다. 그리하여 탐정은 바로 그 이야기를 뒤집어 제대로 해놓는 그 명민한 증인인 것이다. 가보리오의 방법은 그의 소설들 속에 이미 아주 명확히 나타나 있다. 추리소설의 한 주요 요소인 경이로운 것은 그처럼 희생된다. 범죄자(혹은 범죄자들)는 지나칠 만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수수께끼는 신통치 않거나, 아니면 보기 흔한 것이다. 하지만 소설의 진실성은 고이 간직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그 소설의 진실성이 그가 믿는 바의 것이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추리소설 속에 있는 모호성을 분명히 이해하도록 해야겠다. 추론이 우세함, 그것은 곧 사실임직함을 희생시키는 일인데, 그렇게 되면 소설이 사라진다. 비록 수수께끼가 정말 이성을 꼼짝 못하게 하는 그런 것이 못될지라도 추리소설은 여전히 틀림없는 소설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 매혹적이고 매력적인 힘과 아마도 그것의 가장 독창적인 공헌이 될 그 환상적인 성질을 상실하게 된다. 그 문제를 면밀히 규명하기 위해서, 범죄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두 측면을 보여준다고 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먼저, 그것은 하나의 작업이다(계획, 교묘한 음모, 형벌의 면제에 대한 숙고된 탐구, 바로 거기에서 완전 범죄가 나오는 것이다). 그 때 중요한 것은 ‘ 어떻게(방법)’ 그리고 ‘ 누가(주체)’이다. 둘째로, 그것은 하나의 행위이다(동기들의 중요성, 범죄자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 이 때 중요한 것은 ‘ 왜(이유)’이다. 하지만 작업과 행위는 상호 관련적이다. 사리 사욕이 없는 범죄는 없다. 그런데 추리소설은 범죄와 범죄자에 대해 동시에 흥미를 가질 수는 없는 것 같다. 범죄자가 자신의 범죄(해결이 불확실한 문제)에게 상석을 양보하거나, 아니면 범죄가 범죄자(심리적인 경우)에게 상석을 양보해야 한다. 완전한 추리소설은 실현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모리스 르블랑은 영국의 추리소설과 프랑스 추리소설의 종합을 이루려 시도했다. 그는 신사 도둑 아르센 뤼팽을 창조했다. 코난 도일처럼 그는 모든 흥미를 자신의 인물에 집중시켜 그 인물을 초인간으로 만드는 오류를 범했다. 그것은 단번에 관습과, 독자와 제작된 것에의 양도에 빠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르블랑은 훌륭한 이야기꾼이었다. 뒤마만큼이나 아주 능숙하게 역사적인 수수께끼를 이용하면서(그 예로, 『속이 빈 바늘』), 사르두 Sardou의 그것에 비교되는 연극의 의미와(그 예로, 『크리스탈 마개』, 『아르센 뤼팽의 세 가지 범죄』), 로스탕 Rostand식의 낭만주의적 의미, 그리고 『도둑맞은 편지』의 에드가 포우 작품에서처럼 독창적인 의미를 가지고 그는 참으로 환상과 재치와 사건의 우여곡절로 가득찬 신문소설을 썼던 것이다. 아르센 뤼팽, 그는 곧 르 씨드, 뤼 블라스, 동 쎄사르, 다르따냥, 씨라노, 가브로쉬였던 것이다. 그는 콧수염난 프랑스인으로, 포도주와 결투, 그리고 여자를 좋아하는 1908년의 상쾌하게 우스운 국수주의적 프랑스인이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영국인 라이벌(코난 도일)의 탐정에 비교되는 천재성을 타고난(하지만 더 보헤미안적이며 제멋대로이다), 방법론과 학구적인 열심, 그리고 그 영국인 탐정의 <잘난 체하는 지식인> 측면을 경멸하는 그 셜록 홈즈의 적수이다. 뤼팽, 그는 곧 재치가 넘치는 즉흥곡이며 마지막 순간의 책동이며, 대성공을 이루기 위한 대실패이다. 르블랑은 우리의 민족적 결점을 가지고 돈 주앙의 신화를 새롭게 했다.
그는 추리소설을 발전시켰던가? 물론이다. 그는 낭만주의 시대의 낡아빠진 수수께끼들에 탐정 수수께끼를 대체시킴으로써 무협 신문소설을 일신하는 공적을 세웠다. 그는 현대화된 공포물(스릴러)을 발명했던 것이다. 배경과 인물들이 현대적이다. 도시, 여객선, 화려한 열차, 경주용 자동차들이 은신처, 지하감옥, 저택들, 한마디로 말해 위고 Hugo 이래로 대중문학에 가득찼던 중세의 골동품들을 대치시켰던 것이다. 한마디로, 스릴러는 이제 상투적인 것이기를 그친다. 그것은 혈기가 넘치고 과감하며 현대적이다. 그것은 아주 대담한 모든 탐구에서 상상력을 발휘한다. 그것은 단순하고 자연스런 수단을 사용하여 공포를 주려 시도한다. 그것은 일상적이고 진부한 만큼 더 매혹적인 한 경이로운 것을 사용한다(『해 시계』, 『붉은 목도리』, 그리고 르블랑의 대부분의 소설). 르블랑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추리소설의 특징인 합리적 사고의 진행과 조화하여 상상적인 것의 한 형태를 발견했다. 그(르블랑) 이전에는 조사와 이야기의 소설 내용이 조화를 이루지 못했었다. 문학적인 방법으로 사용된 -의식적이든 아니든, 별 중요하지 않다- 그 추론 속의 새로운 것은 이를테면 소설의 내용 그 자체(감정, 인물, 사회적 관계 따위) 속의 구식의 것에 부딪쳤다. 옛 엽기소설은 기사도소설의 아주 좋지 않은 흔한 이야기들과 플라토닉한 사랑의 너무도 낡은 상투적 문구들, 그리고 미신적이며 하찮은, 특권층에 충실한 경건한 한 세계의 가장 의심스런 편견들을 끌어냈었다. 그로 말미암아 단조로운 줄거리들에 의해 표현되었던 아주 명확한 꿈들이 들어있는 한 집단 무의식이 나오게 된다. 느끼고 보는 그 방식들의 변화, 말하자면 상상의 물매를 변화시키는 것은 시시한 시도가 아니었다. 르블랑은 그러한 변형의 장인이었던 것이다.
르블랑과 심농 사이에는 아무도 찾을 수 없다. 가스통 르루는 『노란 방의 신비』를 씀으로써 주요 인물이 될 뻔했다. 하지만 곧 가장 견디기 힘든 멜로물로 침몰해 버렸다. 여러 다른 작가들이 셜록 홈즈의 광맥을 빈둥빈둥 이용했다. 하지만 추리소설은 조금도 진보하지 않았다. 심농은 (일반) 소설에 추리소설을 병합함으로써, 또한 모호성이 추리소설의 크나큰 법칙임을 인정하기를 거절함으로써 그 추리소설을 위험한 길로 접어들게 했다. 매그레는 이를테면 우연스레 P.J.의 경찰서장일 뿐이다. 그는 또한 의사이기도 하고 변호사이기도 하며 고해 신부이기도 한데, 무엇보다 <영혼의 사색가>인 것이다. 심농에서는 단서들의 선택조차도 계시적이다(몸짓, 말, 시선 따위도 단서가 된다). 독자는 이런 질문만을 제기해야 한다. 곧 <내가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런 몸짓을 할 것인가, 그런 말을 발설할 것인가, 그런 시선을 던질 것인가?> 그래서 그것은 범죄가 독자에 의해서, 말하자면 우리 모두가 침해를 입었던 그런 공통의 정열들 가운데 하나의 희생자인 정상적인 어떠한 사람에 의해서도 범해졌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가정한다. 심농에게 있어서 수수께끼를 푸는 것, 그것은 그러므로 범죄자의 범죄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비극을 유발했던 심리적인 발작을 경험하며 시험적으로 살아보는 것이다. 독자는 살인자를 동정해야 한다. 바로 그 때문에 매그레는 그곳에서 범죄자의 손과 우리의 손을 잡고 있으며, 서로를 무시하고 싶어 했던 그 손들을 서로를 향해 뻗게 한다. 매그레는 특이한 깊이와 확고함과 비중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보잘것 없는 살과 우리의 초라한 인간 의식을 괴롭힐 수 있는 모든 충동들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많은 피와 근육이 필요하다. 매그레는 그로 하여금 장소들과 존재들을 보이지 않게 퍼뜨리는(장소들도 또한 사람들처럼 그것들의 숨겨진 의미, 은연한 의식, 기초 심리 상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발산물을 냄새 맡아 해석하는 일을 가능케 해주는 어떤 한 본능과 아주 유사한 그런 섬세함을 소유하고 있다. 매그레의 역할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범죄자를 책임지는 것이며, 그의 대죄를 은밀히 인수하는 것이다. 범죄는 항상 육체적인 동시에 정신적인 쇠약에서 발생하기에 매그레는 조금은 혈액 증여자로 행동한다. 그는 아픈 곳에 따뜻함과 생기를 불어 넣어준다. 그가 옆에 있는 일만이 유일하게 인물들의 활력을 변화시킨다. 그들은 진정되고 부드러워져 정상적인 개인들로 다시 돌아간다. 그들이 변화해감에 따라 범죄는 그들로부터 분리되고, 심각성이 감소하며, 동물적인 성질이 사라진다. 매그레는 일언반구도 없이 불길한 방사물들을 흡수하여 중성화시킨다. 마침내 살인자는 자신의 범죄에 대해 입을 연다. 그는 매그레가 이번에는 그 살인을 범하고 체험했으며, 흉내내고 속죄했다고 느낀다. 솔직히 고백이 터져 나올 수 있다. 매그레 덕택에 살인자는 인간 사회로부터 파문을 당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추리소설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추리소설은 끔찍할 수도 있다. 그는 전혀 심각하지 않다. 항상 어떤 완곡한 수단을 통해 그는 우리의 기분을 전환시켜 주려 생각한다. 심농은 인간의 어떤 <진실>을, 인간 존재의 어떤 드라마를 표현하려고 애쓰나 삶 속에서의 근거가 빈약하다. 그가 추리소설의 기교를 준수할 때조차도 그는 (일반) 소설가로서 보고 느끼고 집필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경이로운 것>을 인간적인 것으로 대치한다. 그러니 그것은 곧 그 장르(추리소설)의 사망인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추리 장르의 정확한 성질은 무엇이며, 대법칙들은 어떤 것들인가? 추리소설은 정의내려질 수 있는가?
경이로운 것
상상의 문학은 보상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 상상의 문학은 이성의 정복들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위태롭게 되는 이상함에 대한 권리를 보전한다. 여기에서 상상적인 것의 구조들에 대한 완전한 분석을 시도할 필요가 있을 테지만, 가능하지 못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의 간략한 특징만을 스케치하는 일은 쉬운 일이다. 먼저 상상은 마술적 성질을 띠고 있다. 내가 상상하는 강변, 그 강변에 서있는 포플러 나무는 내게는 진짜 강변에 서있는 진짜 포플러 나무보다 더 진짜 같다. 그 상상의 포플러 나무, 나는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안다. 그것을 창조했던 사람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환영인가? 절대로 그렇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그 덕택에 내가 사물들을 소유하게 되는 인상을 갖는 그 조물주적 힘이다. 그 사물들의 외형을 소유하게 되는 인상을 갖는 것은 내 자신에게 그것들을 대립시키기 때문이며, 그것들의 내적 존재에 관해서는 내가 그것들을 내 마음대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그 이미지들은 나에게서 자양분을 섭취한다. 그것들의 영혼과 생명, 그리고 그것들의 <내부> 등 그 모든 것은 내 자신의 감정들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나는 나의 모든 감수성을 가지고 그 이미지들에 응한다. 그러므로 그 이미지들은 나의 욕망들과 증오들로 가득 찬다. 이미지, 그것은 <주관적인 것-객관적인 것>의 성질을 지닌다. 그 마술에 관한 또다른 정의는 없다.
그러므로 상상은 아주 자연스럽게 신화를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다. 신화들은 이를테면 현실을 교정한다. 현실은 꿈에 의해 관개(灌漑)될 필요가 있다. 인과의 기계적인 상호작용으로 환원된 현실은 허위적이거나 실망을 주는 것 같다. 상상은 결정주의 배후에서 인과관계의 더 유연한 타협, 우리의 가슴 속 열망에 더 부합하는 타협을 가정한다. 세계는 선과 악의 싸움에 의해 지배되는 하나의 모험이 된다. 위험과 공포는 상상의 소설을 낳는다.
수 세기 동안, 모험소설은 전설이나 혹은 몽환극의 외양을 보전했다. 그것은 우리 조상들의 상상이 -증거의 감각으로 가득찬 이성에 의해 제어되지 못하고- 불가능한 것과 금지된 것을 혼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점 경험은 전설적인 것의 영역을 물러가게 했다. 신들은 대지를 황량하게 했다. 하지만 정복해야 할 땅은 남아 있었다. 용사, 중세의 기사가 충성을 맹세한 귀부인, 반역자, 대모험의 영원한 인물들은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들을 닮게 되었다. 이상함 그 자체가 문제시되며, 마술이 의심을 받게 되며, 상상이 그 자신의 창조를 중요시하기를 그쳐야만 하는 때가 도래했다. 그리하여 종말을 고한 것은 <순진한 경이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성의 승리 그 자체는 명철하고 세련된 또다른 한 경이로운 것, 곧 <논리적인 경이로움>을 가능케 했다. 사람들은 분명 지성을 위험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험소설은 추리소설로 변모했다.
실제로, 현대적인 경이로움을 창조한 것은 바로 논리이다. 왜냐하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바로 그 논리이기 때문이다. 만일 상상이 추론을 근거로 삼지 않으면 그것은 전혀 놀라움의 기능이 아닐 것이다. 놀라움은 섬세한 수수께끼 위에서 발휘된다. 놀랄 줄 아는 인간의 모토는 외양을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한 아무 것도 확실한 것이 없다. 안전함은 설명과 관계된다. 그런 의미에서 논리는 하나의 <부적>이다. 논리만이 유일하게 -사람들이 그것을 줄거리에 적용시킬 때- 뜻밖의 놀라움과 위험들을 예기한다. 맨 먼저 이상함을 부추기거나, 그 이상함에 도전하는 것도 바로 그 논리이다. 그 이상함을 더 잘 해소하기 위해 그 이상함을 꾸미는 것도 바로 그 논리이다. 하지만 동시에 논리는 자신이 뒤에 가서 진정시켜야 하는 불안을 부추긴다. 논리는 위협을 예감하며, 자연과 사회가 완전히 고요하고 평화로운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음모들을 발견한다. 논리는 한마디로 말해서, 숨어 있는 의도들을 탐지해 내며, 그렇게 하여 마술을 되살아나게 한다. 왜냐하면 까다롭게 된 이성은 이를테면 불안의 동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적들은 추리소설의 성질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추리소설은 모험소설로부터 인물들, 그리고 선과 악을 대립시키는 근본적인 대결을 보전한다. 그 대결은 모험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추리소설의 심오하고 필연적인 논거이다. 이 사실을 강조하는 일이 중요하다. 곧 탐정과 독자 사이의 대결이 아니라 탐정과 악의 힘 사이의 대결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모험소설로부터, 추리소설은 또한 마술적인 요소를 보전한다. 하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그 요소를 구상함으로써다. 추론은 수수께끼를 만들어 내고 푸는 그 정도의 범위 내에서 허구에 합류한다. 고지식한 모험소설이 독자를 관례적인 배경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획득했던 낯설음을 추리소설은 그 친근한 대상들이 가면을 쓰고 있음을 암시함으로써 더 단순하게, 더 강력하게 성취한다. 그런데 그 암시는 그것을 부과하는 것이 바로 추론인 만큼 더 효력이 있다. 더 이상 이야기의 매혹에 빠지지 않을 수도, 멀찍이 물러나서 볼 수도, 비판 정신에 호소할 수도 없다. 경계를 해야 한다는 것, 집은 범죄자가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문이 꼭 잠겨 있지 않다는 것, 밀폐된 방은 살인자가 들어올 수 있도록 내버려 둘 것이라는 것 따위를 우리에게 입증해 주는 것은 바로 그 비판 정신인데도 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공포에 경탄하는 장본인이 된다. 노련한 한 살인자의 간악한 의지가 신화가 획득할 수 없었던 것(우리의 눈 앞에서 아주 범속한 사물들을 변모시키는 어두운 신성들의 한 놀라운 증식)을 실현시켰다. 펜은 하나의 단검이며 교수형 끈이며 뱀이다. 그리하여 추리소설은 과학이 제거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던, 하지만 과학이 한 방법을 부여했던 우리의 경신(輕信) 덕택으로 심사숙고로부터 공포를, 이해하려는 의지로부터 마술을 생겨나게 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불안은 시적 감흥이 되었다! 과연 우리가 사물들의 내재적 표리부동을 발견하게 될 때 그것들의 순수하고 일상적인 면과 그것들의 비밀스럽고 상징적인 면(예를 들어, 살인자가-사라져-버렸던-로터리인 그 달빛에 젖은 로터리)을 우리는 평소에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던 신선하고 강렬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절대로 세상은 그것이 살인자의 도주를 숨겨주었을 때보다 더 실감이 나지 않으며 더 감동적이지도 않다. 우리의 기억 속에는 아주 조그만 사실일지라도 의미가 있으며 잊혀질 수 없다. 총알이 휙 소리를 내며 무섭게 지나갈 때나 칼이 진동을 할 때 독자가 바라보았던 사물들은 돌연 일종의 한 영원 속에 고착되어 버렸다. 그 사물들과 독자 사이에는 산만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하지만 존재의 가슴 속에 뿌리 내린- 한 서정의 모든 수단들로 소설을 윤택하게 하는 한 소통이 설정되었다. 추리소설은 경이로운 것의 모든 광채로 치장된다. 하지만 그 경이로운 것은 논리적인 본질을 가진다. 추리소설은 그것의 상상적인 기능을 포기하지 않았던, 하지만 이성에 의해 훈련되어, 그 후, 개연성이 있음과 사실임직함의 한계를 인식하게 되는 한 상상력에 적합하다. 마술은 더 이상 방법이 없이 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술은 그 방법의 멜로디일 것이기 때문이다.
추리소설의 법칙들
가장 일반적인 정의들이 가지는 약점은 아마 그것들이 내용 부재의 이야기에도 또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추리소설은 하나의 허구이지 단지 수수께끼만이 아니다. 더욱이 수수께끼와 조사, 혹은 더 나은 표현으로 공포와 논리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사람들이 아연실색하는 것은 추론이 범죄가 불가능했던 점을 확증하기 때문이며, 공포가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훨씬 더 치밀한 추론이 우리를 천천히 그 살인자에게로 데리고 가기 때문이다. 추리소설에서 탐정의 목숨은 한 생각에 투기된다. 논리가 그 투기에서 목숨을 걸지 않는다면 그 논리는 덜 면밀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런 논리는 지루한 산책이 감히 될 것이다. 역으로 목숨이 추론을 보증으로 삼지 않으면 그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들은 어설픈 우연들로 통할 것이다. 하지만 즉시 공포 -곧, 적대적인 세계 속에서 우리의 고립에 대한 의식과 심사숙고에 고유한 불안함과 힘에 대한 격심한 감정에서 태어나는 아주 특별한 성질의 공포- 가 생겨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생각과 목숨으로 서로 굳게 결속된 두 현실을 만드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로부터 이러한 가능한 정의가 나오게 될 것이다. 곧 <추리소설은 추론이 -그 추론이 물론 다시 진정시킬 책임이 있는- 공포를 창조하는 이야기이다.>
공포가 각 페이지마다 출현하지 않으면 그 추리소설은 단지 크로스 워즈 퍼즐에 불과하다. 그런데 공포가 과장되면 우리는 병적인 공포의 심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공포는 절대로 진짜 감정으로 되지 말아야 한다. 비극에서 시구들의 미와 주술적 리듬을 통해 획득된 <카타르시스>가 추리소설에서는 해결의 간결성과 재치를 통해 실현된다. 라신느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하지만 내재화되고 섬세한 데다 지식으로 가득찬 방식으로 고통을 준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훌륭한 추리소설은 우리를 열광시킨다. 하지만 명철하고 재치있게 열광시킨다. 라신느는 우리에게 정열의 비열함이 아닌 정열의 고통을 경험하도록 한다. 진정한 추리소설은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일시적 광기의 정화된 공포, 생존 본능의 격분들의 정화된 공포를 야기시킨다. 그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무한히 뉘앙스를 풍길 수 있는 한 감정이다. 바로 그것이 추리소설이 진정한 한 문학장르인 이유인 것이다. 잘 규정된 예술 수단들을 통해 정화하며, 영혼의 심오한 삶을 나타내는 5-6가지 주요 감정들 가운데 하나를 일종의 한 명료한 투명성까지 야기시키는 작품이면 모두가 문학 장르에 속한다. 경이로운 추리소설은 바로 그러한 한계선상에서 가공적인 것에 대한 감정을 잘 조절하면서 열광시킨다. 그러한 감정은 예를 들면 비극적인 감정보다 더 초라하고 더 평범하다. 그 감정은 자주 통속적인 묘사들과 불쾌하고 진부한 이미지들에 결합된 터뜨리기 쉬운 동물적 힘으로 너무 오염되었다. 하지만 추리소설이 분명 한 문학 장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단언할 권리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감정이 독립되어 길러질 수 있고, 미학적인 즐거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의 유치하거나 병적 형태들이 우리를 속이지 말아야 한다.
추리소설의 법칙들은 그것의 정의에서 유래한다.
1. 추리소설은 공포와 추론 사이에 항상 논리적인 최대의 간결성이 최대의 공포에 부합하도록 알맞게 배합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2. 모험의 주인공은 호감을 주어야 할 뿐 아니라 독자 대신 생각하는 배려를 그 독자로부터 위임받도록 하기 위해 독자가 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해야 한다(추리소설이 일반 소설과 같은 식으로 읽혀야 한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3.탐정에게 제기된 수수께끼는 동시에 증거일 필요가 있다(달리 말해, 추리소설은 일반 소설처럼 창작될 것이다).
4. 추리소설의 문체는 극적인 상황들을 돋보이게 해야 한다(달리 말해, 추리소설은 일반 소설처럼 쓰여질 것이다).
요약하면, 추리소설은 공포의 시일 것이다. 그것은 정묘한 논리적 진행 덕택으로 교묘하게 정돈되고 완곡하게 두려움을 주는 제어된 한 공포물(스릴러)일 것이다.
고전적 추리소설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비평가가 확실하게 의거할 수 있을 모범적인 걸작을 결코 창작해 내지 못했던 게 분명하다. 작가들은 자신들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한 채 유행과 정황에 따라 경험에 의하여 추리소설을 썼다. 제2차 세계대전은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추리소설의 새로운 개념을 생겨나게 한다.
엽기 추리소설
전면전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흔적을 남겼다. 그것은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멸시와 절망의 침울한 미를 가르쳐 주었다. 대중적인 형태의 낭만주의적 엽기소설은 멜로드라마적 방법들로 공포를 발생시키려고 마음먹었다. 비교(秘敎)적 형태의 그것은 신비술로 향했다. 그것은 문학 장르로 성립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 한편으로 그것은 그랑-기뇰의 유혹을 감수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귀신 숭배와 사악한 마술에 의해 유혹되었다. 그것에는 동기화가 결여되어 있었으며, 개연성과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부족했다. 그런데 전쟁은 공포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일상생활은 대단히 위험한 상태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여전히 죽음에 대한 취향에 너무 젖어 있어서 독자의 감수성을 괴롭히기 위해서는 그 일상생활을 성실하게 묘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절망과 증오, 그리고 광신 따위는 옛 엽기소설에 과거에 결여되었던 철학을 부여해 주었다. 작가의 기법 또한 변화되었다. 문장의 미는 2차적인 것이 되었다. 오로지 이미지들의 조립만이 중요하다. 소설은 영화로 제작된다. 이미지는 때리는 것처럼 독자의 살결에 충격을 주어야 한다. 문체는 오로지 효과적인 것만을 목표로 한다. 반복과 서툼과 욕설, 그리고 말의 부적절한 용법 따위를 가진 구어체 문체가 환영을 받을 것이다. 은어가 제1의 위치를 차지했다. 누구나 고대인들이 즐겼던 우주적 대진리에 더 이상 이성이 조화되지 못함을 잘 안다. 이성은 더 이상 재앙을 번식시키기를 끝내지 못하는 무자비한 신념들을 세계에 야기시켰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하찮고 쓸데없는, 얼굴을 찌프리게 하는 것이 되었다. 인간은 -싸르트르가 말했듯이- 잉여다. 로깡땡은 르 시드를 계승했다. 언어는 분해되어 근육과 신경을 상실했다. 그리하여 프라스마와 원초적 혼돈의 점착성만을 보존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동시대의 문학은 그처럼 공포 속에서 새로운 사회를 발생시키려 시도하는 부패해가는 세계의 이미지를 제공해 준다.
물론, 엽기 추리소설은 현금의 소설에서 직접 출현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오늘날의 예술이 근원을 두는 주된 의식의 조류들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반영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자기 나름대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속의 평범한 사람들은 공포 속에서 산다. 그들은 경쟁적인 이데올로기를 가진 두 진영을 본다. 한쪽은 선한 사람들이며 다른 한쪽은 악인들이다. 그들은 맞은 편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누구이든- 무자비한 증오를 보낸다. 그들은 반항적임과 동시에 동의도 하며, 무정부주의자인 동시에 힘에 대한 지지자이며, 가혹한 동시에 고지식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적대자들의 잔인성을 비난하며 그들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을 날을 고대한다. 그들은 타인들에 대해, 그리고 물론 삶 자체에 대해서도 엄청난 복수거리를 가지고 있다고 막연하게 느낀다. 황금기는 후일에 모든 치사스런 인간들이 제거될 때에 도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들이 다 좋은데, 특히 비밀 전쟁의 음험하고 무언의 자극적인 수단들이 적합하다. 그들은 불법 지하운동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다. 그 지하운동가는 추적을 당하지만 자유로운 몸이었다. 그 지하운동가는 자신이 선택한 이름과 추억들과 친구들, 적들과 함께 제로 상태에서 다시 출발했다. 그는 단번에 기계 문명에 의해 짓밟힌 도시인의 오랜 꿈과 영웅적인 탈출, 그리고 모험과 전설로의 도약을 실현했다.
스파이 소설(특히, 피터 셰이니 Peter Cheyney의 소설)은 고전적인 추리소설을 완전히 일신시킨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스파이 소설은 그 당시의 세 가지 주요 문학적 주제(불법 지하운동, 잔인성, 반항)를 자신에게 흡수했다. 그런데 그 세 주제는 고전적 추리소설의 주요한 세 가지 요소(수수께끼, 공포, 심리학)에 일치한다. 불법 지하운동은 수수께끼를 새롭게 하는 데 적합한 것처럼 보였다. 잔인성은 공포의 개념에 매력을 돌려줄 수 있었으며, 반항은 살인자에게 기발한 살인 동기를 제공해 줄 수 있었다. 추리소설의 내용에 엽기소설의 내용을 대체시킴으로써 그것의 구조까지도 변화시킬 수는 없는지 두고 보아야 할 일이었다. 추리소설이 피터 셰이니, 챈들러, 제임즈 H. 체이즈 등의 손에서 엽기소설의 상업화되고 순회적인 형태로 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가장 이름난 작품들을 다시 읽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렇지만, 또다른 관점들에서 보면 엽기 추리소설은 고전적인 추리소설보다 훨씬 더 진짜(일반) 소설과 닮았다. 그 이유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다. 엽기 추리소설은 경이로운 논리를 제거함으로써 고전적인 추리소설의 진정한 문학적 생활권인 대중소설의 폭을 넓혀주었다(민중 사회적 소설의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세련되지 못한 대중소설)고 말할 수 있다. 엽기 추리소설의 상인들은 멜로드라마와 스파이에 관한, 너무도 깊이없는 낭만주의를 추잡스런 정도까지 이용했다. 하지만 몇몇 작가들은 아직 전혀 연구되지 않은 인물들과 장소들을 힘차게 묘사하기도 했다. 그래서 마르셀 뒤아멜에 의해 계획된 그 유명한 엽기 시리즈 Série noire 총서는 가장 나은 작가들과 가장 좋지 못한 작가들을 다 포함한다. 가장 나은 작가들만을 인용해 보면, 호레이스 맥 코이, 제임즈 케인, 리차드 버넷, 테리 스튜어트, 존 애밀러, 루이즈 맬리, 헨더슨-클라크 등일 것이다. 그 장르의 모든 소설은 미국 작가의 것들이거나 아니면 미국식을 모방한 것들이다. 이유가 무엇인가? 아마도 그 장르의 시조인 대쉬엘 하멧 Dashiell Hammett이 감상적이고 비사교적인 탐정을 혐오스런 악당에 대립시킴으로써 대결의 신화와 다시 만나는 그 행동문학의 정확한 형식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탐정과 악당은 현대적으로 개척자와 배신자, (미국 개척 시대의) 서부와 마차의 공격을 환기시킨다. 형식은 새것이지만 주제는 변함이 없다. 그것은 곧 우리의 상상력에 내재한 마니교인 것이다. 그런데 정황들은 대쉬엘 하멧의 폭력을 더 가치있게 했으며, 우리에게 <특공대> 문체를 강요했던 반(半) 보이스카웃 단원들, 반 <낙하산병들>과 같은 오늘날의 그 주인공들과 동시에 가장 비열한 공갈단들을 그토록 야릇하게 낳은 미국의 대집단 도시를 유행하게 했다.
도둑 집단 또한 그들의 시인들을 가지고 있다(시모냉 Simonin의 『현찰에 손대지 마라!』, 르 브르똥 Le Breton의 『남자들의 난투』. 우리는 여기에서 아직도 『레 미제라블』과 『파리의 신비』의 전통 속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방가르드적인 몇 작가는 스릴러와 논리의 엄격성을 어떻게 동시에 보전할 것인가를 자문하게 될 것이다. <서스펜스>가 곧 출현하게 될 것이다.
<서스펜스>
<서스펜스>라는 말은 몇 년 전에 아주 오래된 어떤 것을 가리키기 위해 발명된 단어이다. 왜냐하면 회중을 불안한 상태로 내버려두는 기교는 세상만큼이나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단어는 혼동되어서는 안될 하나의 이야기의 두 측면을 가리킬 수 있다. 먼저, 서술에 고유한 서스펜스가 있다. 서스펜스를 창조하는 것은 바로 문체와 -그러므로- 저작이다. 하기야 작가들은 아주 평범할 수 있는 두렵고 기대되는 사건을 다소 재치있게 이끌어간다. 하지만 주제 그 자체에 기인하는 서스펜스가 있다. 그것을 <발명에 의한> 서스펜스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의 성질을 파악하기란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몇몇 외형적인 것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그것의 개념에 무관하다. 하지만 어쨌든 시간은 부차적이며 별 대수롭지 않게 그것에 연루되어 있을 뿐이다. 이야기의 리듬을 인위적으로 느리게 함으로써, 곧, 기대되는 사건의 출현을 자연스러운 위치보다 더 뒤에까지 연기시키면서 서스펜스를 만드는 일은 독자를 속이지 않는 한 방법, 한 간단한 트릭일 뿐이다. 독자는 자신이 조종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아차리고는 그 허구에 사로잡히기를 그친다. 서스펜스, 그것은 그의 정상적인 귀결이 없이 자기 자신에게로 환원되는 기다림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서스펜스는 독자들이 그 성질을 알 수 없는(그 성질은 아마도 불가지의 것일 게다), 이성에 의해 이해될 수 없게, 그리고 동화될 수 없게 나타날(예를 들면, 『어셔가의 몰락』) 어떤 것에 대한 기다림인 것이다. 그 이야기(『어셔가의 몰락』)를 종결짓는 파국적 결말은 처음부터 두려움을 준다는 것, 하지만 독자들은 어떤 모습으로 그 파국적 결말이 이루어질지 전혀 알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다른 한편으로는, 그 파국적 결말 자체는 자신에 관해 용이하게 할 수 있는 모든 설명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여기에서 기다림은 시간 저편에 있는, 그 표시들이 -어느 정도 모든 과학적 질서의 해석을 경멸하면서- 하지만 그 기다림을 누구러뜨리는 대신 줄곧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자극하고 북돋아주는 그 어떤 것과 떼어 놓을 수가 없다. 진정한 서스펜스는 완료를 용인하지 않는 고통스런 영혼 상태를 낳는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완료라는 것은 모두가 부자연스러울 수 있으며 유감스러울 수 있음을 의식한다. 우리에게 아주 고통을 주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하나의 겉모습일 뿐이며, 수수께끼의 해결은 오로지 인간의 논리에만 속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짐작하도록 하는 한 수수께끼와 우리는 부딪친다. 아마도 사람들은 모든 진정한 수수께끼는 논리적 설명과 동시에 초논리적 métalogique 설명을 용인한다고, 혹은 달리 말하면, 그 모든 수수께끼는 이성적 측면과 환상적 측면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수수께끼가 모든 이성적인 설명을 금할 때 그것이 곧 퇴색한 상태의 환상적 측면이며, 그 수수께끼가 어떤 <초현실>을 향한 모든 탈주를 물리칠 때 그것이 곧 결실없이 추론적이 되어버리는 설명 그 자체인 것이다. 다시 한번 우리는 경이로운 것에 관한 문제에 이르게 되는데, 우리는 그 경이로운 것의 다른 요소들을 더 명확하게 이해하게 된다. 그것(경이로운 것)은 첫째로 이중 해석에 응하는 에피소드들을 포함한다. 하나는 이성적이지만 불완전한 해석이며, 다른 하나는 시적이지만 막연한 해석이다. 그런데 그 두 해석은 다 함께 받아들여질만 하며, 서로에게 자양분을 제공하며, 인간적인 것으로 동시에 이를테면 <실체적인> 것으로 파악된 현실의 모호한 성질에 부합한다. 그 다음, 그것(경이로운 것)은 한 위기, 곧 증명의 한계들을 거의 무너뜨리며 증거를 그 두 세계의 경계에 위치시키는 흉측하고 숨막히는 그 어떤 것의 발현을 가정한다. 마지막으로, 그것(경이로운 것)은 이야기 전체에 한 불길한 그림자를 던지며 음침하고 무시무시한 공포의 가능성들을 확대시키는 파격적 결말을 예상케 한다. 경이로운 것의 감정은 그 때 공포의 감정과 혼합된다. 공포는 -어떤 간접적 수단을 통해- 언제나 성스럽다. 공포는 우리가 형이상학적 질서의 비밀을 어기거나, 가장 깊이 뿌리박은 우리의 확신들뿐 아니라 특히 그 확신들이 우리에게 보장해 주었던 안전을 문제삼는 사물들의 신비로운 배열을 뜻하지 않게 간파하는 것 같을 때 나타난다. 그 때 우리의 영혼은 <불안한 상태에 있게 되며> 마비된 것 같다. 그러므로 서스펜스에 대한 가장 나은 정의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사실임직함과 기묘함이 너무도 대단해서 우리의 영혼이 마비된 것과 빈사 상태에 있는 것 같음을 느끼는 한 이야기>.
이제, 서스펜스를 어떤 이야기에라도 새로운 어떤 활기를 불어넣어줄 수 있는 방법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잘못 알고 있는지를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서스펜스는 <새롭게 하기>의 한 기교가 아니다. 그것은 느끼는 한 방법으로 추리소설의 긴요한 특징을 이룬다.
<서스펜스>와 추리소설
고전적 추리소설에서 항상 수수께끼와 설명이 양립되지 않는 경향이 있었던 것은 탐정이 <현실과 꼭같은 상황에서의>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구세주(절망적인 상황에서 뜻밖에 나타나 다행한 결말을 지어주는 인물)인 그는 설명해 줄 책임이 있는 그 수수께끼의 존재를 믿지 않았으며, 대체적으로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강요했다. 그(탐정) 때문에 우리는 소설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소설의 관객으로 남았었다. 바로 그것이 추리소설은 하나의 유희인 이유이다. 소설, 그것은 하나의 드라마에 대한 한 견해이다. 그러므로 소설가의 모든 재능은 먼저 그에게 전망의 중심으로 이용될 인물을 잘 선택하는 데 있다. 그런데, 탐정은 좋은 인물일 수가 없다. 그는 항상 아주 늦게 드라마가 완성될 때에야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그 드라마의 심오한 동기들에 낯설며, 그 동기들을 재구성하려 시도할 때 망설이며 말한다. 엽기 추리소설은 그 전망의 중심을 변화시켰다. 그것은 자신의 주인공(탐정, 밀정 혹은 깡패)을 한 관계자 -하지만 살인자에게 벌을 주는 임무를 띤 관계자로- 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폭력이 경이로운 것을 파괴했다. 수수께끼와 설명을 어떻게 굳게 연결시킬 수 있을까? 추리소설을 어떻게 장중하고 매혹적인 진짜 소설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중심 인물로 희생자를 선택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서스펜스는 희생자 소설이다. 희생자는 파묻혀서 위협을 당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일종의 함정에 빠져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는 그 함정의 성질을 알지 못한다(독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함정은 천천히 다시 닫혀서 그를 점점 짓누를 것이다. 출구를 찾아보지만 소용없을 것이다. 출구는 없을 것이다. 그는 곰곰히 생각하며 추론해 볼 것이다. 그는 자신이 대상이 되는 그 책략의 소재와 내용을 명확히 알려고 시도할 것이다. 하지만 헛일일 것이다.
소설가는 수수께끼를 매혹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또한 그 수수께끼를 명확한 의식의 장(場)(작가는 그곳에서 자신의 가장 매력적인 참해를 행한다)으로 데려 오기 위해서 추론으로부터 필요한 것만을 보전할 것이다. 그 때 어떠한 문학 장르도 그 정도로 야기시킬 수 없는 한 몽환극이 시작된다. 서스펜스는 비이성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 사이에 미묘한 균형점을 남길 것이다. 그리하여 무고한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죽어갈 것이다. <조금만 더 알았으면! 하지만 난 이해했었는 걸!> 그와 같이, 독자는 그 수수께끼를 사고하는 대신 희생자와 동시에 그것을 체험한다. 그는 희생자처럼 그에게 온통 고통을 주는 그 <문제(수수께끼)>를 감수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이성과 현실의 한계지점까지 데리고 가는 밤의 끝으로의 그 여행에서 마지막까지 그 희생자를 동반한다. 결국, 논리는 여기에서 경이로운 것을 위해 사용되기도 할 뿐 아니라 저해받기도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논리는 조사에서 발휘되지 않는다. 논리는 드라마를 구축하는 데 사용된다. 그것은 완전히 이야기의 깊이 속에 내재해 있다. 그것은 이야기 자체를 -문학적 구조 속에서- 죽이는 한 기계로 변화시킨다. 논리 덕택에 미궁과 미노타우로스는 하나가 될 뿐이다. 달리 말해, 희생자가 모색하는 논리는 음모의 은밀하고 집요한 논리 앞에서 무력하다. 고전적 추리소설에는 한편으로 수수께끼를 야기하는 범죄자의 지성과 다른 한편으로 그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탐정의 지성이 있었다. 서스펜스에서는 사람들이 범죄 후에 위치하는 대신 그 (범죄) 앞에 위치한다. 모든 인물들은 이미 공모에 의해 왜곡된 한 세계 속에서 현실과 꼭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 그처럼 추리소설의 요소들과 엽기소설의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다. 서스펜스는 추리소설로부터 논리를, 엽기소설로부터 고통을 차용한다. 하지만 고통은 더 이상 육체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이성과 운명 사이의 갈등의 결과물인 한 그것은 정신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스펜스는 현대의 공포물(스릴러)이다. 서스펜스는 오로지 상이한 <편집>에 의해서만 고전적 추리소설과 다를 뿐이다. 하지만 실상, 그 상이성은 근본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문학의 본질에 속하기 때문이다.
<공포물(스릴러)>과 문학
고전적 추리소설은 -사람들은 이 점을 과도하게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절대로 진짜 소설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진짜 소설이지도 않았으며, 조금의 문학적 가치도 가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전히 유희와 문제의 측면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가 항상 재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주제의 성질 바로 그것은 문학적이 아니었으며 -크로스 워즈 퍼즐에 이용되는- 가장 훌륭한 문체는 여전히 아크로스티쉬 유희만큼이나 공허한 어떤 것으로 머물러 있었다. 그와 같은 난점에 대해 면밀히 검토하기를 시도했던 프랑스 작가들은 곧 그 순수 추리소설과 결별하게 되었다. 심농의 경우가 그러한데, 삐에르 노르, 삐에르 베리 Pierre Véry, 자크 드크레스 Jacques Decrest, 노엘 뱅드리 등의 이름도 마찬가지로 들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떤 한 명암이 추리소설 속에 보존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논리가 모든 것을 다 설명해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 논리는 사건들에 대해 중심부의 비밀을 다 드러내지 못하고 개연성 있는 한 해석을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 암시와 시사의 무한한 수단들이 추리작가에게 제공된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어떠튼 소설가다. 왜냐하면 진짜 소설은 항상 <긍정>과 <부정> 사이에 위치하기 때문이며, 진실은 항상 사실의 저편이기 때문이다. 추리소설은 소설적임이 부차적인 한 조사이며, 서스펜스는 거의 추리가 부차적인 한 소설이다. 서스펜스는 그의 인물들의 가치만큼의 가치가 나간다. 바로 거기에 서스펜스 작가들이 추리소설의 기계를 모면하는 그 <소실점>이 위치한다. 왜냐하면 포우가 원했듯이 거꾸로 쓰여진 소설은 분명히 모든 것(사건들과 인물들)이 예측되는 엄격한 창작에 순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당황케 하는 한 수수께끼의 이야기를 발생케 하는 대신에 독자에게 극도의 흥미를 부추김과 동시에 인물들에게 유연성을 남겨두기에 적절한, 흔하지 않은 한 상황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유연한 한 추리소설의 출현을 보게 된다. 한 새로운 작가 세대가 그 장르에 참여하는 것 같다. 추리소설은 -몇 년 동안의 서스펜스물과 공포물이 자신에게 가르쳐주었던 것을 잘 보존하면서- <잡보들>을 생각해 내고 삶을 복사하려고 노력한다. 이에 관한 작가들로, 로스 맥도날드, 딕슨, 그리고 특히 두 이태리 작가(푸르테로 Fruttero와 루센티니 Luccentini)를 들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에릭 앰블러 Eric Ambler의 『근동 지방의 사람』에서처럼 오늘날의 추리소설과 규모가 있는 어떤 공포물을 구분짓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 모든 형태의 폭력이 광란하는 한 세계가 곧 스릴러의 특징이라는 사실을 실로 인정하고자 한다면 추리소설이 오늘날 문학의 한복판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인정할 것이다. 추리소설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새롭게 이야기하는 방식의 문학을 더 증식시켜 놓고 사라져 버릴 것인가? 우리의 시대를 근본부터 변화시키는 사회 변화들의 압박을 받아 그것은 다시 변화되어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모습을 띨 것이라고 믿는 것이 더 그럴 듯할 게다. 그것의 고유 기능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세계에 대한 어떤 한 비전을 보전하는 일이며, 아울러 지성은 아무런 위험없이 이성과 과학의 한계 속에 갇혀 있을 수는 없으리라는 점을 환기시켜 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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