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이라는 작가가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 순간. 첫장 펼치자말자 이다.

 

 

일러두기.

3.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현실의 어느 누구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만약 비슷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오직 문학의 영역에서 발화된 정치 풍자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에 하나 즐기는 것 이상으로 심각하게 여긴다면 이는 문학적 무지와 정신 병리적 망상이 분명하므로 조속한 학습과 치료의 병행을 권하니다. 개인이건 사회건 간에.

 

 

ㅋㅋㅋㅋ  문득, 읽다가 비슷한 사람 얼굴이 뿅 떠오를 때면 억지로 누른다. 아 난 아냐. 학습과 치료 필요없어. 이러기에 딱 맞는 <일러두기>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말이다. 미리 구설수를 차단하는 이 작가.

 

이 책에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책에서 가져온 글들이 많다. 그게 좋기도 하고 좀 거슬리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다음과 같이 갈파했다.

-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봤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볼 테니까. (p62)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가난도 아니고 근심도 아니고 병도 아니다. 그것은 생에 대한 권태이다. (p90)

쇼펜하우어가 했던 양에 대한 어두운 이야기를 떠올렸다.

- 우리는 목장에서 놀고 있는 양의 무리와 흡사하다. 도살자는 그중 이것저것을 뽑아 가르고 있다. 우리는 행복한 나날 중에도 어떠한 재앙 (병, 박해, 전락, 상처, 질병, 발광, 죽음 등등)이 우리에게 예비돼 있음을 알고 있기는 한 것인가. (p159)

스탕달은 이렇게 말했다. 연애는 열병과 같은 것이어서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p202)

사랑은 늦게 찾아올수록 격렬하다.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술>에 나오는 구절이다. (p209)

이러니 벤저민 프랭클린이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우리를 망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눈이다. 만약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장님이라면 나는 굳이 고래 등 같은 집도 번쩍이는 가구도 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라고. (p212)

 

다 좋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모든 다른 사람의 말과 글을 빌린 말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은 19페이지에 이미 버젓이 나와 있었다. 이 구절은 나중에 사랑하는 연인, 김수영과 오소영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도 해주게 된다.

 

심리학에는 다음과 같은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열 명이서 포커를 하는데요. 그중 아홉 명이 작당해 나머지 한 사람을 틀리지 않았는데도 틀렸다고 몰아붙이는 겁니다. 나아가 그 하나가 항의하면 할수록 다른 아홉은 훨씬 강하게 그를 압박합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이 어이없는 상황이 하염없이 지속되면 제아무리 심지가 굳은 사람도 결국엔 굴복하고 말죠. 그런데 말이에요. 정말 신기한 사실은, 그때 만약 단 한 사람만 그의 편을 들어 주면, 그는 그 어떤 혹독한 공격이 끝없이 들어온다 한들 결코 꺾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단 한 사람. 이것이 바로 단 한 사람의 위대함입니다. (p19)

 

그 단 한 사람이, 연인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이 나이를 먹어갈수록 부모 이외에 나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전폭적으로 지지해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런 사람 하나, 그 사람이 연인이든, 친구든, 남편이든, 아내든, 어쩌면 자식이든, 동료든, 그런 사람 하나만 확실히 있다면 사는 게 팍팍하지만은 않을 것이고 좀더 힘내서 살 수 있을 거다, 싶다. 위대함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이런 게 정말 위대함인 것인 게지. 우주와 같은 한 사람의 마음을 붙들어 매둘 수 있는 사람의 힘. 그 어디에도 비견할 수 없는 그 무한한 힘. 나는 누군가에게 '단 한 사람'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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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16-09-04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에 들어오게 굵게 인용하신 글, 참 좋아요.
요즈음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다 그 한 사람, 될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하고 바라 봅니다. 심지가 곧아야 할텐데 그러기가 힘들다는 것까지만 알고 있어요.

비연 2016-09-04 20:46   좋아요 0 | URL
저도, 그 한 사람 되고 싶은 맘이 어쩌면 누군가 제게 그 한 사람이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불쑥 불쑥 생기는 글귀였어요... 그 어느 것도 쉽지 않겠지만.
 

 

요즘은 여러가지로 싱숭생숭하고 마음도 많이 상했고 덕분에 몸도 별로 안 좋고 그래서 피부는 누렇게 뜨고 눈에서는 총기가 사라지고... 뭐 이런 좋지 않은 시기가 비연에게 도래했음을 궁시렁궁시렁. 회사 생활 하면서 (도대체 몇 년이나 회사 생활을 한 거냐... 쩝) 여러 회사를 다녀보았지만, 작금의 상황은 매우 불편하고 기분나쁘고 허무하고 그런 상황으로 애써 '즐겁게 버티기'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 지만, 나아지는 건 별로 없는 것 같다. 역시나 회사에 정이 떨어지는 건, 사람에 대한 정이 떨어지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이번 (개떡같은) 프로젝트 추진에 이어서 줄줄이 사탕 꾸러미 소세지로 나온 결과물은, 배신과 상실의 시대. (뭔가 멋져보이는 제목이지만 실상은 참담)

 

덕분에 모든 약속을 자제하고 지난 주 집에서 칩거를 했는데 - 아 회사는 다녔다 - 그래서 주말엔 드러누워 책 보기에 전념. 근데 근질근질... 함을 못이겨 오늘은 나와서 다음주까지 쫘악.. 약속을 잡아버렸다. 주말에도 전부. 미쳤나봐. 정신적 육체적 피로로 허덕거리면서도 이 짓이다. 으이그.

 

암튼 주말엔 책을 읽었다. 토요일은 좀 바빴고.. 일요일 온종일... 읽으려고 했는데 동생네가 와서 잠시 놀다가 논 김에 좀 자고... 우쩄든 그 나머지 시간은 전부 책.

 

 

 

비턴의 "~죽음" 시리즈 번역되어 나온 건 다 읽었다. 세 권. 올해 내로 세 권 더 나온다니 기대가 크다. 갈수록 이야기가 쫀득쫀득 해지고 캐릭터들의 성격이 또렷해지고 있다. 주인공인 맥베스 순경은 참 설명하기 어려운 캐릭터로서 (ㅎㅎ) 그럼에도 왠지 모를 매력이 느껴지는 사람이다. 예리한 면이 남다르고 사소한 것에서 이야기의 맥락을 짚어가며, 사람들과의 관계에 능수능란하지만, 의외로 텅빈 구석도 있고 유혹에도 약한 구석이 있는... (이번 3권에서 결국 유혹에 굴복...) 물론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한 속물적 행위들도 그냥 그대로 하고 있고 말이다. <외지인의 죽음>은 좀 끔찍한 설정이기는 해서, 바닷가재들이 시체를 먹어치웠다... 그러니 그 바닷가재를 먹은 자들은 일종의 식인종... 이라는 연상작용을 일으키게 되어 한동안 가재요리는 먹지 못할 느낌이다. (물론 비싸서 기회가 많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사건 해결이 좀 급작스러운 면만 제외하면 시노선이라는 또 다른 곳으로 가서의 멕베스 순경의 (일탈적인)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나머지 세 권도 얼른 나와랏. 이돌람바~

 

 

 

 

 

난 이걸 읽기 전까지는 이 책이 이런 내용일 줄 몰랐다. 그냥 시바타 신이라는 사람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책이겠거니, 책에 대한 사랑과 서점을 운영하는 자의 재미와 근심 등이 담겨 있겠거니 했었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이 책은 '서점경영'에 대한 이야기였고 시바타 신 만의 독특한(!) 방법에 대한 구술이었던 것 같다. 서점을 경영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단지 책을 좋아하고 그 책을 다른 사람과 함께 공유한다는 낭만적인 감상만으로는 안 되며, 근무하는 사람들의 월급을 책임져야 하고 수익도 내야 하며 반품 등을 통해 서점의 매출도 보전해야 하는 일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시바타 신이라는 사람은 독보적인 존재이며, 진보초 지역 더 나아가 일본 전역의 서점에 관여한 사람들에게 구루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 책에 대한 내용은 나중에 밑줄 쫙쫙 친 것들로 다시 한번 얘기하고 싶다. 이제까지 서점경영에 대해 가졌던 약간의 분홍빛 꿈 따위는 스윽 밀어버리는 내용이라...

 

 

 

 

책만 봤다고 했는데, 2권 정도 봤다니. <팅커스>도 거의 다 읽어 가긴 하는데, 이게 영 진도가 안 나간다.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나 할까. 그래도 내용이 나쁘지 않아서 끝까지 읽어야 해 라고 고집부리며 쥐고 있다고 보면 된다.

 

....

 

사람이 싫어지면 두 가지가 싫어진다고 한다. 밥먹는 모습이 싫어지고, 더 지나치면 목소리가 듣기 싫어진다고. 내가 회사에서 정말 싫어하는 자가 지금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다. 뭔가 못 견디겠다는 느낌이 스물스물하여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틀어버린다.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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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 네스뵈를 참말로 좋아한다. 그리고 그가 쓰는 해리 홀레 시리즈의 해리 홀레도 좋아한다. 그래서 관련 책이 나오는 족족, 바로바로 사서 집에 일단 쟁여 두어야 마음이 놓이는 편이다. 이것도 병이라면 병인데 어쨌거나 누구에게나 그런 작가, 그런 책이 있는 거니까.

 

그런데, 해리 홀레 시리즈를 보면 볼수록 자꾸 괴로와져서 야단났다. 이번 작품도 그렇다. 제목부터가 <바퀴벌레>. 선듯 손이 안 가는 제목 아닌가 말이다. 이 책을 만약 서점에서 샀다면 제목을 누가 볼까봐 가렸지 않을까 라고 문득 생각해 보았다. 물론, 나는 알라딘에서 구매했으니까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서도.

 

휴가의 첫날. 이 책을 벗한다는 즐거움에 마음이 설레기까지 했었는데 말이다. 아. 읽는 동안 내내 괴로왔다. 방콕이란 분위기가 주는 압박감도 있었고. 여행지로서의 방콕은 매력만점의 도시임에 반해, 뭔가 사건사고와 엮이면 그지없이 어둡고 끔찍해진다. 다양한 인간군상. 다양한 죽음의 방법. 그에 따르는 다양한 범죄의 양태. 다양한 타락의 모습... 역시나 이 책에서도 그랬다.

 

해리 홀레의 여동생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낯모르는 인간에게 성폭행을 당해야 했고, 어쩌다 날아간 방콕에서도 맞부딪히는 건 소아성애... 으. 글자를 따라 읽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그리고 바퀴벌레에 대한 비유들. 읽는데 밥맛이 막 떨어지려고 하는 걸 간신히... 눌...렀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이 책 읽으면서 밥 몇 끼는 굶어야 했다. 꾸웩.

 

그리고 해리 홀레는 역시나 사건을 '해결'한다기보다는 사건을 확대 재생산한 끝에 치열한 몸싸움, 아니 몸싸움이 아니라 상대에게 찔리고 베이고 잘리고 눌리고... 하는 몸에 대한 강력한 학대를 당한 이후에야 상대를 '무찌른다'. 아무리 봐도 해리 홀레가 사건을 하나씩 거쳐갈 때마다 그 몸이 남아난 게 심히 의아할 정도이다. 인간의 몸이 그렇게 당하고도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머리도 여러번 세게 얻어맞거나 바닥에 패대기쳐지고, 높은 곳에서 몸일 떨어지는 것은 부지기수이고, 칼로 쑤욱 찔리는 건 더 흔해빠진 일인지라, 해리 홀레의 몸은 아마 넝마가 되었을 것이다 라고 짐작해본다. 이 사람, 좀비? 프랑켄슈타인? 뭐 이런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들 정도.

 

게다가 해리 홀레가 가까이 하거나 해리 홀레에게 호감을 가지는 사람 - 특히 여성 - 은 언제나 거의 대부분 책이 끝나기 전에 하늘나라로 임하신다. 그러니까 해리 홀레가 지나가는 길은 시체의 더미가 깔리게 되고 그리고 나서 범인이라고 잡으면 이 넘을 아주 요절을 내 버리는 게 또 홀레 아저씨다 이거다. 괜찮은 거니, 해리 홀레? ㅜㅜ

 

그래서 이 책 <바퀴벌레>를 다 읽기까지 상당히 괴로왔음을 고백한다. 전혀 즐겁지 않았고 전혀 통쾌하지 않았다. 그냥 좀 메슥거렸고 많이 불쾌했다. 아직 시리즈는 계속 되고 있고 <바퀴벌레>는 심지어 해리 홀레 시리즈의 두번째인가 작품이다. 이미 진도가 많이 나간 시리즈는, 내용은 갈수록 잔인해지고 해리 홀레는 점점 마초스러워지고 살덩이와 핏덩이가 난무하는 장면이 더욱 흔해지고 있다. 이젠 겁이 날 정도.

 

요 네스뵈님. 이제 해리 홀레 그만 괴롭히면 안될까요. 꽃길은 아니라도 그냥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게는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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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런 책이 있다. 읽다 보면 차분해지고 묵상하는 기분이 드는 듯한 느낌을 주는 책. 주변의 소음이 잦아지고 내 속으로 침잠하게 하는 책. 특별히 나에게 잠언이라고 똑부러지게 말하고 있지는 않으나 글을 따라 가노라면 내게 잠언으로 다가오는 책.

 

이 책이, 그런 책 중의 하나였다.

 

어두운 글일까봐 걱정했다. 읽다 보니 밝은 글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사랑하지 않는, 혹은 시기하는 딸. 그래서 생겼던 불화. 미움. 상처. 그리고 불쑥 다가온 건강상의 이상. 어머니의 알츠하이머병. 단어 하나하나 더듬어 보면 아, 답답해서 머리가 아파져온다.

 

하지만, 그렇다, 이 책는 '하지만' 이라는 반전이 어울리는 책인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많은 인연과 우연들이, 어머니의 병이, 뜻하지 않은 여행이, 심지어 나의 병이, 그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함과 치유함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제 모든 게 끝! 이라고 비명을 지를 정도의 통쾌한 마무리가 아니라, 그렇게 그렇게 사노라면 그렇게 그렇게 잊혀지고 묻혀지고 이해되고... 그런 느낌을 주는, 여운이 있는 마무리였다.

 

선 사상의 스승인 순류 스즈키 로시도 영혼의 수련에 관해 비슷한 말을 했다. "일단 어느 정도 수련을 하고 나면, 급격히 남다른 성과를 내는 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아주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도 늘 조금씩만 나아진다. 젖을 걸 알고 소나기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는 다르다. 안개 안에 있으면 몸이 젖어가는 줄을 모르지만, 계속 그렇게 걷다 보면 조금씩 조금씩 젖어 드는 것이다." (p260)

 

이 글들을 읽어나가는 것은, 이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씩 조금씩 작가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동시에 내 마음으로 들어가는 느낌. 그래서 작가에게 동감하는 동안 나 자신도 어느 새 이입되어 치유되는 느낌. 마치 수련을 하듯이.

 

친절, 동정, 너그러움 같은 것은 마치 순전히 감정의 미덕인 것처럼 이야기되곤 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무엇보다도 상상력의 미덕이다. 우리는 누군가 다친 것을 보면 그를 안쓰럽게 여긴다. 누군가가 모욕을 당했거나 아주 지쳐 있는 것을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의 감각이 전하는 정보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그것을 해석하고 나면 비로소 그 정보가 당신에게 생생하게 전해진다. 직접 목격하지 않은 어떤 사태,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어떤 괴로움을 상상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고민하기도 한다. (p284-285)

 

어쩌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이입되어 자신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p286), 그렇게 상상하여 도약하는 것, 그런 것이 우리가 느끼는 '감정' 인 것인지도. 그렇게 타인과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감정의 교류라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고대 그리스어 '시그노미'라는 단어가 있다. '이해하다, 공감하다, 용서하다, 봐주다'라는 뜻을 모두 담고 있는 이 단어는 생각과 느낌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 단어는 이해가 용서 혹은 대상 자체의 출발점이라고 제안한다. 이 단어의 범위는 이해를 위해 감정이입이 필요하고, 감정이입에 이르기 위해 이해가 필요하며, 감정이입은 또한 용서임을, 이 모든 것은 서로서로를 도우며, 함께 이루어지는 것임을 암시한다. 어쩌면 그것들은 처음부터 따로 있는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영어에서는 '이해하다(understanding)'가 그런 식으로 사용되며,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종종 이해를 먼저 구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태도가 변명의 남발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p341)

 

작가의 어머니, 그리 단단하고 딸에게 매정했던 어머니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후 딸에게 의지하게 된다. 옅어져 가는 기억들 속에서 과거를 버리고 현재만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있는 것들에 가끔은 충만함을 느끼게 되는 어머니. 기억이 사라지고, 기력이 쇠해지고, 살아 있음 또한 흐려져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작가는 어머니의 과거를 이해하게 되고 그렇게 용서라는 감정과 조우하게 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주는 고통은 쉽사리 극복되기 힘든 것이고 기억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은 더더운 아닌 까닭에, 그냥 현재의 나로서 어머니의 기억이 희미해져가는 것에 발맞추어 나의 힘듦도 함께 스러져가도록 둘 뿐이지만.

 

많은 구절들이 마음에 와닿았었다. 살구와 이야기라는 단어로 시작된 글들은 어머니와 병과 아이슬란드와 릴케와 울프와 체 게바라와 남편과 아이의 죽은몸을 먹어야 했던 어느 에스키모 여인의 이야기 등으로 넓게 스며들어가고 그렇게 돌아다니던 마음은 마침내 치유라는 하나의 단어로 수렴하게 된다. 그 과정이, 참 고요하면서도 절박하면서도 ... 아름답다 싶었다.

 

 

몰랐었는데, 리베카 솔닛의 작품들이 여러 권 번역되어 국내에 소개되어 있었다. 이런. 다른 책들도 몇 권 더 읽어봐야겠다. 내 취향에 잘 들어맞는 글을 쓰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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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된 시리즈물은 즐거움이다. 그냥 시리즈물 말고 '잘된' 시리즈물. 이게 중요하긴 하지만.... 한 권씩 나오는 책들을 기다리는 것도 즐거움이지만, 책 속의 주인공이 시리즈가 진행함에 따라 진화하는 모습이 마치 내 인생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20대가 40대 50대가 되고 지키고 싶었던 아들과 딸이 어느새 반항기 넘치는 사춘기 청소년으로 커가고, 심지어 결혼도 하고... 주변을 바라보는 시각들도 나이가 듦에 따라,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달라지고 성숙해지고... 이런 것들이 좋다, 나는.

 

시리즈물은 사실, 범죄소설이나 추리/스릴러소설이 많은 것 같다. 셜록 홈즈나 에르큘 포와로도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고 최근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나 루이즈 페니의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 제프리 디버의 링컨 라임 시리즈 등등 내가 매혹되어 있는 시리즈들이 한두 개가 아니다. 책의 재미나 수준이 시리즈 내에서 조금씩 둘쭉날쭉 할 때도 있지만, 나오면 무조건 믿고 보게 되는 것이 시리즈물이 가지는 매력이라고 할 수 있고.

 

이제 여기에 한 시리즈가 더해지게 생겼다. 이것은 결국, 나에게 책값이 좀 더 더해질 거라는 적신호임과 동시에 재미도 하나 더 는다는 청신호이기도 하다. M.C.비턴의 <해미시 멕베스 순경 시리즈>.  이제 한 권 읽었는데, 어쩌나. 이거 계속 사봐야 할 것 같다.

 

 

1985년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31권이 나왔는데, 책 제목이 전부 Death of... 로 시작한다. 그러니까 전부 ~의 죽음..이라는 제목을 가진다 이거다. 첫 권은 <Death of a Gossip>. 여기서 해미시 멕베스 순경이라는 시골 순경이 짜잔 ... 등장한다.

 

"그러기엔 너무 게으른걸요. 그 사람도 어서 결혼을 하면 좋을 텐데. 벌써 서른다섯은 넘엇을 거에요. 마을 처녀 애들은 대부분 한 번쯤은 해미시를 마음에 두고 애를 태운 적이 있대요. 도대체 그 사람 어디가 여자애들 마음을 끄는 건지 나는 전혀 모르겠지만요." - p10

 

첫 등장. 로흐두라는 스코틀랜드의 북서쪽 끝자락에 자리잡은 마을의 한 명뿐인 순경. 부임 즉시 살 집을 짓고 그 옆에 유치장 하나가 딸린 현대식 경찰서를 짓고는 신형 모리스로 순찰을 도는 해미시. 집에서 닭과 거위를키우고 품종을 알 수 없는, 덩치가 크고 침을 질질 흘리는 타우저라는 경비견과 함께 사는 멕베스 순경. 큰 키에 길쭉한 체구, 경찰 제복을 자루처럼 걸친 채, 챙이 있는 모자를 쓰고 다니는, 불타오는 빛깔의 머리칼을 가진 해미시 멕베스 순경...

 

이 조용하고 자그마한 마을에 발생한 살인 사건으로 런던에서 경시청 사람들이 들이닥치고, 시골 순경을 무시하는 언동에, 내가 한번 사건을 해결해봐... 라는 생각에 여기저기 질문을 하며 다니는 그의 모습은, 어수룩하면서도 일면 할 말 다하는 날카로움까지 가진다. 막상 사건 수사에서 손을 떼라고 하니 갑자기 살인자를 알고 싶은 의욕이 불타올랐다 이거지. 그리고는 무시하는 경시청 경감을 제치고 진범을 밝혀내는 시골 순경 멕베스. 굿.

 

사람들에게 간간히 던지는 사이다같은 말에, 가슴이 다 후련해지게도 하는 이 사람. 아 매력적이지 않은가. 대단한 집안의 딸인 프리실라가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해미시는 몸을 돌려 해안가의 돌담에 등을 기대고 섰다. "믿으셔도 좋습니다. 로흐두 마을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으니까요. 하지만 보고서에 저의 재치는 없지만 성실한 업무 태도 덕분에 사건 해결에 도움을 받았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으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 p255

 

아. 이미 이 책 이외에도 번역되어 나온 책이 두 권이나 더 있다는 것. 그 책들이 내게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날 번민하게 한다.

 

 

15일 이후에나 살 수 있다고 .. ㅜ 게다가 책표지 안쪽을 보니, 앞으로 세 권을 2016년 내에 번역출간한다고 되어 있다. 사실,.... 쌓여 있는 책들을 해결하지 못한 채 또 책을 사야만 한다는, 사야만 한다는 것에서 느껴지는 죄책감보다는 이런 재미난 시리즈가 31권이나 나와 있고 이것들이 서서히 번역되어 나올 거라는 사실에 더 큰 쾌감을 느끼고 있으니... 비연. 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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