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이라는 작가가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 순간. 첫장 펼치자말자 이다.

 

 

일러두기.

3.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현실의 어느 누구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만약 비슷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오직 문학의 영역에서 발화된 정치 풍자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에 하나 즐기는 것 이상으로 심각하게 여긴다면 이는 문학적 무지와 정신 병리적 망상이 분명하므로 조속한 학습과 치료의 병행을 권하니다. 개인이건 사회건 간에.

 

 

ㅋㅋㅋㅋ  문득, 읽다가 비슷한 사람 얼굴이 뿅 떠오를 때면 억지로 누른다. 아 난 아냐. 학습과 치료 필요없어. 이러기에 딱 맞는 <일러두기>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말이다. 미리 구설수를 차단하는 이 작가.

 

이 책에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책에서 가져온 글들이 많다. 그게 좋기도 하고 좀 거슬리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다음과 같이 갈파했다.

-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봤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볼 테니까. (p62)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가난도 아니고 근심도 아니고 병도 아니다. 그것은 생에 대한 권태이다. (p90)

쇼펜하우어가 했던 양에 대한 어두운 이야기를 떠올렸다.

- 우리는 목장에서 놀고 있는 양의 무리와 흡사하다. 도살자는 그중 이것저것을 뽑아 가르고 있다. 우리는 행복한 나날 중에도 어떠한 재앙 (병, 박해, 전락, 상처, 질병, 발광, 죽음 등등)이 우리에게 예비돼 있음을 알고 있기는 한 것인가. (p159)

스탕달은 이렇게 말했다. 연애는 열병과 같은 것이어서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p202)

사랑은 늦게 찾아올수록 격렬하다.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술>에 나오는 구절이다. (p209)

이러니 벤저민 프랭클린이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우리를 망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눈이다. 만약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장님이라면 나는 굳이 고래 등 같은 집도 번쩍이는 가구도 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라고. (p212)

 

다 좋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모든 다른 사람의 말과 글을 빌린 말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은 19페이지에 이미 버젓이 나와 있었다. 이 구절은 나중에 사랑하는 연인, 김수영과 오소영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도 해주게 된다.

 

심리학에는 다음과 같은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열 명이서 포커를 하는데요. 그중 아홉 명이 작당해 나머지 한 사람을 틀리지 않았는데도 틀렸다고 몰아붙이는 겁니다. 나아가 그 하나가 항의하면 할수록 다른 아홉은 훨씬 강하게 그를 압박합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이 어이없는 상황이 하염없이 지속되면 제아무리 심지가 굳은 사람도 결국엔 굴복하고 말죠. 그런데 말이에요. 정말 신기한 사실은, 그때 만약 단 한 사람만 그의 편을 들어 주면, 그는 그 어떤 혹독한 공격이 끝없이 들어온다 한들 결코 꺾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단 한 사람. 이것이 바로 단 한 사람의 위대함입니다. (p19)

 

그 단 한 사람이, 연인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이 나이를 먹어갈수록 부모 이외에 나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전폭적으로 지지해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런 사람 하나, 그 사람이 연인이든, 친구든, 남편이든, 아내든, 어쩌면 자식이든, 동료든, 그런 사람 하나만 확실히 있다면 사는 게 팍팍하지만은 않을 것이고 좀더 힘내서 살 수 있을 거다, 싶다. 위대함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이런 게 정말 위대함인 것인 게지. 우주와 같은 한 사람의 마음을 붙들어 매둘 수 있는 사람의 힘. 그 어디에도 비견할 수 없는 그 무한한 힘. 나는 누군가에게 '단 한 사람'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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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16-09-04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에 들어오게 굵게 인용하신 글, 참 좋아요.
요즈음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다 그 한 사람, 될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하고 바라 봅니다. 심지가 곧아야 할텐데 그러기가 힘들다는 것까지만 알고 있어요.

비연 2016-09-04 20:46   좋아요 0 | URL
저도, 그 한 사람 되고 싶은 맘이 어쩌면 누군가 제게 그 한 사람이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불쑥 불쑥 생기는 글귀였어요... 그 어느 것도 쉽지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