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고 있노라니 내 어린 시절은 어땠지.. 그런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먼먼 옛날 일 같은데, 가 아니라 먼먼 옛날 일이라 (아흑) 기억이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 이 책을 읽으니 조금씩 조금씩 생각이 날랑말랑 하게 되어서 괜히 아연해진다고나 할까. 



그러자 현성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것도 맞는데, 지금도 묶을 수 있어요. 어른은 빨리 할 수 있고, 어린이는 시간이 걸리는 것만 달라요." (p18)


아이라고, 몇 년 안 살았다고 알 걸 모르는 게 아니다. 할 걸 못하는 게 아니다. 그냥 어른의 시각으로 보니 모르는 것 같고 느린 것 같고 그런 것이지. 좀 다른 얘기긴 하지만..  어릴 때 나는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했다. 삐쩍 말라서 허연 얼굴로 다니는 아이였다. 달리기도 잘 못하고 자전거도 못 타는 아이였다. 그냥 맨날 방에 앉아 책만 읽는 아이였다. 좀더 활발하게 힘차게 지내고 싶었지만, 체력이 안 따라주고 운동신경이 뒷받침되지 않았다. 못한다 못한다 하니까 더 못하게 되는 것 같다고나 할까. 딱 하나 잘 하는 게 있다면 피구였다. 그것도 던지는 건 잘 못하고 피하는 걸 잘했다. 몸이 작아서 그런 지 잘 맞지 않았고 매번 끝까지 남는 한 명이었다. 난 그걸 잘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끝까지 남는 내가 좋았다. 어느 순간 발꿈치를 탁 맞아 장렬히 전사하게 되긴 했지만, 둘러싼 아이들의 눈을 보며 그 공을 어디로 던질 건지 머리로 가늠하며 던지는 순간 판단해서 피할 때, 쾌감이 컸다. 묘하게 그 때 그 쾌감이 아직도 기억된다. 가끔 뭔가 잘 안 풀릴 때 그 어린이가 기억나기도 한다. 그 때 잘 피했었는데.. 하면서. 


하지만 모든 무서운 일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가, 청소년이, 어른이 '여성'이기 때문에 무서워하게 되는 그 많은 일들이 모두 그렇다. 그런 무서움은 아무런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세상을 좀먹고 무너뜨린다. 우리는 어린이가, 여성이 안전을 위협받는 세상에서 살게 할 수 없다. 수수를, 보리를, 검은콩이를 불안하고 신뢰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살게 할 수 없다. (p53)


어린이든 누구든,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런 무서움을 유발하는 모든 것을 증오한다. 길거리를 걸을 때 뒤에서 다가오는 남자의 발걸음 소리에 가슴이 쿵쿵거리거나, 으슥한 곳에서 남자와 단 둘이 스쳐지나가게 되거나, 택시를 탔을 때 백미러 너머로 의미심장하게 쳐다보는 눈초리를 느끼는, 그런 경험들 하나하나가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사람을 주눅들게 하는지, 여성들만이 아는 그 무엇이 있다. 아이들을 보면서 앞으로의 세상은 그런 일이 없는 세상이어야 할텐데. 나도 그런 생각을 늘 한다. 신문지상이나 어디나 떠들어대는 그 소름끼치는 이야기들도 그렇고,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여성이기 때문에 당해야 하는 불평등과 모멸감도 그렇고, 단지 성별을 이유로 감내해야 하는 것들이 앞으로의 세상에서는 없어지길 늘 기원한다. 



자람이가 가고 보니 편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이 책이 선생님한테 있잖아요? 하지만 다 똑같은 책이어도 이 책엔 제 마음이 있어요." (p72)



어린이는 참 착하다. 요즘 애들이 못됐다고 까졌다고 아무리 그래도 애는 애다. 아이의 마음엔 순수함이 있다. 착함이 있고 반짝이는 생각이 있다. 그런 어린이들을 보고 있으면 웃음도 나고 기쁘기도 하고 가끔은 씁쓸하기도 하다. 예전에 초등학교 2학년 때 선생님이 분홍색 플라스틱 자를 하나씩 나눠주시면서 이게 있어야 2학년 5반이다, 라고 하셨던 기억이 있다. 그런 일이 왜 기억에 남는 지 모르겠지만, 어쩄든 그 얘길 듣고 난 2학년 5반 학생이 아니면 안된다는 약간의 절박함으로 그 자를 내내 지니고 다녔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안달이었다 싶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메리 올리버의 문장들이 떠오른다.

"우주가 무수히 많은 곳에서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아름다운 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그러면서도 우주는 활기차고 사무적이다" (<완벽한 날들> 중에서) (p91)


이렇게 또 좋은 책을 하나 소개 받는다. 요즘은 아이들에게 공부를 너무 강요해서 유치원 때부터 선행을 하고 영어를 하고 초등학교 때 학원을 돌려대며 애들에게 공부를 시킨다. 중학생이 되면 새벽까지 학원에 가고 숙제하느라 잠을 못잔다. 고등학생이 되어도 마찬가지고. 공부를 못하면 여전히 낙오자 취급을 받는다. 살아보니 그게 다가 아니더라, 하면서도 자기 자식한테는 용납을 못하는 부모가 많다... 근데 정말 살아보니 그게 아니던데. 하나하나 사는 내용이 다르고 방식이 다르고 그 모든 것이 다 소중한 것이던데. 이게 사실은 살아봐야 아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게 하나 있는 조카에게 (이젠 고등학생이 되어 총각티가 나는) 가끔 메세지를 보내며 꼭 뒤에 이런 말을 달아준다. "OO이가 뭘 해도 고모는 OO편임을 잊지마. 사랑해요, 조카." 남자아이고 아직 어려서 이거 뭐야? 하고 쓱 지나칠 지 모르지만, 난 우리 조카가 그걸 알아줄 날이 있을 거라 믿는다. 세상에 하나 뿐인 소중한 사람으로 조건없이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의 든든함. 어떤 일을 하든 다 믿어줄 거라는 자신감. 그리고 누구보다 스스로가 스스로이기에 빛나는 사람이라는 생각. 





















좋은 책이다. 어린이를 대할 때도 기억해야겠지만,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고 이해하는 데에도 큰 위안이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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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1-01-19 14: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올해 들어 읽은 리뷰 중 최고인데요 비연님 포용력 갑인 목소리에 걸맞는 포용력 최갑인 리뷰입니다. 이런 고모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싶은 :)

비연 2021-01-20 11:54   좋아요 1 | URL
앗. 수연님.. 부끄부끄... 우리 조카도 든든해해야 할텐데..^^

미미 2021-01-19 14: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히히~저도 피구 잘피하는 편이었는데 시작만하면 항상 너무나 심장이 터질것같더라구요.
비연님 글 읽으니 그 느낌이 또 다른 생각을 부르네요. 메리 올리버의 책 담아갑니당♡

비연 2021-01-20 11:55   좋아요 2 | URL
예전 피구 볼 때의 그 둑은둑은이 저도 아직 느껴져요. 돌아보면 즐거운 기억이기도 하구요.
메리 올리버 책은 저도 담 구매시 포함할 예정. 룰루~

얄라알라 2021-01-19 14: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비연 어린이^^ 저도 제 이름 뒤에 어린이 한 번 붙여 불러보고 싶어집니다.

˝뭘 해도 네 편˝ 이런 문자 보내주시는 고모 너무 멋지시네요^^

비연 2021-01-20 11:55   좋아요 2 | URL
비연 어린이.. 그러니까 좀 느낌이 다르죠? ㅎㅎ
사실, 전 우리 조카가 있다는 자체가 우주를 안고 있는 기분이에요~

syo 2021-01-19 14: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비연 어린이는 어릴 적부터 똑똑하고 자기 일 스스로 하는 씩씩한 어린이였을 것만 같은데!

비연 2021-01-20 11:56   좋아요 1 | URL
흠흠... 노 코멘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cott 2021-01-19 15: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둘도 없는 조카와 고모 뭘해도 네편이 있다면 매끼 챙겨먹지 않아도 든든 ^ㅎ^

비연 2021-01-20 11:57   좋아요 1 | URL
우리 조카와 제가 좋은 팀웍이긴 하죠.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1-01-19 16: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작고 하얀 비연 어린이 너무 보고 싶어요^^
조카님은 비연 고모님 맘을 알고 있을 거에요. 조카님 부럽네요, 홍홍!

비연 2021-01-20 11:57   좋아요 0 | URL
제 어린 시절은.. 비연 어린이는... ㅋㅋㅋㅋ
우리 조카도 알고 있겠죠? 믿어봅니다~ 워낙 철없는 고딩이라 ㅎㅎ;;

라로 2021-01-20 15: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비연 어린이와 친구가 되고 싶은 어린이였을 것 같아요. ^^;;
저는 비연님처럼 좋은 고모, 또는 이모가 될수도 있었을텐데 그러지 못했어요.
아무래도 제게 좋은 고모나 이모가 없어서 모범을 보지 못해서 그런가 봐요. (또 또 어두운 이야기... 라로 어린이는 어두웠나봐요. ㅎㅎㅎㅎㅎ)

비연 2021-01-20 16:57   좋아요 0 | URL
저도 라로 어린이랑 친구하고 싶었을 듯요 ㅎㅎㅎ^^
라로님은 좋은 엄마시잖아요. 전 사실 엄마가 되어 보지 못해서 자식이 있다면 어땠을까 상상만 해볼 뿐이지만, 그게 훨씬 더 어려운 일일 것 같아요~

카스피 2021-01-20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꾸만 핵가족이 되고 친인척간의 교류가 없어지다보니 좋은 고모나 이모 삼촌이 되기는 더욱 더 힘든 시대인가 봅니다.

비연 2021-01-21 00:06   좋아요 0 | URL
먼 친척과는 잘 안 만나도 고모, 이모, 삼촌이랑은 더 가까울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고.. 저처럼 아이가 없는 사람은 조카가 제일 큰 보물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