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있는 아는 선배 언니가 이 책을 읽었다며, 재미있다고 해서 사둔 책이었다. 어제, 와인이 먹고 싶은데 속이 좀 꿀렁거려서 못 먹는 게 넘 억울해서 자다가 이 책을 펼쳤다. 솔직히, 난 김혼비라는 작가를 몰랐고 그 사람이 여자 축구에 대한 책을 썼다는 것도 이 책 초반에 나와서 알았고 김혼비라는 이름이 (내가 느무나 좋아하는) "닉 혼비" 에게서 왔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요즘 우리나라 작가들의 소설이나 에세이를 너무 외면해왔음에 깊이 반성 중인데, 이 책 읽으면서 다시 깊게 반성했다...왜냐하면....
이 책, 너어어어어어무 재밌다!!!!!
조금만 읽고 자야지 하다가 다 읽고야 말았다. 아니 이렇게 글솜씨 좋은 사람을 내가 왜 몰랐지? 라는 생각과 함께 완전 솔직한 내용에 혼자 배꼽을 잡고 웃었다. 책 보면서 웃은 지 한참 되었는데 김혼비가 날 웃긴 거다. 크크크크크. 특히 <첫술> 에서는 침대에서 데구르르 구르면서 웃었다. 배추, 김치.. 배추, 김치..ㅎㅎㅎㅎㅎ
그러고 보니 내가 처음으로 술을 먹게 된 때가 생각났다. 나는 술을 좋아하고 술자리를 사랑하고.. 그걸 그다지 부인하지 않는 사람 중 하나이다. (김혼비, 그 점이 맘에 든다. 그냥 직설적으로 술이 좋다고 하는 거) 그러다보니 이제까지 먹은 술의 종류와 양과, 술자리의 수와... 흠... 기억도 안나.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누군가가 나한테 그럤다. 너처럼 술 많이 먹는 여자 첨 봤다고. 흠? 넌 도대체 본 여자가 몇 명인데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니? 하고 무시했지만... 그 말은 대개는 머리 한 구석에 쳐박혀 있다가 꿀꿀한 마음으로 술 먹을 때 아주 가끔 생각난다. 문제는, 그 얘길 누가 했는 지 기억이 안난다는 거지. (패스)
내가 처음 술을 먹은 건 대학교 1학년 6월이었다(고 기억한다). 그 전의 나는, 놀라울 정도로, 금주주의자였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 갔을 때 누가 스파클링 음료 가져와서 술 대신 먹을 때도 비웃었었고 (아니, 정신 나갈 지도 모르는 저런 걸 왜 먹어? 흥) 대학교 입학했을 때 선배들이 술을 강권하면 조용히 물리치며 말했다. 전 술 한잔만 먹어도 쓰러집니다. 아무래도 성별이 여자이다 보니 더 이상 권하진 않았지만, 엄청 괴롭혔었다. 요즘이랑 달라서 예전(언제?ㅜ) 나 대학 다닐 땐 술 안 먹는 사람은 사람으로 치지도 않았었다는. 그래도 잘도 버티며 술자리는 다 좇아다녔었다.
왜냐고? 내가 첫눈에 반한 선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으홧홧)
지금 생각하면 그 선배에게 내가 왜 반했었나.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근데 정말 한눈에 뿅 하는 것도 있더라. 일생 한번의 경험이었지만. (사실 이런 경험을 여러번 하는 것도 이상하지...) 그렇게 잘도 좇아다니던 1학년 신입생 비연의 모습은.. 참으로 애처롭고 아는 사람은 다 눈치챌 수밖에 없는 그런 눈길이었고... 그래도 술만큼은 안 먹고 버티고 있었는데...
축제 때가 된거다. 축제에는 여친 남친을 데려오는 거고, 없으면 소개팅이라도 해서 데려오는 것인데.. 난 소개팅 시켜주겠다는 친구를 뿌리치고 혹시나 축제에 그 선배가 와 있나 하이에나처럼 헤매고 다녔었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저어기 멀리, 정말 도저히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거리에 있던 그 선배가, 그리고 그 옆의 여자가 눈에 파팟 뜨인 거다. 어떻게 그게 보였을까. 그 때, 정말 발 아래 땅이 다 꺼지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한 달은 아팠나? 신입생 비연은 너무나 순진했던 거다.
그리고 나서 술을 먹기로 자청했었다. 소주였고, 취했지. 그게 나의 음주생활 시작. 결국 첫사랑 때문에 술을 먹게 되었다. 라는 슬픈 스토리. 눈물 찔끔. 첫술을 생각하면... 그냥 이젠 첫사랑이니 이런 게 생각난다기 보다는, 정말 어렸고 순진했고 감정 컨트롤이 안 되어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흘리던 내가 생각나서, 괜히 애틋해진다. 요즘의 다차원적 시공간 감각으로 본다면, 그 때의 내가 지금의 나와 같은 사람일까, 라는 게 의심스럽지만(<인터스텔라> 영화를 생각해보라), 내 기억 속에는 그 아이가 아직 남아 있으니. 이 책을 보면서, 그 생각이 오랜만에 떠올라 아릿했었다.
자자. 이 책은 정말 재미있습니다. 그냥 휘리릭 읽어보면 좋고 술 좋아하는 사람은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아 밑줄이라도 좍좍 긋고 싶은 책이랍니다. 인용하지 않는 이유는, 한번 읽어보라고. 미리 말하면 김빠지니. 그래도 하나는 인용하자.
앞으로도 퇴근길마다 뻗쳐오는 유혹을 이겨내고 술을 안 마시기 위해서라도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렇다.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일을 위해 오늘도 마신다. (p104)
오늘 저녁은 와인이다. 왜냐고? 내일을 위해 오늘도 마셔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