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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치마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재잘거리는 수다쟁이는 필시 과장하고 모방하며 나풀나풀 가벼울 수밖에 없다. 그들은 어딘가에서 주워 들은 다른 이의 유니크한 생각이나 표현에 약간의 첨삭과 윤색을 가해 제것인양 떠들어댄다. 그 과정이 하도 무의식적이라 누군가 그것을 지적하면 아연실색하고 만다. 제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떠들어대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글로 쓰고 모양을 추스려 책으로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야단맞을 소리지만 이런 뒤틀린 심성으로 오래전부터 제나라말로 쓰인 책읽기를 멀리 했다. 그래서일까. 헛생각은 떨쳐버리고 정신 좀 차리라는 것인지 이 책이 곁에 왔다. <처녀치마>. 그리고 이내 무언가 둔중한 것이 뒤통수를 친다. 그 냉소와 깊이에 빠져든다. 군더더기 없는, 조각퍼즐처럼 단 하나의 딱 맞는 조각이 끼워져 생겨난 문장들은 읽는 내내 서늘함을 느끼게 할 정도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그림쟁이입네 평생을 화가로 살아 온 아버지와 일수놀이로 물감을 댄 어머니. 여자는 생일날 이제는 세상에 없는 어머니가 운영하던 여관으로 길을 떠난다. 10년 동안을 한 해도 생일을 기억해주지 않는 연인에게 쓰레기통이자 변기통이자 타구통이 되었던 자신과, 남편의 배다른 아들로부터 죽은 남편이나마 미련스럽게 지키고자 했던 어머니의 안간힘. 아버지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 어머니를 초라하게 만든다는 것을, '사랑이 관계적이라는 것을 관계란 악마에 속한다는 것을 어머니는 몰랐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여자는 어머니의 모습을 닮는다. 그러나 어머니의 '캄캄한 욕망의 입구를 엿본' 여자는 조금 이른 때에 그 고통을 알아챈다. 여자는 해장국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남자의 그릇에 남자 몰래 꽃씨를 띄운다.
그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왜, 속 안 좋아? 안 받아도 먹어둬."
속에서 받아주기만 한다면 네 놈 안에서 조만간 꽃이 필 거다. 꽃씨는 쑥쑥 자라서 네 놈의 협소한 내부를 폭파하고 말 거다. 남편 몰래 밥에 독을 섞는 데 만족하지 않고 목까지 조르려는 간부처럼 10년 내 한 번도 생일을 기억해준 적 없는 그의 머리를 뜨거운 해장국 뚝배기에 지그시 밀어 넣고 싶었다.
여관방 단체손님의 소주박스에서 술병을 꺼내 마시는 여자에게 생일이란 '고작 남의 술을 축내는 날일 뿐'이며 서른 다섯 남은 봄을 꿈꾸다 꿈이라면 악몽일 뿐이라 자조한다. '겪은 날보다 남은 날이 더 적다고 부등호가 살짝 몸을 돌려앉는 봄에는' 그저 '희뿌연 꽃가루만 분분 날릴' 뿐이다. 돌아오는 길에 여자는 버스 안에서 흥건하지도 못한 눈물 몇 방울을 쥐어짜낸다. 휴가는 끝났고 여자는 말한다. 집에 돌아가면 즉시 냉장고에서 남은 우유를 꺼내 마시고 목욕을 하고 얼큰한 국밥을 사 먹으리라. 지옥 같은 부엌에 갇혀 똑같은 모양의 검은 절망을 말 만큼 나는 바보가 아니다. 그러나 바보는 죽어도 바보라면서요, 스님.
책을 읽다 까무룩 든 잠의 꿈속에서 운전을 하고 있었다. 가끔 높은 장벽이 세워져 있어 옆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차의 방향이 마구 뒤섞이는 난잡한 도로 위에서 열심히 핸들을 돌려댔다. 어이없게도 브레이크와 가속페달을 밟는 공간이 마치 두터운 요 사이에 발을 집어넣은 것처럼 꽉 끼어서 소형차라 그렇다,고 꿈속에서 투덜거렸다. 헌데 한참을 서툴고 미련하게 경사진 도로들 구불거리며 운전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페달이 세 개였다. 지금껏 브레이크라 생각하며 밟아댔던 건 클러치였고, 가속페달이라 생각했던 건 브레이크였다. 아뿔싸. 그걸로 운전이 됐다는 것도 꿈이니 상관없지만 의뭉스러운 나는 마지막 오른쪽에서 가속페달의 존재를 발견하고는 허둥거리던 감정을 동행인에게 알리지 않았다, 들키지도 않았다. 그저 조급하게 발을 바꿔 올리고는 어수룩한 운전을 계속 했다. 그렇게 댓바람부터 열심히 되도 않는 운전을 하고 잠에서 깨니 심하게 피곤했다.
잠들기 전 이 책 <처녀치마>를 읽고 있었다. 읽다 잠든 책은 꿈에서 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인생의 어느 때부터 브레이크와 가속페달과 클러치를 얼마나 잘못 밟아대며 살았던 것일까. 잘못 밟아댄 것을 깨닫고나서도 슬며시 감춰버리는 일을 숱하게 반복하지는 않았을까. 죽어서도 바보인 바보처럼 여자는 '똑같이 검은 절망을 국에 말' 것이 분명한 것처럼, 꿈속에서 허망하게 발견했던 세 번째 가속페달처럼, '산다는 일엔 애당초 그 어떤 아름다운 실마리도 없다는 걸. 누군가 우연히 제 손가락 마디를 이용해 실을 감고 조심스럽게 덧감아나가면서 만들어놓은 빈 공간, 누군가의 손가락이 빠져나가버린 그 허사의 자리에 자신이 도착했다는 걸.' 작가는 매몰차게 진실을 말한다. 인생은 지리멸렬, 다짐은 허무하고 뉘우침은 필연적으로 뒤늦다.
어색한 번역체의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고전임에도 어릴 때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머리가 굵어진 후에 읽어봐야 이미 자신은 옴짝달싹할 수 없는 곳에 서 있기 때문이다. 무릎을 치며 고전의 진리를 깨닫더라도 돌아야 할 터닝포인트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다. 10년 전쯤에 나는 <푸르른 틈새>를 읽었어야 했다. 지금의 나는 가속페달과 브레이크와 클러치를 구분 못하는 곳에 서 있고 터닝포인트는 초라하며 인생은 지리멸렬하고 암울할 뿐이다. 그나마 단 한 편의 리뷰에 이 책을 골라 절박한 선택을 할 수 있게 해 준 어느분 덕에 10년 후에 <처녀치마>를 읽는 일이 생겨나지 않았으니 그때의 뒤늦을 뉘우침을 '부등호가 살짝 몸을 돌려 앉는 이 봄에' 막아냈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