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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과 남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5년 8월
평점 :
정글에서 기어다니는 수많은 벌레처럼, 수많은 방향으로 뻗쳐 춤을 추듯 지면을 기다가 마침내 모든 물이 한 거대한 틈새로 쏟아져 내린다. 정말 에로틱한 광경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의미를 그대로 재현한 세계가 이 세상에 출현해 있었다. 음과 양, 남과 여, 뭐라 하든 상관없다, 상반되는 두 힘이 부딪치면서 지구를 만들어낸 그 경치의 박력에 나는 그저 압도되어 어질어질하면서도 눈길을 돌릴 수 없었다.
마치 직접 헬기를 타고 눈아래 이과수 폭포를 내려다보고 있는 착각에 빠져 현기증이 인다.
누군가의 말처럼 세상에는 바나나가 먹히는 사람과 바나나가 먹히지 않는 사람이 있다. 다행스럽게도 내게는 바나나가 먹힌다. 먹히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글 속에 늪처럼 빠져 허우적거릴 정도다. 반갑게 새로 만난 요시모토 바나나의 <불륜과 남미>는 '불륜'과 '남미'에 관한 단편집이다. 불륜과 남미를 이야기하며 어둠과 죽음을 말한다. 일상에서 '비일상적'인 불륜은 원시의 힘을 지닌 남미에서 '비일상'의 옷을 벗는다. 일상에서 '비일상적'인 죽음은 강렬한 탱고의 선율이 흐르는 남미에서 일상이 된다. 일상에서 불륜의 사랑을 겪는 기쁨도, 연인의 불륜으로 생겨난 슬픔도 채 몸으로 느끼지 못하던 그들은 이곳 짙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한 남미의 거리에서 사소한 것들, 일테면 거리와 나무와 공원 같은 것들을 방아쇠삼아 코피가 흐를 정도로 생생한 일상의 감정을 되찾는다.
바나나는 불륜의 사랑을 아름답다 칭송하거나 혹은 불륜에 빠지지 말라고 어불성설 충고하지 않는다. 그저 감정이 흐르는 곳으로 몸이 가도록 내맡기라 한다. 어느날 내 사랑이 믿음을 잃더라도, 오랜 시간 애써왔던 나날들이 무너져 내리더라도 그는 '우리 삶에 조금이라도 구원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작은 손을 내민다. 사랑이건 불륜이건 다 괜찮아, 이세상에 살아남았건 저세상으로 가버렸건 다 괜찮아, 하고 말하는 것 같다. 괜찮아, 그렇게 안간힘 쓸 필요 없어. 이제까지 잘 해왔잖아. 조금은 발걸음을 늦춰도 돼. 잠시 앉아 쉬어가도 돼,라고 광장 한 귀퉁이에 앉으라 잡아끌며 등 뒤에서 가만히 어깨에 손을 얹어주는 친구같다. 바로 하얀 스카프를 두르고 광장을 돌며 돌아오지 않을 자식을 향한 마음을 표현하는 아르헨티나의 엄마들에게 건네는 하치 하니이다. 뜨거운 물에 꿀을 타서 위스키와 레몬즙을 떨어뜨린 하치 하니를 마시며, 결코 치유할 수 없는 슬픔을 엷게 엷게 희석시켜 나가는 방식인 것이다.
바나나는 못내 누가 알아챌까 숨기며 마음졸였던 마음속 '조그맣고 깊은 어둠'을 더이상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이 '어둠'은 나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성장해 온 나의 일부분이고 함께 나이먹어 성장해가며 다른 모습으로 변할 풍요로운 것이다. 그렇게 그의 글을 읽으면 '조그맣고 깊은 어둠'이 치유되고 치유할 수 없는 슬픔은 그 색을 바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어스름 저녁거리를 걸을지도, 에비타의 묘 앞에 설지도, 이과수 폭포를 발아래 둘지도 모를 더없이 운 좋은 게 분명한 어느날, 나는 바나나의 저 글귀를 떠올리리라. '그 광경을 몇 번밖에 볼 수 없는 생명의 허망함을 저주'하리라. '그 숨막히는 아름다움 속에서' 옆자리의 사랑이 불륜이든, 타인이든, 혹은 죽음의 빈자리든 그게 무슨 상관일까. 살아가는 긴 시간 속의 한 장면일 뿐, 온전한 내 몫의 사랑스런 작은 어둠일 뿐, 옆자리의 그와 함께 길거리 신발가게에서 싸구려 파란 운동화를 똑같이 사서 신고 남미의 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싶다. 탱고의 선율이 어렴풋이 들려온다면 더없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