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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멋진 세상 1
아사노 이니오 지음, 천의성 옮김 / 애니북스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생활에서 벗어날 용기가 없는 자신에게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로 이것도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하'며 살던 다네다가, ‘긍정적/부정적/협조성/의심/사랑/성욕/불안/무기력/바보’의 이름표를 단 '나'들과 '제8230801회 나의 대책회의'를 하는 장면은 <소라닌>의 명장면 중 하나이다. 스물 몇 해 동안 8백23만8백1회의 '나의 대책회의'를 개최하다니 다네다도 꽤나 고지식하고 끈질기다. 그렇게 무수한 '나'와 싸우고 으르고 타협하던 다네다는, 어느 날 '거슬러 올라가 보는 거야, 그 흐름을!'이라는 정답일지 오답일지 알 수 없는 답을 내고는 정말로 흐름을 거스르다, 미련없이 죽어버린다. 기타 하나 달랑 남겨두고 말이다. 이 전개를 명쾌하다고 해야 할지, 당혹스럽다 해야 할지... <소라닌>에서 죽은 애인의 아버지와 명란젓을 나눠 먹고, 애인이 남겨둔 밴드에서 기타 연주를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가업을 이으며, 풍뎅이 유충처럼 생겨먹은 얼굴을 이력서에 붙이던 메이코와 다네다 무리들은 <이 멋진 세상>에서 제각각 다른 얼굴들을 하고 색종이 고리처럼 아슬아슬하게 엮여 등장한다. 그 많은 군상들은 다듬어지고 견고해지고 작가가 살아낸 시간 속에서 발효되어 메이코와 다네다 들이 된 것일까.
<소라닌>과 <이 멋진 세상>으로 인상깊게 나타난 80년생 작가 아사노 이니오는 끈질기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힘들고 괴로워도 죽지 말고 살아보라고, 언젠가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말한다.
올려다보면
이른 아침부터 시퍼렇게 맑은 하늘.
눈이 아프다.
문득 발밑에 느껴지는 익숙한 감촉.
아침부터 똥 밟았다.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는다.
내가 똥을 밟았다고 해서,
뭔가 큰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16th program. 멋진 세상
그 똥의 임자가 등에 화살을 맞은 검정개임을 발견하고 편의점 알바군은 말한다.
왜?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난 너 도와주겠다고 한 적 없어. 운이 없었다 생각하고, 길바닥에 쓰러져 죽어라.
작가는 잔인하리만치 시퍼런 현실을 눈앞에 들이댄다. 고개 돌리지 말라고, ‘이 멋진 세상’을 똑바로 보라고 말이다. 뒤늦게 검정개를 구해주러 찾아다니던 알바군은 길바닥에 넘어져 눈물콧물 범벅으로 목젖이 보이도록 외쳐댄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자...
그게 내 마음의 평화였잖아... 이제 됐어.
애써 ’평화롭고 무료한 일상을 되찾은’ 그는 코뼈 부러진 노숙자에게 구원 받은 검정개와 맞닥뜨린다.
아하하, 뭐야 저놈. 안 잡혀 먹혔잖아!!
헤헤헤, 뭐야?! 세상... 아직 살 만하잖아?
뒤늦게라도 길바닥을 뛰어다닐 수 있는 그런 순수함, 그래서 세상은 아직 살 만한 것인가 보다.
'내려놓고 홀가분해 할 꿈' 따위 언제 꿔 봤는지 기억조차 없이, 말하는 순간 스스로 놀랄 만큼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 치열하고 독하게 살아야 하는 걸까, 아니면 한번 살고 갈 세상 기왕지사 설렁설렁 살아 버릴까. 어느 잠 안 오는 밤에는 천정을 향해 알 수 없는 기합을 넣고, 숙취 따위와 싸우는 아침에는 될 대로 되라,성 싶어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고 방바닥을 뒹군다.
그게 아니잖아?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내 자신을 납득할 수 있는지가 문제잖아? -13th program. 잘 자요
난 그에게 괜찮다고 위무를 받고 있는 것도 같고, 호되게 야단을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 열심히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 괜찮아요. 도망가는 게 아니에요. 이래봬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하고 말해주는 것 같다. ‘이런 지랄 같은 세상, 거저 준대도 안 가져!’ 떼쓰는 내게 ‘가족들도 안녕하고, 애인도 있으니 그 정도면 충분한 거 아닌가요?’하며 도대체 뭘 더 바라는 거야? 질책하는 것도 같다. 위무와 야단. 아마도 그는 또 다른 작품에서도 계속 이 두 가지를 내게 줄 것 같다.
잘 살고 있어요. 하지만 지나친 욕망은 까마귀에게나 던져 주세요. 하고 말이다. 그러고는 덧붙이리라.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죽지 말고 살아보라고, 언젠가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