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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 보이는 것, 그것은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새침한 여고생처럼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얼굴을
프로필 사진으로 내건 가와카미 히로미라는 작가를 처음 만난 건
요시다 슈이치의 신작에 덤으로 끼어온 <나카노네 고만물상>에서였다.
접착식으로 사전처럼 장정한 노란색 표지도 맘에 들었지만
아무 기대없이 읽다가 이 작가, 범상치 않군,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력을 보니 수상 내역도 만만찮은데 한국에서는 그리 '뜨지' 않은 모양이다.
어쨌거나 분위기 좋고 거기에 주인까지 맘에 드는 찻집을 혼자만 알고 있는 것마냥 기분이 좋았다.
그 후로 몇 작품을 더 찾아 읽고 나서 얼마 전 <빛나 보이는 것, 그것은>을 읽게 되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시침을 뚝 따고 있는 모습의 작가가 무척이나 사랑스럽다.
외할머니와, 결혼하지 않은 엄마라는 조금 특이한 '여성스러운' 분위기의 가족을 지닌,
이름도 여성스러운 소년 미도리. 아직 오래 살지 않은, 닳지 않은 소년의 이야기는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나 이시다 이라의 <4teen>과는 또 다른 색깔을 지녔다.
개인적으로는 과장되지 않은, 성장소설 냄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무료해 보이면서도 묘하게 현실에서 조금 붕 떠 있는 듯한
가와카미 히로미만의 작품 분위기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의 날에 아버지 대신 손자의 학교에 갔다가 담임선생의 '배려'로
아버지한테 편지쓰기도 안 하는 재미없는 수업을 했다는 걸 알게 된 할머니의 일갈은
인상적인 부분이다.
"아버지가 없으면 어떻고, 어머니만 서른 명이면 어떻고, 쥐가 키우면 또 어때서? 그렇다고 꼭 불행해지라는 법이 있나?" 할머니가 계속 말했다. 쥐 슬하에서 크기는 싫은데, 하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애초에 남들과 똑같지 않으면 불행할 거라는 사고방식이 이런 우습지도 않은 교육적 배려를 낳은 거예요."
이런 말씀을 해 주는 할머니라면 날마다 마주앉아 수다를 떨고 싶다. 할머니는 또 이런 말씀도 한다.
"주변머리가 뭐야?" 어린 내가 물으면 할머니는 빙긋 웃으며, "속물근성을 동반한 정신적인 힘."이라고 대답했다.
"그 속물근성이란 게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어떤 일이든 그렇게 쉽게 좋고 나쁘고를 가를 수 있는 게 아냐, 미도리."
요즘처럼 하수상한 시절에 세상의, 인생의 중심을 잡아 줄 수 있는 '어르신'이 많았으면 싶다.
'애초에 남들과 똑같지 않으면 불행할 거라는' 조바심과 두려움을 안고 산 지 삼십 몇 년, 여전히 한참 더 살아야 미도리 할머니 같은 내공을 기를 수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