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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멋진 세상 1
아사노 이니오 지음, 천의성 옮김 / 애니북스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생활에서 벗어날 용기가 없는 자신에게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로 이것도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하'며 살던 다네다가, ‘긍정적/부정적/협조성/의심/사랑/성욕/불안/무기력/바보’의 이름표를 단 '나'들과 '제8230801회 나의 대책회의'를 하는 장면은 <소라닌>의 명장면 중 하나이다. 스물 몇 해 동안 8백23만8백1회의 '나의 대책회의'를 개최하다니 다네다도 꽤나 고지식하고 끈질기다. 그렇게 무수한 '나'와 싸우고 으르고 타협하던 다네다는, 어느 날 '거슬러 올라가 보는 거야, 그 흐름을!'이라는 정답일지 오답일지 알 수 없는 답을 내고는 정말로 흐름을 거스르다, 미련없이 죽어버린다. 기타 하나 달랑 남겨두고 말이다. 이 전개를 명쾌하다고 해야 할지, 당혹스럽다 해야 할지... <소라닌>에서 죽은 애인의 아버지와 명란젓을 나눠 먹고, 애인이 남겨둔 밴드에서 기타 연주를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가업을 이으며, 풍뎅이 유충처럼 생겨먹은 얼굴을 이력서에 붙이던 메이코와 다네다 무리들은 <이 멋진 세상>에서 제각각 다른 얼굴들을 하고 색종이 고리처럼 아슬아슬하게 엮여 등장한다. 그 많은 군상들은 다듬어지고 견고해지고 작가가 살아낸 시간 속에서 발효되어 메이코와 다네다 들이 된 것일까.
<소라닌>과 <이 멋진 세상>으로 인상깊게 나타난 80년생 작가 아사노 이니오는 끈질기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힘들고 괴로워도 죽지 말고 살아보라고, 언젠가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말한다.

올려다보면
이른 아침부터 시퍼렇게 맑은 하늘.
눈이 아프다.
문득 발밑에 느껴지는 익숙한 감촉.
아침부터 똥 밟았다.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는다.
내가 똥을 밟았다고 해서,
뭔가 큰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16th program. 멋진 세상

그 똥의 임자가 등에 화살을 맞은 검정개임을 발견하고 편의점 알바군은 말한다.
왜?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난 너 도와주겠다고 한 적 없어. 운이 없었다 생각하고, 길바닥에 쓰러져 죽어라.

작가는 잔인하리만치 시퍼런 현실을 눈앞에 들이댄다. 고개 돌리지 말라고, ‘이 멋진 세상’을 똑바로 보라고 말이다. 뒤늦게 검정개를 구해주러 찾아다니던 알바군은 길바닥에 넘어져 눈물콧물 범벅으로 목젖이 보이도록 외쳐댄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자...
그게 내 마음의 평화였잖아... 이제 됐어.

애써 ’평화롭고 무료한 일상을 되찾은’ 그는 코뼈 부러진 노숙자에게 구원 받은 검정개와 맞닥뜨린다.
아하하, 뭐야 저놈. 안 잡혀 먹혔잖아!!
헤헤헤, 뭐야?! 세상... 아직 살 만하잖아?

뒤늦게라도 길바닥을 뛰어다닐 수 있는 그런 순수함, 그래서 세상은 아직 살 만한 것인가 보다.

'내려놓고 홀가분해 할 꿈' 따위 언제 꿔 봤는지 기억조차 없이, 말하는 순간 스스로 놀랄 만큼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 치열하고 독하게 살아야 하는 걸까, 아니면 한번 살고 갈 세상 기왕지사 설렁설렁 살아 버릴까. 어느 잠 안 오는 밤에는 천정을 향해 알 수 없는 기합을 넣고, 숙취 따위와 싸우는 아침에는 될 대로 되라,성 싶어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고 방바닥을 뒹군다.
그게 아니잖아?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내 자신을 납득할 수 있는지가 문제잖아?     -13th program. 잘 자요

난 그에게 괜찮다고 위무를 받고 있는 것도 같고, 호되게 야단을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 열심히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 괜찮아요. 도망가는 게 아니에요. 이래봬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하고 말해주는 것 같다. ‘이런 지랄 같은 세상, 거저 준대도 안 가져!’ 떼쓰는 내게 ‘가족들도 안녕하고, 애인도 있으니 그 정도면 충분한 거 아닌가요?’하며 도대체 뭘 더 바라는 거야? 질책하는 것도 같다. 위무와 야단. 아마도 그는 또 다른 작품에서도 계속 이 두 가지를 내게 줄 것 같다.
잘 살고 있어요. 하지만 지나친 욕망은 까마귀에게나 던져 주세요. 하고 말이다. 그러고는 덧붙이리라.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죽지 말고 살아보라고, 언젠가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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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8 1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28 1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ng 2008-01-28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정말 오랜만에 올라온 님의 리뷰가
오늘 제 마음에 위로가 되는거 같아요
아침부터 퍼석퍼석한 월요일을 보냈거든요 ^^
지나친 욕심은 강물에나 던지고 살아봐야겠어요 흐

superfrog 2008-01-28 19:33   좋아요 0 | URL
몽몽님, 님에게 작은 위로를 선사했다니,
좋은 작품을 읽게 해준 아사노 이니오 작가에게 감사를 해야겠는데요?^^
내일은 좀더 말캉하고 보드라운 아침을 맞으시길.

치니 2008-01-28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소라닌2>를 읽어야 하는데...우선 그거부터 읽고 이 책을 읽어야겠어요.
이건 왠지 순서를 바꾸면 안될 거 같은 강박이 마구 마구...ㅎㅎ

superfrog 2008-01-28 21:18   좋아요 0 | URL
치니님, <소라닌>을 보실 예정이라면 <이 멋진 세상>을 먼저 읽으셔도 상관없어요. 소라닌이 (아마도) 후속작인 듯하고 정제된 느낌이 들거든요.^^

2008-01-28 2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28 2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nicare 2008-01-29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 아니고
아주 오랫만에 보는 리뷰네요.

별 일 없으셨는지요.

superfrog 2008-01-29 13:21   좋아요 0 | URL
아.. hanicare님, 아주 오래된 연인을 우연히 만난 듯
반갑고 쑥스럽고 그런걸요.
사실은 님 서재에는 몰래 들락거렸어요.
졸지에 학부형이 되신 것도, 쫀득하게 백석과 가자미 얘기 풀어내신 것도
읽었다죠. 백석 연작 잠수시키지 마세요.
게으른 저는 아직 다 못 읽었거든요.
책을 재밌게 봐서 썼는데 끄적이는 것도 안 하다 하려니 힘이 부쳐요..
자주 뵈어요^^

2008-01-29 1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29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라닌 1
아사노 이니오 지음 / 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봐요, 그럴 수 없으니까 인생이 괴로운 거 아냐.'

독약을 먹이고 싶으면 약 이름 정도는 가르쳐 줄 수 있지. 에헤헤.. 하며 방긋이 웃는 이라부에게 항변하는 어느 환자의 말처럼, 인생이 괴로운 이유는 '그럴 수 없으니까'이다. 때맞춰 '그럴 수 있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도쿄의 한 구석, '낮고 좁고 무거운' 하늘을 이고 회사 옥상에 쭈그리고 앉아 고양이한테나 푸념하던 메이코에게 '인생의 레일 따위에서 벗어나'라는 속삭임이 들려온다. 레일을 벗어나면 예전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드넓은 하늘을 볼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인생이 괴롭다.
프리터로 일러스트를 그리며 대학시절 시작한 밴드생활을, 본격적으로 활동하지도 접지도 못하는 다네다. 그럴 수 없으니 그 또한 괴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런 다네다에게 어느날 메이코가 감자같은 얼굴을 들이밀고 회사를 관뒀다고 말한다. 이제 그들에게 '그럴 수 있어서 행복한 인생이' 시작되는 것일까.

설마. 인생이라는 괴물 같은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 없다. 그 정도라면 누구나 이라부병원의 처방전 한 장을 받는 것으로 라 돌체 비타.. 노랠 부르며 살다가 마지막 눈을 감으리라. 둥글넙적하고 평범한 주인공들의 거창할 것 하나 없는 밋밋한 인생 이야기가 시작된다. 애초에 반짝거리기는커녕 스포트라이트조차 비추지 않는 불투명한 청춘, <소라닌>은 여름 한낮 사람 하나 없는 골목처럼 심심할 지경인 청춘 군상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조금만 더 죽어라 노력하면, '90일만 더 살면' 뭔가 좀 좋아질까 싶지만 기실 인생에서 놀라운 일들은 그렇게 쉽사리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다네다 밴드가 마지막으로 한번 해보자, 마음먹고 만든 앨범이 하룻밤 사이에 히트곡이 될 리 만무하고 다네다의 아버지가 지어준 밥과 명란젓 한 덩어리가 메이코에게 마법의 주문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골방에 박혀 날마다 텔레비전이나 부수며 살 수는 없으니 메이코는 다네다가 남겨둔 기타를 둘러맨다. 다시 한 번 '그럴 수 있어서 행복할'지도 모를 인생이 시작되는 것도 같지만, 엉망진창 연주를 하고 간신히 틀리지 않게 노랠 부르며 메이코는 생각한다.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는 거야. 하지만... 이 곡이 끝나면 언제나와 똑같은 생활이 시작돼.'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 노랠 부르고 나서 무대 위에 코를 박고 엎드린 메이코는 영화 <태풍태양>의 모기처럼 밋밋한 일상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자기만의 의례를 치러낸다. 이 장면이 얼마나 안타깝고 애처로우며 서글픈지는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자고 일어나 새로운 해가 떠올라도 어제와 같은 오늘이 반복되고, 심하면 기시감을 불러올 정도로 10년 전 어느날과 똑같은 나날이 이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 하찮은 꼴을 한 게 내 인생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다. 슬쩍 정류장 한 귀퉁이에 놔두고 떠나고 싶은 쓸모없는 물건처럼, 덩치 큰 배낭 같은 인생의 무게를 내다버리지 못해 누구나 질질 끌고 버티고 있는 거다. 어떤 이는, 하루하루가 행복하고, 죽는날까지가 아니라 사는날까지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인생이란 거 그렇게 누구에게나 헤헤 웃으며 행복할 수는 없는 노릇.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고 손을 놀려야 한다. 아침마다 잠이 덜 깬 얼굴로, 이 끔찍한 인간들은 다들 어딜 향해 가고 있는 걸까. 다 죽어버리든지! 저주를 퍼부으며 지하철을 타고 출근해야 하고, 이참에 거지같은 면상을 한 상사를 들이받을까, 아니꼽고 더럽지만 이번만 참고 넘어갈까, 매초마다 시덥잖은, 혹은 절체절명의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의 연속인거다. 그런 자질구레함이 모여 한달이, 1년이, 인생이 돼버린다. 때때로 회상인지 착각인지 모를, 내게도 반짝거리던 지난 시절이 있었지..하는 중얼거림을 하며 한번씩 가늘어진 눈을 하고 허공을 보면서 말이다.

어제와 같은 모습의 언제나 똑같은 생활이 시작되더라도, 메이코는 그때 '그럴 수 있는' 선택을 했기 때문에 조금은 인생이 괴롭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가출했던 애인이 돌아온다고 전화해 놓고는 그길로 황천길로 가버릴 수도 있는 게 인생이지만, 청춘 앞에 항상 찬란한 미래가 펼쳐져 있는 건 아니지만, 한번쯤 '레일을 벗어나라'는 검은 속삭임의 꾐에 빠져든다고 해도 세상이 무너지는 건 아니라고 작가는 말한다. 텔레비전을 던져 버린다고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내 손톱 아래 가시 하나가 세상의 전부가 되기도 하고, 세상의 전부가 발톱에 낀 때만도 못하게 하찮은 것으로 느껴지는 그 불합리하고 제멋대로인 게 청춘의 모습이니까.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무척이나 사실적이다. 만화의 본질이랄 수 있는 과장도, 남발하는 우연도, 따뜻함도, 청춘예찬도, 밝은 미래도, 로맨틱함도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공명수에 맞춘 작품이 아닌, 작가의 섬세한 감정에 함께 공명했을 때만이 화려하지 않은 작품 속에 숨겨진 작가의 내공을 발견할 수 있다. 툭툭 던지는 듯 하지만 묵직함을 지닌 작가의 생각들과 그것들을 무겁지 않게 받쳐 주는 경쾌한 유머, 그리고 치밀하고 섬세한 데생과 구도, 입체적인 전개, 무엇 하나 흠잡을 데가 없는 80년생 젊은 작가가 앞으로 어떤 작품을 보여줄지 몹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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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05 00: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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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frog 2007-03-05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방에 놀러 갈게요..^^

2007-03-05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7-03-05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기피인물인가봐요. 다들 속삭이고 가시네요..^^
0944님, 스스로 내준 숙제라 기꺼운 맘으로 하긴 했지만, 님 한마디 말씀이 엄청난 압빡이라는 거 아시죠..?^^;
참, 부끄러워서 저는 1권에 올려놨어요..

2007-03-05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07-03-08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진짜 사봐야지 안되겠어요, 제가 아는 모든 알라디너들이 한결같이 칭찬이시니...

superfrog 2007-03-08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348님, 이거 꼭 죄수번호 같잖아요..;; 추천은 보신다는 말씀인거죠?^^
치니님, 치니님도 이 책 보시고 나면 다른분께도 추천하고 싶으실걸요? 저처럼 메이코를 대문에다 걸고도 싶고요.^^

2007-03-08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7-03-09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345님, 역시 웃는 버섯을 드신게야..^^
혈액 속에 퍼진 독 성분이 빠져나가려면 하루 정도 걸린데요.
우리 잘 견뎌내봐요.ㅎㅎㅎ

습관 2007-06-21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서재에 들러봤습니다.
요즈음은 거의 서재에 오지 않습니다.
그래도 무슨 여운인지 이렇게 가끔씩 들렀다가 이런 보석같은 리뷰도 보고 가네요.
추천 누르고 갈게요.
 
허니와 클로버 9
우미노 치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릴 때 난 관람차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느려터지고 그저 높기만 해서,
딱 한 번 타보고는 질려버렸다.
제트 코스터에 루프 슬라이더.
가슴이 콩닥거리는 놀이기구 외엔
눈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젠,
왠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관람차라는 이 놀이기구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천천히 하늘을 가로질러 가기 위해 있는 것이다.
아마도
"조금 무섭다" 라느니 하면서...

 
자신을 봐주지 않는 사람을 바라봐야 하는 그는
그 사람이 바라보는 사람과, 그 사람과, 셋이서 관람차에 오른다.
또 다른 엇갈린 사랑을 하는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못하는 그와 관람차에 오른다.

 
그때
관람차가 밑으로 다 내려가기 전에,
세상이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 정도로 그 석양은,
아름다웠다...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가슴에 뜨끔, 하는 감각이 사랑인지도 모르는, 사랑인 줄 깨닫고는 당혹스러움에 줄행랑을 치는, 감당하기 힘든 알 수 없는 감정에 눈앞에서 밥도 못 넘기는, 아, 이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예감하고, 서글퍼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추스리고, 다독거리는, 체념하고, 바라보고, 체념하고, 바라보는, 어린 그들은 몹시도 사랑스러워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하아.. 하고 한번 큰숨을 내쉬게 된다. 그래, <허니와 클로버>는 섬세한 눈과 손으로 세상을 보고 세상을 담아 내는, 어리숙하고 섬세하고 몹시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이야기다.
이제 결말을 향해 가고 있어 못내 서운하고 안타깝다. <렛츠고, 이나중 탁구부>를 곁에 쌓아 두고 보며 한권 한권 줄어들 때 느낀 아쉬웠던 감정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한참 동안 다음권이 나오지 않을 때 맘속으로 이렇게 빌었었다. '우미노 치카님, 열심히 열심히 사서 읽을 테니 작가님은 그저 힘을 내서 그려 주세요!'하고 말이다. 그 바람이 가 닿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작품이 끝나가는 이제는 또 이렇게 빌고 있으니 중증이 맞겠지만 그래도 빌고 싶다. '이 어리숙하고 섬세하고 사랑스러운 것들에게 조금만 상처주세요!'
'행복하게 해주세요!'라는 바람은 두리뭉실 안일해 보인다. <맘보걸 키쿠>의 토키와 엄마의 말처럼 '젊음이라서 섬세하고 결벽할' 수 있으니까. '섬세하고 결벽하면서' 행복하다 느끼기는 쉽지 않으니까. 고약한 취미가 분명하지만 숨막혀 어쩔 줄 모르는 하구미를, 얼굴 붉히는 마야마를, 야마다를 보고 있으면 내가 행복해지니까, 그러니 너무 많이 아파하지 않게만 해주길. 눈물 흘리는 야마다에게는 손잡아주고 음료수를 건네주는 모리다가 항상 옆에 있기를. 

<허니와 클로버>를 첫 번째 읽었을 때는 그 복작복작함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간간히 재밌고 독특했고, 드문드문 싸한 아픔을 느꼈던 정도였다. 다시 읽었을 때 처음보다 사람들 사이의 엮여진 끈이 선명해지자 조바심 때문에 놓쳤던 다른 부분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노다메왕국의 백성이 되어야 비로소 <노다메 칸타빌레>의 참맛을 알 수 있듯이 <허니와 클로버>는 그 아이들이 사는 작은 공간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때서야 그 섬세한 디테일들을 느낄 수 있다. 기린을 통째로 빨아들이는 눈을 가진 자그마한 콜로보클 하구미가 사는 마을, 훌쩍거리며 밤길을 걷는 야마다 뒤에 리더를 데리고 슬그머니 나타나는 노미야씨가 있는, 자아를 찾아 떠난 다케모토와 그를 기다리는 교수님이 있는 마을. 끝없이 하늘로 하늘로 향하는 탑을 쌓는 다케모토와 거대한 캔버스를 앞에 두고 앉은 요정처럼 작은 하구미의 작업실이 있는, 초콜릿과 민트와 산딸기향이 나는 도시락을 싸서 벚꽃놀이를 가는 하구미와 야마다가 있는 마을.
그리고 마을 어귀에는 석양을 등지고 천천히 돌고 있는 낡은 관람차가 있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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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4 1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6-11-04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명님, 저는 그게 능력이라 생각해요. 그 섬세한 감정에 공명할 수 있는 능력, 그게 반드시 성에 따라 주어지는 것도 아니더라구요.^^ 단순하게 두 패로 갈랐을 때 여자쪽에 좀 더 그 편중되어 주어지는 건 맞는 것 같지만요. 그래서 저는 공명할 수 있어 다행이다, 싶어요.^^ <허니와 클로버>는 사실 몹시 유쾌한 만화에요. 어떤 장면에서는 거짓말 안 보태고 떼굴떼굴 구를 정도에요.(예를 들자면 아빠머리통 장면. 보시면 알아요.^^) 작가가 대단한 건 심하게 웃기고 심하게 사랑스럽고 심하게 안타까운 장면들이 아무런 어색함 없이 같이 잘 뒤섞여 있다는 거죠. 님이 선택해주셨다니 기쁜걸요. 어떻게 보실지도 많이 궁금해져요. 혹 적응이 한번에 안 되시면 한번 더 보시길. 두번째는 더 재밌어져요.^^

superfrog 2006-11-05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좋아요, 좋아.. 다시 보면 더 재밌어지는 건 아마도 쪼만한 글씨들이 바글바글한 것도 이유가 될 거에요, 그쵸?^^

2006-11-07 1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1-07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1-07 1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날개 2006-11-10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보겠다고 하고선 결국 다른 일때문에 오늘 리뷰 읽었어요..
리뷰 읽노라니.. 저는 눈물이 나려 합니다..
코끝이 찡해져 오는 이 감각이, 내가 느낀것을 금붕어님도 느꼈다는데서 오는 기쁨과 함께 전해져 오네요..
갑자기 책을 다시 들추고 싶어집니다....ㅡ.ㅜ

superfrog 2006-11-10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하구미는 하구미대로, 야마다는 야마다대로, 다케모토는 다케모토대로, 생각만 하면 아아, 이 사랑스러운 것들을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들어요. 젊고 어리숙하고 섬세해서 어쩔 수 없이 아파하는 애들을 보면 하.. 젊음이란 좋은 것이구나, 하고 늙은이 소리가 저절로 새나와요..;; 너무 이쁜 애들이죠? 작가는 어떻게 저런 아이들을 만들어냈을까요? 저는 한 세번 봤어요. 볼 때마다 더 재밌어지니 희한하죠?
 
시가테라 6 - 완결
후루야 미노루 지음 / 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세상은 온통 11월의 암울하고 절망적인 기운으로 가득 찼다고 외치는 <두더지>를 그리던 와중에 작가 후루야 미노루는 잠시 봄날 오후의 산책이라도 필요했던가 보다. <두더지>의 연재 사이에 시작된 <시가테라>는 학교폭력, 상해, 강간, 청부살인 등 섣불리 접근하기 꺼려지는 힘겨운 이야기를 하면서도 분명 숨막히는 긴장과 절망과는 한발 떨어져 밝은 색조를 띠고 있다.
'시가테라'는 '독어가 몸에 지닌 독'을 의미한다. 독은 공격의 수단이자 동시에 자신을 방어하는 잠재적인 무기가 된다. 고교생 오기노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지닌 시가테라의 힘으로 쉽사리 지나기 힘든 성장의 어두운 터널들을 애써 버텨나간다. 성장기의 거부할 수도 피해갈 수도 없는 고통의 시간을 관통하는 데 필요한 여과장치를 그는 오토바이와 여자친구에게서 찾는다. 그러나 젊음의 시간은 그렇게 알맞게 식은 죽처럼 편하게 넘길 수 있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오기노는 망가지고 배신당하고 좌절한다. 자신이 불행 덩어리가 아닐까 고민하며 악몽을 꾼다. 눈물과 콧물 범벅의 시간들을 보내며 오기노는 강한 어른이 된다. 스스로의 선택으로, 자신이 지닌 독으로 서서히 단련하여 어른이 되어 강해진다. 
'젊음의 푸가'라는 부제가 붙은 <시가테라>, 이나중에서 징글징글하게 귀여운 악동의 시간을 보내고, 그린힐에서 맘껏 오토바이를 타며 일탈을 맛본 작가는 젊음 또한 시가테라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자신을 지키면서 타인을 죽일 수도 있는 독, 이 양날의 힘을 지닌 독을 누구를 향해 어떻게 쓸 것인가는 독을 쥔 자에게 달려 있다. 독을 지닌 모든 것들이 현란한 겉모습으로 주의를 끌어 옭아매듯, 젊음의 어설픈 풋내는 마지막 한 모금을 넘길 때에야 쓴맛의 정체가 무엇인지 드러낸다. 타인을 향했던 독이 자신을 향해 있음을 피를 흘린 후에야 알게 되는 것이다. 오직 지나간 시간에 대해서만 그리워하고 푸념할 수 있으며, 태풍에 몸을 맡긴 그 시간에는 안타깝게도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곁눈질은 허락되지 않는다. 해서 젊음은 모두에게 주어지는 푸르른 열정의 독인 것이다.  
전봇대 뒤에 숨어 목을 길게 빼던 괴물은 벽장에서 얼굴을 내밀고 성장기의 변방에 다다른 오기노에게 마지막 질문을 한다. 정말로 이대로 잘 될 거라고 생각해? 오기노는 말한다. 나도 알아. 공부해서, 대학에 가서, 사회에 나가서, 어른이 돼서, 그래서..

그때 상상하던 것보다 몇 배로 괜찮은 사회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자신을 지나치게 의심하거나 집요하게 따지거나 불행 덩어리라고 저주하는 일은 없어졌다.
불안정함의 결정체였던 나는 이제 존재하지 않아...
난 재미없는 녀석이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점잖은 표정의 어른이 되어 모범답안의 수순을 걷는다면 망상의 폭주가 특기인 사랑스런 오기노가 아니다. 작가는 독자만큼 오기노에게 애정을 갖고 있었나 보다.
'재미없는 어른'이 되었다고 스스로 믿었던 오기노에게는 다행히도 훈풍의 시가테라가 남아 있었다.
예의 그 폭주하는 모습을 보이며 오기노는 이렇게 말한다.

내일... 두카티나...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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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03 2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5-11-03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네.. 즐겁게 완결되었어요. 아, 그리고 그 잠깐 스치는 생각은 제게 몹시 영광인걸요? 마나마나를 열심히 들여다보긴 했지요..^^

날개 2005-11-03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대한 금붕어님의 리뷰가 올라올걸 기대하고 있었어요..^^*
리뷰 넘 멋집니다..!

superfrog 2005-11-03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오기노 너무 귀엽지요? 어른이 된 오기노도 귀여워요.^^
후루야미노루님의 다음 작품은 뭘지 궁금합니다..!

어룸 2005-11-04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넘 멋집니다, 꼬옥 읽어볼께요!! ^ㅂ^)b
(아...낑깡모가 이작가 좋아하는데 안사려나...^^a)

2005-11-04 0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5-11-04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oofool님, 아, 낑깡엄마가 후루야미노루님을 좋아하시는군요? ㅎㅎ 아무래도 저랑 친구맺어야겠어요..^^ 시가테라 보세요, 재밌어요..^^
아침 일찍 다녀가신 님, 님이 편협하심 저는 어쩝니까..;; 만화는 긴 시간 감각이 적응할 시간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해요. 익숙해지지 않으면 놓치고 못 보는 부분들이 많거든요. 하긴 책이고 그림이고 음악이고 다 마찬가지죠. 헌데 만화를 너무 쉽고 가볍다고 생각하거든요. 시가테라 같은 만화만 봐도 절대 아닌데 말이죠. 그 책, 보셨군요. 동경만경을 볼 때는 동경만이, 그 책을 볼 때는 히비야공원이 그렇게 그리웠더랬죠. 가본적도 없으면서 말예요..^^

쎈연필 2005-11-04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벌써 완결인가요 ㅠ.ㅠ

superfrog 2005-11-04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마님,ㅎㅎ 네, 끝났어요. 글고 보니 님과는 시가테라로도 인연이 있군요!^^
저는 맘에 드는 결말이었답니다..! 꼭 보세요..^^

panda78 2005-11-05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저는 후루야미노루님과는 코드가 안 맞아서 안 보지만, 금붕어님의 리뷰는 정말 멋져요. 저도 철썩! ^ㅂ^

panda78 2005-11-05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og in Car-Alex Colville 모모 생각나서 얼른 업어 왔어요. 모모보담 덜 이쁘고 더 꺼멓긴 하지만.. ㅎㅎㅎ

superfrog 2005-11-05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추천 감사드려요..^^;; (옆구리 좀 아프시죠??!)
판다님, 후루야 미노루 놓치기에는 좀 아까운데요.. 시가테라는 다른 작들과는 다르니 한번 다시 시도해보세요.. 아, 저는 참 많이 존경하는 작간데..^^;;;
ㅋㅋ 요즘 모모가 반항기인지 말도 잘 안듣고 그래요.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건가..;; 그림 감사합니다!!^^

플레져 2005-11-10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을 향해 품었던 독이 곧 자신을 향한 것이라니요..............
이렇게 뼈저린 말은 근래에 첨이야요.
멋진 리뷰여요! ^^

115563


superfrog 2005-11-11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시가테라 제가 좋아하는 작가 작품이에요..^^ 오죽하면 제 서재 소개글에도 나왔겠어요..ㅎㅎ
음, 음전한 님과 맞을지는 좀 우려되어 감히 추천은 못하겠어요..^^;;
독이 가진 의미를 좀 잘 풀어내야 했는데 머릿속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기는 참 어려워요. 그러니 님처럼 글을 잘 쓰시는 분이 어찌나 부러운지..ㅠ.ㅜ

2005-12-07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dddpower 2006-04-22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는 천재입니다

superfrog 2006-05-06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ddpower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반갑습니다.!
 
식객 9 - 홍어를 찾아서
허영만 지음 / 김영사 / 2007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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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만은 이제 단순한 만화가가 아니다. 허영만이라는 이름 뒤에 붙는 화백이라는 칭호는 이제 어색하거나 부담스럽지 않다. <각시탈>이나 <무당거미>, <비트>에서 함께 떠올릴 수 있는 반항과 일탈의 그림자는 이제 그의 동안의 외모에서나 그 희미한 그림자를 붙잡는 것이 가능하고, 굳이 그의 데뷰 연도인 74년을 끄집어내어 보면 화백이라는 호칭은 그다지 거북살스럽지 않다. 단순하게 데뷰연도뿐만 아니라 그가 지나온 흔적을 살펴보아도 그는 명실공히 한국 만화계의 버팀목이라 할 수 있는 훌륭한 만화가다.
표류하는 청춘을 다룬 <비트>, 잘 짜여진 스토리를 뒷받침으로 한 <미스터 Q> 이후로 방향을 튼 그의 작품 세계는 이제 <사랑해>와 <식객>에서 비로소 화백이라는 칭호에 걸맞는 무게를 갖춘다. 동시에 젊은 시절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었던 반항의 기운과 거친 모습을 식객에서는 볼 수없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모가 난 부분이 둥글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이 반드시 예민한 더듬이들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안타깝다. 그만큼 <식객>은 '화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무당거미>나 <세일즈맨>, <타짜>보다는 <사랑해>쪽에 걸맞은 '화백'표 만화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책에 많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는 당위는 바로 취재력에 있다. 
만화는 오로지 만화로 승부해야 한다는 게 지론이지만 식객을 읽으면서 개개의 에피소드 뒤에 붙은 뒷얘기를 읽는 재미는 만만치 않다. 만화의 인프라가 되면서도, 만화의 완성도를 위해 어쩔 수없이 잔가지들을 쳐낼 수밖에 없는, 물 아래 숨은 빙산만큼 커다란 덩어리가 바로 만화 뒤 취재수첩 안에 숨어 있다. 에피소드 하나 하나를 읽어가자면 왜 겉으로 보여지는 만화가 원초적이고 감각적인 즐거움은 그다지 크지 않은가 이해할 수 있다. 뭉긋하고 따뜻한, 옆집 아줌마나 아저씨 같은 우리네 이웃의 성정은 느껴지지만 가슴을 후벼파거나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전율은 느낄 수 없다. 대신 슬그머니 코끝이 찡해지는 정도의 감동은 느낄 수 있다. 해서 읽으면서 조금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아.. 그는 이제 화백이 되었구나, 아무리 취재력이 뒷받침된다고 해도 그에게서는 예전의 애끓는 젊음의 감각을 느낄 수 없구나, 했더랬다.
그러나 에피소드 뒤에 많은 공간을 할애한 공들인 페이지들은 그(의 팀)가 하나의, 더 버릴 것도 더할 것도 없는 완전하게 짜여진 에피소드를 위해 포기해야 했던 무수한 정보들은 얼마나 많았을 것이며, 아쉽게도 제자식을 놓아버리듯 게재할 수 없었던, 극화할 수 없었던 무수한 정보들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에 생각이 미쳤다. 그러자 그 밋밋하게 여겨졌던 에피소드들은 정제 중에 정제만을 모아 놓은 보석같은 존재들로 여겨졌다. 그렇다. 그는 그렇게 만만한 만화가가 아닌 것이다. 그가 취재를 하면서 자가용이 아닌 시골버스만을 이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은 것은 바로 그의 만화에 보이지 않는 완성도의 밑받침이 되었던 것이다. 말초적인 감각이 아닌 가슴 깊은 곳, 발끝에서부터 온몸으로 전해지는 감동을 그는 찾아나섰던 것이다.  

바다에서의 취재는 긴장의 연속입니다. 날카로운 어구와 거친 날씨. 무엇 하나 만만한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 꼬박 열세 시간 동안 전해지는 바다의 리듬은 극도의 피곤을 동반합니다. 육지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풍경이지만 고기잡이배를 타고 바다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치열한 삶의 현장입니다.

9권 '홍어를찾아서'를 취재하며 겪었던 경험에 대한 내용이다. 드러나지 않는 물 아래 잠긴 거대한 얼음덩어리인 취재의 노력은, 물밖의 짐짓 허술해 보이는 에피소드를 비춰 주는 거대한 조명이다. 제 자신은 스포트라이트 뒤 어둠 속에 있지만, 그림을 보는 독자로 하여금 경험하지 못한 음식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신비의 힘, 도봉산 초입의 봄동겉절이와 김밥을 먹고 싶게 만드는, 고추장굴비를 담가 보고 싶게 만드는, 흑산도로 홍어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세상 떠난 어머니의 김장김치맛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난생 처음 듣는 옻나무 순의 맛을 궁금하게 여기게 하는 마법의 힘이 바로 그림에 빛을 주는 글자의 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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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28 0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5-08-28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 속닥님.. 날이 선선해져서 모모는 물론이고 저도 한시름 놓았어요.
이젠 저녁나절 산책길이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아요. 예전에는 가관이었죠..
강쥐는 구둣주걱같은 분홍혀를 내놓고 헉헉대고 주인은 땀범벅이 되어 끌려다니고..ㅎㅎ
안부 물어봐주셔서 감사해요. 님, 제 새 집도 아시면서..^^

superfrog 2005-08-28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그림 속 알록달록 금붕어들이 이뻐요..! 감사합니다요^^

2005-08-28 0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8-28 0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8-28 0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5-08-28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00:30 속닥님, 오세요!! 오세요!! 언제나 환영이에요! 제가 날개님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상시 만화방 운영중입니다.. 게다가 필살기인 모모도 있잖아요..ㅎㅎ
00:32 속닥님, ㅎㅎ 저도 허영만 아주 많이 좋아해요..! 약간 나이 먹은 분위기가 안타깝기는 하지만서도 도리안그레이가 아닌 이상 나이먹으며 변하는 부분도 있어야잖아요.ㅎㅎ 저랑 많은 부분이 일치해요! 이 책 읽으며 다시 한번 허영만 작가에게 반했지요.. 장인정신을 고수한 2등이 더 값지게 느껴져요.^^

superfrog 2005-08-28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00:34님, 그러게 말예요..ㅋㅋ 모모가 요즘 유명세를 탄다니깐요..ㅎㅎㅎ

2005-08-28 0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5-08-28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00:40님, 공항에서 김포시내로 들어오셔야 하는데요, 오신다면 제가 덥썩 물으러 갈게요..^^

superfrog 2005-08-28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 그 사이 새벽별님.. 그다지 속닥글일 게 없는데요.. ㅎㅎㅎ 그게 말이죠, ㅍ 님과 ㄲ님이 워낙에 부끄럼을 타시는지라..ㅋㅋㅋ 저도 식객 좋아요. 빌려서 봤는데요, 조만간 사려구요.ㅎㅎ

2005-08-28 0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5-08-28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00:45님, 님 서재로 갈게요..^^

2005-08-28 0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완성 2005-08-28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 금붕어님 리뷰를 읽고 나니 마치 한국어를 배운 지 얼마 안된 외국인이 쓴 것마냥 어설픈 언어로 가득 찬 제 리뷰가 부끄러워질 정도예요. *.* 뒤늦게 읽은 만화에서 느꼈던 '어른 허영만'이 아닌 청년 허영만의 모습까지도 보셨더랬구만요. 아, 역시 독서의 길은 멀고도 멀어요..허허..아무튼 단숨에 9권까지 읽어버린 님의 독서열에 감탄, 또 감탄하고 갑니다 ^-^

superfrog 2005-08-28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멍든님, 그런 말씀 마시어요..ㅠ.ㅜ 다시 읽고 나니 창피스러워서 고치고 싶은데 고칠 재간도 안 되어 그냥 민망해하고 있다구요..;;; 여튼 님 덕에 식객 찾아서 봤어요.^^ 대여점에다 갖다놓으라고 호령해서 봤답니다.ㅎㅎ 이제 구입하려고 해요. 잘 만든 만화는 사야 한다,라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능력이 닿는 데까지..;;

날개 2005-08-28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앗~ 여기는 속닥거려야 하는 곳? +.+
저 아직 이 책 못봤어요... 사실은 안봤다는 쪽에 가까워요.. 별로라는 평을 제법 들어서...^^;;;
하지만 금붕어님 리뷰에 넘어가고야 맙니다.. 보겠습니다..! 불끈~

superfrog 2005-08-28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저도 사실 만화 자체는 좀 민숭민숭해요. 그래서 제멋대로 화백표 만화라고 이름지었는데요, 그게 또 무시할 수 없는 뒷배경이 있단 말씀이죠. 책을 정성들여 만들었어요.^^ 만화도 만화지만 솔직히 작가인 허영만에게 많이 반했답니다. 인간적으로요.. 휴지를 안 쓰기 위해서 손수건을 들고 다니고 꼭 시골버스로 취재를 간다고 하네요. 더 많이 사람들과 접하기 위해서요. 9시 출근, 6시 퇴근. 점심먹고 낮잠. 이런 식으로 자기관리가 철저한 작가니 취재력은 오죽하겠어요.^^ 더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구입하기로 맘먹었지요.ㅎㅎ 님도 어여 보세요!!

Laika 2005-08-28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식객" - 이거야 말로 라이카가 봐야할 책 아니겠습니까? 음~ 오랫만에 함 사볼까요? (이제 지를 시기가 온거군요..^^)

2005-08-28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8-28 15: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리스 2005-08-28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을지로의 리브로... 서점에 갔는데 그 앞에서 식객 시리즈를 한꺼번에 구입하는 어떤 부부를 보았습니다. ^^ 저는 지름신을 멀리하고 있는 중이라. -.-

superfrog 2005-08-28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이카님, 식객 보세요.. 정말 님의 관심분야와 잘 맞아떨어지는데요?^^ 지르세욧!
15:15 속닥님, 그렇지않아도 저 숫자를 잡을까 말까 했었는데..ㅎㅎㅎ 와, 님이 잡아주셨네요! 헤헤, 감사합니다! 추천두요.^^ 허영만, 좋아요..
낡은구두님, 어맛, 반갑습니다..! 아니, 서점에서 그렇게 바람직한 부부를 만나셨군요! 저희 부부도 서점에 가서 한꺼번에 확 지를까요..? 지름신 조금만 멀리하시고 좀 지나 또 친해지세요!^^;;;

Laika 2005-08-28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요...전체를 다 살수도 없고(형편상,...) 잠시 고민중이랍니다...

superfrog 2005-08-28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구입했으면 대여해드리는 건데.. 저도 아직 구입을 못했답니다.^^
한두 권씩 글자책이랑 같이 구입해서 모으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요?
한권 읽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거든요..ㅎㅎ

비로그인 2005-08-29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트>는 영화화된 작품, 맞는 거죠? 허영만 원작이었구나. 식객..글쿤요. 보기보단 성숙한 작품인가 봅니다.

superfrog 2005-08-29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이님, 맞아요..^^ 정우성이랑 고소영이 나왔던.. 아, 유오성이랑 임창정도 나왔던. 근데요, 만화가 훨씬 재밌어요. 글고 식객은 만화도 재밌지만 작가의 글이 더 매력적이었어요.^^

sayonara 2005-09-30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객'의 감동은 글 몇 줄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깊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님의 글에는 감동이... 이런 리뷰가 올라올 줄 알았더라면 9권의 리뷰는 쓰지 않았으련만... 왠지 밑에서 초라해 보이는 나의... 울컥~ -_-#

영화 '비트'가 청춘의 환상이었다면, 만화 '비트'는 청순의 삶을 다룬 작품이죠.
마지막 눈물을 흘리며 헤어지는 로미와 민이의 결말 때문에 허영만씨가 욕을 엄청 먹었다는데, 사실 그게 왜 불행한 결말이겠습니까. 대한민국에서 못배우고 가진 것 없는 청년이 그 정도라면 나름대로 행복한 것이 아닐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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