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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만경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요시다 슈이치의 <동경만경>을 두 번째 읽고 나자 머릿속에서는 순서가 뒤죽박죽된 짤막한 글들이 파편처럼 생겨났다가 사라져간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이 글이 되어 나오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그 파편들은 계속 머릿속을 맴돌며 어떤 형태로든 정리를 하라 채근한다. 해야 할 일을 바로 눈앞에 두고 쳐다만 보고 있는 것처럼 찜찜한 상태로 며칠을 보낸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영화 <비포선라이즈>를 다시 보게 되었다.
영화 <비포선라이즈>의 엔딩은 그들이 함께 했던 짧은 하룻밤 동안의 시간을 거슬러간다. 거리의 공연과 벤치와 누군가의 집 옆 의자, 이름모를 묘지, 공원의 잔디밭이 지나쳐간다. 그 공간들에 두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들이 함께 했던 시간과 그 기억만은 남아 있다.
가슴에 난 화상의 상처만큼이나 커다란 마음의 상처로 사랑을 믿지 않는 남자 료스케와 애초부터 진실한 사랑이란 건 없다고 믿고 있는 여자 미오,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한다. 둘 사이의 간격은 에둘러가는 동경만만큼이나 먼 거리를 두고 있다. 그들은 애초부터 간격을 좁히려는 노력을 선택하지 않는다. '마음이 육체보다 상처받기 쉽다는 것을, 사람의 마음은 언제 변할지 모른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마음'이 아닌 '몸'을 택한다. 애써 열리려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더욱더 의도적으로 몸에 빠져든다. 그러나 그들의 우회하던 마음은 바다를 관통하는 철로가 동경만의 간격을 좁혀 주었듯이 마침내 접점을 찾는다.
소설에는 몇 개의 장치들이 있다. 료스케의 가슴에 난 화상의 상처와 소설의 주 무대가 되고 있는 동경만, 소설 속 소설인 '동경만경', 그리고 영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일식>이 그것이다.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영화 <일식>의 마지막은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영원히 만나 사랑할 것을 맹세하던 두 연인이 바로 오늘밤의 만남을 내던져버리는 장면을 보여준다. 약속장소에 두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그들이 없는 거리만을 계속 비추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몸이 아닌 마음의 접점을 발견한 료스케와 미오, 둘은 여전히 그것을 인정하기를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을 안고 영화 속 장면처럼 미오도 료스케와 만날 약속을 한다. 만의 이쪽 마천루의 흡연실 유리를 통해 만의 저쪽 컨테이너 창고를 바라보는 연인은 연애를 통해 각자를 얽어매고 있던 한계에서 벗어나 변화의 발을 내딛는다.
영화 <비포선라이즈>의 엔딩이 현실에서 한발 비껴난 꿈같은 하룻밤의 기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면 영화 <일식>의 엔딩은 사랑의 맹세의 허망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경만경>의 빈 약속장소는 자각에 따르는 변화를 위한, 잠시의 숨고르기다.
<동경만경>을 읽다보면 제목 그대로 동경만의 풍경이 손에 잡힐 듯이 눈앞에 펼쳐진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어색한 대화를 나눴던 모노레일과, 한밤중 료스케가 스쿠터를 질주하던 안벽, 수많은 컨테이너들이 줄지어 선 부두와 미오가 료스케에게 사랑을 믿게 되었음을 안간힘쓰며 알려주던 컴컴한 골목길 들이 선명한 이미지가 된다. 책장을 덮고 나서 문득 동경만에 가보고 싶어졌다. 세피아톤의 책표지처럼 어스름 하루가 끝나가는 동경만에 앉아 미오를 향해 동경만을 헤엄쳐 건너올 료스케의 모습을 지켜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