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없는 사람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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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몹시 재밌고 유쾌한 농담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읽다 보면 가슴이 너무 아프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돌고래들처럼
나도 '물고기는 고마웠어요..'하며 지구에 작별을 고하고 싶다.
지구의 자정작용은 반드시 이뤄져야 하며, 그래서 인간종을 멸종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아래 글은 부시를 향한 글이며 미국에 대한 글임에도 현재의 우리땅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이름도 부르고 싶지 않은 2mb는 최시중도 모자라 부시를 멘토로 삼았나 보다.

pp.98-101 
언젠가 나는 정말로 무서운 리얼리티 프로를 만들어볼 생각이 없냐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모든 사람의 머리가 쭈뼛 설 만큼 무시무시한 프로를 구상하고 있다. 제목은 ‘예일대 C학점’이다.
조지 W. 부시는 주변에 C학점 상류계급 학생들을 끌어모았다. 그들은 하나 같이 (1) 역사와 지리를 전혀 모르고, (2) 백인 우월주의를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3) 이른바 기독교도이며, (4) 정말 놀랍게도 정신병자, 즉 영리하고 번듯하게 생겼지만 양심은 전혀 없는 자들이다.
특정한 사람을 정신병자라 부르는 것은 맹장염이나 무좀 진단을 내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학적으로 매우 적절한 진단이다. 정신병자의 의미를 규정한 고전적 의학 서적으로는 조지아 의과대학의 정신의학과 임상교수인 허비 클러클리 박사가 집필하고 1941년에 출간한 [정상성의 가면The Mask of Sanity]이 대표적이다. 꼭 읽어보시기를!
어떤 사람은 청각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고 또 어떤 사람은 시각 장애를 갖고 태어나는데, 이 책은 특별한 선천적 결함 때문에 온 미국은 물론이고 지구상의 많은 나라들을 광분케 하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그들은 바로 양심 없이 태어났다가 갑자기 모든 것을 책임지게 된 사람들이다.
정신병자들은 버젓한 외모를 갖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끼칠 고통을 충분히 잘 알면서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무심한 것은 돌대가리이기 때문이다. 나사가 풀린 미치광이기 때문이다!
또한 수많은 종업원들과 투자자들과 온 나라의 순수한 국민들을 파멸로 몰아넣고 그 대가로 자신들의 배를 불린 다음 빗발치는 비난에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는 엔론과 월드컴의 임원들을 다른 어떤 말로 정의할 수 있겠는가? 바로 그들이 백만장자를 억만장자로 만들고 억만장자를 조만장자로 만드는 전쟁을 주도하고, TV 방송국을 소유하고 있으며, 조지 부시에게 돈줄을 대고 있다. 이는 부시가 동성 결혼에 반대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결단만 하면 우리나라를 끝없는 전쟁에 몰아넣을 수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사실 이렇게 많은 정신병자들이 기업과 정부의 고위직에 오를 수 있는 것도 남다른 결단력 덕분이다. 그들은 하루가 멀다 않고 빌어먹을 짓들을 해대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정상인들과는 달리 그들은 결코 의심을 품지 않는다. 다음에 일어날 일을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그런 능력이 없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군대를 동원하라! 공립학교를 사립화하라! 이라크를 공격하라! 의료 혜택을 줄여라! 국민의 전화를 도청하라! 부자들의 세금을 줄여라! 수천억 달러짜리 미사일 방어망을 구축하라! 인신보호법과 시에러 클럽과 인디즈타임즈를 엿 먹여라. 내 엉덩이를 닦아라!
우리의 소중한 헌법에는 비극적 결함이 있지만 그걸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결함은 바로 미치광이 환자들만이 우두머리가 되고자 나선다는 것이다. 심지어 고등학교에서도 그랬다. 정서 장애가 분명한 아이들만 반장 선거에 출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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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8-06-04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시절을 보냈던 80년대 후반기로 시간을 되감아버린 것 같습니다.
아니 그때보다 더 갑갑하네요...

superfrog 2008-06-04 20:55   좋아요 0 | URL
조만간(이라고 해도 지구의 시간은 인간의 계산법으로는 어림없겠죠..)지구의 자정작용이 발동되지 않을까요.. hanicare님의 학부형 생활은 어떠신가요..? 님의 꼬마가 많이 궁금해요.^^

mong 2008-06-04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를 먹었을 때 세상에 대한 분노보다는 유머를 지키고 싶은데
이 냥반만큼이나마 되면 다행이지 싶어요
'어떻게 세상이 이따위인데 이렇게 유쾌한 글을 써주었지?
아...그래서 조금 더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게로군' 하고 혼자 생각해요

superfrog 2008-06-04 20:59   좋아요 0 | URL
kv할배의 위치라면 분노를 유머로 승화시키는 데 있어 극상의 위치가 아닐까요..?^^ 이 문장이 참으로 서글펐어요. '그래서 나는 손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날 쳐다보지 마라. 그냥 이렇게 됐구나." 예전 <타이탄의 미녀> 책이 너무 엉망으로 만들어져 속상했는데 다른 책들도 다시 찾아 읽어야겠어요.

2008-06-04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6-05 1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08-06-05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줄에 밑줄 쫙! 고등학교에서도 정말 그랬어요 ~~ ! ㅋㅋ

superfrog 2008-06-05 21:01   좋아요 0 | URL
치니님, 그런가요?^^
정말 보네거틱한ㅋㅋ 부분은 책을 읽으실 분을 위해 남겨뒀어요.^^

2009-07-02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 멋진 세상 1
아사노 이니오 지음, 천의성 옮김 / 애니북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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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서 벗어날 용기가 없는 자신에게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로 이것도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하'며 살던 다네다가, ‘긍정적/부정적/협조성/의심/사랑/성욕/불안/무기력/바보’의 이름표를 단 '나'들과 '제8230801회 나의 대책회의'를 하는 장면은 <소라닌>의 명장면 중 하나이다. 스물 몇 해 동안 8백23만8백1회의 '나의 대책회의'를 개최하다니 다네다도 꽤나 고지식하고 끈질기다. 그렇게 무수한 '나'와 싸우고 으르고 타협하던 다네다는, 어느 날 '거슬러 올라가 보는 거야, 그 흐름을!'이라는 정답일지 오답일지 알 수 없는 답을 내고는 정말로 흐름을 거스르다, 미련없이 죽어버린다. 기타 하나 달랑 남겨두고 말이다. 이 전개를 명쾌하다고 해야 할지, 당혹스럽다 해야 할지... <소라닌>에서 죽은 애인의 아버지와 명란젓을 나눠 먹고, 애인이 남겨둔 밴드에서 기타 연주를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가업을 이으며, 풍뎅이 유충처럼 생겨먹은 얼굴을 이력서에 붙이던 메이코와 다네다 무리들은 <이 멋진 세상>에서 제각각 다른 얼굴들을 하고 색종이 고리처럼 아슬아슬하게 엮여 등장한다. 그 많은 군상들은 다듬어지고 견고해지고 작가가 살아낸 시간 속에서 발효되어 메이코와 다네다 들이 된 것일까.
<소라닌>과 <이 멋진 세상>으로 인상깊게 나타난 80년생 작가 아사노 이니오는 끈질기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힘들고 괴로워도 죽지 말고 살아보라고, 언젠가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말한다.

올려다보면
이른 아침부터 시퍼렇게 맑은 하늘.
눈이 아프다.
문득 발밑에 느껴지는 익숙한 감촉.
아침부터 똥 밟았다.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는다.
내가 똥을 밟았다고 해서,
뭔가 큰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16th program. 멋진 세상

그 똥의 임자가 등에 화살을 맞은 검정개임을 발견하고 편의점 알바군은 말한다.
왜?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난 너 도와주겠다고 한 적 없어. 운이 없었다 생각하고, 길바닥에 쓰러져 죽어라.

작가는 잔인하리만치 시퍼런 현실을 눈앞에 들이댄다. 고개 돌리지 말라고, ‘이 멋진 세상’을 똑바로 보라고 말이다. 뒤늦게 검정개를 구해주러 찾아다니던 알바군은 길바닥에 넘어져 눈물콧물 범벅으로 목젖이 보이도록 외쳐댄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자...
그게 내 마음의 평화였잖아... 이제 됐어.

애써 ’평화롭고 무료한 일상을 되찾은’ 그는 코뼈 부러진 노숙자에게 구원 받은 검정개와 맞닥뜨린다.
아하하, 뭐야 저놈. 안 잡혀 먹혔잖아!!
헤헤헤, 뭐야?! 세상... 아직 살 만하잖아?

뒤늦게라도 길바닥을 뛰어다닐 수 있는 그런 순수함, 그래서 세상은 아직 살 만한 것인가 보다.

'내려놓고 홀가분해 할 꿈' 따위 언제 꿔 봤는지 기억조차 없이, 말하는 순간 스스로 놀랄 만큼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 치열하고 독하게 살아야 하는 걸까, 아니면 한번 살고 갈 세상 기왕지사 설렁설렁 살아 버릴까. 어느 잠 안 오는 밤에는 천정을 향해 알 수 없는 기합을 넣고, 숙취 따위와 싸우는 아침에는 될 대로 되라,성 싶어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고 방바닥을 뒹군다.
그게 아니잖아?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내 자신을 납득할 수 있는지가 문제잖아?     -13th program. 잘 자요

난 그에게 괜찮다고 위무를 받고 있는 것도 같고, 호되게 야단을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 열심히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 괜찮아요. 도망가는 게 아니에요. 이래봬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하고 말해주는 것 같다. ‘이런 지랄 같은 세상, 거저 준대도 안 가져!’ 떼쓰는 내게 ‘가족들도 안녕하고, 애인도 있으니 그 정도면 충분한 거 아닌가요?’하며 도대체 뭘 더 바라는 거야? 질책하는 것도 같다. 위무와 야단. 아마도 그는 또 다른 작품에서도 계속 이 두 가지를 내게 줄 것 같다.
잘 살고 있어요. 하지만 지나친 욕망은 까마귀에게나 던져 주세요. 하고 말이다. 그러고는 덧붙이리라.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죽지 말고 살아보라고, 언젠가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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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8 18: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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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8 18: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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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8-01-28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정말 오랜만에 올라온 님의 리뷰가
오늘 제 마음에 위로가 되는거 같아요
아침부터 퍼석퍼석한 월요일을 보냈거든요 ^^
지나친 욕심은 강물에나 던지고 살아봐야겠어요 흐

superfrog 2008-01-28 19:33   좋아요 0 | URL
몽몽님, 님에게 작은 위로를 선사했다니,
좋은 작품을 읽게 해준 아사노 이니오 작가에게 감사를 해야겠는데요?^^
내일은 좀더 말캉하고 보드라운 아침을 맞으시길.

치니 2008-01-28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소라닌2>를 읽어야 하는데...우선 그거부터 읽고 이 책을 읽어야겠어요.
이건 왠지 순서를 바꾸면 안될 거 같은 강박이 마구 마구...ㅎㅎ

superfrog 2008-01-28 21:18   좋아요 0 | URL
치니님, <소라닌>을 보실 예정이라면 <이 멋진 세상>을 먼저 읽으셔도 상관없어요. 소라닌이 (아마도) 후속작인 듯하고 정제된 느낌이 들거든요.^^

2008-01-28 21: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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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8 21: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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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8-01-29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 아니고
아주 오랫만에 보는 리뷰네요.

별 일 없으셨는지요.

superfrog 2008-01-29 13:21   좋아요 0 | URL
아.. hanicare님, 아주 오래된 연인을 우연히 만난 듯
반갑고 쑥스럽고 그런걸요.
사실은 님 서재에는 몰래 들락거렸어요.
졸지에 학부형이 되신 것도, 쫀득하게 백석과 가자미 얘기 풀어내신 것도
읽었다죠. 백석 연작 잠수시키지 마세요.
게으른 저는 아직 다 못 읽었거든요.
책을 재밌게 봐서 썼는데 끄적이는 것도 안 하다 하려니 힘이 부쳐요..
자주 뵈어요^^

2008-01-29 1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29 14: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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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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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대작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증에 걸리는 걸까. <태엽감는 새> 이후 일련의 장대한 스케일의 작품들을 사뭇 못마땅해 하며 청년 하루키쪽을 더 담아두고 싶어 한 나는, 요시다 슈이치가 조금 더 <파크라이프>와 <동경만경>쪽에 머물러 있기를 바랐던 바, 어느새 (혹은 벌써) '감히 나의 대표작'을 만들어낸 그가 몹시 서운하다. 그의 신작 '악인(惡人)'은 작가 스스로 '감히 나의 대표작이라‘ 여기겠다는 자신만만한 문구를 달고 출간되었다.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2007년 일본 최고화제작'이라는 호화로운 금색의 띠지를 허리에 두르고 있으니, 요시다 슈이치 씨, 이렇게 요란해도 되는 건가요, 하는 괜한 심술에 띠지를 휙 벗겨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한번 어긋난 심보는 삐딱한 시선까지 동반하는 게 당연지사, 읽는 동안에 이게 요시다 슈이치가 쓴 글인지, 혹시 미미 여사의 새 작품인지, 그도 아니면 내용도 대동소이하여 헷갈릴 정도인 한 단어 제목 류의 추리소설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만큼 그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색깔을 찾아볼 수 없었다. 눈앞에 동경만이 펼쳐진 듯한, 하늘을 찌를 듯 뻗어 오르는 나선형의 스파이럴 빌딩의 풍경을 선명한 영상으로 떠올리게 했던 그의 섬세한 묘사들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극도의 제한된 감정 묘사로 더욱 강한 감정을 뿜어내던 주인공들은? 그의 작품들의 중심을 이루고 있던 색들이 모두 대작 강박증에 빠져 제 빛깔을 잃어버린 것인가 몹시 안타까웠다. 설상가상 앞 장면의 마지막 단어에서 다른 장면의 첫 장면으로 이어지는 꼬리를 무는 방식은 몇 차례 반복되고, 신문연재로 인해 의도된 것으로 보이는, 캐릭터를 반복 설명하는 방식도 자꾸 눈에 띄어 종종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다행스럽게도 후반에 접어들수록 요시다 슈이치의 색깔이 선명해지고 그의 문체임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을 찾아볼 수 있었지만 '악인'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요리하려다 그 무게가 조금은 부담스러워 평이한 모양새를 택한 것일까, 혹은 자신의 빛깔을 부러 흐릿하고 평범하게 만든 것일까, 웬일인지 그의 새 작품은 추리소설과 르포가 혼재된, 작가의 색깔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소설이 되어 버린 듯했다.

여기까지는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들을 몹시 사랑한 나머지, 엄청난 기대치를 품고 작품을 읽은 한 열혈독자의 푸념이었다. 부풀린 기대치의 바람을 뺀 일반 독자로서 이 책을 다 읽고 난 느낌을 말하자면, 확실히 요시다 슈이치의 신작 '악인'은 그의 이전 작품들에 비해 다루는 주제에서나 분량 면에서 스스로 그의 대표작이라고 칭할 정도로 스케일이 큰 작품임에는 분명하는 생각이 든다.
별반 새로울 것도 없이, 이야기는 한 여자가 외딴 고갯길 도로변에서 목이 졸려 숨진 채 발견되는 사건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전날 밤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나가 만남사이트에서 알게 된 남자를 만나러 갔다가 살해당한다. 작가는 추리소설의 복선이나 복잡한 장치, 긴박감을 택하는 대신 일찍부터 범인의 윤곽을 드러내고 사건의 면면을 세심히 관찰하듯 전개시켜 나간다. 다각적인 시각에서 범인과 피해자를 둘러싸고 연결되어 있는 주변인들의 상황과 감정을 세밀하면서도 무심하게 전달하는 것으로, 대수롭지 않은 충동에 의해 저질러졌을 수도 있는 살인사건이 어떻게 '피라미드의 맨 밑에서 불쑥 돌을 뽑아내는‘ 것처럼 주변의 모든 것에 파장을 미치고 크나큰 울림을 가져다주는가를 보여준다. 마지막 장을 읽고 나면 날마다 눈으로 귀로 보고 듣는 무수한 말들과 정보들에, 사람들 사이의 혼재된 선의와 악의가, 혹은 그들의 욕망이 투영될 때 어떻게 왜곡되고 변질되어 속절없는 쓰레기로 변해버리는지 또 한 번 절감하게 된다. 짐짓 헛된 죽음으로도 볼 수 있는 사건의 이면에는 쉽사리 재단해버릴 수 없는 많은 복잡다단한 인간들 사이의 감정과 교류, 그리고 순간적인 선택이 얽혀 있으며, 누군가에게는, '행실 나쁜' 여자의 '그리 되어도 마땅한' 것이라 내뱉어버릴 수 있는 죽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남은 인생을 내던질 만큼 더없는 슬픔이 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독자 스스로 무엇이 선과 악인지 생각하고 판단하도록 만든다. 많은 사람들에게 악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그는 피할 길 없는 악인인 것일까, 그녀는 제멋대로 들떠 그 악인과 사랑에 빠진 것일까. ‘악인’이 된 그는 너무 늦게 만나버린 사랑하는 상대를, 그와 같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만드는 것으로, 그녀를 향한 마지막 선택을 한다.

누구나가 선량한 표정을 한 채 숨 쉬고 생활하고 있는 바로 이 공간에도 발현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도처에 숨죽인 악의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 하는 데 생각이 미치면 오싹 소름이 돋는다. 상황과 욕망, 그리고 그 욕망의 상대가 최적의 상태를 갖췄을 때 누구든지 악의를 품은 악인이 될 수 있으며 본인 스스로 깨닫지 못하거나 혹은 알면서도 스스로 이 정도는 악의 축에도 끼지 못한다 합리화할 것이다. 현실의 세계에서, 영웅의 겉모습을 하고, 욕망을 먹이로 힘을 키우는 진짜 악인이 있을지니 무섭고 두려운 일이다. 그 진짜 악인에게 나의 욕망을 먹이로 주며 복무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것이 더욱 무섭고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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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6 00: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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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6 08: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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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6 00: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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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6 08: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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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6 09: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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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6 14: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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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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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7-07-22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하고 여쭈러 왔더니...친절도 하셔라!
유레루 빼고는 저도 갖고 있고 주문한 책이라 반가워요 헤헷^^

superfrog 2007-07-22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몽님^^ 주말 잘 보내셨나요?
또 한 주가 시작되는군요. 오늘은 김영하의 <여행자, 하이델베르크>를 다 봤어요.
(읽었다,보다는 봤다,가 좀 더 적절하겠죠^^) 몽님 리스트와도 겹치죠?ㅎㅎ
<유레루>는 영화를 보고 났더니 책이 궁금해져서..
 
씨 인사이드 SE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 하비에르 바르뎀 외 출연 / AltoDVD (알토미디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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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가끔 하늘을 나는 꿈을 꾼다. 그것도 스릴 만점의 저공비행으로. 땅에 발이 닿을 듯 말듯, 어느 때는 엄지발가락으로 땅을 한번 박차고 가속을 붙여 아슬아슬하게 계곡 사이를 누비고 짙푸른 바다 위를 수평선을 보며 날기도 한다. 한참을 비행을 하다 잠에서 설핏 깨고 나면 속이 후련하면서도 못내 아쉽다. 다시 잠을 이어붙여 아쉬운 비행을 마저, 맘껏 하고 싶다. 하늘을 나는 꿈은 삶이 안겨 주는 참가상 상품 같은 그런 사소한 기쁨 같은 게 아닐까. 아주 잠깐 꿈속에서나마 맨몸으로 바람을 가르며 날아보렴, 하고 말이다. 대개의 꿈들은 현실도 허황됨도 아닌 뒤죽박죽의 우스꽝스런 스토리를 지녔지만 말이다. 

꿈속이 아닌 현실에서 눈을 감고 하늘을 나는 사람을 만났다. 몸뚱이를 움직여 바다를 향해 나아갈 수 없는 사내는 상상 속에서 하늘을 날아 바다로 향한다. 26년 전 다이빙으로 전신마비자가 된 라몬 삼베드로.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죽음이지만 그에게는 그 선택을 실현할 능력이 없다. 그리하여 마비된 몸뚱이를 건 그의 투쟁이 시작된다. 죽음을 택할 수 있는 권리. 하지만 삶의 예찬론자들은 그를 가만두지 않는다.
'삶이라는 게 단지 팔을 움직이거나 뛰어다니는 데 있지 않다는 걸 보여주세요. 삶은 뭔가 다른 것이지요. 삶이라는 것은 그 이상'이라고 삶의 예찬을 퍼붓는 라몬과 같은 전신마비 성직자의 설득은 '우리가 무얼 하길 원하나요? 그가 말을 못하도록 재갈을 물릴까요? 아니면 딸랑이를 흔들면서 잠을 재울까요?'라는 26년 간 그를 돌봐온 형수의 말로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 '아들의 죽음'보다 아들이 '죽기를 원한다'는 사실에 더 고통을 느끼는 늙은 아버지의 초점 잃은 눈빛은 아들을 사랑하기에 그의 죽음에 대한 선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가족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지 보여 준다. 
살기 위해 죽으려는, 죽기 위해 살고 있는 눈물겨운 라몬의 모습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게 만든다. 목 아래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를 달고 머리통 하나로 살고 있는 그에게 '삶은 의무가 아니라 권리'라는 말은 법원 앞에 서서 피켓팅을 하고 있는, 제 몸을 움직여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성한 사람들의 움직임을 한없이 가볍고 또 허망하게 만든다. 그를 지탱하며 동시에 짓누르고 있을 그 말의 무게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느닷없이 얻어맞은 뒷통수의 얼얼한 아픔처럼 혼란스러웠다. 죽음을 선택할 수조차 없는 사람이 갖는 삶의 의미란 무엇일까. 그보다 도통 어떤 삶이 의미를 갖는 것이고, 그 삶이 가진 의미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의무로 살아내는 삶과 자유의지로 택한 죽음은 어느쪽이 더 숭고한 것인가. 가치란 무엇인가. 그러면서도 어떤 경우에서도 삶의 순간들과 죽음을 긍정하는 라몬을 지켜보자면 그가 그 상태로 삶에 행복을 느낄 수는 없는 걸까, 하는 바람을 갖게 된다. 하여 라몬이, 로사가 다녀간 후에 장난스런 눈빛으로 곱아 있던 손가락을 움직이며 슬며시 몸을 일으켜고, 침대 바깥으로 걸어나와 침대를 밀어놓고 복도까지 물러나 전력질주로 도움닫기를 하여 창밖을 향해 날아오르는 장면은 한순간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로사의 아들의 말처럼 라몬은 꾀병이었던 거야?'라는 황당함이 아니라 몸을 움직이는 라몬의 모습에서 안도감을 느꼈다는 데 대한, 그러니까 '아직도 당신은 삶이 팔다리를 움직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고 생각하는가?라는 무거운 물음에서 고개를 돌리지 말라는 감독의 낮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느껴지는 당혹감이라는 거다. 로사처럼 관객은, 라몬의 금붕어처럼 꿈벅거리는 위트 가득한 눈을 들여다보며 그가 삶을 지속하기를 바랄 수도 있겠지만, 결국 죽음의 선택이 주는 삶의 존엄을 받아들여 그를 돕는 사람은 로사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또한 그것은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말이다. 라몬의 삶과 죽음은 슬프지 않지만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러니 그의 죽음에 눈물어린 박수를. 그 어딘가의 시공간에서 그가 바다를 향해 자유로운 비행을 할 수 있기를.  

우연찮게도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본 후 이 영화를 보았다. '이번에야말로 세상의 끝인 줄 알았음'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도 또다시 '삶의 지옥'을 선택하는 마츠코와 라몬은 묘한 대조를 이루지만 결국 이 두 영화의 감독이 말하려는 바는 같은 맥락이 아닐까. 의미없네, 의미없네, 살아가는 게 의미없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이 말처럼 삶에 너무 큰 의미를 두려고 할 때 그순간 삶은 의무가 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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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7-06-03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고 또 멋진 리뷰이옵니다
망설이다 극장에서 놓쳐버렸는데, 찾아 보고 싶어져요 ^^

superfrog 2007-06-03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님, 이 영화 꼭 보세요. 정말 봐야 할 영화라고 꼽습니다.^^

2007-06-04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7-06-04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충일님ㅋ, 담에는 좀더 숭고한 날로 잡아볼까요? 일테면, 물의 날이라던가, 지구의 날이라던가, 말복이라던가..^^;;;

치니 2007-06-04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정말 잘 쓰시네요. 포스터가 제 취향이 아니라 접어놨던 영화인데 슬쩍 보고 싶어지는데요? ^-^

superfrog 2007-06-04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 시디 케이스의 저 얼굴은 영화 전체를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장면이에요.
일전에 카이레님도 쓰셨지만, '슬쩍' 말고요, 진짜 치니님도 꼭 보셨음 좋겠습니다.^^

superfrog 2007-06-05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틀이님, 히힛! 세 편 다 보셔도 절대 후회 안 하실 겁니다.^^

2007-06-16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7-06-16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저와 많이 공명했던 영화에요.
치기어리게도 죽음에 대한 답을 냈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지만
자신에게 닥치기까지 끊임없이 품고 있어야 할 생각이 아닌가 해요.
이 영화가 님께 어떻게 읽힐지 많이 궁금해요.
햇살과, 동반한 그늘처럼 조화로운 날들 보내시길.
풍경이 되었다는 표현, 맘에 들어요.^^

2007-06-27 0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6-29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