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ㅣ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0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나무나무! 그야말로 일기일회의 만남,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사랑스러운 책을 오랜만에 만났다. 교토의 길모퉁이마다 사랑스러운 아가씨를 향해 허구한 날 바깥해자만 단단히 다지고 있는 망상폭주 순정파 선배, 아가씨에게 가짜 전기부랑과 인생론을 알려준 도도씨, 내공 높은 할배 같기도 하고 무적의 악당 같기도 한 이백씨, 빤스총반장, 코끼리엉덩이 노리코씨, 규방조사단 청년부와 사무국장, 헌책방제자 소년, 축지법고타츠 텐구 히구치씨-고래술 하누키씨, 그리고 가공할 무기 친구펀치를 깜찍하게 숨기고 다니는 윤기 나는 검은머리의 아.가.씨. 그들이 밤거리로, 헌책방거리로, 축제를 맞은 학교 구석구석으로, 때로는 회오리바람에 공중부양까지, 난리법석으로 왔다갔다 우르르 몰려다니며 한바탕 별세계를 만들어낸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라는 의미심장하고 리드미컬한 제목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다보면 코끝은 살짝 들어 올리고 잉어인형을 팔락거리며 걷고 있는 아가씨의 두 발 보행 로봇의 스텝처럼 지면과 발 사이에 얇은 공기층이 생겨 덩달아 사뿐히 그 위를 밟으며 밤길을 걷는 느낌이 든다. 물론 우리 아가씨의 뒤태에 비하자면 발뒤꿈치에도 못 미치겠지만 말이다.
아침나절 목에 까슬까슬한 실 하나가 걸린 듯 자꾸 헛기침이 나, 설마 이백 할아버지가 다다스 숲에서부터 퍼뜨려 교토를 초토화시킨 바로 그 이백 감기가 책으로부터 옮은 것인가!라고 너스레를 떨어도 보지만 엊저녁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다 유행하는 목감기에 걸린 것일 뿐, 도도씨의 비단잉어센터도 없고 헌책시장도 열리지 않는 거친 아파트 숲에서 사과비가 내리고 비단잉어 회오리바람이 부는 판타지가 언감생심 펼쳐질 턱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잠시잠깐 유자비라도 어떻게 좀 안 될까요, 하고 이백 할아버지에게 부탁해보고 싶다.
헌책시장의 신 가라사대 책들은 가능한 한 세상에 풀어놓아 다음 사람의 손길이 닿을 수 있도록 하라 하셨다지만 이 책은 책상에 고이 모셔두고 여러 번 귀퉁이가 닳도록 읽고 싶다. 한 번은 ‘형님, 좋은 게 다 모였어요. 흥분은 필연지사.“라고 느물느물한 영감처럼 독자를 끌어당기는 작가의 세계로, 두 번째는 3층 전차가 다니는 봄날 밤의 환상 속으로, 세 번째는 한여름 헌책시장의 미로 판타지로, 네 번째는 아, 그런 시절이 있었지, 하며 대학축제 시절로, 마지막으로 아가씨와 선배가 부끄러운 빗금을 볼에 그린 채 다소곳하게 마주 앉은 진진당으로 그렇게 봄여름가을겨울 시시때때로 즐겁게 빨려 들어가고 싶다.
마지막으로 '뭐, 어쩌다 지나가던 길이었어'라는 뻔한 소리를 해대며 새초롬하고 천진하게 둔감한 아가씨와의 '우연한' 만남을 위해 온몸을 바치는 선배의 망상폭주 장면을 인용하자면,
“그녀가 어린 시절 아직 어리고 귀여운 얼굴로 천진난만하게 자신의 이름을 써넣은 그림책이 내 눈앞에 있었다. 만일 그녀가 이 책을 본다면 그리움이 치솟아 기절하고 말 것이다. 이 책이야말로 천하유일의 보배이며 또한 나의 미래를 열어줄 하늘이 내린 한 권의 책이리라. 이것을 입수한다는 건 그녀의 처녀마음을 내 손에 쥐는 것과 같고, 장밋빛 캠퍼스 라이프를 보장받는 것과 같으며, 나아가 그건 만인이 부러워할 영광의 미래를 약속받는 것과 같다.
제군. 이론이 있는가. 있다면 몽땅 다 각하다.
나는 승리를 향하여 포효했다.“
하하, 선배, '편리주의도 적당히 할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