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왔는데 게다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두번째 봄>까지 읽었는데 (공교롭게도 주인공 셀리아가 두번째 봄을 맞은 나이는 나와 같다. 물론 서양식으로 한다면 아직 나에겐 이년의 시간이 남아 있다.)도 불구하고 요즘 종종 우울하다. 이것은 내가 나로 태어나서 나의 삶을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또 당면하게 될 우울감이라 도망갈 수도 없다. 그래도 역시 나에게 힐링은 책에 관련된 것들. 아주 오랜만에 이동진의 팟캐스트 빨간 책방을 찾아 들었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에 대하여 이야기한다지 않는가. 두 시간 가까이 되는 중혁 작가와의 그 주저리주저리가 너무 좋아 그 순간 만큼은 살아 있다는 것이 참 좋았다. 나는 '카버'에 대하여 좀 각별한 기억들이 있다. 이렇게 얘기하니 마치 친분이 있는 것처럼 들려 더 좋다. 분홍공주가 아기였을 때 아기가 잠에서 깨기 전 그 아침 시간이 나에게는 거의 유일하게 주어진 자유 시간이었다. 빈속에 꼭 믹스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었다. 아마존에서 한 달이나 걸려 내 손에 온 중고책은 카버의 단편집. 물론 전체를 다 제대로 읽어낼 역량은 되지 않았다. 드문 드문, 어쩌면 철저한 오독과 몰이해였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냥 이렇게 카버가 쓴 그 언어 자체를 내 눈 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 아이를 낳고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사는 부부에게 어느덧 벼락처럼 아이의 사고와 죽음이 다가왔을 때의 카버의 이야기는 분홍공주가 많이 아팠을 때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카버는 분명 이런 종류의 상실이나 고통을 직접 겪어본 후에 이 이야기를 시작했을 거라는 심증이 들 정도로 그 담담한 듯하면서도 핵을 건드리는 정황 설명, 감정의 변화는 나의 그것들과 만났다. 소름이 끼쳤다. 작년 사월 이동진은 이 작품을 낭독하는 것으로 아이들의 죽음을 애도한다. 고저나 강약이 강조되지 않은 읊조리는 듯한 잠긴 그의 목소리로 듣는 일상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그 삶의 가혹한 반전은 영락없이 또다시 나를 흔들었다. 빵집 주인의 그 따뜻한 위로의 결말은 어쩌면 이 이야기의 핵심이 아닐 거라는 의혹. 난 언제나 아이가 서서히 죽어가며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그 평온한 일상이 해체되는 그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그 평범한 부부의 가슴을 저미는 고통에 전염된다. 언젠가 느꼈던 바로 그 고통의 흔적은 다시 거스러미를 뚫고 돌아오고 만다.

 

카버의 편집자와의 스캔들, 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추측이고 주장인 지에 대한 그 모호한 지점에 대한 갑론을박은 카버의 이야기들에 대한 본질적인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기, 이렇게 우리 손에 주어진 그 가난하고 항상 돈에 급급해야 했던 신산한 삶 속에서나마 한 자, 한 자, 이야기를 놓치지 않으려 했던 그 처절한 시도들의 주인공인 거구의 사내가 남기고 간 이야기들, 그것들로 충분한 것이 아닌지. 김연수의 번역은 되도록 카버의 그 직설적이고 짧고 과장되지 않은 문장 그대로를 살리려는 노력에 닿아 있다.

 

 

 

 

 

 

 

 

 

 

 

 

 

김영하는 김연수와 대척점에 있는 작가라고 나는 종종 느낀다. 김연수가 삶에 대한 소통에 대한 희망, 낭만에 대한 그 어떤 희구에 언어를 어루만진다면, 김영하는 삶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듯하다. 그의 언어는 그의 이야기와 닮아 있다. 친절하지도 부드럽지도 않다. 살의, 의심, 망설임, 비정함 들이 난무하는 현실 앞에 그는 일말의 희망마저 단칼에 베어 버린 그 지점에 독자들을 불러 세운다. 그는 글을 잘 쓴다기보다는 이야기를 잘 만드는 데에 가깝고 언어의 조탁에 크게 괘념치 않아 보이는 모습이 매력적이기도 하고 무심해 보이기도 한다. 한데 이런 추측들이 그의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다.

 

 

 

 

 

 

 

 

 

 

 

 

 

 

 

정말 김영하가 말한 내용들. 강연회, 인터뷰, 대담. 내밀한 사적인 이야기들을 말하는 것도 아닌데 꼭 작가로서가 아닌 일반 생활인으로서의 김영하에 대한 많은 것들을 듣고 알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그는 말하는 것보다 쓰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지만 여하튼 자신을 표현하는 데에 어떤 경계나 거리낌, 가식을 치워버리고 덤벼든 그의 진정성에서 비롯된 면이 있을 것이다. 비관적 현실주의자. 하지만 그러한 현실 안에서 지속 가능한 즐거움을 추구하자는, 그것이 일상의 경건함을 만들어 간다는 그의 이야기는 지금의 나에게 굉장히 호소력 있게 들린다. 나는 그가 추구하는 단단함과는 멀리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의 지향은 역설적으로 그의 이야기와 급하게 만난다. 그가 이야기하는 견고한 내면을 가진 개인들이 다채롭게 살아가는 세상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나는 분명 더 단단해져야 할 것이다. 나의 못남과 나의 어리석음과 나의 편견, 아집들은 결국 나의 나의 약함과 만나고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데에도 분명 걸림돌이 된다. 소비에도 관계에도 의존하지 않고 쓰면서 그 과정에서 이미 충분한 행복을 누리는 작가의 삶이 일견 참 부러웠다.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금고에 넣어둔 샐린저를 몇 번이나 언급하며 사실 소설가는 이미 쓰는 과정에서 보상을 받는다는 그의 이야기는 어쩌면 내가 지금 여기에 이렇게 글을 끄적거리며 치유를 받는 것과 닮아 있다. 읽고 쓰고 듣고가 만나고 이야기하고 느끼는 것보다 나에게는 더 절절하고 친밀하다. 어떤 게 진짜 삶인지는 섣불리 단정짓지 않으려 한다. 다 살아 내고 마지막에는 결론을 낼 수 있을까, 확답하기 힘든 문제다. 레이먼드 카버의 알콜 중독에 평생 시달렸던 그 삶과 자신의 작품 <대성당>에서 주인공 남자가 아내의 맹인친구에게 티비의 대성당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 함께 대성당을 그리며 느낀 감동과 전율의 대목 어떤 것이 더 진짜인 지를 우리가 판단해 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단정하고 확신하지 않고 한번 더 질문하고 회의하는 지점에 바로 '이야기'와 '작가'가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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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3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03 1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03 1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comi 2015-04-03 10: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김영하와 김연수를 대비하신 점 격하게 동감해요. 저도 이렇게 생각하곤 했는데 잘 정리해주셨네요.^^

blanca 2015-04-03 18:57   좋아요 0 | URL
아, 감사합니다. 써놓고 항상 좀 뭣한데 힘이 되네요.

AgalmA 2015-04-03 1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blanca님이나 cocomi님처럼 공감.
좋은? 선호되는 작가는, 시대를 사는 독자들이 원하는 어떤 것을 계속 제시해주는 것일 거라 생각합니다. 대중에 대한 아부가 아니라 그자신 또한 치열하게 고민하기 때문에 공감을 낳는 접점을. 김연수, 김영하 두 작가가 그래서 나란히 환호받는 것이기도 할테고, 카프카나 도스토예프스키가 영원할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걸 담보하지 못하는 작가는 밀려나는 거죠.(코드가 맞는 소수의 마니아라도 있으면 다행이고;)
뛰어난 소설이나 시는 인간의 그런 면을 언제나 대변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작가들을, 시인들을 내내 기억하려고 애쓰는 것이기도 하겠죠.

blanca 2015-04-03 19:00   좋아요 1 | URL
Agalma님의 댓글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대중에 영합하고 무언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들을 배신하기 시작하면 작가는 위험해지는 것 같아요. 하지만 사실 어떤 직업이든 누군가의 반응이 결과에 포함되어 있는 경우에는 그 유혹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워지는 것도 쉽지 않을 테고요. 그래서 위대한 작가는 쉽게 되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자서전은 장장 십오 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일흔 다섯에 찍은 자서전의 마침표는 수많은 곡절들을 거쳐 비교적 행복했던 시절들의 잔향들로 어떤 충만감 속에 찍힌다. 방대한 양이지만 추리소설의 여왕이 회고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고 찬란하여 어떤 문학적 가치나 사회적, 정치적 성취에 지지 않는다. 그녀의 추리 소설이 단순한 서스펜스나 반전들로 폄하되지 않을 수 있었던 근저에는 분명 그녀가 이렇게나 진심으로 성실하게 줄곧 열정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 낸 근면성과 진정성도 있을 것이다. 그녀의 포와로와 그녀의 마플이 많은 독자들의 가슴에 사건 해결사 이상으로 오래 잔잔하게 살아 남은 힘이기도 하다.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추리소설이 아닌 여섯 편의 장편 소설을 펴낸 것은 애거서 크리스티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삶에서 얻어낸 많은 것들을 진지하게 독자들과 나누고 싶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탐정 에르큘 포와로나 귀여운 해결사 할머니 미스 마플이 나오지는 않지만 대신 하나 같이 이 이야기들에는 주인공들의 방황과 괴로움에 천금 같은 조언을 던져 주는 멘토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의 조언은 금과옥조 같다. 그들의 탄생의 든든한 뒷배는 애거서의 어머니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결정적인 작품. <두번째 봄>이다.

 

 

 

 

 

 

 

 

 

 

 

 

 

 

원제는 <Unfinished portrait>. 전도유망했던 초상화가 래러비는 전쟁중 손을 잃게 된다. 그리고 그가 그려낸 끝나지 않은 초상화는 붓 대신 펜을 빌리게 된다. 우연히 만난 서른아홉 살의 여인. 래러비는 셀리아의 삶의 '인간 녹음기'를 자처하게 된다. 그녀는 또다른 애거서 크리스티다. 세밀하고 방대한 자서전 대신 조금은 축약되고 조금은 전개가 빠른 또다른 자서전을 읽게 된다. 많은 부분 셀리아의 삶은 실제 애거서가 자서전에서 고백한 에피소드들과 겹친다. 아기방의 연보라색 아이리스 벽지. 친절하고 푸근했던 유모. 언제나 놀이 동무가 되어주고 수많은 이야기들과 꿈, 공상을 진지하게 공유해 주었던 엄마, 느긋하고 너그러웠던 아빠,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남자들의 수면양말을 떠주었던 에너지가 넘쳤던 윔블던의 할머니. 너무나 아름답고 생생하고 사랑스러웠던 어린시절의 파노라마 앞에서 점점 성장해 가는 셀리아의 모습에는 우리들이 잃어버려 언제나 찾아 헤매며 방황했던 바로 그 조각들도 흩어져 있다. 셀리아가 세상의 거친 풍랑을 막아주었던 안온한 방벽 아래에서 보낸 유년은 그녀의 내면 속의 미처 자라지 못한 아이가 찾아 만난 남편과의 가슴 아픈 파경 앞에서 그녀를 거의 해체시킨다. 실제 애거서는 그녀에게 크리스티라는 성을 준 첫남편의 외도로 이혼에 이르게 되고 이 과정에서 죽을 때까지 해명되지 않은 실종 사건을 일으킬 정도로 참혹한 고통을 겪는다.

 

그녀가 이야기를 들려 준 화가 래러비는 "그녀가 성장하기 위해 서른아홉에 돌아왔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구개월도 아홉 살도 열아홉도 아닌 서른아홉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진정한 의미의 성장에 다다른 셀리아라는 여인의 삶은 애거사 크리스티 자신의 처절했던 성장통에 대한 또다른 내밀한 고백이다. 그 고백은 삶 속에 온전히 빠져 있을 때에는 결코 인식할 수 없는 삶의 원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일종의 '패턴'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실제 애거서는 여러 작품에서 줄곧 '삶의 패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누구나 한번쯤 자신의 삶에서 어떤 거리감을 유지하게 되면 자신이 그려온 삶의 궤적이 나름대로의 일정한 패턴을 그리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때 일어났었던 일들은 그 일들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다. 더 큰 밑그림의 한 귀퉁이였던 경우가 많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실제 첫결혼의 실패 후 연하의 따뜻한 고고학자를 만나 재혼하게 되고 죽을 때까지 해로하게 된다. 수많은 회한은 어쩌면 전체를 보고 난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작가라면 자신의 창조한 인물들에게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작가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혹은 생각하는 대로 인물을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인물들이 도리어 작가에게 놀라움을 선사하지요. 진짜 신 역시 인간에 대해 그런 느낌을 갖는지 궁금합니다......

-<두번째 봄> 중

 

위엄 있게 단호히 삶을 떠나는 것을 꿈꾸었던 애거서 크리스티는 자서전을 마무리하고 십 년 후에 그 꿈에 거의 다다른다. 삶에 관한 한 말해야 할 것은 모두 말했다고 느꼈던 일흔다섯의 나이 앞에는 십 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선물로 주어져 있었다. '여기', '지금'은 죽는 그 순간까지 잠정적이다. 결국은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답 대신 질문의 무게가 주어질 것이다. 믿고 걸어가는 데 삶의 매력이 있을 테니까. 그녀의 말처럼 크고 진지한 것들보다 작고 사소한 것들에 어리석게 끄달리면서도 가끔은 저만치 한 발자국 떨어져 나와 나의 궤적을 가만가만 들여다 보고 싶다. 그 순간의 감탄을 잊지 말아야겠다. 나도 성장하기 위해 이야기를 여기 떨구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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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15-03-30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안그래도 이 시리즈 신간을 기다렸는데 반가운 글 잘 읽었습니다 ;)

blanca 2015-03-31 07:57   좋아요 0 | URL
쟌느님도 이 시리즈 좋아하시는군요!! 추리소설도 좋지만 애거서 크리스티의 이 이야기들도 참 좋아요. 이렇게 순차적으로 번역하여 펴내어 주어 고마울 따름입니다. ^^

다락방 2015-03-30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신간 소식에 쫑긋했는데 블랑카님의 반가운 리뷰로군요!

blanca 2015-03-31 07:58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도 그러시구나!! 반갑네요. 좋아하고 기다리는 게 겹치면 참 행복해져요^^

moonnight 2015-03-30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도 기다리고 있던 시리즈예요. 감사합니다. 블랑카님^^

blanca 2015-03-31 07:58   좋아요 0 | URL
이 책들 읽고 나시면 더욱 행복해지실 겁니다.

라로 2015-03-31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한꺼번에 다 지르려고 기다린 보람이 있어요~~`.^^)

blanca 2015-03-31 08:00   좋아요 0 | URL
아웅, 한꺼번에 다 지르고 읽어내실 그 기쁨도 못지않죠!! 저는 나올 때마다 챙겼는데 이게 또 감질나더라고요. 이 시리즈는 한 권의 번역이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아쉽기도 하고 기대도 됩니다.

transient-guest 2015-04-07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거서 크리시티는 삶 자체도 종종 소설 같다고 느낄때가 있어요. 나중에 꼭 구해서 봐야겠습니다.

blanca 2015-04-07 18:52   좋아요 0 | URL
저는 그녀의
광팬인데 자서전이랑 다른 필명으로 쓴 이 책 읽고 더 빠져들게 되었어요. 강추드려요.

파란놀 2015-04-08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쓸 때에도
내 삶을 누릴 때에도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 새로운 하느님(신)이 되어서
하루를 보내는구나 하고 느끼곤 해요

blanca 2015-04-08 23:34   좋아요 0 | URL
요새 들어 더욱 하루하루가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아침부터 눈발이 흩날렸다. 자의가 아닌 상황과 타의에 의해 하는 이사는 얼마쯤 서러웠다. 그리고 무심코 보게 된 인터넷 기사에서 당신의 부음을 전해들었다. 2011년 1월 22일.

 

 

 

 

 

 

 

 

 

 

 

 

 

 

 

 

박완서 작가의 죽음이 훑고 지난 간 4년의 시간 후, 당신의 고즈넉하고 단아한 문체를 닮은 맏딸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 현재의 자신을 둘러싼 생활을 담담하게 기록한다. 노작가가 세상과 작별하기 이전, 이후, 그리고 딸의 삶이 잘 버무려져 있다. 딸이 바라보는 작가는 평범하고 엽엽한 가정주부로서의 삶과 전후 시대의 질곡과 여인의 신산한 삶들을 섬세한 문장으로 갈무리한 위업 사이의 어느 지점에 가 닿아 있다. 그것은 평범한 모녀 관계에서 조금 더 나아간 일종의 경외감이 자아낸 거리. 익숙하지 않은 그 간극은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아이를 훌쩍 키워내고 갑자기 등단하게 된 작가의 원고를 직접 들고 거리를 뛰어다니는 여고생의 풍경이 그려진다. 어머니의 마지막, 그렇게나 완벽하고 단단해 보이던 여인이 이제 마침표를 찍기 위에 풀썩 주저앉은 자리는 의외로 슬프고 비극적이지만 않았기에 안심이 되었다. 이제 딸들은 작고 약해진 어머니를 마음껏 사랑하고 어루만지며 아쉬움과 회한을 달랜다. 그리고 어느 새벽, 이삿짐을 기다리며 몸을 뒤채며 내가 보내던 그 신새벽, 나의 첫아이의 태교의 지문을 주었던 다감하면서도 엄격할 것 같던 소설가 할머니는 생의 소임을 다하고 훌쩍 사라져간다.

 

작가들이 태어남과 길러짐의 모호한 지점에 서 있다는 데에서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로맹가리의 이야기처럼 어머니를 이 세상에서 잊혀지지 않게 하려는 특별한 소명의식 때문인지 유달리 어머니와의 추억과 석별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다. 그 중에서 기억에 각인처럼 남은 몇 작품들.

 

 

수전 손택의 외아들 데이비드 리프가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어머니에 대해 남긴 기록은 살아 있는 지성으로서의 그녀의 신화에 먹칠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죽음 앞에서는 너무나 무력하고 작아지는 한 인간으로서의 그녀의 모습에 대한 아들의 시선은 절절하다. 가장 명료하고 가장 현명하고 가장 세상과 강하게 밀착되어 있던 그녀의 이지러짐은 그래서 더더욱 슬프고 또 애끓는다. 자신에게 닥친 병조차 학문적으로 해석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그 해답을 구하려 했던 그녀의 시도들은 안타깝기도 하고 한편 그녀의 저작들, 그녀의 삶과 지근거리라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녀가 없어져 버린 거리에서 아들은 정작 했어야 할 일들과 하지 말았어야 할 일들을 되짚으며 자책한다. 그 누군들 이러한 모습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참 신기하게도 이 흑백 사진 속 어머니의 옆모습에서 나는 친정 엄마의 미소를 발견했다. 엄마가 젊었을 때에도 이런 옆모습, 이러한 느낌이었다. 잘 웃지 않아서 미소로 들어가는 관문의 엄마의 모습은 언제나 수줍었다. 종군기자인 아들이 고백하는 어머니와의 내밀한 순간들은 너무나 아름답고 그것이 지는 지점에서는 너무나 눈물겨워 한번에 도저히 읽어낼 수 없는 이야기. 군데 군데 삽입된 흑백사진들이 가두어 놓은 찰나들은 도저히 시간의 결 속에 고여 있는 것들로 보이지 않는다.  저자의 어머니는 25년 간이나 정신병으로 아들을 보살펴 주지 못했다. 생의 마지막 즈음에서는 말 그대로 무너진다. 아들은 어머니를 찾아 거리를 헤매고 노숙인처럼 입성이 추레해진 이제는 도저히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는 늙고 병든 여자 앞에서 또 그녀의 죽음 앞에서 그가 정신이 명료한, 젊은, 온전한 엄마를 되찾기 위해 엄마의 요리 레시피를 찾아 그녀의 그 따스했던 부엌을 다시 복원해 낸다. 애도와 추모의 과정은 한 인간의 성숙의 여정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솔직하게 드러내어 보여준다. 고백은 뼈아픈 것이지만 한 인간의 가장 적나라한 탈피와 성장의 노래이기도 하다.

 

 

 

 

 나이들어 노망난 여자와 힘차고 빛이 났던 여자를 글쓰기로 합쳐 놓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는 아니 에르노의 어머니에 대한 연가는 사실 모든 어머니에 대한 글쓰기의 핵심을 이야기하고 있다. 젊고 여자의 향기가 바래지 않았던 젊은 엄마의 품 안에서 우리는 태어나고 걷고 뛰고 자라나서 마침내 우리보다 더 작아지고 약해지고 혼미해진 늙은 여인의 슬픈 뒷모습을 어떻게든 극복해야 하는 과제로 다가간다. '그녀'라는 3인칭은 애써 그녀를 객관화하고 그녀와 나와의 거리감을 만들면서 동시에 좁히려는 그 헛된 시도의 응축일런 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니 에르노의 어머니는 아니 에르노만의 것이 아니라 아니라 우리 모두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화장실에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를 들고 들어갔는데 맞춤하게도 그 안에 저자의 어머니 박완서의 에세이집 <세상에 예쁜 것>이 꽂혀 있었다. 묘한 기분. 딸의 글 속에서 어머니에 대한 커다란 아쉬움, 회한 대신 어떤 충족된 애착, 존경심, 애정이 느껴져 부러웠다. 마지막으로 걸어들어가는 모습 속에서도 지나친 고통이나 쇠락을 떨구지 않고 가 뒤에 남은 이들의 부책감을 줄여준 노작가의 단정한 모습이 그의 작품 같아 가슴 한켠이 따뜻해졌다. 그러고 보면 이별도 만남 만큼이나 관계에 있어 중요한 부분인 것 같다. 맞잡은 손을 놓을 때 비로소 '나'와 '당신'의 관계는 완결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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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03-21 15: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사시는 곳이 서울이 아니신가 봅니다.
서울은 눈이 안 온 것 같은데...

이렇게 쓰시니 뭉클합니다.
저의 엄마는 건강하신 편이긴한데 꼭 요맘 때 한번씩 병을 앓곤 하죠.
며칠 전에도 그냥 안 지나가시더라구요.
예전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요즘엔 부쩍 마음이 무겁고 걱정이 앞서더군요.
저러다 어떻게 되는 건 아닌가 싶어서 말이죠.

저는 세번째 책은 읽은 적이 있는데 생각 보다 크게 감동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이런 책 좀 많이 읽어 둘까봐요.
언젠가 저도 엄마와 헤어질 날을 위해...ㅠ

blanca 2015-03-22 09:22   좋아요 1 | URL
스텔라님, 제가 혼란을 드렸나 봐요.^^;; 2011년 1월 이삿날에 눈이 오더라고요.
부모님이 없는 세상은 상상만으로도 참 쓸쓸하고 무서워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강건한 모습이 되기란 힘든가 봐요. 아니 에르노 책은 사실 우리의 정서와 안 맞는 노골성, 냉정해 보이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사실 더 와닿았어요.

몬스터 2015-03-21 1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blanca님, 며칠 전에 ˝ Still Alice˝ 란 영화를 눈물 흘리면서 봤어요. 이른 나이에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여성의 삶의 단편을 보여주는데 , 내 엄마가 마음에 걸려서 내내 울면서 봤어요. 글 읽으면서 제 엄마와 나의 추억을 생각해 봤어요. 많이 늦기 전에 더 많이 만들어야 되는데.

blanca 2015-03-22 09:25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몬스터님. 저는 아쉽게도 보지 못한 영화인데 들려주신 내용만으로 슬퍼지네요. 예전에 소설가 박민규가 인간인 것만으로 연민을 느낀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본 기억이 나는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실감해요. 유한한 삶 앞에서 너무 무기력한 부분이 있어서요. 저도 몬스터님도 가족들과 순간 순간에 집중하며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페크pek0501 2015-03-22 14: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니, 라는 말만 들어도 때로는 가슴 따뜻하고, 때로는 짠해지지요.
연로하신 친정어머니와 같은 동네에 살아서 자주 보는 편인데
오늘은 미세먼지가 심한 날이라 못가네요. (건강에 안 좋다고 오지 말라고 하세요.)

어머니와 관련한 책만 모아서 완결된 페이퍼를 잘 쓰신 것 같아요. 잘 보고 갑니다. ^^

blanca 2015-03-22 15:00   좋아요 1 | URL
페크님은 어머니와 같은 동네에 사시는군요. 부럽습니다. 저는 같은 서울이기는 하지만 지하철을 몇 번이나 갈아타야 해서 엄마가 고생이랍니다. 오늘 미세먼지 너무 독하네요. 이 좋은 봄날 벌 서는 것처럼 갇혀 있어야 해서 참 속상하네요.

세실 2015-03-26 14: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의가 아닌 상황과 타의에 하는 이사....저도 경험했기에 많이 서러웠고, 많이 울었답니다.
두 어머니, 아니 네분의 부모님이 살아계시니 때로는 버겁지만, 좀 더 열심히 찾아뵈려고 노력합니다.
나중에 덜 후회하려구요. 이별은 아직 낯설기만 합니다.

blanca 2015-03-28 21:32   좋아요 0 | URL
저는 특히 한겨울이었고 한달만에 이사갈 집을 구해야 해서 고생했던 기억이 나요. 세실님도 그러셨군요. 네분의 부모님이 건강히 생존해 계신다는 것 참 행운이고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열심히 즐겁게 살아가려 합니다. 세실님은 이미 그러고 계신 듯해요.
 

'화양연화'의 뜻을 찾아보니 인생의 가장 찬란한, 아름다운 '순간'을 뜻하는 말이다. 이승환의 뮤직 비디오를 보니 그의 화양연화는 지금 이 순간인 듯 그를 꼭  닮은 할아버지 보컬의 밴드가 회고하는 현재의 이승환의 모습이 빛난다. 가사는 떠나버린 연인에 대한 그리움인 듯 하지만 그 안에는 사실 우리가 보내버린 찬란한 젊음, 흘려버린 찰나들의 은유가 보태어져 있는 듯하다. 동명의 영화는 아쉽게도 보지 못했다. 대신 장만옥이 가장 외면적으로 빛났던 순간들의 이미지들이 떠돌아 다닌다.

 

 

 

 

 

 

 

 

 

 

 

 

 

 

 

 

 

플로베르의 '화양연화'의 단서는 여기에 있다. 카프카가 어린 시절부터 반복적으로 꾼 꿈은 놀랍게도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을 큰 소리로 읽으면, 그 소리가 벽에 부딪혀 반향되는 것이었다고 한다.(제프리 월의 서문 참조) 1840년, 갓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한 프레데릭 모로가 홀어머니가 계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야기에는 플로베르의 평생을 지배하다시피 한 연상의 귀부인에 대한 첫사랑이 강렬하게 투영되어 있다. 근대 파리에서 청춘이 어떤 치기, 무모함, 어리석음의 조류에 흔들리며 권력, 명예, 돈에 물들어갈 때에도 결국 프레데릭을 가장 매혹하고 힘들게 한 것은 이미 결혼해 아이까지 있는 그녀였다.

 

솔직히 <감정교육>의 주인공인 프레데릭 모로는 내가 지금까지 봐 온 남자 주인공들 중 가장 비호감인 면이 있었다. 양다리는 기본에, 심지어 문어발까지 서슴지 않으며 '내 맘을 나도 몰라'란 무책임한 언사에 매춘부와 동거까지 하면서도 권력이나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자리에는 젠틀한 척하며 참석하고 부르주아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향유하며 민중의 편에 선 듯한 가식적인 행태들은 역겨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어쩌면 지금까지 소설 속에 등장한 사람들 중 가장 사실적이고 그렇기에 가장 덜 매력적인 인물일런지도 모른다. 꿈꾸는 인물은 이야기에서 난무했지만 정작 난무하는 사람의 모습은 그러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누구나의 마음 속의 가장 못난 구석들이 청춘과 만나면 빚어지는 형상이 플로베르에 의해 그려진 이 사내일까. 지나치게 사실적인 이야기들은 때로 역겹게 느껴진다. 주춤, 주춤, 프레데릭 모로와 만났다가 헤어졌다가 하며 힘겹게 그의 비속함, 비열함에 동행한다.

 

마침내 그러나 다행히 왜 카프카가 이 이야기를 낭독하는 꿈 속에 헤매었는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프레데릭이 '만물이 수렴되는 빛의 중심'으로 여겼던 아르누 부인과의 늦은 재회. 그녀의 머리는 하얗게 세어버렸다. 이 재회는 프레데릭의 청춘의 출발점에서 이미 예정된 결론처럼 담담하지만 더없이 낭만적이다. 일종의 체념, 회한이 훑고 간 자리에서 프레데릭은 자신과 함께 가기도 하고 때로 어긋나기도 했던 절친과 함께 둘의 삶을 회고한다. 그들이 정작 '화양연화'로 추억한 시점은 흥청망청 쾌락과 권력과 명예에 탐닉했던 청춘이 아니라 모호하고 미진하고 순수했던 소년 시절의 작은 일탈의 공모의 순간이었다. "그때가 제일 좋았지!"라는 이제는 늙어버린 친구들의 회고는 어쩐지 눈물겹다.

 

어리석음에 무모함에 대한 회한이 남지 않는 과거는 이미 늙어버린 과거다. '화양연화'에는 그래서 반드시 실패와 좌절과 아쉬움이 남아야 제맛이다. '현재'를 미래의 시점에서 '화양연화'로 만들어 버린 이승환의 뮤직 비디오가 근사하게 느껴지면서도 불가능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 것도 그러한 이유가 아닐까. 그것은 반드시 과거의 환영 속에 모호함 속에 돌이킬 수 없음의 휘장을 걷고 걸어 나와야 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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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3-17 2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에 나오는 젊은 주인공도 <감정 교육>의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유사해요. 시대적 배경도 비슷하고(두 소설 다 프랑스 19세기 중반일 겁니다) 속물적인 인간들이 등장해요. 주인공도 어떻게든 부르주아 사회에 편승해서 자신의 야망을 펼치기 위해서 부정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플로베르가 발자크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19세기 프랑스의 어두운 사회상을 잘 표현했어요. 소설이 오래돼서 지루할 법한데 재미있어요. 씁쓸하지만 소설 속 프랑스 사회의 모습이 우리나라 사회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니까요.

blanca 2015-03-18 10:08   좋아요 0 | URL
아, cyrus님, 저도 발자크 <고리오 영감>이 떠올랐어요. 미처 시대적 배경의 유사점은 몰랐었는데, 음, 그렇군요. 모옴의 <인간의 굴레>도 비슷한 구도로 보입니다. 그런데 <감정교육>은 이상할만치 플로베르 자신의 이야기의 고백처럼 느껴졌어요. 어떤 느낌, 감정보다는 주인공의 행동들, 그 행동을 둘러싼 주변 정황에 치중하는 게 마치 좀 자신의 내면을 얘기하기에는 멋쩍어서 그런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착각일 수도 있지만요. 맞아요, 사실 이런 속물성은 인간인 이상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요.

다락방 2015-03-18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 책 엄청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별로 관심갖지 않았었는데 말이에요. 블랑카님이 말씀해주신 프레데릭은 모파상의 벨 아미와 겹치는 것 같아요. 캐릭터적인 면에서요. 하아- 세상엔 읽을 책이 너무나 많군요. 저 오늘 읽던 책 다 읽을 것 같아 새로운 책도 한 권 챙겨가지고 왔는데, 그것들 다 치우고 이 책을 읽고 싶네요.

blanca 2015-03-18 10:1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저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주 재미있지는 않았어요.^^;; <벨아미>는 저도 너무 좋아하는 책인데, 이 책은 뭐랄까, 지극히 사실적이라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푹 담기는 맛이 좀 부족했어요. 하지만 마지막 대목이 너무 좋아서 모든 단점을 상쇄했다고나 할까,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뭉클했어요.

아, 다음 읽을 책이 없으면 항상 초조해요. 저는 요새 왜이리 책이 더디게 읽히는지 모르겠어요.
 
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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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슨 먼로에게는 단편만을 쓸 수 밖에 없는 데에 대한 일종의 무력감이 있었지만 트루먼 커포티는 단편이 현존하는 산문 중 가장 어려우면서 절제된 형태라고 칭송했다. '단편'은 분량의 압축 뿐만 아니라 고도의 응축이 일어나야 공간의 한계를 이길 수 있다. 자칫하면 회색 지대에서 부유하기 쉬운 형태, '삶의 이야기'는 멈칫하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해야 비로소 독자를 설득할 수 있다, 고 한다면 <환상의 빛>의 미야모토 테루는 빛난다.

 

바다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파도의 잔물결이 빛을 받아 반짝이며 <환상의 빛>의 어제 서른두 살이 된 그녀의 시아버지가 "멀리 있는 사람을 속인다."고 이야기한 그 한순간 꿈을 꾸게 하는 불온한 잔물결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없어서다. 젖먹이를 두고 전차 선로 위를 스스로 걸어나가 죽어버린 남편에게 하는 혼잣말들. 그녀는 이미 쇠락한 어촌의 '새 남편' 곁이다. 이 이야기 안에는 죽은 남편, 재혼한 남편과 함께 하는 환상의 빛이 떠도는 바다, 그리고 '가난'에 사무친 어린 시절, 그 속에 노망 난 할머니의 가출이 수시로 교차하고 어긋나며 젊은 여인의 신산하고 처절한 삶의 근저에 있는 '존재'와 '삶'에 대한 이해의 비말을 분출한다. 그녀가 수시로 자문하는 남편의 자살의 이유는 구태여 정확한 '답'을 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와 함께 했던 삶을 해석하고 현재의 삶에 통합하기 위한 작은 여인의 몸부림이다. 보여지는 그녀의 삶은 화려하지 않지만 전남편의 죽음과 비로소 화해하는 그녀의 '찰나'는 이 작품의 아름다운 마침표다. 마치 한 편의 정제된 산문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이제 곧 쉰이 되는 아야코는 이혼하고 혼자 아들을 키우다 일년 전에 아들을 사고로 잃게 된다. 하숙을 치려 했던 아들 방에 하루 묵겠다고 다짜고짜 온 청년이 다시 갓 결혼한 아내까지 데리고 왔을 때 그녀는 황망함에도 그들을 내치지 못한다. 가난한 신혼 부부가 벚꽃이 보이는 곳에서 소원대로 아늑한 초야를 치루는 건너편에서는 그녀가 밤새 밤 벚꽃에 몸을 담근다. <환상의 빛>의 어제 서른두 살이 된 그녀가 암흑의 바다 위를 떠도는 환상의 빛을 보며 알 수 없는 환희를 느꼈듯이 <밤 벚꽃>의 아야코는 꽃비를 맞으며 표현하기 힘든 찰나의 깨달음에 몸을 떤다. 비애를 머금은 환희는 아마도 우리 모두의 삶의 동력 그 자체일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불량했던 친구의 여자 친구를 만나러 떠나는 원정에 동행했던 모범생은 지금 불륜 행각의 가운데에 있다. 우연히 그 친구의 죽음을 알게 된 그는 그 시절 그 친구의 비행의 세계에서 도망쳐 오며 느꼈던 당혹감과 지금도 무관하지 않은 세계에 발을 걸치고 있다. 어둑시근한 그때 우연히 봤던 <박쥐>의 모습과 소리는 지금의 축축한 '낙엽'위에 다시 돌아온다.

 

마지막 <침대차>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다. 무엇보다 '미생'의 직장인들의 처절한 생의 고투 현장 한복판에서 인간 대 인간으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직장 내 인간관계에 대한 묘사가 절창이었다. 기계 제조업에서 어쩔 수 없이 영업까지 해야 하는 주인공의 곁에 어느새 파트너로 상사로 내려 온 그가 사무실의 석양 속에 앉아 있는 모습은 침대차 동승객 노인이 한없이 흐느끼던 그 어깨와 닮아 있다. 뒤켠에는 누구나 나약하고 작은 인간으로 생의 가혹함을 밀고 나가며 살고 있다. 이 짧은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주인공의 삶 전체를 목격한다. '나'는 어린 시절 함께 했던 친구를 우연히 사고로 잃을 뻔한 기억이 있다. 친구와는 그 일로 소원해지고 그 친구는 그렇게 힘들게 목숨을 건졌건만 젊은 시절 다른 경로로 어처구니없이 죽어버린다. 부모가 없는 그를 키워냈던 친구의 할아버지를 병원에서 환자 대 의사로 만나며 '나'는 회한에 잠긴다. '나'를 스쳐가는 사람들, 그리고 지금 내가 여기 발을 딛고 있는 생의 격류. 도시락을 먹으며 출장지로 향하는 기차 안의 담담한 '나'의 모습은 내가 또 그렇게 틈새에서 살아나갈 것임을 예고한다.

 

구체적인 것과 단정적인 것과 멀어지면 보이는 것들이 휘몰아치는 이야기들 속에 갑자기 아연해져 버렸다. 이 사람은 무언가를 알고 있구나, 하지만 그것을 선뜻 다 꺼내 보여주지는 않는구나, 그리고 그 신중한 몸짓 이면에 간직한 것들이 언뜻언뜻 속살처럼 내비칠 때 우리는 그만 쓰러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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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5 21: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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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6 17: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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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5-02-26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리뷰를 보면 ˝리뷰는 이렇게 써야 하는데˝란 생각을 합니다. 마지막 끝맺음을 특히 잘하시는 것 같습니다. 전 리뷰 쓰는 게 갈수록 어렵더라고요. 줄거리를 조금은 얘기해야겠는데 스포일러를 주면 안되고.저도 님처럼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는 능력이 있다면 좋겠어요 그런 건 타고나는 걸까요ㅠㅠ

blanca 2015-02-26 17:38   좋아요 0 | URL
마태우스님, 저도 아마 저만의 편견, 아집 같은 것들로 작가의 작품을 작가 의도와 다르게 파악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아요. 생각해 보니 저는 스포일러를 너무 많이 주는 듯해요. ^^;; 그 부분도 고려를 해야겠습니다.

마태우스 2015-03-02 22:30   좋아요 0 | URL
아네요 블랑카님 리뷰는 스포일러 거의 없어요 읽고싶을 만큼만 살짝 보여주는 그런 멋진 리뷰에요

Nussbaum 2015-02-26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결하면서도 의미있는 리뷰, 다른 일 하다가 좀 머리가 복잡해져서 blanca님 서재에 들렸는데 머리를 정리하고 갑니다.
마침 이 책도 관심있어서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이런 의미가 있구나 하고 생각도 하고 말이죠~

blanca 2015-02-26 17:40   좋아요 0 | URL
아, 이 책 참 좋더라고요. 원래 여행지에 들고 가기만 했는데 의외로 거기에서 흠뻑 빠져 제법 읽고 왔어요. 분명 태어나는 작가, 태어나는 작곡가가 있는 것 같아요. 아직도 여전히 놀라고 감탄할 것들이 있다는 게 새삼 참 기쁘네요.

2015-03-01 1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01 14: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01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01 17: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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