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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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슨 먼로에게는 단편만을 쓸 수 밖에 없는 데에 대한 일종의 무력감이 있었지만 트루먼 커포티는 단편이 현존하는 산문 중 가장 어려우면서 절제된 형태라고 칭송했다. '단편'은 분량의 압축 뿐만 아니라 고도의 응축이 일어나야 공간의 한계를 이길 수 있다. 자칫하면 회색 지대에서 부유하기 쉬운 형태, '삶의 이야기'는 멈칫하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해야 비로소 독자를 설득할 수 있다, 고 한다면 <환상의 빛>의 미야모토 테루는 빛난다.

 

바다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파도의 잔물결이 빛을 받아 반짝이며 <환상의 빛>의 어제 서른두 살이 된 그녀의 시아버지가 "멀리 있는 사람을 속인다."고 이야기한 그 한순간 꿈을 꾸게 하는 불온한 잔물결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없어서다. 젖먹이를 두고 전차 선로 위를 스스로 걸어나가 죽어버린 남편에게 하는 혼잣말들. 그녀는 이미 쇠락한 어촌의 '새 남편' 곁이다. 이 이야기 안에는 죽은 남편, 재혼한 남편과 함께 하는 환상의 빛이 떠도는 바다, 그리고 '가난'에 사무친 어린 시절, 그 속에 노망 난 할머니의 가출이 수시로 교차하고 어긋나며 젊은 여인의 신산하고 처절한 삶의 근저에 있는 '존재'와 '삶'에 대한 이해의 비말을 분출한다. 그녀가 수시로 자문하는 남편의 자살의 이유는 구태여 정확한 '답'을 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와 함께 했던 삶을 해석하고 현재의 삶에 통합하기 위한 작은 여인의 몸부림이다. 보여지는 그녀의 삶은 화려하지 않지만 전남편의 죽음과 비로소 화해하는 그녀의 '찰나'는 이 작품의 아름다운 마침표다. 마치 한 편의 정제된 산문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이제 곧 쉰이 되는 아야코는 이혼하고 혼자 아들을 키우다 일년 전에 아들을 사고로 잃게 된다. 하숙을 치려 했던 아들 방에 하루 묵겠다고 다짜고짜 온 청년이 다시 갓 결혼한 아내까지 데리고 왔을 때 그녀는 황망함에도 그들을 내치지 못한다. 가난한 신혼 부부가 벚꽃이 보이는 곳에서 소원대로 아늑한 초야를 치루는 건너편에서는 그녀가 밤새 밤 벚꽃에 몸을 담근다. <환상의 빛>의 어제 서른두 살이 된 그녀가 암흑의 바다 위를 떠도는 환상의 빛을 보며 알 수 없는 환희를 느꼈듯이 <밤 벚꽃>의 아야코는 꽃비를 맞으며 표현하기 힘든 찰나의 깨달음에 몸을 떤다. 비애를 머금은 환희는 아마도 우리 모두의 삶의 동력 그 자체일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불량했던 친구의 여자 친구를 만나러 떠나는 원정에 동행했던 모범생은 지금 불륜 행각의 가운데에 있다. 우연히 그 친구의 죽음을 알게 된 그는 그 시절 그 친구의 비행의 세계에서 도망쳐 오며 느꼈던 당혹감과 지금도 무관하지 않은 세계에 발을 걸치고 있다. 어둑시근한 그때 우연히 봤던 <박쥐>의 모습과 소리는 지금의 축축한 '낙엽'위에 다시 돌아온다.

 

마지막 <침대차>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다. 무엇보다 '미생'의 직장인들의 처절한 생의 고투 현장 한복판에서 인간 대 인간으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직장 내 인간관계에 대한 묘사가 절창이었다. 기계 제조업에서 어쩔 수 없이 영업까지 해야 하는 주인공의 곁에 어느새 파트너로 상사로 내려 온 그가 사무실의 석양 속에 앉아 있는 모습은 침대차 동승객 노인이 한없이 흐느끼던 그 어깨와 닮아 있다. 뒤켠에는 누구나 나약하고 작은 인간으로 생의 가혹함을 밀고 나가며 살고 있다. 이 짧은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주인공의 삶 전체를 목격한다. '나'는 어린 시절 함께 했던 친구를 우연히 사고로 잃을 뻔한 기억이 있다. 친구와는 그 일로 소원해지고 그 친구는 그렇게 힘들게 목숨을 건졌건만 젊은 시절 다른 경로로 어처구니없이 죽어버린다. 부모가 없는 그를 키워냈던 친구의 할아버지를 병원에서 환자 대 의사로 만나며 '나'는 회한에 잠긴다. '나'를 스쳐가는 사람들, 그리고 지금 내가 여기 발을 딛고 있는 생의 격류. 도시락을 먹으며 출장지로 향하는 기차 안의 담담한 '나'의 모습은 내가 또 그렇게 틈새에서 살아나갈 것임을 예고한다.

 

구체적인 것과 단정적인 것과 멀어지면 보이는 것들이 휘몰아치는 이야기들 속에 갑자기 아연해져 버렸다. 이 사람은 무언가를 알고 있구나, 하지만 그것을 선뜻 다 꺼내 보여주지는 않는구나, 그리고 그 신중한 몸짓 이면에 간직한 것들이 언뜻언뜻 속살처럼 내비칠 때 우리는 그만 쓰러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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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5 21: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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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6 17: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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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5-02-26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리뷰를 보면 ˝리뷰는 이렇게 써야 하는데˝란 생각을 합니다. 마지막 끝맺음을 특히 잘하시는 것 같습니다. 전 리뷰 쓰는 게 갈수록 어렵더라고요. 줄거리를 조금은 얘기해야겠는데 스포일러를 주면 안되고.저도 님처럼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는 능력이 있다면 좋겠어요 그런 건 타고나는 걸까요ㅠㅠ

blanca 2015-02-26 17:38   좋아요 0 | URL
마태우스님, 저도 아마 저만의 편견, 아집 같은 것들로 작가의 작품을 작가 의도와 다르게 파악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아요. 생각해 보니 저는 스포일러를 너무 많이 주는 듯해요. ^^;; 그 부분도 고려를 해야겠습니다.

마태우스 2015-03-02 22:30   좋아요 0 | URL
아네요 블랑카님 리뷰는 스포일러 거의 없어요 읽고싶을 만큼만 살짝 보여주는 그런 멋진 리뷰에요

Nussbaum 2015-02-26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결하면서도 의미있는 리뷰, 다른 일 하다가 좀 머리가 복잡해져서 blanca님 서재에 들렸는데 머리를 정리하고 갑니다.
마침 이 책도 관심있어서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이런 의미가 있구나 하고 생각도 하고 말이죠~

blanca 2015-02-26 17:40   좋아요 0 | URL
아, 이 책 참 좋더라고요. 원래 여행지에 들고 가기만 했는데 의외로 거기에서 흠뻑 빠져 제법 읽고 왔어요. 분명 태어나는 작가, 태어나는 작곡가가 있는 것 같아요. 아직도 여전히 놀라고 감탄할 것들이 있다는 게 새삼 참 기쁘네요.

2015-03-01 12: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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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1 14: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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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1 17: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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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1 17: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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