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에 생명의 무게를 생각해본다. 특히 요양원과 중환자실에서 코로나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그들의 존재를. 어떤 것이든 드러내어 놓고 말하기 힘든 기준 아래 익명화되는 그 존재의 존엄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그것이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일까. 언제까지나 남의 일이 될 수 없는 그 나약함. 


"하지만 인간의 목숨이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 해도, 우리는 항상 무언가가 인간의 목숨보다 더 값진 것처럼 행동하죠."

-생텍쥐페리 <야간비행>


















가여운 이들.흔들리는 가여운 불꽃들. 더듬거리며 말하는 별들.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사랑스러운 점은 바로 살아있다는 것이다.

-크리스티앙 보뱅 <환희의 인간>



















크리스티안 보뱅의 아버지는 마지막 1년을 알츠하이머로 요양원에서 보낸다. 보뱅이 요양원의 노인들을 보고 쓴 글은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편협함을 일깨운다. 자본주의의 눈먼 경쟁에서 밀려나 타인을 짓밟고 올라설 필요가 없는 그들의 존재가 가지는 가치에 대하여 보뱅은 얘기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있음이 가지는 그 계량화될 수 없는 의미에 대하여. 


코로나 시대에 이야기되지 않는 것들을 이미 이야기한 작가들의 글에서 위안을 얻는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12-25 0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 ℳ𝒶𝓇𝓇𝓎 𝒞𝓇𝒾𝓈𝓉𝓂𝒶𝓈 🎅🏻
。゚゚・。・゚゚。
゚。  。゚
 ゚・。・゚
⠀()_/)
⠀(。ˆ꒳ˆ)⠀
ଫ/⌒づ🎁

blanca 2021-12-25 11:05   좋아요 1 | URL
오, 귀여운 토끼가. 스캇님도 메리크리스마스!

그레이스 2021-12-25 2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야간비행!
너무 오래전에 읽어서 다시 읽고픈 소설이예요.~♡

blanca 2021-12-26 09:59   좋아요 0 | URL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라 이렇게 좋은 이야기를 이제서야 읽다니 하며 놀랐답니다.
 

올해 갑자기 노안이 왔다. 그 탓에 한동안 책도 보기 싫고 글도 쓰기 싫어졌다. 뭔가 이런 행위를 할 때마다 너는 이제 늙었다,고 확인사살당하는 심정에 절로 우울해졌다. 노안이 오기 전의 내가 그리웠다. 깨알같은 글씨로 그날그날 있었던 별스럽지 않은 일들을 메모했던 나날들이 낯설었다. 나이든 얼굴도 새치도 노안만큼 나이듦의 현타를 주지는 않는다. 노안이 온 순간 이제 엄마로만 생각했던 어떤 중년의 여인의 모습이 내 것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자각이 왔다. 

















미켈란젤로가 72세에 성 베드로 대성당의 수석 건축가로 임명된 사실은 크게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이다. 그는 만년에 그 걸작의 책임을 떠안았다. 심지어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을 가능성이 큰 프로젝트였는데도 그는 기꺼이 떠안았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착공부터 완공까지 미켈란젤로가 전담한 것은 아니다. 착공은 이미 브라만테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한 것을 미켈란젤로가 인수하여 시공상의 결점을 보완하고 윤곽을 확정지어 후대의 잔로렌초 베르니니가 완공하기까지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한 마디로 누군가에게 노년에 그런 일을 떠맡긴다면 골칫거리로 여기고 거절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자신이 시작도 마무리도 할 수 없는 일, 분명 많은 착오와 허점을 수정, 보완해야 하는 머리 아픈 일을 이제는 모두 퇴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쉴 나이에 타향에서 만년의 17년을 온전히 헌신하여 완수해 낸 것이다. 


저자 월리스는 세계적인 미켈란젤로 권위자로 그 자신이 예순이 넘고 나서야 미켈란젤로의 이 만년의 프로젝트를 탐사한 이야기를 집필할 결심을 하게 된다. 미켈란젤로는 위대한 예술 작품들 뿐만 아니라 방대한 기록 자료를 남긴 사람이라 한다. 이 문서 자료들을 통해 구축한 거장의 만년의 서사는 그 자체로 감동적인 이야기로 와닿는다. <미켈란젤로, 생의 마지막 도전>은 미켈란젤로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가로 출발하여 완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의 장대한 여정에 관한 보고다.


미켈란젤로는 모든 것을 명령하고 뒷짐만 지고 있는 유형의 건축가는 분명 아니었지만 노령에 접어들며 어디까지 자신이 관여하고 어디부터 위임해야 하는지를 기민하게 인식한 실행가였다. 그는 그 자신을 중심으로 한 여러 조수들의 군단을 직접 조직했고 그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우정을 나누었다. 그의 건축 프로젝트의 위대한 점이 여기에 있다. 스승이 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그 스승의 정신이 구현되는 데 한 치의 오차도 없도록 후계자들이 움직일 수 있었던 건 그의 설계, 그의 조직이 체계성과 핵심적 가치 덕분일 것이다. 이는 온갖 정보를 한 사람이 독식하고 주변 사람들과 제대로 된 소통이나 아랫사람에 대한 적절한 위임이 이루어지지 않아 끊임없이 초심의 가치와 정신이 무화되는 여러 프로젝트나 심지어 정책들에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그가 주변 사람들과 나누었던 우정들, 아들처럼 사랑하고 아꼈던 하인과의 눈물겨운 작별 에피소드들은 두고두고 여운이 길다. 동시대 사람들보다 거의 배는 살아서 장수했던 거장은 그만큼 수많은 인연들과 예기치 않은 석별의 정을 나누어야 했다. 그는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조물주에게서 주어진 하나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끊임없이 고향 피렌체로 돌아오라는 주변인들의 요청에도 결국 로마에 남아 여든이 훌쩍 넘어서까지 버틴 것은 그 소명을 완수하는 것이 구원 그 자체로 향한 길이기도 하다는 그 자신의 믿음과도 통하는 일이었다. 


나는 이탈리아에 가본 적이 없고 그래서 아쉽게도 "나의 백발과 나의 고령을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고백하고 시작했던 이 예술가의 걸작의 스카이라인을 보지 못했다.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보고 싶다. 그 앞에서 고작 그의 나이의 반 정도를 살고 노안으로 투덜거렸던 나의 이 나약함을 반성해보고 싶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4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oonnight 2021-12-06 14: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토요일 신문에서 신간소개된 걸 보고 보관함에 넣었는데 blanca님은 벌써 완독 후 리뷰까지@_@;;; 저도 노안 와서 슬퍼요ㅠㅠ;;;;

blanca 2021-12-06 16:10   좋아요 1 | URL
헉, 달밤님마저...알라딘에서는 노안이 가장 슬픈 화두죠.

다락방 2021-12-06 15: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근 급격한 시력 저하로 토요일에 안과를 갔었는데요 건조증과 노안이라는 진단을 받았어요. 노안이라는 거 알고 갔지만 막상 닥터가 ‘버티세요‘ 라고 하니까 우울하더라고요. 이미 시작된 노안은 영양제로 잡을수도 늦출 수도 없고 앞으로 더 진행될 일만 있으니 버티다가 안되겠을 때 돋보기 맞추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몸이 노화를 실감하는 일은 이래저래 우울하지만 눈에 있어서는 더 우울했어요. 저는 책을 봐야 하는데요. 책을 봐야하는데 노안이라뇨. 닥터는 눈을 좀 덜 쓸 것을, 보는 일을 좀 덜 할것을 권유했는데요 그렇다면 제가 줄여야 할 것은 폰이겠구나 싶었어요. 무언가 줄여야 한다면 책 보다는 폰이 나을것 같아요.

노안도 저와 같이 겪는 블랑카님. 사실 저는 노안온지 좀 됐답니다 ㅠㅠ

blanca 2021-12-06 16:13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도 최근에 안과가셨군요. 저도 미루다미루다 간 거였거든요. 저보다 훌쩍 젊은 여자 의사가 사십 대에는 정밀 검진을 요합니다. 이렇게 확인사살을 ㅋㅋㅋ 흑, 노안은 저는 아주 머나먼 정말 할머니가 되면 갑자기 짠 오는 건 줄 알았어요. 이렇게 사십대부터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건지 몰랐잖아요. 아, 폰을 줄여야겠군요! 근데 지금 너무 우울해하면 더 나이들면 또 후회할 것 같아서 최대한 빨리 길고 두꺼운 책들을 독파하기로 마음 먹었어요.ㅋㅋㅋ 나이들면 힘드니까요.

북극곰 2021-12-06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쵸, 흰머리와 주름살은 그러려니 싶은데 노안은 심리적인 충격이 크죠? 근시 때문에 안경까지 쓰고 있는 저로서는 정말 불편해요. 근시 시력도 나빠졌는데 그에 맞춰 도수를 올리면 책 볼 때 어질어질 촛점이 안 맞아서 아예 책을 보기 힘들더라고요. 슬픕니다. ㅠㅠ

blanca 2021-12-06 16:14   좋아요 0 | URL
한동안 너무 우울해서 책이 꼴도 보기 싫어지더라고요. 지금은 넘어가긴 했는데...그래도 우울감이 있어요. 노안이란 게 참...사람을 침울하게 만들더라고요. 내가 이십대에 쓴 자그마한 글씨를 내가 보고 놀란다니까요.보이지도 않네, 이러면서...

stella.K 2021-12-06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브랑카님, 인간은 한때 낙심할 수 있어도 좌절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저도 노안이 왔을 때 다소 의기소침했는데 또 그냥 살아지더군요. 오늘 아침 배우 송승환이 나왔는데 시력을 거의 상실했는데 그래도 무대에 오른다고 하더군요. 대사는 소리로 외우고 동선 익히면 어렵지 않다며 긍정적이었어요. 우린 그 정도는 아니잖아요. 어느덧 60대 중반을 넘어섰다고 하는데 응원해 주고 싶더라구요. 그냥 응원해 주자구요.^^

blanca 2021-12-06 19:10   좋아요 1 | URL
송승환님 예전에 강연으로 실제 뵌 적이 있는데 최근 소식 듣고 많이 놀라고 안타까웠어요. 다시 연기하고 계신다니 참으로 반갑고 다행입니다. 네, 스텔라님 말씀 감사합니다.
 

어떤 책은 예기치 않게 다른 책을 매개로 해서 온다. 


















최은영 작가의 솔직한 고객들에 감동 받았다. 인터뷰에서 자신을 그럴듯한 사람으로 포장하고 싶은 욕구를 이겨내기란 쉽지 않을 터인데 그녀는 그것을 넘어서 자신의 상처, 한계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내보이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최은영의 인물들이 독자의 공감을 자아내는 것은 그런 작가의 내려놓기가 했던 역할이 클 것이다. 나의 시선은 반드시 나를 먼저 관통해서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 실린, 아버지를 아직 아빠라 부르는 젊은 시인 김연덕의 <일요일 오후의 책 말리기에 대한 짧은 이야기>라는 앤 카슨의 <짧은 이야기들>에 대한 서평의 잔상이 길다. 나는 김연덕 시인 덕택에 앤 카슨을 읽게 되었다. 주말, 원로목사가 소장했던 일본의 옛 신학자의 고서적을 마루에 앉아 말리는 아버지의 아들이 쓴 서평이다. 김연덕 시인은 그런 아빠가 비석처럼 도미노처럼 늘어놓은 서적들을 바라보며 앤 카슨의 "아주 작고 명징한 비석들" 같은 짧은 시를 떠올린다.

















시 같기도 하고 단상 같기도 한 짧은 글들의 모음집이다. 책의 왼편에는 제목이, 오른편에는 시가 실려 있는데 제목 자체가 시의 주제의 함축이라 시를 다 읽고 나면 한번 더 들여다보며 나의 의미 해석이 맞았나 확인하게 되는 구조다. 고흐도 카미유 클로델도 브리지트 바르도도 나온다. 역사적 사실들과 실존 인물들을 소재로 활용하여 의미를 추출하는 시인의 재능이 경이롭다. 이 중에서 특히 시인이 시로 적은 후기가 가장 좋았다. 


후기에 대한 짧은 이야기


후기는 재빨리 피부를 떠나야 한다. 소독용 알코올처럼. 여기 그 예가 하나 있는데, 에밀리 테니슨의 할머니가 자기 결혼식 날인 1765년 5월 20일에 남긴 일기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안티고네」를 다 읽었고, 주교와 결혼했다. 


자신의 결혼식 날 남긴 짧은 이야기. 생의 후기도 이와 마찬가지여야 할 것 같다. 구구절절 나를 해명하거나 변명할 필요가 뭐 있을까. 태어나 살다 죽었다, 고 이야기하는 말만으로 충분하다. 생은 그 자체로 존엄하고 충분히 무거우니까. 많은 말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말들로 우리를 오염 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앤 카슨은 '짧은 이야기들'로 충분히 많은 것들을 깊게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시인 같다. 말과 글들에는 이미 숨결이 있어서 내뱉는 그 순간부터 날개를 달고 상대에게 가닿는다. 나의 의도는 그 순간 이미 떠나게 된다. 그 언어가 어떻게 해석되고 소화되고 남을지는 이후부터 나의 소관이 아니다. 자식을 낳는 일과도 닮았다. 


그 마음을 짐작하는 일만 남는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11-18 21: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번호 최은영 작가님 특집이네요
글속에 작가의 성품이 뭍어 나는데 인터뷰에서도 善한 분 맑은 기운이 느껴지는 작가!

앤카슨은 응축된 언어 속에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어서 산문같은 시를 쓰는 작가 인것 같습니다. ^^

blanca 2021-11-19 09:52   좋아요 1 | URL
네, 제가 최은영 작가 팬이라서 바로 구입을 ^^ 인터뷰도 마치 작가 소설처럼 문장 하나하나가 참 정제되어 있더라고요. 단편소설 읽는 것처럼 뭉클했답니다. 악스트는 인터뷰가 너무 좋아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인물들은 하나 같이 불완전하다. 실제 우리처럼. 가장 사랑 받았던 캐릭터 올리브 키터리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는 불쑥불쑥 남의 일에 끼어들고 참견한다. 실제 주변에 이런 할머니가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성가셔할 것이다. 그러니 차 안에서 옛 스승을 보게 된 제자는 자신을 들키지 않으려고 목을 움츠릴 수밖에. 그러나 이를 그냥 지나칠 올리브가 아니다. 그녀는 눈을 피하려는 구태여 제자를 불러낸다. 그러나 이러한 그녀의 무람 없음은 결국 타인의 삶에 끼어들고 개입함으로써 어떤 공감과 소통의 영역을 만들어 낸다. 좋다고도 나쁘다고만 할 수도 없는 풍경이다.















그녀의 신간이 나왔다. 올리브 시리즈는 아니고 루시 바턴 시리즈라 할 수 있다. 지독한 가난과 학대를 경험한 그 루시 바턴이다. 그녀가 노인이 되어 하는 이야기들은 전남편 윌리엄을 중심으로 엮여 있지만 결국 그녀 자신의 이야기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윌리엄은 루시 바턴의 전남편이다. 루시 바턴과는 달리 부잣집 출신이다. 과학자이고 끊임없이 외도를 했다. 심지어 루시 바턴과의 친구와도. 그러나 쿨하게도 루시와 윌리엄은 성인이 된 두 딸의 문제를 함께 상의하고 심지어 떠나간 각자의 배우자 이후의 성가신 일들을 함께 처리한다. 윌리엄의 엄마가 그를 낳기 전에 떠나온 딸, 즉 윌리엄의 이부 누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에도 동행한다. 루시 바턴에게 고급한 취향을 전수하고 때로는 루시 바턴의 출신 배경을 공공연히 언급하기도 했던 윌리엄의 어머니에 얽힌 비화와 소설가로 성공하고 난 후에도 어린 시절의 상처를 여전히 간직한 그녀가 어떻게 이 여정에서 변화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잔잔하면서도 여전히 깊은 울림을 준다. 동서양의 가치관과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우리에게 여전히 호소력을 지닌 것은 그녀가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 기댄 어떤 근원적 고독감과 삶에 대한 갈망을 섬세하게 포착해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박물관의 꺼지지 않는 불빛을 보며 그 안에서 밤을 새워 일하는 가상의 직원을 상상하며 스스로의 외로움을 달래는 이야기 같은 것. 실제 박물관에 그런 사람이 없었을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어떤 이야기의 빛에 기대어 때로는 이 고단한 현실을 버텨나갈 힘을 얻는다는 통찰이 와 닿는다. 또한 어떤 결핍이 그 사람의 내면을 점령할지라도 그 사람이 삶을 살아나가는 데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망가뜨리지는 않는다는 인간과 삶에 대한 신뢰 또한 따스하다. 스트라우트는 현실적인 인간 군상을 통해 결국 삶을 긍정하고 싶어하는 작가다. 


그녀의 인물들은 작가와 함께 나이를 먹는다. 올리브도 루시도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노년기에 접어든 주인공들과 과거의 일들의 회상들을 들으며 그것의 의미를 다시 정립하는 과정의 독서를 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의 미래이기도 하고 과거이기도 하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겪어나가는 일들이 내 삶에 어떤 의미로 남을지는 그때에 가 봐서야 비로소 알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가 얼마나 신비롭고 신기하고 신화적인 존재인지를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강조한다. 지금 가는 시간은 결국 우리 모두 각자의 이야기를 쓰는 하나의 공간인 셈이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10-29 15: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출간된 오! 윌리엄 125페이지 분량인데 루시 바턴의 출신 배경 따졌던 이 집안도 그다지 ㅎㅎ
가장 현실적인 거대한 이민자 출신 구성원으로 이룩한 미국의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blanca 2021-10-29 19:24   좋아요 1 | URL
분량이 생각보다 짧아 놀랐어요. 그래도 좋아하는 작가 신간이라 참 반가웠고 특유의 어떤 사랑스러움이 묻어나와 저는 개인적으로 좋았는데 혹평도 많더라고요. 작가 나이가 들었구나 싶은 대목은 많더라고요. 자전적인 내용도 많이 들어간 듯한 흔적이 보였고요.

그레이스 2021-10-30 01:46   좋아요 2 | URL
그럼 원서로 도전해 볼까요?^^

blanca 2021-10-30 08:45   좋아요 2 | URL
그레이스님, 분량도 그렇고 이 작가가 단문, 구어체를 많이 쓰는 편이라 가독성이 좋아서 그 어느 작가들보다 원서 추천합니다.

scott 2021-10-30 18:17   좋아요 0 | URL
저도 블랑카님 말씀에 동감 합니다
스트라우트가 단문, 구어체를 많이 쓰는데
특히 루시 버튼은 스트라우트 책 중에 원서 진입 장벽이 낮고
이번에 오! 윌리엄은 솔직히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 정도 어휘력이면 충분히 ^^

라로 2021-10-30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루시 바턴은 읽지 못했는데 그럼 루시 바턴의 이야기부터 읽어봐야겠어요. 장담 못하는 미래에..^^;; 일단 보브아르, 긴스버그, 메르켈,, 읽고...끙;;;

blanca 2021-10-30 18:02   좋아요 1 | URL
라로님 읽을 책이 있는 상태가 좋은 것 같아요. 저는 갑자기 읽고 싶은 책도 읽을 책도 없을 때 멘붕 오더라고요.

다락방 2021-11-02 1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번역되기를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는데 블랑카님의 이 글 읽으니 원서로 한 번 도전해볼까 봐요. 그러다 안되면 포기하고 번역본 기다리죠, 뭐. 후훗.

땡투 누르고 구매했습니다, 블랑카 님. 부자되세요! ㅋㅋㅋㅋㅋ

blanca 2021-11-02 18:16   좋아요 0 | URL
ㅋㅋ 저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팬이라 이래도 저래도 좋더라고요. 이미 객관적 판단은 불가한 상태이고요. 좀 뭐랄까 너무 수필 같은 면은 있는데 그래서 더 좋기도 하고 그랬어요. 일단 분량이나 문장이 짧아 원서로 읽는 것도 추천합니다.
 

앤드루 솔로몬의 <부모와 다른 아이들>에는 콜롬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자 중 한 명의 엄마인 수 클리블랜드의 인터뷰가 나온다. 수는 다시 시간을 되돌려도 지금의 남편과 댄스 파티에서 춤을 추고 사랑에 빠져 딜런을 낳을 거라는 취지의 얘기를 한다. 이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얘기다. 가해자로서의 죄책감, 책임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이 고통스러운 일들을 다시 반복할 거라는 이야기는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서 키운 아이가 친구들을 죽이고 자살하는 이야기를 다시 살겠다는 엄마의 마음을 차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렇다. 예전에는 여러 번 나의 선택지를 곱씹고 시간을 되돌리는 상상들을 하곤 했다. 그걸 택했더라면, 이 길을 가지 않았더라면. 그런 회한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는 내가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삶보다 더 좋은 삶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다. 내가 설사 그런 삶을 살았다고 해서 여기에서 느끼는 만족감, 아쉬움과 엄청난 차이가 나는 감정을 느꼈을 것이라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 어쩌면 결론은 같았을런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로 풀어 설명하기 힘든 느낌인데 설사 평행우주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다지 궁금해지지 않는다는 것도. 변화라면 변화다. 가능성으로 직조된 세계에 나를 넣어봤자 나는 여전히 어떤 면에서는 과잉되어 있고 다른 면에서는 부족한 나일 뿐이다.



















테드 창의 <숨>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나온다. '세월의 문'을 통과하면 이십 년 전의 나와 이십 년 후의 나를 대면할 수 있다. 내가 개입하여 어떤 상황을 바꾼다고 해도 실제 내가 누리는 삶의 내면적 만족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단지 그것을 더 잘 알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의미와 잔향. 테드 창은 우리가 만드는 삶의 서사에 주목한다. 그것은 내용이 달라도 결국 우리 자신이 부여하는 의미의 무게로 수렴한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은 특히나 우리가 선별하는 과거의 기억의 서사의 임의성을 부각시킨다. 내가 '나'라고 믿고 만든 과거의 이야기들은 사실의 집약체가 아니라 '감정적 진실의 조합'이다. 이것이 거짓이라거나 허구라고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테드 창은 좋은 싱글 파더라고 믿었던 화자가 사실은 딸에게 폭언을 퍼부었던 과거를 소환하게 한다. 그 틈새에 티브족의 부족 간의 갈등의 이야기가 파고든다. 진실과 사실, 구전과 문자 기록을 둘러싼 논란은 결국 우리가 소유하게 되는 삶의 서사로서의 이야기의 진실의 힘으로 압축된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나도 모르게 지어내게 되고 이것은 때로는 진실인 것처럼 호도된다. 그러나 이 이야기처럼 과연 모든 정확하고 극명한 사실들을 수시로 확인할 수 있는 디지털기억 보조장치가 있는 것이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일까? 정확한 기억이 미화된, 혹은 연화된 기억들보다 더 가치로운 것일까? 테드 창은 연신 이런 심오한 질문들을 구체적으로 서사화한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에는 드디어 평행우주가 등장한다. 두 갈래의 우주가 공유하고 있는 메모패드인 '프리즘'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다른 선택을 내린 세계를 경험한다. 그 세계는 획기적으로 다른 곳이 아니다. 여전히 범죄가 배신이 실수와 실패가 산재하는 삶이다. 다른 양태를 띠고 있을 뿐이다.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고 해서 지금 여기의 현실이 극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우리는 듣는다. 설사 현실이 달라졌다고 해도 그 현실에 발을 담그고 있는 우리의 갈라진 자아들은 여전히 거대한 유사성을 공유한다. 그것은 내가 막연하게만 느꼈던 어떤 만족, 무기력과도 닮아 있다. 획기적으로 다른 삶을 사는 다른 '나'를 이제 나는 더이상 상상할 수 없다. 그럴 에너지가 소진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르지만. 시간은 가능성의 문을 하나씩 닫아 나간다. 그러나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소실점이 없는 대로를 언제까지나 걸어야 한다면 그것만큼 고달픈 일도 없을 것이다. 가능성의 무한창고인 젊음은 한시적일 때 빛난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가. 그건 영원히 재귀적인 물음이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11-05 16: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이달의 당선 추카 합니다
앤드류 솔로몬의 한 낮의 우울 저의 최애 책중 한권!

주말 테드 창의 숨 다시 읽어 봐야 겠습니다
해피 프라이 데이 ~*

blanca 2021-11-06 08:4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이 책은 정말이지 두고두고 기억에 남아요. 난소암으로 죽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 설거지가 하기 싫어 갑자기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에피소드(설거지 하기 싫을 때마다 생각납니다. ) 등등

그레이스 2021-11-05 16: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blanca 2021-11-06 08:4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기쁜 소식이네요.

새파랑 2021-11-05 17: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당선 축하드려요 ^^ 🎂 🥳

blanca 2021-11-06 08:46   좋아요 3 | URL
새파랑님 감사해요. 책을 살 수 있는 명문이 ㅋㅋ 생겨서 좋네요.

서니데이 2021-11-05 18: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blanca 2021-11-06 08:47   좋아요 3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되시기를...

초딩 2021-11-07 1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일요일 되세요~

blanca 2021-11-09 10:57   좋아요 0 | URL
이미 지나버렸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