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솔로몬의 <부모와 다른 아이들>에는 콜롬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자 중 한 명의 엄마인 수 클리블랜드의 인터뷰가 나온다. 수는 다시 시간을 되돌려도 지금의 남편과 댄스 파티에서 춤을 추고 사랑에 빠져 딜런을 낳을 거라는 취지의 얘기를 한다. 이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얘기다. 가해자로서의 죄책감, 책임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이 고통스러운 일들을 다시 반복할 거라는 이야기는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서 키운 아이가 친구들을 죽이고 자살하는 이야기를 다시 살겠다는 엄마의 마음을 차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렇다. 예전에는 여러 번 나의 선택지를 곱씹고 시간을 되돌리는 상상들을 하곤 했다. 그걸 택했더라면, 이 길을 가지 않았더라면. 그런 회한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는 내가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삶보다 더 좋은 삶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다. 내가 설사 그런 삶을 살았다고 해서 여기에서 느끼는 만족감, 아쉬움과 엄청난 차이가 나는 감정을 느꼈을 것이라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 어쩌면 결론은 같았을런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로 풀어 설명하기 힘든 느낌인데 설사 평행우주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다지 궁금해지지 않는다는 것도. 변화라면 변화다. 가능성으로 직조된 세계에 나를 넣어봤자 나는 여전히 어떤 면에서는 과잉되어 있고 다른 면에서는 부족한 나일 뿐이다.



















테드 창의 <숨>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나온다. '세월의 문'을 통과하면 이십 년 전의 나와 이십 년 후의 나를 대면할 수 있다. 내가 개입하여 어떤 상황을 바꾼다고 해도 실제 내가 누리는 삶의 내면적 만족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단지 그것을 더 잘 알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의미와 잔향. 테드 창은 우리가 만드는 삶의 서사에 주목한다. 그것은 내용이 달라도 결국 우리 자신이 부여하는 의미의 무게로 수렴한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은 특히나 우리가 선별하는 과거의 기억의 서사의 임의성을 부각시킨다. 내가 '나'라고 믿고 만든 과거의 이야기들은 사실의 집약체가 아니라 '감정적 진실의 조합'이다. 이것이 거짓이라거나 허구라고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테드 창은 좋은 싱글 파더라고 믿었던 화자가 사실은 딸에게 폭언을 퍼부었던 과거를 소환하게 한다. 그 틈새에 티브족의 부족 간의 갈등의 이야기가 파고든다. 진실과 사실, 구전과 문자 기록을 둘러싼 논란은 결국 우리가 소유하게 되는 삶의 서사로서의 이야기의 진실의 힘으로 압축된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나도 모르게 지어내게 되고 이것은 때로는 진실인 것처럼 호도된다. 그러나 이 이야기처럼 과연 모든 정확하고 극명한 사실들을 수시로 확인할 수 있는 디지털기억 보조장치가 있는 것이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일까? 정확한 기억이 미화된, 혹은 연화된 기억들보다 더 가치로운 것일까? 테드 창은 연신 이런 심오한 질문들을 구체적으로 서사화한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에는 드디어 평행우주가 등장한다. 두 갈래의 우주가 공유하고 있는 메모패드인 '프리즘'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다른 선택을 내린 세계를 경험한다. 그 세계는 획기적으로 다른 곳이 아니다. 여전히 범죄가 배신이 실수와 실패가 산재하는 삶이다. 다른 양태를 띠고 있을 뿐이다.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고 해서 지금 여기의 현실이 극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우리는 듣는다. 설사 현실이 달라졌다고 해도 그 현실에 발을 담그고 있는 우리의 갈라진 자아들은 여전히 거대한 유사성을 공유한다. 그것은 내가 막연하게만 느꼈던 어떤 만족, 무기력과도 닮아 있다. 획기적으로 다른 삶을 사는 다른 '나'를 이제 나는 더이상 상상할 수 없다. 그럴 에너지가 소진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르지만. 시간은 가능성의 문을 하나씩 닫아 나간다. 그러나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소실점이 없는 대로를 언제까지나 걸어야 한다면 그것만큼 고달픈 일도 없을 것이다. 가능성의 무한창고인 젊음은 한시적일 때 빛난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가. 그건 영원히 재귀적인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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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1-05 16: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이달의 당선 추카 합니다
앤드류 솔로몬의 한 낮의 우울 저의 최애 책중 한권!

주말 테드 창의 숨 다시 읽어 봐야 겠습니다
해피 프라이 데이 ~*

blanca 2021-11-06 08:4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이 책은 정말이지 두고두고 기억에 남아요. 난소암으로 죽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 설거지가 하기 싫어 갑자기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에피소드(설거지 하기 싫을 때마다 생각납니다. ) 등등

그레이스 2021-11-05 16: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blanca 2021-11-06 08:4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기쁜 소식이네요.

새파랑 2021-11-05 17: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당선 축하드려요 ^^ 🎂 🥳

blanca 2021-11-06 08:46   좋아요 3 | URL
새파랑님 감사해요. 책을 살 수 있는 명문이 ㅋㅋ 생겨서 좋네요.

서니데이 2021-11-05 18: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blanca 2021-11-06 08:47   좋아요 3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되시기를...

초딩 2021-11-07 1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일요일 되세요~

blanca 2021-11-09 10:57   좋아요 0 | URL
이미 지나버렸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