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책. 단 한 대의 피아노가 주인공이 되는 일대기. 어떤 극적인 드라마도 사건도 없이 그저 400명의 노동자가 조연이 되어 묵묵히 일 년 가까이 88개의 건반과 240개가 넘는 현이 만들어 낼 소리의 잠재태를 위하여 투신하는 이야기. 그런데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마음이 한없이 먹먹해지는 이야기. 
















저자인 [뉴욕 타임스] 기자인 제임스 배런은 K0862의 성격과 인격을 형성하는 스타인웨이 공장 노동자들 곁에서 피아노의 거대한 림을 만드는 출발점부터 조율을 거쳐 유명 피아니스트들이 연주를 하는 '독립'의 피날레까지 전과정을 밀착 취재하여 기록했을 뿐 아니라 이민 노동자들 개개의 서사, 스타인웨이 가문의 전사까지 더불어 치밀한 태피스트리처럼 엮어낸다. 피아노를 만드는 과정은 기술의 혁신, 사람들의 관심사 변화와 더불어 많이 진화했지만 피아노라는 악기 자체가 가지는 어떤 고전성을 수호하는 여전한 수작업과 오랜 시간 공력이 들어가는 지난한 시간의 경과를 화석처럼 품고 있고 이것은 다른 제조업 노동자들과는 다른 자부심을 각 공정의 노동자에게 불어 넣는다. 전임자는 후임자에게 정형화된 자동 매뉴얼이 아니라 자신의 작업 형태를 보고 그것을 체현하는 형태의 도제 시스템을 통해 하나의 악기의 분업화된 업무를 전수한다. 스타인웨이 공장의 노동자들은 서로 피아노를 가르치기도 하고 가족을 영입하기도 하며 하나의 단단한 결속력을 가진 부족처럼 끈끈해진다. 


효율과 능률과 IT 기술이 선봉에 서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과는 거리가 먼 영역에서 여전히 느리고 진중하지만 과거의 가치를 믿고 수호하려 애쓰는 분투의 현장의 목격은 그 자체로 잔잔한 감동을 준다. 


이렇게 완성된 K0862의 연주자의 이름이 낯익다.
















피아니스트 조너선 비스의 언어는 마치 잘 다듬어진 선율처럼 독자를 설득한다. 그의 음악 이야기는 마치 하나의 근사한 연주회를 다녀온 듯한 느낌을 자아낼 정도로 생생하고 아름답다. 그것은 언어와 음악이 가지는 한계를 서로 상쇄하며 이루어내는 절대 경지의 표현과 소통의 처절한 앙상블이다. 


지금도 내 인생에서 손으로 꼽는 값진 경험 중 하나가 어렸을 때 무리해서 배운 피아노다. 재능이 없는데 재능이 있다고 믿고 싶어했던 엄마와 소곡집 연습만 해도 대단한 연주를 듣는 듯 감격했던 주변인들의 과장된 박수가 얼마 안 되는 자부심의 원천이 되었다. 지금도 피아노 앞에 앉으면 설명할 수 없는 증폭된 감정들이 소용돌이친다. 


그것은 잃어버린 시절에 대한 향수, 실현하지 못한 꿈들, 그리고 결국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들에 대한 상실감. 그럼에도 여전히 그러한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 손가락의 기억에 대한 신비로움이 한데 섞인 것이다. 울림 페달을 밟으면 나의 원래 실력보다 한 뼘쯤은 더 그럴듯하게 들렸던 그 기만의 연주에 취했던 그 어리석었던 과장의 시간들은  가감 없이 직시하는 현실의 황량함과 대비되어 언제나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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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SF에 푹 빠져들지는 못한다. 그 세계와 현실과의 갭 사이 어디쯤에서 항상 서성인다. 테드 창과 김초엽의 이야기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모든 작품에 전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어떤 공명 지점도 결국 SF 세계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세계와 현실의 접점의 보편 정서가 얘기되는 곳이어서 가능했다. 


















아, 그런데 뒤늦게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에 흠뻑 빠져 버렸다. "로켓의 여름이었다." 이런 문장 하나로도 사람을 끌어당길 수 있는 작가라니. 존 스칼지가  열두 살에 실물을 영접한 마법사 같은 작가로 레이 브래드버리를 회고한 서문은 이 책을 다 읽고 마무리로 맞춤했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를 읽는 일은 아쉽게도 열두 살은 아니지만(그 때 이 마법에 걸린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황홀할까) 마법사가 만든 마법의 왕국에 로켓을 타고 탐사를 다녀온 느낌이다. 허무맹랑한데 그냥 무작정 설득된다. 잠들어 있던 그 무엇이 하나하나 깨어난다. 올더스 헉슬리가 브래드버리를 시인이라고 칭하자 "그런 망할 일이."이라고 응답한 에피소드를 고백한 것은 겸손이 아니다. 올더스 헉슬리의 이야기가 맞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어로 화성의 연대기를 만들 수 있는 작가가 이 지구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그가 설계한 화성은 지구와 동떨어진 곳이 아니다. 지구인들의 탐욕과 오만, 질서, 차별 의식을 벗어던지고 남은 실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지구인들은 연이어 원정대를 보내고 그곳을 또 오염시키려 한다. 그들만의 공고한 관념과 욕망은 다시 삶의 음험한 두려움과 불안, 유한한 생의 한계를 불러온다. 그의 비판 의식은 언뜻 화성과 지구를 대척점에서 대비시키는 것 같지만 화성은 결국 우리의 가장 근원적인 삶과 생의 핵심을 정면으로 직시해야 하는 전환기의 공간으로 위치한다.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허공에서 너무나 사소해져 버린 지상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삶을 조망하듯 이 작가의 렌즈로 비로소 우리와 우리가 채운 지구를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화성 연대기>의 스물 여덟 편의 이야기는 연작처럼 묘하게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1999년 1월부터 2026년 10월로 상정되는 기간은 저마다 하나의 이야기를 가진다. 그것은 화성에 정착한 지구인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연인들이 정착한 화성으로 떠나기 전의 여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화성에서 이미 전멸해 버렸다고 생각한 화성인과 노인이 재회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또한 사라져 버린 아름다운 환영과의 재회, 과거, 현재, 미래가 교차하는 이야기, 돌이킬 수 없는 작별들을 송환하는 메아리이기도 하다. 한 편 한 편은 브래드버리의 서정적이고 다채로운 언어들로 직조되어 인류의 거대한 출항의 서사시처럼 들린다. 


브래드버리 자신의 이야기를 빌려 "먼지를 흠뻑 뒤집어쓴 과거로 미래를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한 이야기들이다. 미래의 이야기에서 그리운 빛바랜 과거의 향수를 다시 발견하는 즐거움은 특별한 것이다.


할아버지가 작은 초에 불을 붙이면 풍등은 천천히 빛을 품고 부풀어 올랐고,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친척들은 우울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떠나보내기 싫은 반짝이는 환영이었으니까. 풍등을 손에서 놓으면 인생의 한 해가, 또 한 조각의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셈이니까. 풍등은 빛을 품은 채로 따스한 여름밤의 별자리 사이로 흘러갔고, 빨갛고 하얗고 파랗게 물든 눈들은 함께 베란다에 앉아 아무말 없이 그 모습을 좇았다. 

-레이 브래드버리 <풍등>


이 책을 손에서 놓으면 인생의 한 해가, 또 한 조각의 아름다움이 별빛 사이로 떠가는 풍등처럼 사라져 버린다. 다행히도 풍등을 떠나 보내는 마음은 사라져 버리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의 가치와 무게로 바로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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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역주행이다. 사십 대에 갑자기 김연수의 <스무 살>을 , 하루키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읽는 일. 이십 년도 넘게 지난 스무 살의 정서는 이제는 과거완료형이다. 그럼에도 나는 더 깊이 더 풍부하게 주인공들의 정서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건 당시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이 비로소 완결되고 나서야 뒤돌아보고 나서야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게 되는 인생의 많은 일들과 스무 살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스무 살은 그렇다. 하나의 사건 같다.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하고 헤어지고 넘어지고 구르는 일, 모두가 빛난다고 최고라고 하는 시기를 통과하며 전혀 그렇다고 느낄 수 없는 그 거리감에 한없이 추워하면서도 내가 과연 서른 살과 마흔 살을 기다리는지 확신할 수 없었더 시간들.

















정말 놀라운 것은 하루키가 스물아홉 살에 갑자기 "아무 생각 없이 쓴 소설"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결국 오늘날의 하루키가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인간의 심연, 삶의 비의의 원형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물론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은ㄱ 심플한 문장들이 하루키스러운 그 무엇의 강렬한 울림을 더 원색적으로 제공한다. 스물한 살의 남자애가 또래 여자애와 나누는 그 살아 있는 대화들, 갑자기 튀어 나오는 너무 무겁고 진지한 삶의 이야기들은 불협화음처럼 들려야 하는데 또 그렇지 않다. 이를테면 우리도 그랬다. 뜬금없이 스무 살에 죽음을 이야기하는 식. 삶의 모든 철학적 진의를 이미 다 알아버린 듯한 허세. 스무 살은 그런 부조화와 모순과 불협화음의 결정체여야 스무 살 답다. 논리적이고 담담하고 겸손하다면 그건 스무 살의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다. 마땅히 지워버리고 싶은 많은 부분을 품고 있어야 제법 스무 살 답다. 내 생각은 그렇다.


김연수의 <스무살>의 친구 재진과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친구 쥐는 크게 닮은 점이 없다. 아니, 오히려 반대다. 재진은 온순하고 사회의 정형화된 틀에 맞는 성공의 코스를 성실히 답습한다. 쥐는 그렇지 않다. 반항하고 도망친다. 둘은 각각 주인공의 청춘에 강렬하게 각인되는 주변인으로 그려지지만 어쩌면 자신의 내부에 있던 또 다른 자아의 모습일런지도 모른다. 결국 김연수도 하루키도 화자가 아니라 재진과 쥐를 그려내기 위해 단지 나의 스무 살과, 스물한 살을 빌려온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결국 이러한 것을 이미 우리는 다 나이 들어서가 아니라 이미 스무 살에 직관적으로 알았다는 것을 고백하기 위한 방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라구. 조건은 모두 같아. 고장난 비행기에 함께 탄 것처럼 말이야. 물론 운이 좋은 녀석도 있고 나쁜 녀석도 있겠지. 터프한 녀석이 있는가 하면 나약한 녀석도 있을 테고, 부자도 있고 가난뱅이도 있을 거야. 하지만 남들보다 월등히 강한 녀석은 아무 데도 없다구. 모두 같은 거야.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자는 언젠가는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겁을 집어 먹고 있고,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자는 영원히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게 아닐까 걱정하고 있지. 모두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빨리 그걸 깨달은 사람은 아주 조금이라도 강해지려고 노력해야 해. 시늉만이라도 좋아. 안 그래? 강한 인간 따윈 어디에도 없다구. 강한 척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뿐이야.

-무라카미 하루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중


우리 모두 마찬가지다. 종내는 고장나서 추락할 수밖에 없는 죽음으로 향한 비행기에 함께 타고 있다. 다 두려워하면서 그것을 숨기기도 하고 잊기도 한다. 이미 그걸 우리는 아주 어려서 알고 있었다. 그래도 계속 잊어 버리고 욕망하고 시샘하고 절망한다. 청춘의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죽음과 상실과 직시함으로써 제대로 복기할 수 있다. 가뭇없이 사라져 버리는 그 찰나를 복원하는 것은 그래서 어렵고 여전히 유효하다. 노인이 되어서 다시 스무 살의 이야기를 읽는다 해도 여전히 나는 또 가슴 뭉클할 것이다. 너무 멀어져 버려서, 너무 가까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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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7-13 16: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루키는 아무 생각 없이 써야지 좋은 작품이 나오나 봐요. 전 하루키 작품 중에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참 좋아했거든요. ㅎㅎ

blanca 2021-07-14 08:01   좋아요 1 | URL
저 이거 얼마전에 읽었어요. 정말 좋더라고요. 진짜 힘이 쫙 빠진 담백한 서정성.
 

진짜 신비로운 일이 있다. 이를테면 충동적으로 산 호박잎. 이건 그냥 시판 쌈장과는 안 어울린다. 강된장을 만들어 먹어야 하는데 그건 심히 귀찮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다음 날 만나기로 한 엄마에게 쌈장을 부탁한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그런데 식당 앞에서 부시럭 부시럭 검은 봉지를 내미는 엄마가 

"자, 쌈장이다. 쌈 싸먹어라. 상추까지 사려 했는데 상추는 아줌마가 안 나와 못 샀다."

이러는 것이었다. 그럴 때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나는 쌈장을 말한 적이 없다. 엄마가 종종 쌈장을 만드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때 맞추어 쌈장이 왔다. 게다가 나에겐 호박잎이 있다. 상추 아줌마가까지 때맞춰 안 나와준 것이다. 이럴 수가.
















게다가. 나는 하루키의 <우연 여행자>를 읽고 있었다. <우연 여행자>도 그런 신비로운 우연에 관한 이야기다. 화자인 하루키가 자신이 좋아하는 재즈 피아니스트에게 요청하고 싶었던 앵콜곡을 마치 알아채기라도 한듯 바로 듣게 되는 우연, 우연히 카페에서 같은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만나게 된 여자, 그 여자의 투병으로 오랜 기간 소원했던 누나와 재회하게 된 우연 등이 계속해서 나오는 이야기다. 논리적이지도 않고 핍진성도 떨어져 보이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갖는 것은 역시 하루키이기 때문일까? 


기본적으로 하루키의 이야기에는 신비로운 요소, 정합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은 서사의 진행들이 빈번하다. 갑자기 누군가가 사라지거나 다시 나타나거나 죽은 자를 보게 되는 등의 판타지는 그런데 묘한 설득력을 갖는다. 거기엔 인간의 내면, 심연에 가닿은 하루키 특유의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 개입하는 우연성, 그 돌발적인 변수들에 대한 천착은 언어와 인식의 틀로 포섭되는 것이 아니다. 그 지점을 이야기하는 데 하루키는 노련하다.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다. 논리적인 근거를 댈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있다. 하나레이 해변에서 서핑을 하던 아들을 상어에게 잃은 엄마가 그 아들의 모습을 봤다고 주장하는 또래 청년들을 만나 그들의 시선에 맞춘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가 가지는 감동은 그 느닷없음이 끼어든 삶이 그 후로도 여전히 진행되는 모습을 그린 것에 기인한 바가 크다. 가장 큰 신비는 바로 그것이 아닐까. 상실, 절망,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서 여전히 삶은 계속된다는 것. 그 자체의 신비를 대적할 크기의 것은 없을 것 같다. 그게 가장 오컬트적인 삶의 비의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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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6-22 13: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언제나 블랑카님 글을 좋아하지만 오늘 글을 읽으면서는 아 블랑카님 처럼 글쓰고 싶다, 생각했습니다. 저도 꼭 블랑카님처럼 쓰고 싶어요. 블랑카님 글은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고 차분하며 그러면서도 중요한 건 다 넣고 있는 것 같아요.

쌈장에 호박잎으로 식사는 맛있게 하셨습니까?
:)

잠자냥 2021-06-22 14:20   좋아요 1 | URL
다부장님은 정리정돈 잘 된 글에 약하시군요? ㅋㅋㅋㅋㅋ 다부장님 삼천포 글도 매력있어요. ㅋㅋㅋㅋㅋ 그런 글 쓰기 쉽지 않아.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6-22 14:27   좋아요 3 | URL
네, 저는 워낙 정리정돈을 못해서 정리잘 된 글 보면 되게 매력적이고 부러워요. 아 어떻게 이게 되지.. 이러면서요. 그런 글 쓰는 분들 너무 멋져요! 그게 생각하고 써야 가능한 것 같은데 저는 쓰면서 생각해서 그런것 같아요. 어휴.. 안돼안돼 왜 안될까.. ㅠㅠ

blanca 2021-06-22 17:01   좋아요 1 | URL
거의 며칠을 웅녀의 마늘처럼 먹었어요. ㅋㅋㅋ 또 이게 수제 쌈장은 유통기한이 짧아서 전투적으로 며칠내에 소진해야 합니다. 아, 다락방님 글의 매력은 이미 검증된 바가 있잖아요. 저의 문제는 글을 길게 못 쓰겠어요. 어느 정도 쓰면 에너지가 바닥나고 다른 것들이 자꾸 떠오르는... 이것도 참 문제더라고요. 어느 정도 분량 이상되는 깊이 있는, 그것도 생활에 접목한 글을 쓰시는 다락방님이 부러운걸요.
곧 행복한 퇴근길 되시기를...
 

교생 실습을 나가고 난 후 스스로 교사가 될 자질과 역량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고작 한 달이었지만 중학생 아이들과 생각보다 교감이 잘 되지 않는다고 느꼈고 수업에 대한 열정도 크게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니 그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이었던가 확신이 안 선다. 아이들과 어쩌면 함께 했을 수도 있을 교실에서의 수업의 정경을 떠올리게 된다. 같이 읽고 쓸 수 있다면, 그 또한 지금은 짐작하기 힘든 의미가 있었을 것 같다. 어렵고 생각대로 안 되고 때로는 상처 받고 실망하고 무력감에 휩싸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지 않은, 아니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이 남는다. 

















십대에게 읽고 쓰기를 가르친 국어 선생님들의 이야기인데 이 둘의 현장은 외형적으로 사뭇 다르다. <우리들의 문학시간>은 과학고이고 <소년을 읽다>는 소년원이다. 한곳은 <코스모스>를 읽고 교사보다 더 쉽게 이해하는 아이들이 영재 교육을 받는 곳이고 다른 한 곳은 열일곱 살까지 단 한 권의 책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소년이 교사에게 인사하기 위해 간이 교실에 자유롭게 들어오지도 못하고 개인적으로 만화책도 소유하지 못하는 곳이다. 표면적으로만 보자면 이들의 공통점은 십대라는 연령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생각지 않게 이 두 공간을 가로지르는 공감의 지대에서 두 공간의 십대들은 만난다. 좋은 글을 읽고 마음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편견은 와르르 무너진다. 윤동주의 시에 모두 진심으로 공감하고 소년원 친구들은 줄줄 암송해 내기까지 한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진지하고 순수했다. 좋은 글 앞에서. 


<소년을 읽다>를 읽다 자주 가슴이 아렸다. 분명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이 가는 곳이다. 범죄에는 분명 피해자가 존재한다. 그들을 의식한다면 이 소년들의 국어 수업을 그저 낭만적으로만 받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독방에서 시엽서의 시를 암송하며 시간을 보내고 책의 감상을 나누는 시간에 '먹고사는 일의 급급함'을 발표하고 십대의 아이들이 택배 상하차를 다룬 이야기에 가장 크게 공감하는 풍경은 이 소년들을 또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한다. 아이이고 싶은데 아이에 머무를 수 없는 상황을 감히 상상해 본다. 일찍부터 친절하지 않았던 세상, 소년이기 이전에 생활인으로서의 역할을 먼저 강요하는 곳에서 재판으로 넘어온 경계의 이편에서 저자는 아이들을 만난다. 저자 또한 자신 앞에 있는 이 소년들의 열중하는 눈망울과 그 뒤안의 이야기를 연결하는 데 큰 어려움을 느낀다. 그것은 무엇보다 이 아이들에게 이러한 좋은 삶과 좋은 읽기를 가르치는 일이 가지는 궁극의 의미에 대한 불확실성과도 닿아 있는 이야기다. 이곳의 아이들은 다시 세상으로 나가지만 그 세상은 그 아이가 떠나왔던 이 곳에 오기 직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테고 이것은 아이들이 좋은 삶을 사는데 인간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회복하는 데 분명 우호적인 상황은 아닐 것이다. 암울한 전망과 현실로 여기에서의 아이들을 바라보고 재단하는 일은 어떤 관성처럼 아이들을 옭아맨다. 


금요일마다 만나서 소년들과 시를 외우고 책을 읽는 꽉 찬 시간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디에 쌓이고 있을까. 강 하구에 퇴적물처럼 조금씩 쌓이고 쌓이다가, 바다로 흘러가는 어귀에서 새로운 물길을 만나게 될까. 아니면 도로 옆에 쌓인 흙먼지처럼 풀꽃 위에 잠시 머물다가 , 휙 지나가는 자동차가 일으키는 바람에 흔적도 없이 흩어져버리고  말까. 사라져버리고 말까.

-서현숙 <소년을 읽다> 


실제 일 년 동안의 수업일기는 대단한 성취나 거창한 감동의 결말을 가진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극적으로 교화되어 근사한 성인이 되어 나타나는 장면도 없다. 대신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해주어 감사하다며 선생님에게 커피 두 잔의 기프티콘을 보내오고 선생님 건강하라고 안부 전화를 잊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담담한 장면들의 울림이 한층 더 크다. 사람을 믿지 않았던 아이들이 자신들과 일주일에 한번 책을 읽고 때로 짜장면을 사주었던 선생님의 건강을 신경쓰고 누군가와 함께 선생님이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겨나기까지의 여정은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읽는 일을 가르친다는 것은 그러한 것이다. 


나는 잘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잘 안다. 그래도 무언가를 함께 읽고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을 나누며 교감을 나누며 그들의 기억의 한 자락을 점유하게 되는 일은 분명 헤아리기 힘든 질량과 질감을 가지는 시간일 것이라는 점에서 다시 한번 부럽다. 그것이 세상의 풍파를 만나 깎이고 때로 스러진다 해도 거기 그렇게 한 구석에 오롯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 가지게 될 가치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하는 책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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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06-08 19:2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교생 실습하신 적이 있으시군요.
저는 오래 전 주일학교 교사를 한 적이 있는데 저도 아이들 가르치는 건
정말 내일이 아니구나 했죠. 그래도 한 6년 했던 것 같습니다.
성경을 직접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가능했죠.ㅋㅋ
요즘 성경공부를 줌으로 하고 있었는데 정말 못할 짓이더군요.
근데 리더님이 참 열정 있으세요.
본인도 죽 쑤고 계시다는 걸 누구 보다 가장 잘 알고 계실텐데
저 같으면 일찌감치 포기했을 텐데 끝까지 해 내시는 걸 보면서
저의 주일학교 시절을 돌아보곤 했습니다.
중요한 건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끝까지 해 내는 것이구나 반성하게 되더군요.

blanca 2021-06-09 11:19   좋아요 4 | URL
스텔라님, 6년이나 그 일을 지속하셨다니 대단하시네요. 아, 요새는 다 줌으로 하는 분위기가 되어서. 그런데 이게 모여 하는 분위기랑은 또 다르더라고요. 아무래도 아쉬운 점이 많은데 지금 이 상황에서는 이게 또 최선이라... 맞아요, 그런데 그 끝까지 해내는 게 진짜 갈수록 더 힘들어져요. 그런데 저는 갑자기 요새 아이들이 마음으로 예뻐요. 뒤늦게--;; 이걸 좀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요.

페크pek0501 2021-06-18 12: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때에 따라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저도 교생실습을 나간 적이 있는데 교사는 제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잡지사 기자 하다가
어찌어찌하여 나중에 뒤늦게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이외로 적성에도 맞고 재미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지금은 수업을 하고 싶지 않더라고요.ㅋ 인생엔 정답이 없음, 인 것 같아요.

blanca 2021-06-22 13:17   좋아요 3 | URL
페크님, 잡지사 기자 일 하셨군요! 저는 막 마음으로 애들이 이쁘고 그러지 않아 그게 이십 대에 나는 교사가 되지 못할 이유라고 판단내렸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나이 들고 나니 고등학생도 예쁘고 대학생도 예쁘더라고요. ㅋㅋ 귀엽고 아기아기한 아이들 뿐 아니라 뭔가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이 지금에서야 생기니...왜 이렇게 항상 타이밍이 어긋날까요. 뭔가를 할 수 있을 때에는 그게 싫고 참, 모르겠습니다.

초딩 2021-07-07 23: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blanca 2021-07-08 08:3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07-07 2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blanca 2021-07-08 08:31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감사해요.^^

얄라알라 2021-07-08 15: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링크 타고 들어와서 이제서야 글 읽고 갑니다. 축하드려요^^

blanca 2021-07-13 15:4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책과커피 2021-09-22 17: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넘 멋진글!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맛있는 글이네요~^^ 저도 주일학교등 20년 넘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데요 뒤늦게 아이들이 그모습 그대로 예뻐요~

blanca 2021-09-23 11:36   좋아요 1 | URL
기대보다 너무 좋은 책들이라 감상에 젖어 봤습니다. 시대가 아무리 달라져도 아이들을 대하는 일은 어떤 특유의 가치와 보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