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해서 이 예술가들이 열대를 자신들의 문명과 동일한 선상에 놓았던 것은 아니었다. 문명과 야만의 근대적 이분법에서 원시적 이상향이었던 열대는 야만으로 취급받았고, 그들은 이를 ‘고귀한야만 noble savage" 5 이라는 이율배반적인 명칭으로 개념화했을 뿐이다. - P32

결국 열대우림이 제거되는 이유가 우리의 일상생활과 연결되어있다는 엄연한 사실에 비추어본다면, 바로 우리가 열대우림을 갉아먹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연결고리는 질기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열대의 자연환경, 그것을 보러 가는 길에 개발로 훼손되고 있는 심각한 지구촌의 문제 또한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게 된다.
열대 여행은 그렇게 우리를 즐겁고도 우울하게 만든다. - P105

당시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던 영국의 탐험가들은 자신들이 첫발을 내디딘 주요 지점마다 빅토리아 폭포, 빅토리아섬, 빅토리아항 등빅토리아라는 지명을 붙여놓았다. 나는 식민제국주의 시대에 굴러들어온 이러한 지명들이 원래대로 복원되기를 바란다. 예를 하나 더들면, 세계 3대 폭포 중 하나라고 알려진 잠베지강 중류의 빅토리아폭포를 원주민들은 ‘모시-오야 - 둔야Mosi-oa-Tunya‘라고 불렀는데 이는 ‘천둥 치는 연기‘라는 뜻이다. 이곳에 와본 적도 없는 영국 여왕의이름보다 훨씬 실감나는 멋진 이름이 아닌가! - P137

열대의 고산지대는 과거 유럽 식민지배 세력들에게 대단히 매력적인 곳이었다. 저지대의 덥고 습한 열대 기후가 유럽인들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환경이었던 데 반해 고지대의 상춘 기후는 그들이 활동하기에 알맞은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열대의 저지대에원주민들이 밀집한 전통토착도시를 초기 식민통치의 행정중심지로삼았던 유럽인들은 점차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휴식과 위락을 위한휴양도시를 고산지대에 건설하게 된다. 온화한 환경을 지닌 이러한도시를 ‘힐스테이션hill station‘이라 한다. 특히 저지대 전통 토착 행정중심지의 우기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덥고 습해지면 그 기간 동안일시적으로 도시행정 기능을 아예 힐스테이션으로 옮겨 일종의 계절 수도를 운영하기도 했다.  - P185

이곳의 울창한 열대우림은 또한 유럽 세력들이 신대륙 식민화를거의 끝내는 17세기까지도 마야 문명이 완전히 정복되지 않고 존속할 수 있었던 지리적 배경이 되었다. 즉, 이곳 유카탄 반도는 비록기복이 별로 없는 평평한 땅임에도 열대우림으로 뒤덮여 정복하기어려운 매우 낯설고 힘든 싸움터였던 것이다. 스페인 식민세력은 자신들의 터전인 이베리아 반도의 고원 환경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유카탄을 제외한 멕시코의 고원지역은 쉽게 정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 유카탄의 열대우림은 무지의 땅, 고난의 땅이었을것이다. - P206

인류의 아름다운 자산을 여행을 통해 감상하고픈 욕망 자체는 지극히 당연하다. 다만 그것을 편리한 방법으로 편안하게 즐길 것이나, 아니면 다소 불편하더라도 고된 여정을 참아가며즐길 것이냐의 차이가 있다. 지구 환경의 파괴가 우리 미래의 삶을위협한다는 현실 앞에서 나는 기꺼이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 P207

세계사 시간에 인류가 미개 - 야만 - 문명의 단계를 거쳐 ‘발전‘을 해왔다고 배웠고, 이러한 단계를 도구 활용 기술의 변화와 연결해석기 - 청동기 - 철기 시대가 순차적으로 이어져왔다고 배웠다. 19세기 사회진화론에 뿌리를 둔 이러한 사고는 문명이곧 발전이고, 발전은 곧 행복을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변화임을 은연중에 우리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 P230

여행지의 자연과 문화는 서구의, 혹은 한국 사회의 관점이 아닌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각각의 삶터에서 살아가는 그곳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연과 문화의 세게 속에서 가장 바람직한 형태로 적응하며 행복한 삶을 향해 분투하고 있다. 그들과 내삶을 비교해 생각해보되 내 기준으로 타인의 행복을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각 지역의 지리적 맥락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고, 그에 적응하며 가장 합리적으로 형성된 그곳 사람들의 삶의 방식 또한제각각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 P237

지금의 남아프리카공화국 영토 내에서는 백인들 중 보어인이 수적인 우위가 계속 유지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잡게된다. 그리고 이들의 극우적 정치력은 진정한 선주민인 80퍼센트의흑인 코이산족)들을 향한 차별정책으로 이어졌다. 아파르트헤이트(흑인격리정책 같은 지독한 흑인 차별정책은 1994년 공식적으로 사라졌지만, 부유한 백인들이 사는 주택 단지의 담장 위에 설치된 전기 철조망처럼 그 흔적은 여전히 곳곳에 남아 여행자의 시선을 잡아끈다. - P277

싱가포르는 작은 면적의 섬 위에 자리 잡은 도시국가다. 그런데 경제력이 커지면 땅에 대한 수요 또한 커질 수밖에 없으므로 이 문제는싱가포르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다. 기발함이 넘쳐나는 싱가포르는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왔을까? - P309

표류를 통해 남방 열대지역을 가장 길게 경험하고 그 기록을 가장상세하게 남긴 사람은 아마도 우이도(소흑산도홍어 중계상 문순득이아닐까 싶다. 흑산도 일대에서 홍어를 사서 나주 영산포로 싣고 가서파는 일을 했던 그는 1802년 1월 풍랑을 만나 표류 끝에 유구국(오키나와에 도착한다. 여기서 8개월을 체류한 후 중국으로 가는 조공선을 타지만 또다시 표류해 이번에는 더 남쪽으로 여송국(필리핀 루손섬)에 도착한다. 여기서는 9개월 체류한 후 마카오 상선을 얻어타고마카오에 도착한다. 이후 육로로 중국을 가로질러 북경을 거쳐 한양에, 그리고 마침내 1805 년 1월 고향 우이도에 도착한다.
그런데 그 당시 우이도에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실학자, 정약전이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운명과도 같은 만남을 통해문순득의 파란만장한 3년 2개월의 여정이 <표해시말>로 기록되어 전해지게 된다
- P327

문순득의 탁월한 외국어 구사 능력은 고향으로 귀환한 후 엉뚱한기회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1801년 제주도에 표류해 9년 동안이나 억류당해 있던 여송인들의 통역으로 나서 귀환을 성사시킨것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 조선 땅에서 만난 문순득이 그들 눈에는마치 구세주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 P3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