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바뀐 사람들]-감태준

산자락에 매달린 바라크 몇 채는 트럭에 실려 가고, 어디서 불볕에 닳은 매미들 울음소리가 간간히 흘러왔다
다시 몸 한 채로 집이 된 사람들은 거기, 꿈을 이어 담을 치던 집 폐허에서 못을 줍고 있었다

그들은, 꾸부러진 못 하나에서도 집이 보인다
헐린 마음에 무수히 못을 박으며, 또 거기, 발통이 나간 세발자전거를 모는 아이들 옆에서, 아이들을 쳐다보고 한번 더 마음에 못을 질렀다

갈 사람은 그러나, 못 하나 지르지 않고도 가볍게 손을 털고, 더러는 일치감치 風聞(풍문)을 따라간다 했다 하지만, 어디엔가 生(생)이 뒤틀린 산길, 끊이었다 이어지는 말매미 울음 소리에도 문득문득 발이 묶이고,

생각이 다 닳은 사람들은, 거기 다만 재가 풀풀 날리는 얼굴로 빨래처럼 널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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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어느 곳 향해 발을 내딛으랴. 어느 하늘 아래 몸누일 지상의 방 한 칸 찾으랴.
오뉴월 염천에 뒤틀리고 끊긴 길은 우리네 인생처럼 자꾸 흔들리고 풀어져 내리는데, 꿈을 따라 누비고 감치고 박고 이어온 길.
그 길 밖으로만 밀려나 밀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으로 쥐어보는 주먹도 아프고, 저 헛되고 무모한 믿음과 의지도 부질없어라.

수도 이전 후보지 지정 한 달.
신행정 수도 건설특별법 위헌 헌법소헌이 벌어지고, 무모한 공청회가 연일 개최하고, 여 야는 힘겨루기가 한창이고, 부동산 중개업소는 하루에 하나씩 문을 열고, 수용지는 쪽박이고 후보지 인근은 대박의 기대감이 한창이다
공시지가 2배 보상 받아도 아파트 한 채 장만 어려운 ' 700년 가꾼 터전 고향 두고 못 떠난다' <투쟁>이란 붉은 글씨체의 현수막 사진이 조간 신문속에서 눈물처럼 펄럭인다.
또 한 면에는 아파트값 수천만원 '껑충' 농지시세도 작년 2~5배 충청권 투기 청양등 확산이란 연기군-장기면 일대 르포 기사가 시선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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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에 대하여]-복효근

오래전 입은 누이의
화상은 아무래도 꽃을 닮아간다
젊은 날 내내 속썩었쌓더니
누이의 눈매에선
꽃향기가 난다
요즈음 보니
모든 상처는 꽃을
꽃의 빛깔을 닮았다
하다 못해 상처라면
아이들의 여드름마저도
초여름 고마리꽃을 닮았다
오래 피가 멎지 않던
상처일수록 꽃향기가 괸다
오래된 누이의 화상을 보니 알겠다
향기가 배어나는 사람의 가슴속엔
커다란 상처 하나 있다는 것

잘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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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상처에선 향기뿐 아니라 추억도 깃들어 있다
유화물감 냄새 번지던 친구의 화실, 낡은 목조계단의 삐걱거림, 퉁퉁 불어터진 라면, 각종 공모전의 모집요강, 그윽한 첼로의 선율, 빗소리,눈물 담긴 눈으로 올려다 보던 저녁 별, 가지 않은 길, 두 개의 떡갈나무 사이로 프로스트....눈오던 밤의 이별, 아아, 진작에 잊은 내 아무렇게나 잊으려 한 옛이야기를 떠올리면 알겠다

바람 불어쌓고 눈,비 휘날려 때리던 날의 모든 것들
그토록 먼 길 돌아 돌아
오래된 술처럼 익어 간 상처도 향기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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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김재진

문득 눈앞의 세월 다 지워지고
사람이 아름다울 때 있다
수첩 속에 빽빽하던 이름들 하나같이
소나기 맞은 글씨처럼 자욱으로 번질 때
흔적도 없이 사라져갈
사람이 아름다울 때 있다
세파에 치어 각양각색인
남루 또한 지나간 상처 마냥 눈물겹고
서있는 사람들이 한 그루 나무처럼
이유없이 그냥 아름다울 때 있다
가파른 세월이야 지나면 그뿐,
코끝을 감고 도는
한 자락 커피 향에 두 눈을 감고
비 맞는 나무처럼 가슴 적시는
무심한 몸놀림이 아름다울 때 있다


*내 모든 그리움을 모아 불러보고 싶은
세월따라 바람따라 먼 먼 기억의 강물소리 같은
당최 안 잊히는 사람
내 오랜 무심함의 아픈 회초리 때늦은 후회로
천둥처럼 가슴을 치는
한 그루 늙고 병든 나무로 버티고 서서 너무 오래된 이름
당신!

아버님의 꿈은 만년 권투선수였다
때론 마도로스가 되어
항구의 일번지 마도로스 부기부기 LP판 턴테이블이 돌아가고....

쨉 쨉 라이트 훅 길게 뻗고 어퍼컷 치면서
꽃 다 진 키큰 나무 앙상한 가지만 남긴 채
비틀비틀 절뚝거리며 세월은 그렇게 꿈처럼 아름답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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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7-21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얼마나 세월이 더 흘러야 세월이 그렇게 꿈처럼 아름답게 흘러갔다고 말할수 있을까요.
김재진님의 나무 님의 서재에서 보니 더 반갑네요.

두심이 2004-07-21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있잖아요. 이시를 읽고 있는데, 갑자기 부모님 생각이 문득 나서, 휴가떠나신 부모님들께 안부전화 드리려고 해요. 길을 잃고 헤맬때 늘 제 등불이 되어주신 분들이었죠.
 


[선운사에서]-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십 수 년이 지나고도 까마득하게 세월을 잊고 살고도
지난 날 홀로 뒤척이던, 잠이 먼 그 밤의 빗소리 잘도 들린다.
돌아서면 잊으리라
이빨 앙다물고 축축하게 젖어오는 가슴을 다치던,
그 날과 그 시간의 물소리 바람소리 여전히 그치지 않는다.
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불러볼 그 이름 그 목소리 그날의 풍경 하나 애써 기억나지 않는다.
세월이 가면
안부없이 세월이 가고 나면
이 곳에 길이 있었던가 우리 어떤 노래를 불렀던가
희미한 흔적처럼 그 모든 추억의 이름을 덮고 어디서 먼 강물소리 들릴 지 모른다.
문득 길을 가다 우연히 흘러 나오는 음악을 듣다 옛날 영화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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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7-15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글 올리셨네요.
전 시보다도 오히려 님의 글에서 더 목이 메어 버리곤 합니다.^^

프레이야 2004-07-25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가분아저씨, 무더운 날씨에 건강한 생활 하고 계시겠죠.
이 시와 님의 글, 모두 좋아서 가져갑니다.
 

[ 구두가 남겨졌다 ]-나희덕

그는 가고
그가 남기고 간 또 하나의 육체
삶은 어차피 낡은 가죽 냄새 같은 게 나지 않던가
씹을 수도 없이 질긴 것
그러다가도 홀연 구두 한 켤레로 남는 것

그가 구두를 끌고 다닌 게 아니라
구두가 여기까지 그를 이끌어 온 게 아니었을까
구두가 멈춘 그 자리에서
그의 생도 문득 걸음을 멈추었으니

얼마나 많이 걸었던지
납작해진 뒷굽, 어느 한쪽은 유독 닳아
그의 몸 마지막엔 심하게 기우뚱거렸을 것이다
밑 모를 우물 속에 던져진 돌이
바닥에 가 닿는 소리
생이 끝나는 순간에야 듣고 소스라쳤을지도 모른다
노고는 길고 회오의 순간은 짧다

고래 뱃속에서 마악 토해져 나온 듯한
구두 한 켤레, 그 속에는
그의 발이 연주하던 생의 냄새 같은 게
그를 품고 있던 어둠 같은 게
온기처럼 한 움큼 남겨져 있다 날아간다

...................................................................................................
* 구두 한 컬레 온전히 남기기 위해 그 먼 길들 걸어간다.
너무 숨가쁘게 때론 무심하게 아니면 맹목적인 그런 삶의 모습들 ...
어느날 문득 조금은 어긋나고 실패하고 망가진, 더는 어떻게 다듬어 보고
가지런하게 챙겨볼 여유도 없이 그런 요량도 없이 그렇게 또 세월이 가고...

아아, 산다는 일의 그 절실하고 간절함 같은 것
어디 누구 의미없는 삶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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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심이 2004-06-28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정말 가슴에 와닿는 글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