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月蝕(월식)]-김명수

달그늘에 잠긴
비인 마을의 잠
사나이 하나가 지나갔다

붉게 물들어
발자국 성큼
성큼
남겨 놓은 채

개는 다시 짖지 않았다
목이 쉬어 짖어대던
외로운 개

그 뒤로 누님은
말이 없었다

달이
커다랗게
불끈 솟은 달이

슬슬 마을을 가려주던 저녁

.......................................................................................................
*지구가 태양과 달 사이에 들어 달의 한쪽 또는 전체가 지구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는 현상을 월식이라 하던가. 어제 오전 달이 태양의 일부를 가리는 부분일식이 우리나라 상공에서 펼쳐졌다, 는 동아일보의 보도가 눈길을 끈다.

월식 현상이 있던 밤 어느 마을에 한 사나이가 지나가고 그 뒤로 누님은 말이 없었다.
개 조차도 외로워 목쉴 만큼 짖어대고 성큼 성큼 커다란 발자국은 끝끝내 누님의 가슴에 두근거림과 설레임과 쉬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으리...
월식 현상은 몽환과 환상과 자욱한 안개를 동반한 알 수 없는 분위기로 치닫고, 상상과 여백과 생략의 의미를 따라가는 길.

불끈 솟은
슬슬 마을을 가려주는 달 속엔
차마 하고 싶은 말 꾹꾹 눌러 숨죽인 그 얼마나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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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미인]-이원규

그믐께마다
밤마실 나가더니
저 년,
애 밴 년

무서리 이부자리에
초경의 단풍잎만 지더니

차마
지아비도 밝힐 수 없는
저 년,
저 만삭의 보름달

당산나무 아래
우우우 피가 도는
돌벅수 하나

.....................................................................................
*.
무서리 내리듯 푹 익어 결박된 사랑의 마음으로 보면  돌에도 피가 도는 것.
휘영청 보름달이 뜨면 마침내 뜨거운 피,
몸이 달아 징징 왼 몸이 달아
퉁방울 눈 뭉툭한 코 헤벌죽 웃음 짓는
돌벅수(장승) 하나.

아니, 그 아니
내 사랑도
절절하고 곰삭은 적막에 길들어
오늘 끝끝내 다정도 병이라 했던가

"옛 애인의 집"-이원규시집을 읽어 나가는 새로 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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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등을 밀며]-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갈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이미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 번은 입속에 준비해 둔 다섯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
*아버지!
절절한 사연 하나 없는 부자간이 이 세상에 있으랴.

당신 가신 지 이십 년,
돌이켜 보면 끝끝내 단 하나 피붙이 자식에게도 숨기고 싶은 지게자국(?) 같은 자존심 하나 있어 그 얼마나 외롭고 고단한 일생이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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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10-12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
담담하게 쓴 시면서도 읽고나니 절절하네요.
 

[나막신]-이병철

은하 푸른 물에 머리 좀 감아 빗고
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목숨 壽(수) 자 박힌 정한 그릇으로
체할라 버들잎 띄워 물 좀 먹고
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삽살개 앞세우곤 좀 쓸쓸하다만
고운 밤에 딸그락 딸그락
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
*추석에 어머니 모시고 아내, 아들, 딸 더부러 천주교 장미공원에 다녀왔습니다.
당신 무덤 앞 상석 옆면에 달랑 어머니 이름과 제 이름 뿐이었건만, 이제 세 식구나 불어 마음은 넉넉하게 한 살림 이룬 듯 하였습니다.
살아 계셨다면 겨우 일흔 여덟,
임당가는 길 경산 집 키 큰 미류나무와 함께 서서 아직도 창창할 앞길 무어 그리 바쁘게 질러 먼 길 떠나가셨는지요.
문득 돌아 보면 당신 안계신 이십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오늘은 달이 밝습니다.
휘영청 눈물겹도록 달이 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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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병]-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
*중풍으로 여러 해 자리보전 하던 어느 날 당신은 문득 물으셨다.
,,,,,,,,내 죽으면 고향 감천에 가야 안되겄나?
그래도 자식이 한 번이라도 더 가 볼 수 있는 경산쪽 공원묘지가 안 났겠습니까.
,,,,,,,,, 그래 네가 다 알아 해라....그리고 더는 말씀이 없으셨다.

그렇게 당신 떠나신 지 이십년이 넘었다.
일찌기 공자는 이립(而立)에 자립했다는데 , 당신가시던 그해 겨울 서른도 안되었던 난 미혹되지 않는다는 불혹(不惑,사십)도 넘어 하늘의 뜻과 삶을 안다는 지천명(知天名,오십)을 바라보는 가을을 맞이하고 있구나.

어디서 쪼그려 앉아 어께 들먹이며 흐느꼈을 당신의 고독한 말년을 생각했다.
제대하고 옳은 취직도 뫃하고 배깔고 엎드려 소설책이나 읽던 그 해 겨울, 자식을 향한 은근한 기대와 보람 얼마나 허무하고 부질없이 무너졌었던가. 그렇지만 한 번도 채근하거나 닥달하지 않으시고 자식이 다 알아서 하리라 믿어주셨던 당신....

오는 추석에는 그리운 당신보러 가야겠다.
당신의 손주 손녀 며느리 앞서거니 뒤서거니 청도가는 길 장미공원엔 가을빛이 한창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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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9-23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은 항상 가슴 시리도록 아련하네요.
댓글을 통해 추석 잘 보내시라는 글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