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떠나려거든 눈썹도 빼놓고 가라 했거늘 마음이 마냥 설레고 두근거린 것만은 아니었다. 일찌기 한 소년이 소 한 마리 값 훔쳐 집을 나선 이래 속절없이 어언 반세기가 흘렀다. 마침내 일천 마리 소 트럭에 나누어 싣고 고향 집 금강산 통천으로 찾아가던 잔뜩 나이든 사내의 감동적인 모습을 진작 TV에서 엿보았거니, 칠천 만 겨레의 염원도 눈물과 감동 더불어 분단의 벽을 넘었다.
 소떼 방문 후 고성항에서 금강산 가는 바다길이 열린 이래 방문객이 천만을 넘었다고 한다. 반세기 허리 잘린 아픈 세월을 보상이라도 받듯 너도 나도 금강산, 금강산으로 몰려갈 때도 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료다 식량이다 대북지원 사업이다 마냥 퍼주며 끌려가기만 하는 것으로 비치는 일련의 모습들이 왠지 못마땅한 탓이었다. 적어도 남북 적십자회담이나 서해교전이나 핵시설물 처리문제 등에서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저간의 사정이 금강산관광 조차도 허울 좋은 호사와 사치로 밖에는 여겨지지 않은 탓이기도 했다. 북의 태도가 그러할진데 1998년 11월 금강산 방문길이 트인 이래 아무리 아래 윗 집 온 동네 사람들 너나들이로 다 금강산에 간다손 그런 식으로는 가지 않겠다는 얄팍한 자만심 같은 것이었는지도 딴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 시인 있어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고 했던가.
초등학교 시절 익힌 금강산 찾아 가자 일만 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라는 동요거나 누구의 주제런가 맑고 고운 산 그리운 만 이천봉 말은 없어도.... 라는 가곡은 진작 내 가슴 저 깊은 곳에 몰래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만난 정비석의 '산정무한'이나 최남선의 '금강예찬'도 그 시절 그 얼마나 벅찬 감동 지지 누르며 숨가쁘게 징징 달아 오르도록 했던 문장들인가.

 내 어쩌다 좋은 글벗들과 시절의 인연 좇아 대구문인협회 문학 기행 세미나(7.15~7.17)에 참석했거니 바닷길에 이어 육로로 열린 길 위에서 나는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나 쉬 이룰 수 없는 기약처럼 그리운 금강산으로 향했던 것이다.
 시민회관 앞에서 7시에 세 대 버스에 탑승한 130여명은 추풍령 휴게소 지나 만해마을 옆구리에 끼고 화진포 넘어 오후 1시가 되어 고성 아산휴게소에 도착했다. 간단한 식사 후 헌병과 철책이 있는 바깥 풍경에 눈주다가 남측 출입국사무소에서 금강산 가는 수속을 밟고 있자니 조금씩 긴장되고 온 몸 가려두르는 막연한 기대와 미지의 호기심 같은 것이 스멀거리기 시작했다.
 금강통문을 지났다. 금강통문이라는 것은 비무장지대(DMZ) 에서 수색이나 매복을 위해 들어가는 문이라고 한다. 어느새 군사분계선(MDL)이란다. 아아 그 군사분계선이라는 것이 동서로 248km, 200m 구간마다 나지막하게 박아놓은 1292개의 콘크리트 말뚝이라니. 가까이는 700m 길게는 4km 비무장지대를 두고 남과 북이 반세기 동안 총부리를 겨눈 경계가 한갖 높이 1m도 안되 보이던 콘크리트 말뚝이 전부였다니.
 1290번 째 말뚝을 차창밖으로 스치듯 보고 나자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온갖 상념으로 삽삽하다.
 북측 출입국사무소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북한 노래 탓이었는데 가성 섞인 창법이랄까 그네들 특유의 톤이 전하는 아련함과 애수어린 호소력 같은 것이 가슴에
척척 와 감겼다. 어떻게 보면 낯설고 처연하여 알싸한 슬픔 같은 것이 묻어나는 듯도 했다. 그런 생각도 잠시 뿐 군데 군데 서있는, 대체로 시커먼 얼굴에 유독 커보이는 모자를 쓴 북한군의 모습을 곁눈질하며 갖고 간 짐가방을 검색대 앞에 내려 놓았다.
 일행 중 두 사람의 카메라가 문제였다. 금강산 관광시 규정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카메라 렌즈나 본체에 적힌 배율이 160mm 이상은 반입 허용이 안되고 휴대폰이나 심지어 밧데리 조차 소지했을 경우 벌금 10달러란다.
 우리측 안내원인 조장의 설명에 의하면 지켜야할 규칙이 많았다.
 버스 이동중에는 사진 촬영을 해서 안되며....북한군이나 주체사상 찬양의 글에 손가락질 해서도 안되며.....관광증을 접거나 낙서하거나 훼손해서도 안되며.....연두색 펜스를 벗어나서도 안되며.....방뇨를 하거나 휴지나 담배꽁초를 버려서도 안되며....허락된 곳 이외의 사진 촬영을 해서는 더 더욱 안되며......

 버스는 어느듯 숙소로 향했는데 원수처럼 총부리를 겨누었던 지난 세월도 부질없어서 같은 하늘과 땅 우리네 여느 시골과 다름없는 풍경들이었다. 잘 닦인 도로 옆으로 뻗은 철길은 두 달전 경의선과 동해선이 분단 57년 만에 시험운행을 하며 내달린 철길이었다.
 납작납작하고 꽝꽝 눌러놓은 듯 비슷한 모습의 단층 집들은 온통 회색빛이었고, 버스가 달리는 연도를 차단한 연두색 펜스 저 너머 간간 경계 근무를 서는 병사들은 꼿꼿하게 긴장된 모습이었다. 눈주어 자세히 보면 들녘에서 집단으로 농사일을 하고 있는 주민들의 모습은 60년대 우리 아주머니나 아저씨와 할머니들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숙소인 온정리는 사방 바위산으로 둘러 쌓였는데 바특이 바라다 뵈는 가깝고 먼 데 산들의 웅자가 예사로이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가는 날은 날씨가 잔뜩 흐려 수시로 빗방울을 뿌리다가 잠시 개다가 했는데 물안개 끼어 시정거리가 매우 짧은데도 바위산들이 주는 느낌은 이곳이 금강산 초입이라는 사실을 불러 일으키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온정리 구룡마을에서 너 댓명씩 한 방에 묵게 되었는데 숙소로 꾸민 컨테이너는 다소 아쉬운 구석은 있었지만 아무렴 이박 삼일의 일정인데 싶었다. 화장실과 공동 세면장은 따로 떨어져 있었는데 집 나서면 고생이라는데 그 정도면 좋고 자시고 따질 계제가 전혀 못되었다. 각자의 방에 짐을 두고 숨돌릴 겨를도 없이 평양 모란봉교예단 공연장으로 가야했기 때문이다.

 돔식 천장을 가진 건물 앞 바위돌에 깊이 새긴 '금강산 문회회관' 붉은 글씨가 낯설었다. 실내 공연장에 들어서자 예의 그 가성 섞인 쇳소리로 동포 여러분 반갑습니다, 라는 환영의 인사가 있고 교예단의 서커스가 시작되었다.
 사회자는 모나꼬축전에서 최고상인 금상을 받았다거나 국제교예축전에서 금학상, 금사자상을 받았다며 그 때 그 때 연기자들이 펼치게 될 교예의 종류를 설명하곤 했는데 눈 따로 귀 따로 노는 형편이었다. 공훈배우거나 인민배우로 호칭되던 연기자들의 기교가 너무 아찔하여 때로 눈을 순간적으로 감게 하고 나도 모르게 두 손에 힘주고 부르르 떨게 하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거리면서 탄성처럼 낮은 한숨을 내쉬기도 했는데 어깨에 장대걸고 발돋움해서 뛰기나 뒤로 돌며 옆으로 세바퀴 돌아잡기를 할 때는 아닌 말로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교예에 넋놓고 있다가 나는 어느 순간 40년도 전에 아버지 따라 몇 차례 구경한 서커스를 기억해 내기도 했다. 그 시절 때로 덕지덕지 기운 천막 천장 사이로 별이 보이거나 비라도 내리는 날은 가설무대위는 온통 빗물로 어룽지곤 했다. 그래..... 뚱뚱한 아줌마는 누워서 연신 항아리나 나무통을 돌리고, 사방 불길에 휩싸인 쇠봉이 돌아가고, 내 또래밖에 안되는 소녀는 허리가 반이나 꺽여 빛 바랜 추억처럼 덤블링을 넘거나 공중그네를 타고는 했었다.
 그리고 보니 내 대학교 1학년 시절 삐걱이는 목조 계단위 2층 도서관에서 한수산의 '부초'를 읽던 시간도 삼십년 저쪽의 일이 되고 말았다. 그 당시 일월 곡예단떠돌이 서커스 단원들의 뿌리 뽑힌 삶의 세계를 엿보고 느낀 감동은 말로 다 이를 수 없는 것이었다. 기억컨데 주인공 하명의 마지막 대사는 살아가는 순간 순간 늘 우리네 삶을 한번 쯤 되볼아 보게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어딜 가든지 내가 딛고 선 땅이 무대가 아닐까. 하늘이 천막인 게지. 시퍼렇게 살아있는 목숨 어딜 가서든 발붙여 볼테다. 어느 동네든 떨어지면 죽고 다치는 것은 정한 이치일 테니까 말야...."
 기억에 의존한 터라 소설속 문장과는 다를 터이지만 대략 뜻은 그런 정도일 것이다. 온정리에서 만난 교예단의 연기도 그러했다. 어차피 실수하면 다치거나 죽거나 팀에서 밀려날테니 아슬아슬하고 안타까워도 그네들은 또 그네들 나름대로 살아 남고자 하는 안간힘 같은 것으로 하루 하루 주어진 공연을 치루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교예단 공연후 저녁을 먹고 나자 온정리의 밤은 서서히 저물어 갔다. 그날 밤 모처럼 일상에서 놓여난 해방감과 금단의 땅에 왔다는 설레임이 빚어낸 감정의 발산에 대해선 긴 이야기가 필요 없겠다.
 누구는 억병으로 취해 이부자리에 오바이트를 했고 또 누구는 밤새 주사가 넘쳤다거나 가수면 상태에서 자다 깨다가 생시처럼 혹은 오래된 꿈처럼 밤이 깊어가고 어김없이 새벽이 오고 이튿날은 구죽죽이 비가 내렸다.


 더운 우물이라는 뜻의 온정리는 일제시대부터 금강산 탐방의 전초 기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었다. 애써 찾아보면 각종 금강산 탐승 안내 책자와 사진첩이나 엽서를 통해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오죽 했으면 송나라 어느 시인은 '고려국에 태어나 금강산이나 실컷 구경할 수 있었으면!(願生高麗國親見金綱山)하고 글을 남겼을까. 하지만 금강산의 여름은 결코 쉬 넘볼 수 있는 산은 아니었다. 오죽 했으면 한 달 가운데 사십일이 비온다 하고 마누라 팔아 장화 사라는 말이 있을까. 그 말이 하나도 부자연스럽지 않은 것이 새벽부터 내리던 비는 질금거리다가 아침을 먹고 구룡연에 오르기 위해 버스를 타자 사선으로 줄창 빗금을 그으며 간헐적으로 뿌려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익히 아는 얘기지만 봄에는 다이아몬드처럼 빛난다 하여 금강산(金剛山), 여름에는 무성한 녹음이 있다 하여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온 산 단풍이 아름다워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눈 덮인 바위들만 우뚝 뼈같이 솟았다 하여 개골산(皆骨山), 신선이 산다고 하여 선산(仙山). 멧부리 서릿발 같다고 하여 상악산(霜嶽山)....그 이름도 많았다.
 또 금강산의 소나무는 여느 우리나라 산의 소나무와 많이 달랐다. 겨울이면 설해목 현상이라 하여 눈쌓인 가지들이 눈 무게로 인혀 척척 부러지다 보니 위로만 죽죽 뻗게 되는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미인송' '금강송' '황장목' '적송' '홍송' '춘양목'.....등등 부르는 이름도 많았다.
 예전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는데 이번에 우연히 만난 손수용 화백님이 그랬다.
"온정리엔 엿장사가 많나? 왜 신발은 갖고 가서 남 산에도 못가게 하노?"
"신문에 기사 낼 사람이 신문에 나오겠다!"
 어느 수필가 한 분이 그 말을 받았는데 어제 술이 과하여 속앓이 탓으로 산행에 함께하지 못하는 모 기자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대번에 신발을 못찾았다는 말은 핑계로 알아 들었는데 어제밤 그 기자의 낭만적이고 무모하고 길게도 이어지던 술기운에 부대끼며 진저리를 치며 밤을 지샌 때문이었다.


 물 따라 계곡 따라 외금강 구룡폭포 가는 길은 구불텅 구불텅 산자락 에돌아 앞으로 나아갈 수록 점점 더 녹음이 짙어졌다.
목란다리 앙지다리 금수다리 만경다리 거쳐 금강문 앞에서 잠시 호흡을 골랐다. 일찌기 최남선 같은 이도 금강문을 지나며 '에쿠'하는 감탄사를 터트리며 눈앞에 전개되는 광경에 놀라움을 표시하지 않았던가.



 금강문 지나 만나는 옥류동 골짜기는 너무 아름다워 시인은 붓 들어 말 고르고 운율 잡기가 힘들고 화가는 일러 구도를 잡거나 필법을 택하기 힘들었다는 말이 정녕 허투로 지어낸 말은 아닌 듯 했다. 옥류동에서 소정 변관식의 '외금강 옥류동'그림의 현장을 만났는데 먹을 덧칠하고 바위에 주름을 표현했다는 적묵법(積墨法)이나 다양성을 더해준 태점법(苔点法)이라거나 할아버지 모습을 점경인물(点景人物)로 그림에 넣어 현장감을 살린 상황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우의를 입었어도 옷은 척척 몸에 감겨 들었지만 발걸음은 마냥 가볍고 신바람 들린듯 했다. 어느 곳 하나 비 그을 곳 없이 줄레줄레 꼬리에 사람을 달고 등 떠밀리듯 앞으로 나아가며 생각했다.

 서부진 화부득(書不盡 畵不得)이라고 '글로서 다할 수 없고 그림으로서 다 얻을 수 없다'고 옛 사람이 금강산을 두고 이른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라도 느껴 실감으로 맛보고 싶었다.
 그런 생각은 옥류담이나 무봉폭포에서 맛본 감동의 뒤끝에 구룡폭포 앞에 서자 보다 확실해 졌다. 비로소 내가 대구에서 이토록 멀리 금강산 길 뚫린지 석 삼년만에 이제야 달려온 이유가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나는 물소리 퀄퀄퀄 우르릉 쾅쾅쾅 쩡쩡 온 산천 울리던 그 소리의 경계 안에 있었던가 밖에 머물렀던가. 아홉마리 용이 승천한듯 웅장하고 기세찬 구룡폭포 앞에서 내 무슨 말 일러 새삼 그 가슴 벅찬 흥분을 노래하랴. 일찌기 최치원은 구룡폭포를 일러 '만 섬 진주알'이라고 했고 숱한 시인과 화가들이 이 절경을 노래와 그림으로 표현하지 않았던가.
 구 한말의 서예가 해강 김규진이 쓴 미륵불 글씨가 내려다 보이는 관폭정에서 엿본 수필가 이동민선생님의 표정이 그렇게 환하고 밝아보일 수가 없다. 이 분도 모르긴 해도 스스로 만족감에 취해 비룡폭포와 마주한 설레임을 짐짓 숨긴 채 느긋하게 가슴 벅찬 희열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일찌기 전라도 영광 출신의 문인 조운은 구룡폭포를 두고 멋진 사설시조를 발표했는데 나는 애써 그 전문을 되새겨 보았다.
 '사람이 몇 생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 겁이나 전화해야 금강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샘도 강도 바다도 말고 옥류 수렴 진주담과 만폭동 다 고만 두고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안개 풀 끝에 이슬 되어 구슬 구슬 맺혔다가 연주팔담 함께 흘러//구룡연 천 척 절애에 한 번 굴러 보느냐


 구룡폭포를 보고 상팔담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연신 휘몰아치는 빗줄기에 이리 비척 저리 비척 휘둘리면서도 예서 포기하고 말 수는 없었다. 빗속을 뚫고 앞 사람의 등을 떠밀고 뒷사람의 발길에 쫓겨 내닫으며 하다 못해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지닌 분위기에라도 잠시 젖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몇백 개의 철계단을 오르고 몇백 번의 밭은 숨을 내뿜었는지도 모를 즈음 상팔담에 도착했다.
 앞을 가리는 빗줄기와 비안개로 인해 상팔담에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다만 명승지종합개발 지도국 소속의 김원철 부팀장을 만나 인간적인 연민과 갈증을 푸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곧 통일이 되어야 되겠지요?"
 "이렇게 서로 오갈 수 있는 것이 바로 통일이 아니겠습네까."
 "남한 사람들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있나요?"
 "아, 네 송혜교 하고.... 이요원이는 시집가서 인기가 떨어지지 않았겠습네까. 그렇지요. 조용필선생도 내가 잘 압네다."
 서른이 채 안되었을 김원철씨와의 만남은 즐겁고 신기하기만 했다. 우리 일행의 카메라를 능수능란하게 조작하며 구도를 잡아주기도 하고 문인협회에서 왔다고 하자 "능력이 탁월하십네다."며 다음에 오면 지은 시를 보여 달라고 했다. 그는 "선생님 계신 대구에도 한 번 가보고 싶습네다."라고 하며 "통일되면 내 고향 대동강에 모셔서 대동강 소주와 숭어술국을 대접하고 싶습네다."라고 했다.
  상팔담까지 가서 선녀는 못보고 처음 만나는 북한 젊은이, 지도국 동무 김원철씨와 많은 얘기를 나누었는데 박재희 시인은 기어이 배낭을 열어 남한에서 가져간 커다란 사탕 한 봉지를 내밀었다.
 그것은 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친근감이나 애틋함과 다정함이 두루뭉수리되어 우리 식의 속내를 드러낸 방법이었지만 김원철씨는 "이러시면 안됩네다!" 라며 강하게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나는 내 사탕 봉지도 아니면서 기어이 우격다짐으로 "같은 동포의 마음을 이렇게 몰라 주깁니까. 이러시면 정말 섭섭 합니다. 우리 마음이니까 받으세요."라며 생색을 내었다.
 "그러면 고맙게 받겠습니다."라며 우리의 사탕 봉지를 거두어 주어 참 고마웠다. 모르긴 해도 돌아서는 발걸음이 아쉬웠던 게다. 다 못나눈 이야기와 정이 문득 알싸한 아픔과 함께 그리웠던 게다.
 하산하며 금강문에서 본 좌판에는 우리네 슈퍼에서 볼 수 있는 허드레 스넥류와 단물이라고 표현된 쥬스류가 있었다. 몇 군데 좌판이 놓인 곳마다 젊은 여자 판매원이 있었는데 모르긴 해도 판매 목표량이 있는듯 적극적으로 구매를 권유하기도 했다.

 점심은 북한에서 운영하는 목란관에서 먹었다. 나는 미리 정해진 식단인 비빔밥이나 냉면 대신 2달라를 지불하고 '단고기'를 먹었다. 평소 개고기를 즐기는 장하빈 시인은 비빔밥을 먹었는데 나는 '이 사람이 여까지 와서 비빔밥이나 먹고 이래가 좋은 시 쓰겠나....어쩌구 저쩌구 너스레를 떨며 퉁바리를 주곤 했다.
 북한식 보신탕인 '단고기'는 정말 맛이 있었다. 기회가 다시 허락된다면 나는 기꺼이 목란관 식당의 '단고기'를 먹을 것이다. 곰삭은 육질이며 한껏 우러난 육수가 주는 감칠맛이 입안에 살살 도는 향취와 함께 지금은 사라진 어릴적 무쇠솥에 끓인 육계장 맛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는 목란관 식당에서 오분 거리에 있었는데 연락부절로 들고 나는 버스 아무 것이라도 타면 되었다. 그런데 내려가는 길 초입의 신계사 폐사지를 들를 것이냐 바로 삼일포로 향할 것이냐 선택을 해야 될 입장이었다. 삼일포 가는 차편 시간이 빠듯했기 때문이다.
 장하빈 시인과 박재희 시인은 삼일포행을 고집했으나 '어허 여까지 와서 신계사도 안보고 가서 옳은 시 쓰겠나....'하며 내 고집을 피웠다.
 신계사(神溪寺)는 한창 복원공사가 진행중이었다. 일찌기 장안사(長安寺), 유점사(楡岾寺), 표훈사(表訓寺)와 더불어 금강산 4대 사찰의 하나로 꼽히던 명찰이었건만 6.25 전쟁 때 소실된 것을 최근에 남한측의 지원으로 옛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돋을새김으로 기단부 네 면에 표현한 팔부신중이라는 수호신상에 오래 눈길을 주었다. 신계사는 원래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되어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등 고승들이 거처하기도 하고 근세에는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닌 효봉스님의 이야기가 있는 절이라고 하지만 옛 흔적이 남은 것은 3층 석탑 뿐이었다. 하지만 환속한 시인 고은선생과 법정(法頂)스님과 이미 열반에 든 송광사 구산(九山)스님 같은 분들이 다 효봉스님의 제자였다니 내 어찌 쉽사리 지나칠 수가 있었겠는가.


 온정리로 돌아와 저녁 식사후 '예술 속의 금강산'이라는 주제를 두고 펼친 문학기행 세미나는 뜻깊고 보람 있었다.
그림으로 펼친 금강산을 강연하신 이동민선생님이나 시로 오르는 금강산을 소개하신 문무학회장님의 말씀도 새겨들을만 했지만 정작 감동은 예기치 못한데서 왔다.
팔순의 노구를 이끌고 오신 이성수선생님은 몇 해전 얻은 지병으로 한때 꽤 고생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기어이 떨쳐 일어나 이번에 금강산 문학기행에 동참하신 것이었다.


어린 날 금강산이 있다는 말
바람처럼 듣다가
오늘 마침내 이곳까지 와
1931년 금강산 흑백사진첩을 들쳐 보나니.....
오늘에사 오늘에사
너의 맨살을 만져 보는구나.
..............
..............


선생님께서는 금강산에 와 즉흥적으로 느끼신 감흥의 일부를 떨리는 목소리로 읊으셨는데, 문학이란 그런 것이 아니랴. 그토록 오래 품고 가꾸어 온 어린시절의 꿈 같은 소망과 기대를 그 가열한 다스림과 열정의 모습으로 후배들에게 보여주시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세미나 후 만난 북한 가무단의 공연은 건성으로 쉽게 여기고 지나쳤다면 아련한 슬픔이거나 가슴에 젖어오는 애닲음 같은 정서 하나를 놓치고 갈 뻔 했다.
공연 내용 중 아코디언이나 가야금 연주는 알싸한 슬픔의 현을 퉁기고 가듯 축축하게 젖어 들고는 했다. 나는 그네들의 표정 하나 동작 하나라도 더 자세히 카메라에 담기 위해 몇 차례나 무대 앞쪽으로 다가가곤 했는데 나중에는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젊도 늙도 아닌 어설픈 나이에 멋적고 객쩍었지만 시간이 갈 수록 내 행동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두에서 한나로 우린 하나의 겨레
헤여져서 얼마냐 눈물 또한 얼마였던가
잘 있으라 다시 만나요 잘 가시라 다시 만나요
...............
부모형제 애타게 서로 찾고 부르며
통일아 오너라 불러 또한 몇 해 였던가
.................

꿈과 같이 만났다 우린 헤여져 가도
해와 달이 찬란한 통일의 날 다시 만나자


 <다시 만납시다>라는 제목의 잘 있으라 다시 만나요~ 잘 가시라 다시 만나요~ 라는 대목에서 나는 주책없이 눈물을 찔끔 흘렸다. 그 웬 가슴 온통 도려내는듯 절절한 몸부림 앞에서 온전히 무연한 남의 일처럼 노래를 듣고 있을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길에 상봉과 리별 그 얼마나 많으랴 헤여진대도 헤여진대도 심장속에 남는이 있네 아--- 그런 사람 나- 는 못잊어 라는 가사의 <심장에 남은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심장에 남은 사람이 무엇을 의미하든 누구이든 그 깊은 속내와 의미를 몰라도 좋았다. 그냥 댕그러어엉~ 하고 무심한듯 슬픔의 현을 울리다가 스르르으응~ 겨자 먹은듯 눈물처럼 콧등을 찌르르르 울려오던 것이었다.

 금강산호텔에는 놀랍게도 북한 여자 접대원이 있는 가요주점도 있고 홀에서 연주되는 생음악은 물론이고 여러 개의 룸도 있었다. 나는 오며 가며 안보는 척 여러 사람의 북한 아가씨들을 훔쳐 보았는데 과연 자연산 미인들이 많았다. 남남북녀라는 말이 아무렇게나 그냥저냥 나온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가무단의 공연장 바로 옆에는 가요주점이 있었는데 북한 미인들의 자태에 혹하고 낯선 분위기도 작용한 탓이지만 나는 기본이 맥주 다섯병에 7만원이라는 사실도 알아 내었다. 영업은 두 시까지 한다는데 영업후에는 숙소까지 자기들 차편으로 모셔다 드린다고 놀다 가라고 하는데는 잠시 마음이 솔깃하기도 했다. 술을 핑계로 북한 주민들, 그것도 젊고 발랄하고 예쁜 그네들과 이야기를 나누고픈 호기심 때문이었다.


 호기심을 핑계로 거허게(?) 한 잔 하고 싶던 바램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포장마차에서 밤늦게 까지 일행들과 어울렸다. 예총 사무국장인 이기도님의 하모니카 연주는 오랫만에 듣는,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같은 선율이었다. 먼 이북 땅 온정리의 밤 천막 밖에는 소살소살 가는 비 내리고 하모니카 선율은 발목에서 찰랑거리다가 손풍금 소리처럼 공중으로 부드럽게 퍼져 나가다가 마침내 목울대를 타고 등 너머 가고 있었다. 기어이 먼데 산 죄다 불러 모아 산그림자 깔리듯 은은하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언제 오셨던가. 문무학회장님도 왕년의 솜씨를 발휘해 하모니카를 불고 누가 먼저인지 찔레꽃 붉게 피는 자주고오르으음 입에에 무우울고오오~를 불러 재꼈는데 술잔이 몇 순배 돌고 몇 번이나 술병이 쓰러지고 그렇게 밤은 짤랑거리며 깊어갔다.
 '가요 반세기'라는 별명을 가진 박기섭형의 노래를 받아 포항에서 온 이종암시인의 노래가 이어지고 노래 잘 했다고 1달러 팁이 건네지고 영남일보 박종문 기자의 노래를 듣고 다시 난 1달러씩 받고 꽃피는 봄 사월 돌아 오면 이 마음은 푸른 산 저 너머~로 이어지는 '망향'을 불렀다.
 '퍼포먼스'시집을 낸 박진형형은 무슨 노래를 불렀더라? 장하빈형은 바람부는 저 들길 끝에는 삼포로 가는 길 있겠지를 부른 것 같고 권순진 사무국장님은 부지런히 술 나르느라고 바빴던 것 같고....박재희님은 전작이 있던 터라 한껏 흥이 고조된 것 같고 아무렴 그날 우리는 적당히 알딸딸하게 취해 마지막에는 북한 접대원 세 사람의 노래를 열광적으로 박수치며 들었다. 어느 순간 그네들과 어깨를 겯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2박 3일 마지막 밤은 정녕 꿈에 듣는 먼 군가소리처럼 아련하게 깊어갔다.


 금강산 기행의 마지막 날 많은 수의 사람들은 해금강과 삼일포를 둘러보는 쪽 코스를 택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아침부터 비가 찔끔거렸고 만물상 코스가 결코 쉽지 않은데다 날씨가 그래서는 아무것도 못보리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빗속에서 이루어진 산행에 어지간히는 애먹은 탓으로 가벼운 산책코스가 나을듯 싶었을 것이다.
 나는 기꺼이 만물상 코스를 택해 다른 차에 탔다. 우리 일행은 네 사람이었는데 시조를 쓰는 김용주님과 수필을 쓰는 신은순님과 문경에서 오신 시조시인 안용주 선생님이었다.
 만물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온정령이라는 고개를 넘어야 했다. 온정령은 대관령 구비구비 구절양장 아흔 아홉 구비에 일곱구비를 더한 일백 여섯 구비라고 한다. 만물상이란 하늘을 찌를듯 기기묘묘 온갖 사람,귀신,동물의 형상을 한 봉우리들을 말하는 것인데 인간의 상상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자연의 위대함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삼선암,귀면암,칠층암 거쳐 천선대 가는 길은 아찔할 정도로 가팔랐다. 경우에 따라 고소 공포증을 일으킬 정도로 섬뜩하고 아슬아슬하면서도 스릴이 넘쳤는데 산정으로 오를 수록 비가 잦아 들면서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넋을 놓다가 온가슴 가려두르는 황홀경에 잠시 맥박이 빨라지다가 흥분된 감정은 마구 두방망이질 치는데 아뿔사 카메라 든 손에 힘이 쫙 빠진다. 미인은 속살을 천천히 보여 준다는데 너무 서두르고 흥분하며 서두른 탓으로 카메라 밧데리가 떨어져 감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헛다리 짚고 잔뜩 헛물만 켜는 격이었다. 하지만 정상까지 오르며 눈앞에 전개되는 풍경을 어찌 카메라에만 담아두랴 싶었다. 지나고 보면 뜨거운 감동과 그리움 없이는 다시 못 떠올릴 풍경속으로 애써 걸어 들어가 기꺼이 마음에 새기고자 했다.
 누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보고 느끼는 만큼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그리움처럼 뜨겁게 간직하게 되는 풍경임을 천선대(天仙臺 936m)에 오르고 보니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다.
 송강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이적선(李謫仙-이태백을 말함) 이제 있어 의논하면 여산(廬山-중국의 명산)이 여기보다 낫단 말 못하리라고 했다. 정철은 금강산의 절경을 아래와 같이 노래했다.

어화 조화옹(造化翁)이 부산키도 부산하구나
날거든 뛰지나 말며 섰거든 솟지나 말아라
연꽃을 꽂았는 듯 백옥을 묶었는 듯
동해를 박찼는 듯 북극을 고였는 듯
하늘에 치밀어 무슨 말씀 사뢰려고
천만년이 지나도록 굽힐 줄 모르는가

 몇 백개의 돌계단과 쇠계단을 밟고 올라선 천선대인줄 모르겠다. 하지만 문득 눈 들어 알겠다. 산 첩첩 물 청청 구름 둥둥 안개 겹겹한 비구름 너머 그 위에도 또 산이 있음을 비로소 만물상에 와서 알겠다.
 하산길에 하늘문 거쳐 천선대 아래쪽에서 한 모금씩의 샘물을 마셨다. 처음에는 그냥 물맛이 그렇게 달고 시원할 수가 없었다. 힘은 들었지만 무엇인가 이루고 간다는 만족감과 스스로 대견함에 취해 다른 것을 눈여겨 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연히 보고야 말았다. 쫄쫄쫄 나무잎사귀를 타고 흐르는 샘물위 바위에 음각으로 새겨진 크나큰 인삼 뿌리를.
 아마 내가 백 살을 산다면 만물상 천선대 아래 천 년 묵은 인삼물 덕일 것이라고 우스개 소리를 했다.


 2박 삼일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나는 사진작가 서담형이나 시인 장하빈, 박진형,박기섭 제형들에게 은근히 약을 올리곤 했는데 속으로는 어떤지 몰라도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거듭 약을 올리고는 했는데 오늘 이 버스에는 금강산까지 가서 만물상을 본 사람과 보지 못한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금강산까지 가서 만물상도 못보고 시 쓴다고 하는 사람도 있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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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7-25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격스러운 여행 다녀오셨네요. 신선이 노닐던 곳 같습니다.
구룡폭포를 두고 어느 문인이 쓰셨다는 사설시조도 멋집니다.
만물상 천년대 아래 천년 묵은 인삼물을 드셨군요. ^^
박가분아저씨님, 얼굴은 처음 뵙네요.^^ 사진으로나마 풍경들에
흠뻑 홀렸다 갑니다. 부산문협이랑 가까운 곳에 계시네요. 반갑습니다.

박가분아저씨 2007-07-25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부산문협이라구요?
소설쓰는 박명호가 친군데.....

박가분아저씨 2007-07-27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야 다시 읽어보니 너무 흥분한 탓으로 오자도 있고 중간에 뭉텅 끊어 먹어서 다시 고쳤답니다. 오랫만에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