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우물이라는 뜻의 온정리는 일제시대부터 금강산 탐방의 전초 기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었다. 애써 찾아보면 각종 금강산 탐승 안내 책자와 사진첩이나 엽서를 통해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오죽 했으면 송나라 어느 시인은 '고려국에 태어나 금강산이나 실컷 구경할 수 있었으면!(願生高麗國親見金綱山)하고 글을 남겼을까. 하지만 금강산의 여름은 결코 쉬 넘볼 수 있는 산은 아니었다. 오죽 했으면 한 달 가운데 사십일이 비온다 하고 마누라 팔아 장화 사라는 말이 있을까. 그 말이 하나도 부자연스럽지 않은 것이 새벽부터 내리던 비는 질금거리다가 아침을 먹고 구룡연에 오르기 위해 버스를 타자 사선으로 줄창 빗금을 그으며 간헐적으로 뿌려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익히 아는 얘기지만 봄에는 다이아몬드처럼 빛난다 하여 금강산(金剛山), 여름에는 무성한 녹음이 있다 하여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온 산 단풍이 아름다워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눈 덮인 바위들만 우뚝 뼈같이 솟았다 하여 개골산(皆骨山), 신선이 산다고 하여 선산(仙山). 멧부리 서릿발 같다고 하여 상악산(霜嶽山)....그 이름도 많았다.
또 금강산의 소나무는 여느 우리나라 산의 소나무와 많이 달랐다. 겨울이면 설해목 현상이라 하여 눈쌓인 가지들이 눈 무게로 인혀 척척 부러지다 보니 위로만 죽죽 뻗게 되는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미인송' '금강송' '황장목' '적송' '홍송' '춘양목'.....등등 부르는 이름도 많았다.
예전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는데 이번에 우연히 만난 손수용 화백님이 그랬다.
"온정리엔 엿장사가 많나? 왜 신발은 갖고 가서 남 산에도 못가게 하노?"
"신문에 기사 낼 사람이 신문에 나오겠다!"
어느 수필가 한 분이 그 말을 받았는데 어제 술이 과하여 속앓이 탓으로 산행에 함께하지 못하는 모 기자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대번에 신발을 못찾았다는 말은 핑계로 알아 들었는데 어제밤 그 기자의 낭만적이고 무모하고 길게도 이어지던 술기운에 부대끼며 진저리를 치며 밤을 지샌 때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