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감은사를 아십니까?

                     

                                    

 거짓말처럼 또 한 해가 가고 있습니다.

 이룬 것 없이 허전하여 마음 어수선한 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무작정 길을 나서본다면 어떨까요. 함께라도 괜찮고 혼자라도 좋답니다. 찬바람 불고 어디라 정 붙일 곳 없어 헤메임만 가득한 날이라면 더욱 제격이겠지요.

 옛 절은 사라지고 건물을 받치던 기단과 석축과 두 개의 석탑만 덩그러니 남아 가을걷이 끝난 들판처럼 저 홀로 깊어가는 곳.

 경주에서  보문단지 지나 추령고개를 치오르고 구불텅구불텅 삐뚤빼뚤 산길과 호수와 너른 들 계곡을 끼고 달리다 보면 마침내 닿게 될 것입니다.

 들리세요.

 댕~ 대에엥 꿈결처럼 오래 잊고 있었던 감포 앞바다 바닷속 종소리가.

 잠시 또 주위를 둘러보세요.

 3층 석탑에 슬그머니 스몄다가 비껴가는 햇빛과 바람과 노을이나 구름이 있어 영 심심치는 않다고요? 그렇다면 제대로 찾아온 것입니다.


 천 년도 전의 일입니다.

 오랜 전쟁을 끝으로 대왕은 돌아가시기 직전 신하들에게 유언을 했습니다.

 ‘이보게. 내 죽거든 화장하여 저 감포 앞바다에 뼛가루로 뿌려 주시게.’

 ‘대왕마마. 어이 그런 분부시옵니까.’

 위로는 고구려 후예 발해가 중원 대륙에 터를 닦고, 대동강 이남에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룬 대왕의 뜻은 흔들림 없이 꿋꿋했습니다.

 ‘아닐세. 내 죽어서라도 이  땅에 왜구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할 것이네.’

 ‘하필 바다에 처소를 마련하라 하시옵니까?’

 ‘명심하시게. 불법을 숭상하고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려는 나의 뜻을…….’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뒤늦게 불교를 받아들인 신라였습니다.  하지만 김유신과 김춘추에 이어 대왕 대에 이르러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아아, 대왕이시여!

 죽어서도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시는 그 큰 뜻을 어이 거역하리오.

 권력의 힘으로 호화롭고 큰 무덤을 만들어도 영원한 안식처가 되지 못함을 진작부터 알고 계시었단 말씀이옵니까?

 문무대왕의 아들 신문왕은 유언을 좇아 불교식 화장을 하고, 대왕의 뼛가루는 동해 입구 바위에 뿌려졌습니다.

 뒷사람들은 이를 일러 대왕바위, 뎅바위, 해중릉, 대왕암이라 불렀습니다.

 대왕의 유업을 기리고 감사하는 마음은 대왕암 가는 길목 야산 구릉에 ‘감은사’라는 절을 짓도록 했습니다.


 “우와. 석탑이 군시렁 군시렁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아요, 아빠. 무어라 설명은 할 수 없어도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 뛰어요…….”

 “그래. 당당하고 뿌듯한 기운이 느껴지는 모양이지. 후련하구나. 여기까지 찾아 온 보람이 있어.”

 감은사에는 동, 서 마주 보고 선 3층 석탑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절은 진작 허물어지고 석탑과  돌로 된 건축 자재들만 나뒹굴었습니다.

 “감은사는 해방된 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굴한 절터란다. 법당있던 자리 섬돌 밑에 특수한 공간과 통로 흔적이 있었다고 하더구나.”

 “아빠 그럼 정말 용이 된 왕이 그 구멍으로 동해바다를 드나들며 왜구를 지켰다는 이야기에요?”

 “그럴 수도 있겠지. 그리고 밀폐된 지하 공간의 환기를 통해 법당 건물을 유지했을 거야. 삼국유사에는 용이 드나들었다는 ‘용혈’을 의미하는 기록이 있다만……하지만 누가 그 옛날의 일을 감히 장담할 수 있겠냐.”


 감은사로 오르는 길은 밤하늘 별빛 총총 석탑에 가득 내려앉는 겨울이 절정이라고 합니다. 노을 끼는 황혼녘이나, 왠지 서운하고 쓸쓸함이 가슴에 가득한 날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말입니다.

 혹 아름드리 느티나무 뒤쪽 탑을 배경으로 사진이라도 몇 컷 찍어 본 경험이 있으세요? 그리운 추억들이 불쑥불쑥 종주먹을 대며 가슴에 두방망이질 칠 지도 모르겠습니다.

 “왜구들이 감은사 종을 훔쳐가다가  대왕암 앞 바다에 빠트렸다면서요?”

 “어떤 사람은 황룡사 대종이라고도 하더구나. 몽고군 침입때 원나라로 가져가려다 대왕암 앞 바다에 빠트렸는데 그 큰 종이 이 곳 개천을 지나갔다고  대종천이라고 한다더구나.”

 “그래요, 아빠. 책에는 토함산과 함월산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양북면 일대의 넓은 들을 지나 대왕암이 있는 동해 바다로 흘렀다고 했어요. 지금은 시냇물이지만 절 바로 앞으로도 큰 물길이 흘렀데요.”

 “상상해 보려무나 얘야. 이 대종천을 따라 용이 된 왕이 이 곳 대웅전 아래 ‘용혈’까지 오르내렸다고.........”


 종에 대한 기억은 오래 이어졌습니다.

 ‘저 봐, 저 소리가 안 들리시는가. 데엥 데에에엥~. 희미하지만 분명 종소리 같은데…….저, 저 저 소리가 정말 안들려?’

 이 곳에 사는 노인들은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또 그 아버지가 들었다는 종소리를 자신이 들은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랬습니다.

 불경이 부처님 말씀을 글로 옮긴 것이고, 불상은 부처님 모습을 새긴 것처럼, 종소리에는 부처님 목소리를 지극정성으로 담았습니다. 종소리는 진리의 둥근 소리를 천지사방에 퍼지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아빠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도 있었다면서요.”

 “그래, 동해 바다의 떠다니는 작은 산에서 구한 피리가 있었단다.”

 절을 짓고 어느 날.

 신문왕은 친히 바다에 가 거북이 머리 같은 산위에서 낮에는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하나가 되는 대나무를 얻었습니다. 이 대나무로 만든 피리는 문무왕과 김유신장군의 원혼이 나라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내어준 보물이었습니다.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질병이 없어지고 가뭄에도 비가 오고 홍수가 지면 비가 그쳐 바람과 물결을 잦게 하는 신기한 것이었습니다.

 “얘야, 옛 이야기 속에는 쉬 지나칠 수 없는 큰 뜻이 있는 걸 알고 있니.”

 “예, 과학으로는 이해가 안가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럴 수도 있겠지. 이곳을 지나 대왕바위가 바라다보이는 ‘이견대’라는 곳도 문무왕이 용으로 변한 모습을 보았다는 곳이란다. 그리고 그 ‘이견대’에서 만파식적이라는 천하의 보물을 얻었다고 알려져 있단다.”


 시간이라는 것은 무심한 것이어서 존재하는 것은 죄다 물이나 바람이나 흙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옛 절터에서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쓸쓸하면 쓸쓸한 대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가만 귀와 가슴을 열어 보신 적이 있으세요?

 시간을 거슬러 오르다 보면, 무언가 손짓해 불러 미주알고주알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고고학자들은 발굴조사를 통해 많은 것을 알아내었습니다.

 감은사는 중문과 탑, 법당과 강당이 남북으로 배치되었습니다. 다시 회랑이 둘러져 중문으로 연결되어 회랑 내부가 사찰 중심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또한 높은 계단 앞으로 못의 형태가 있어 나무배를 이용해 연못을 건너도록 되어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아빠 탑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나도 궁금하구나. 그 옛날 누군가 바라고 빌면서 꼭 이루어지리라는 소망이나 믿음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때로 먼 산 메아리 소리거나 별빛 같은 것도 얼마쯤은 스며있을테고…….”

 “아니 그런 것 말고 말이에요.”

 따져 보니까 40년도 전의 일이었습니다.

 동,서탑 가장 아랫부분 기단부 석재가 아귀가 안맞고 무너질 위험이 있어 서탑의 해체 수리를 한 것이 말입니다.

 문화재 수리는 나라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드잡이기술자에게 맡겨졌습니다.

 ‘드잡이’라는 것은 원시적인 방법으로 전봇대 같은 나무 지주에 도르래와 밧줄을 걸어 설치하고 석재를 차근차근 들어내는 방법입니다.

 3층 지붕돌인 옥개석을 들어내자 몸돌인 탑신 위쪽 면에서 숨겨둔 구멍처럼 ‘사리공’이 나타났습니다.

 문화재 수리 팀은 아연 긴장하며 부드러운 진흙으로 가득찬 사리공 속의 흙을 긁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작업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설렘과 흥분 속에 진행되었습니다. 종일 진눈깨비가 계속되었지만 옷이 흠뻑 젖어도 추운 줄 몰랐습니다.

 아, 나무아비타불 관세음보살!

 천 년 이상 고이 간직되어온 사리장엄구가 현세의 인간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내시다니…….

 청동의 사리함에는 사천왕상과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모습과 공양상이 조각되어 있었습니다. 내부에는 수정으로 만든 사리병이 있고 사리병 안에는 부처님의 몸인 진신사리가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깜작 놀랐습니다.


 발굴작업과 연구는 계속되었습니다.

 대왕암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도 가지가지였습니다.

 ‘문무왕의 뼈항아리가 묻힌 수증릉이 틀림없어!’

 ‘무슨 소리! 시신을 화장하고 뼛가루를 뿌린 곳이니까 ‘산골처’라고 해야 맞는 말이지.’

 궁금증이 날로 더해가고 여러 주장이 오고 가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신문과 방송에 -문무대왕 ‘해중릉’ 발견하다-고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죽은 뒤 오랫동안 장지가 의문시 되었으나 ‘신라오악조사단’ 학자들이 그 전모를 밝혔다며 사람들의 눈길과 귀를 끌어당겼습니다.

 이 일은 누군가 일부러 꾸며 기사거리를 만들고 발굴 성과를 드러내고자 한 잘못된 생각이 숨어있는 듯 했습니다. 이미 알만한 학자는 대왕암의 존재를 다 알고 있고, 해녀들도 가까이에서는 쉽게 물일을 하지 않을 정도로 대왕암에 대한 두려움과 존경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한 번은 대종을 찾자며 문화재관리국에서 조사단을 구성하였습니다.

‘왜구가 종을 약탈해 가다가 바다가 노해서 배가 뒤집혔다니까 그러네. 지금도 비바람이 심한 날은 그 소리가 더 잘 들리곤 하지. 데 뎅데뎅뎅뎅 뎅뎅하고 말이야........’

 감포 앞바다에 오래 살아 온 할아버지의 제보는 조사단을 흥분시키고 여러 타당성 조사를 거쳐 종 찾는 일에 열중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제 ‘나의 잊히지않는 바다’ 라는 비 앞에서 무슨 생각이 드느냐.”

 “비석에 새겨진 고유섭이라는 사람이 누군데요?”

 “그 분은 ‘경주에 가거든 구경거리로 쏘다니지 말고 문무대왕의 위대한 정신을 기려 대왕암을 찾으라’는 기행문과 ‘대왕암’ 시를 쓰신 분이란다.”

 “진작에 돌아가신 사람 같네요?”

 “그래, 개성박물관장을 지내며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 독립운동 하듯 평생을 바친 분이란다.”

 “일제 식민지에 참 용기 있는 분이셨네요.”

 “어허, 연말에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네. 제법이구나. 갖은 탄압 속에서 민족정신이 담긴 문화재를 지키며 그 분도 문무왕 같은 이를 무척 그리워했을 게다.”

 “그러게요. 그 분한테 배운 제자들이 그 뜻을 길이 간직하려고 대왕암이 보이는 이 자리에 비석을 세웠네요.”


 감은사 대종을 찾는다는 소식은 연일 신문과 방송을 오르락내리락 했습니다.

 여러 신문사와 방송국에서는 조사단과 함께 먹고 자며 스킨스쿠버를 동원하여 조사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기상 조건의 악화와 경험 미숙과 무모한 열정과 언론의 기대를 등에 업은 대종 찾기 작업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저기 대왕암이 보이냐. 이곳 감포 앞바다 봉길리 해수욕장에서 한 200메타 정도 거리라고 하더구나.”

 “보기에는 그냥 평범하고 아담해 보이는 바위섬인데요.”

 “가까이 다가가 보면 바위 한가운데가 못처럼 패어 있고 자연암석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기둥모양으로 세워진 모습이란다. 한 변 길이가 3.5메타 정도 되는 못 안에는 거북이 등 모양의 돌이 덮여 있다고 하는구나.”

 “맞아요. 그 돌 밑에 유골 장치가 있을 거라고 말하던데요. ”

 “얘야. 나는 여기 오기 전 평생 발굴 작업을 하고 민속박물관장을 지내신 분이 쓴 ‘발굴이야기’라는 책 한 권을 읽었단다.”

 “미리 준비 하고 신경 좀 쓰셨네요.”

 “허허 그래. 그 책을 읽으며 그 분께 존경을 보내고 감사했단다. 그리고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구나.”


 당시 고고학자의 마음은 대왕암에 잔뜩 쏠려있었습니다.

 신문과 방송 보도에 솔깃한 사람들은 서로 자기 생각이 맞다고 다투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고고학자의 한 마디 지시로 대왕암 가운데 뚜껑돌을 들어 올리면 맞고 틀리고를 가릴 수 있었습니다. 신비의 베일을 벗기고 어서 발굴작업을 마무리 짓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습니다. 천 년도 넘게 이어져 온 신화와 전설의 한 부분을 속 시원하게 세상에 밝혀 진실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아니 아니야. 세상에는 과학의 힘으로 밝히고 알아낼 수 있는 것보다 더 가치있고 아름다운 궁금증과 소망 같은 것도 있는 게야. 그리움 같은......’

업치락 뒤치락 고민하며 스킨스쿠버를 투입할까 말까 하던 생각은 마지막 순간에 접어버렸습니다.

 차마 호기심과 꿈과 기대와 상상으로 채워진 신화와 전설을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여러 사람의 가슴에 어떤 식으로든 파문지고 고동쳤을 신비스런 ‘비밀’을 까뒤집어 밝힌다는 것이 잘하는 일은 결코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대왕암 돌 아랫 부분을 조사했다면 재미없었겠어요.”

 “그렇겠지. 감은사의 의미도 줄어들고 이번 여행도 절반은 잃어버린 그리움 같은 것이 되었겠지.”

 “이제 곧 새 해가 되겠네요. 이맘때면 이룬 것 없어 허전하시다면서요. 나이 들면 늘 살아온 날이 돌아 보인다시더니....... 어떠세요?”

 “오늘 보니까 네가 훌쩍 컸구나. 너와 함께 한 이번 여행이 오래 가슴에 남을 것 같다. 아빠는 이제 나이 한 살 더 드는 쓸쓸함과 세상살이의 고단함에서 벗어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아싸, 아빠 힘내세요 힘! 저기 저 우뚝하고 늠름한 탑 좀 보세요.”

 “아, 감은사 감은사 감은사 감은사 감은사. 아아, 감은사 감은사 탑이여! ”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돌의 꿈

무엇인가 되고 싶은 꿈을 가진 돌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무렇게나 놓인 자리 그대로 깊은 산 속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신세지만 언젠가는 꼭 무엇이 되리라 야무진 꿈을 키워가는 덩치만 커다란 돌이 있었습니다.
때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우쭐우쭐 키 큰 소나무는 아름드리 거목이 되어 궁궐나무로 뽑혀 가 대들보가 되거나 서까래라도 되어야겠다는 야무진 생각을 하느라 점차 나이테를 더해 갔습니다. 분말이 곱고 찰기있는 황토 흙은 이 나라 으뜸가는 도자기가 되어야겠다며 온갖 눈, 비 맞으며 묵묵히 자신을 다스려 나갔습니다.
해 뜨고 지고 달 뜨고 지는 참 많은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천둥 치고 벼락도 때리는 그런 한 시절이 가고 결국 올곧게 잘 자란 소나무는 궁궐은 아니지만 큰 사찰의 배흘림 기둥이 되거나 목어가 되거나 부처님을 모시는 불단이 되어 한 몫을 단단히 하곤 했습니다. 도자기를 꿈꾸던 황토 흙도 하다 못해 둥근 물항아리가 되거나 간장독이 되어 그토록 바라고 소원하던 소망을 어느 만큼은 이룬 것 같아 스스로 흡족한 나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천덕꾸러기가 되어 찾는 이 없는 울퉁불퉁 못생긴 돌은 마냥 선하품이나 해대며 점차 스스로의 존재 가치에 대해 의심을 품으며 주눅이 들곤 하였습니다.
"아니야 분명 어딘가엔 쓰일거야. 아무렴 이 세상에 쓸모없이 생겨난 것이 어딨겠어. 언젠가 쓰일 그날을 위해 내 꿈을 어떤 식으로든지 키워 갈테야..."
날이면 날마다 하릴없이 무언가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도 힘겨운 돌은 이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동네 어귀에 퉁방울 눈 부릅뜬 돌장승이 되면 너무 좋겠어. 나쁜 잡 귀신이 들어오는 것도 막아 주고 먼 길 가는 나그네한테는 이정표 구실도 하면 좋을거야. 아니 아니 성황당 돌무더기라도 되어 나처럼 무언가 간절히 바라며 기도하는 사람들의 이웃이라도 될 수 있으면 참 기쁠거야...."
누구는 쓰잘데 없는 소망이라 하건 말건 묵묵히 스스로의 좋은 쓰임을 기도한 덕인지, 어느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왁자지껄한 목소리로 온 산을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못생기고 덩치만 커다란 돌도 여엉차 끼엉차 여러사람이 목도를 하여 어께에 지고 산 아래로 옮겨갔습니다.
옛날부터 있던 자리를 벗어난 돌은 주변의 다른 돌들과 함께 이제 커다란 용광로에 들어가 뜨거운 불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아, 온 몸이 깨어질 듯 아파. 지끈거리는 두통과 노곤한 통증과 패대기치듯 흔들어대는 울렁임을 견딜 수 없어. 가슴이 뻐개지듯 아파."
몇 번인가 까무룩 잠이 들듯 이승과 천당 사이를 오고간 돌은 어느 순간 자신의 몸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상한 쇳물 형태로 변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허, 이번엔 쇠질이 좋구먼. 구리가 좋아 정말 좋은 놈을 만들 수 있겠어."
구레나루가 성성한 노인의 근육질 몸매와 만족한 듯한 걸걸한 목소리가 나이답잖게 무척 건강해 보였습니다.
노인은 잠시 주위를 휘둘러 보더니 진작에 만들어 놓은 듯 곱돌로 된 거푸집을 가져 왔습니다. 그 거푸집은 일정한 형태의 기물을 만들기 위해 이용하는 것으로, 다루기 쉽고 표면을 곱게 처리할 수 있고 열에 강하여 좀처럼 터지지 않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따라 그 곱돌 거푸집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입니다.
잠시 골똘한 표정이던 노인은 주물을 부어낼 다른 틀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무슨 생각인지 벌집을 뜨거운 물에 녹여 굳힌 밀랍으로 거푸집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정성을 들여 오랜 시간 밀랍으로 주조할 암,수 기물의 형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암,수 두 개의 판을 입구의 구멍만 남기고 고운 진흙으로 완전히 씌워 잘 말렸습니다. 진흙이 마르고 난 뒤에는 그 틀을 불에 구워 속의 밀랍은 녹아 빠져 나오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밀랍이 다 빠져 나온 빈 거푸집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 밀랍으로 하길 잘했어. 섬세하고 복잡한 무늬를 나타내기엔 이게 제격이지. 곡선형으로 만들땐 이게 좋아...."
오랜 세월 무엇이곤 기필코 되리라, 야무진 꿈만 키우던 얼마전 까지의 돌은 아직까지 무엇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자신과 함께 산에서 이 곳까지 실려왔던 많은 돌들이 이제는 예전의 형체를 완전히 벗어 던지고 다른 그 무엇으로 변해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변해야 될 것이 참 많은 모양이었습니다.
"이 주석과 아연도 맘에 드는군. 이번엔 보나마나 꽤 괜찮은 놈으로 될 것 같군."
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밑 형형한 노인의 눈빛이 예사로이 보이지 않습니다. 척 보기만 해도 오랜 이력과 연륜의 때가 켜켜이 쌓여있는 모습입니다.
이제 노인은 천덕꾸러기 울퉁불퉁 못생겨 선하품이나 하던 돌에서 뽑아낸 구리에다 주석을 섞어 무엇인가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어디서 잠시 폭풍이 불어오는 듯 하고 천둥 번개도 내리 칩니다. 잠시 세상이 캄캄하다가 우지끈 신열처럼 뜨거운 불기운을 이기지 못해 살려 주세요, 무조건 잘못 했어요, 다시는 안 그러겠어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누구에겐지 마냥 기도하며 빌고만 싶은 시간이 빨간 혀를 날름거리며 흘러갔습니다.
무거운 정적의 시간이 흐르고 잠시 가쁜 호흡을 고르던 순간도 사라지고 이제 꼬끼오! 세상의 새벽이 열리는 듯한 조심스런 손놀림으로 거푸집을 벗겨 냈습니다.
세상에나, 어쩜 지금껏 그리도 아름다운 모습이 어디에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겨져 있었던지요.
휘늘어진 계수나무 줄기 한가운데 둔 꼭지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전설처럼 하늘나라 선녀의 옷을 펄럭이며 춤추듯 달로 올라가는 항아 아씨가 있습니다. 오른쪽 위편에는 먹으면 죽지 않는 약을 방아에 찧고 있는 토끼가 있고 토끼를 쳐다보는, 달의 정령이 되었다는 전설의 두꺼비도 있습니다. 꼭지를 중심으로 안쪽과 바깥쪽을 가르는 바깥 원 둘레에는 온갖 덩쿨풀을 일컫는 당초문양이 빼곡 들어 찼습니다.
노인은 몇 날 며칠 거푸집에서 주조되어 나온 동판을 다듬었습니다. 그리고는 정성어린 손질 과정을 거쳐 가며 무늬 동판의 뒷면에 빛을 반사하는 재료를 사용하여 연마해 나갔습니다.
이제는 노인의 얼굴이 달 떠오르듯 뚜렸이 동판면에 잘 보이게 되었습니다.
먼 훗날 사람들은 바깥면에 각종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진 이 동판을 고려시대에 만든 청동거울이라 하여 고려동경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날마다 무엇이 되고 싶었던 돌은 드디어 뿌듯한 만족감으로 어쩔줄 몰라 했습니다. 결국 기다리며 스스로의 꿈을 키우는 사이에 자신으로서는 상상하지도 못한 참으로 귀한 그 무엇이 되어, 세상에 쓸모없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몸으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쓸모없어 보이고 아무짝에도 소용없어 보이던 돌의 꿈은 결국 저 아득한 팔백년 전 고려시대에 빛처럼 훤히 피어났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에는 왜 이렇게 방해되는 일이 많은가 모르겠습니다.
이름없는 돌의 꿈과 한 노인의 정성과 혼이 배인 '항아와 토끼가 있는 달나라 궁전무늬 고려동경'은 정작 그 거울의 주인을 만나기도 전에 거울을 주문한 아가씨의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모양입니다.
지체 높은 가문의 그 아가씨는 시난고난 오랜 병 끝에 세상을 떠나면서도 그 구리 거울을 끝내 무덤에 껴묻이로 함께 갖고 가 내세에서라도 마음의 위로를 삼고자 했습니다.
그로부터 사람들에게 까무룩 잊혀진 세월이 흘러 갔습니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땅 어느 농부 하나가 반나마 무너져 형체도 없어진 옛 무덤을 밭으로 만들다가 조그맣고 동그란 구리 거울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구리 거울의 표면에는 옻칠한 것 같이 검고 빛나면서도 비밀스런 사연을 간직한 듯 녹이 시퍼렇게 슨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이 '항아와 토끼가 있는 달나라 궁전무늬 고려동경'은 어떤 연유에서인지 보따리 장사의 손을 거쳐 조마조마 압록강을 무사히 건너고 압록강을 마주한 중국 단동의 한 골동품 가게에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모든 물건에는 각기 그 주인이 있다는 옛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닌 모양입니다. 다시 대구에서 중국 땅 단동을 오가며 장사를 하는 골동품 취급 상인을 거쳐, 마침내 일없이 쓸쓸하여 세상 사는 재미가 별로 없어 하던 한 아저씨 손에 까지 이 구리거울이 들어 오게 되었습니다.
나름대로는 아들, 딸 낳고 키우며 곁을 돌아볼 겨를없이 열심히 살아온 아저씨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문득 자라지 않을 것만 같던 나이를 잔뜩 먹은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해놓은 것도 없이 요즘 들어 사는게 팍팍하고 무료하게만 느껴지던 아저씨였습니다. 새삼스레 유년시절의 기억이 문득문득 그리운 아저씨의 눈에는 결코 쉬 지나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어 그리도 그 동경에 홀딱 마음을 빼앗겼는지요.
혹시 모르지요.
그 사연 깊은 구리 거울을 보고 있노라면 아저씨는 어디서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바람소리 따라 희미한 눈물자국 같은, 안타깝고 따뜻했던 날의 그리운 사람의 목소리를 다시금 불러보고 싶은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청태빛 녹이 슨 구리 거울 문양을 물끄러미 보고 있노라면 돌의 꿈 같은, 무엇인가 기필코 되고 싶었던 날의 맥박이 뛸지도 모르겠고 이름없이 스러져 간 장인의 땀냄새거나 젊은 나이에 죽은 한 처녀의 못다 핀 간절한 소망이 혹시 엿보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그런 것들은 너무 오래된 이야기이고 어른답지 뫃한 생각이라는 마음에 지지 눌러 못내 접어 두고만 싶었습니다. 그럴 수록 가족 다 잠든 잠 안오는 밤 자신도 몰래 구리 거울을 만지작 거리노라면 온가슴 가려두르며 아슴아슴 떠오르는 추억들이 아저씨를 마구 설레게 하곤 하였습니다.
깊은 밤.
아저씨는 그동안 먹고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참으로 오랫만에 책상앞에 앉았습니다.
타다닥 툭 투다다닥....
군대시절 배운 어설픈 닭발타자 솜씨로 모처럼의 상상력에 힘입어 옛 구리 거울이야기를 적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아저씨는 이루지 못해 쓸쓸한 젊은날의 꿈처럼 아득한 기대 같은 것을 다시 생각하고 있을까요. 아니 문득 높으게 일어서서 놓쳐버린 풍선처럼 아슴푸레 옛 사랑의 추억 같은 것을 떠올린 것일까요?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두심이 2004-06-08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뜻한 동화네요.. 처음에 돌의 이야기보다 아저씨손에 들어온 거울 얘기가 더 재밌게 느껴지네요..잘읽었습니다. 오늘은 이것 하나만 읽고 갑니다. 아껴아껴 읽을려구요..
 

울음잡는 아저씨


캄캄한 밤중입니다.
대장간이라고 불리는 공방은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건물지하에 있습니다. 남들 다 자는데
아저씨 혼자 깨어 있는 중입니다.
찡겅찡겅 쇳덩이를 두들기는 메질 소리가 요란합니다. 모루위에 놓인 시뻘겋게 달구어진 쇳덩이가 조금씩 펴지면서 맛있는 빈대떡 모양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바디기’라고 불리는 빈대떡모양의 쇠판 세 개를 모아 쥐고 다시 달구고 두드려 가장자리를 오긋하게 오그려 나갑니다. 비로소 이제 모양이 비슷해지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놋쇠로 만든 냉면 그릇을 크게 부풀려 놓은 것 같다고 할까요. 이름하여 ‘이가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가리를 만드는 데는 ‘바디기’의 빛깔을 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이 괄하게 핀 화덕 속에서 바디기의 빛깔이 처음에는 잿빛이었다가 점차 붉은 빛을 띠다, 마침내 분홍빛이 되면 메질을 합니다. 바디기가 분홍색이 되지 않았을 때 메질을 하게 되면 단박에 깨져 어머 뜨거라! 지금껏 한 일이 십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저씨가 하는 일은 예로부터 한밤에 깨어나 해뜨기 전까지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제는 ‘싸개질’할 차례입니다. 싸개질이란 ‘이가리’를 불에 달궈서 집게로 잡은 채 계속 돌려 가며 메질하는 걸 말합니다. 비로소 가장자리의 둥근 바퀴가 반반해지고 바닥 살도 얇게 펴지는 것 같습니다. 싸개질이 끝난 뒤에는 물에 담가 강도를 높여 가는 일을 하는데, ‘담금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굴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이 턱과 가슴으로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허리에 척 걸쳐 둔 수건을 꺼내 땀을 닦습니다. 흘러내린 머리칼은 자꾸 눈알을 찔러 오고, 조개탄 불빛과 단쇠냄새와 뜨거운 열기가 뒤엉킨 풀무 소리가 공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아저씨는 지금 징을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까부터 자꾸 어깨 힘이 빠지는 것만 같습니다. 징 만드는 일은 전메꾼, 앞메꾼, 선메꾼이라 불리는 사람들과 박자를 맞춰 가며 해야되는 일입니다. 언제부턴가 불 다루는 일과 메꾼이 해야 될일을 기계가 대신한 뒤로는 도무지 신명이 나지 않습니다.
잠시 하던 일 멈추어 두고, 길게 뿜어내는 담배 연기 너머로 사십 년 저쪽의 일이 그림처럼 떠오르고 있습니다.
“야, 이놈아야. 부채질 그 따우로밖에 몬하겄나. 화덕은 인자부터 니 책임이란 말이다. 불이 그래 시원찮아 갖고는 어디 써먹겠노, 마 치아뿌라.”
열세 살 때 불을 다루는 불메꾼이 된 것은 배곯지 않아야 되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도부(행상)꾼으로서 장이 서는 곳을 찾아 다니며 난전을 폈습니다. 아저씨 밑으로는 올망졸망한 동생들이 많았습니다.
아저씨 어릴 때만 하더라도 아침은 굶고 점심은 물 배 채우고 저녁은 건너뛰거나 국수나 수제비로 때우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너나없이 어려웠던 시절이었습니다.
“외삼촌예, 조개탄 더 여까예. 자꾸 꺼질라 캄니더.”
“아따 이놈아야. 손 뒀다 뭐 할끼고. 후딱후딱 부채질 안하고 뭐하는 기고. 등신이맨쿠로.”
더러 퉁바리를 맞고 꿀밤도 먹었지만, 한 주일씩 일해주고 받은 용돈으로 쌀도 팔고 학용품도 사 쓰던게 어제 일만 같습니다.
쩡겅 쩡 쩡거렁 쩡겅 풀무질 소리가 요란할 때마다 공방 안에는 징, 꽹과리, 대야, 요강...등 놋쇠로 만든 그릇들이 그득그득 쌓여 갔습니다.
놋쇠로 만든 그릇은 유기라고 하는데, 구리와 상납이라고도 하는 주석을 섞어 만들었습니다. 예전에 안성 지방에서 일정한 형틀에 주물을 부어 만든 그릇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까 안성맞춤, 안성 유기란 말까지 생겼습니다.
아저씨가 만드는 징이나 꽹과리 같은 타악기는 두들겨서 만든 것이라 해서 방짜 유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저씨에게 징만드는 일을 가르쳐 주신 외할아버지나 외삼촌이 살아 계실 때만 해도 방짜 유기는 함양이 유명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고생은 되었지만 참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당시는 징, 꽹과리, 밥그릇, 숟가락, 양푼, 세숫대야, 심지어 요강까지 유기로 못 만드는 것이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말입니다.
지금도 눈에 선한 광경이 있습니다.
마을화관 앞 넓은 공터에는 온 마을 사람이 다 나온 듯 합니다. 일찍 지어먹은 저녁밥 탓으로 아랫배가 더부룩합니다.
지지직직직 석유 먹은 솜방망이 횃불이 기세 좋게 타오릅니다. 가만히 있어도 얼쑤얼쑤 어깨춤이 절로 나옵니다. 에헤에헤야 얼싸 좋구 좋다. 열두 발 상모가 돌아가고, 꽤갱 꽹꽤갱 요란하게 꽹과리 소리가 울립니다. 움찔움찔 자신도 모르게 흥이 일어나 덩실덩실 춤추지 않고는 도저히 배겨날 재간이 없습니다. 벌렁 벌러덩거리는 가슴으로 할머니, 아저씨, 아주머니...온 동네 사람이 어우러져 돌아가고,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들쩍지근한 땀 기운을 식히노라면, 마을 고사때마다 막걸리를 닷 말씩이나 먹던 오래된 느티나무에는 어느덧 휘영청 대보름달이 걸렸습니다. 그 대보름달 만큼이나 밝고도 맑고 환한 징지징 징소리는 언제까지고 밤하늘로 퍼져 나갔습니다.
꼭 기쁜 일에만 징소리가 울렸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덩덩덩더쿵 밤이 깊도록 푸닥거리는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한밤의 굿마당에서도 아저씨가 만든 징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맺힌 시름과 슬픔을 달래 주었습니다.
“니도 내일부터는 메 잡거라.”
“외삼촌예, 정말입니꺼. 인자부터는 화덕에 숯불 피우는 거 안 해도 됩니꺼. 정말입니꺼?”
“무거바서 힘은 좀 들끼다. 인자 좀 배워 봐야제.”
비로소 삼 년만에 이글거리는 화덕 앞에서 쇠를 다루는 메꾼이 되었습니다. 처음 들어 보는 쇠방망이가 힘겨웠지만, 웬지 힘이 불끈불끈 솟는 듯했습니다.
다시 또 한 대의 담배를 태워 뭅니다.
생각해 보면 세상에서 제일 빠른 건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세월이란 놈 같습니다. 열세 살 어린 소년의 등을 떠밀어 쉰을 넘긴 나이로 만들었습니다.
놋그릇과 방짜 유기가 신나게 팔려 나갔던 것은 6.25 전쟁이 일어난 뒤였습니다. 놋그릇을 판 돈이 모이고 다시 모여 집이 되고 논이 되고 밭이 되었습니다.
신나는 것도 잠시뿐, 연탄 시대가 열리면서 놋그릇들은 연탄 가스에 맥을 못추고 외면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값싸고 녹 안스는 스테인리스 그릇에 밀려 설자리를 잃어만 갔습니다.
징이나 꽹과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농촌을 춤추고 노는 곳으로 만든다는 이유로 나라에서 농악을 금지시켰습니다.
“야야 이놈아야. 내사 인자 나이도 묵을 만큼 묵꼬, 힘도 부치고 몬 해먹겠데이. 천날 만날 맹글어 봤자 사주는 사람도 없고...”
“외삼촌예. 암만 그렇다케도 우예 징 만드는 걸 치아 뿔깁니꺼. 내사 그래는 몬 하겠심더. 계속 만들김니더.”
“하기사 내도 니가 내 뒤를 잇겠다카이 정말 고맙데이. 그래 인자 이 공방은 니 해뿌라. 삶아 먹든 구워 먹든, 다 니끼다.”
열세 살 어린 나이에 불메꾼이 된 지 이십 수년 만이었습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대장장이의 우두머리인 대장이 되는 동시에, 외가 쪽으로 이백 년 가까이 내려오던 유기 만드는 전통이 이저씨에게 물려지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담배를 피워 문 아저씨의 입술이 가늘게 떨려 오고 있습니다. 참 바람같고 눈 깜짝할 사이인 것 같은데, 벌써 네 번이나 강산이 바뀌었습니다. 유기 제품을 찾는 사람들이 없어지자 아저씨 밑에서 일 배우던 사람들도 하나 둘 떠나갔습니다.
결국 열 군데가 넘던 유기 공방이 김천과 함양에 하나씩만 남게 되었습니다.
좋은 시절에 모아 둔 돈도 조금씩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돌아보는 이 없던 징 만드는 일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자꾸 집안은 기울어져 갔습니다. 오로지 좋은 징 하나 만들기 위해 깨고 주무르고, 눈으로 쇠를 살펴보고 손으로 느끼고 귀로 분별하는 데 밭이 사라졌습니다. 논이 사라졌습니다. 집이 사라졌습니다.
“아부지예, 내일꺼정은 공납금 내야 함니더. 자꾸 미루키만 미루코 인자 참말로 챙피해서 학교 안 갈랍니더...”
“이놈의 자슥아, 누가 그따우 소리하라 카더나. 이 애비가 우야든지 니를 공부시킬끼니까...”
“보이소 인자 우리도 징 맹그는 거 치아 뿌고 남의 땅이나 붙이 먹읍시더. 아이들 공부도 제대로 못 가르칠 짓 무에 그리 미련이 많은교...”
“이놈의 여편네가 무신 소리 해쌌고 있노. 내사 우야란 말이고...배운 도둑질이라고 내사 할 줄 아는 기 징 맹그는 거밖에 더 있겄나. 내사 마 빌어먹더라도 끝을 볼끼다 마. 열씸이만 하모 우째 궁리가 안 생기겄나.”
“아이고 이양반요. 누울 자리 보고 발 뻗으랬다 케씸더. 누가 맹글어 돌라카는 사람도 엄는데 자꾸 미련도가 우야겠단 말인교. 참말 억장이 무너지고 답답심더...”
정말 옛말처럼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고,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었습니다.
어느 날부터 나라에서는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농촌도 이제는 잘 살아 보자는 운동이었습니다.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땀 흘리며 마을 길도 넓히고 오래된 집들도 편리하게 고쳐 나갔습니다. 자연스럽게 농악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농악을 통해 사람들은 힘든 일을 잠시 잊었으며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덕분에 아저씨의 징이나 꽹과리도 막 팔려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담배 맛이 너무 씁니다. 필터까지 타들어 온 모양입니다.
‘담금질’이 끝난 징을 갖고 아직도 거쳐야만 될 과정이 남았습니다. 징이라고 했지만 바르게 얘기하면 징으로서의 형태만 갖추었지 아직 징이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습니다.
사십 년 이상을 징 만드는 일에 바쳐 왔지만 아저씨는 늘 부끄러웠습니다. 징 소리가 마음에 쏙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각 지방마다 징소리가 달랐습니다. 사는 고장에 따라 산 모양이 틀리고 풍습이 다르고 말씨가 차이나듯, 징을 칠 때 나는 소리가 달랐습니다.
중부 지방의 징소리는 경쾌하고 흥겹게 흘렀습니다. 그러다가 가냘픈 뒷소리가 굽이굽이 출렁이며 길게 이어졌습니다.충청도 징 소리는 괄괄거리면서도 엷고 환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민속 경연대회에 어울리는 전라도 징 소리는 육중하되 짧게 끌리다 땅으로 잦아드는 운치 있는 소리였습니다. 또한 경상도 징 소리는 태산같이 육중한 소리가 길게 밀려가다가 하늘로 치솟는 황소 울음 같았습니다.
아저씨는 경상도 징 소리를 제일로 쳤습니다. 얼룩빼기 황소 울음이 경상도 징 소리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음메에에 울다가 뒤끝을 쳐 올라가는 황소 울음속에서 자신의 징 소리를 들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아저씨는 김천의 장날을 찾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오일장이 서면 시 전체가 장바닥이 되곤 했지만, 가장 활기를 띠는 곳은 단연 쇠전이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우시장만큼 사람이 들끓는 곳도 없었습니다. 많을 때는 하루 거래되는 소가 오백 마리에 이르곤 했습니다. 예전에 횡성 쇠전과 수원 쇠전이 크다고 했지만, 그 역사와 규모 면에서 김천 쇠전이 으뜸으로 꼽혔습니다.
아저씨는 눈에 불을 켜고 소장수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습니다. 당신 자신이 만든 징 소리를 황소 울음에서 찾고자 애썼습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쇠전을 누비고 온 날은 날밤을 꼬박 새우며 징을 만들었습니다.
징만드는 마지막 공정은 ‘울음잡기’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저씨는 길쭉하게 튀어나온 독특한 모양의 곰 망치라는 것으로 담금질이 끝난 징 모양의 바닥을 계속 쳐 나갔습니다. ‘살을 편다’는 것으로서 징 바닥의 두께가 고르게 되도록 골고루 펴 나갔습니다. 살이 잘 펴진 다음에는 다시 징의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 울음을 잡아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울음잡기’는 연륜이 깊은 대장장이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아저씨는 곰 망치로 셀 수 없이 징 바닥을 쳐 가며 소리를 듣고 다시 징 바닥을 두들겨 나갔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소리가 잡히면 그것을 ‘풋울음’이라고 불렀습니다. 풋과일, 풋고추, 풋사랑...이라는 말처럼 아직은 완전하지 않은 어설픈 상태인 것입니다.
아저씨의 곰망치질은 다시 셀 수없이 오래도록 이어지고 있습니다. 징을 쳐보고는 다시 곰 망치질을 하고 다시 쳐 보아도 아저씨가 바라는 황소 울음은 끝끝내 아닌 것만 같습니다.
언제부턴가 아저씨의 징 만드는 일이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래 전에 잃어버렸던, 우리 것을 찾자는 움직임들이 아저씨 같은 사람을 찾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옛 소리를 다듬는다. 징 만들기 40년...’
‘징 제작 국내 일인자. 깊고 긴 여운이 징소리의 생명...’
‘구리와 주석을 160(16냥)대 45(4냥 5돈)의 비율로 섞어...불순물 조금만 섞여도 제소리가 안 나...’
“징의 조율사, 김천 방짜 유기의 마지막 장인OOO씨....”
자고 나니까 유명해졌다는 말은 아저씨를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전국의 신문에 아저씨 이야기가 굵직굵직한 기사로 나고, 아저씨의 얼굴은 다투어 대문짝만하게 실리곤 했습니다.
방송국 프로듀서들도 뒤질세라 카메라 기자와 함께 들이닥치기 시작했습니다.
“캬, 그림좋구만. 그걸 ‘이가리’라고 했던가요. 집게로 잡고 돌리면서 그만 할 때까지 계속 치세요. 자, 이번에는 불구덕이라고 합니까. 거기 화덕 앞에서 천장 쪽을 쳐다보면서...예, 그렇게 동작을 취해서...좋습니다. 좋아요...”
“이번에 아까 했던 얘기 있지요. 그 왜 열세 살 때 배고파서 불메꾼이 되었다는...그리고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큐 사인이 떨어지면 카메라 보지 말고 자연스럽게 말해야 합니다...”
어느덧 아저씨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장날 쇠전에 가게 되면 텔레비전에서 봤다고 악수를 청하는 사람도 생겼습니다. 시에서는 우리 것을 지킨 점을 칭찬하여 문화상이라는 것을 주었습니다. 마침내 문화재 관계 일을 하는 사람들의 추천으로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도 지정 받았습니다.
다 타 버린 꽁초를 손끝으로 퉁겨 화덕에 던져 버렸습니다. 이제 잠시 곰망치질을 멈추고 징 바깥쪽에 보기 좋게 ‘상사’라고 하는 나이테 모양의 무늬를 새겨 넣습니다.
징의 굽은 부분에 구멍을 뚫고 끈을 맨 다음 다시 곰 망치로 두들겨 ‘제울음’을 잡으면 마침내 하나의 징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아닌데, 사실은 이게 아닌데...아저씨는 자꾸 도리질을 칩니다. 아저씨가 만드는 징을 두고 신문이나 방송에서 떠들면 떠들수록 자꾸만 움츠러드는 자신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신문 기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의 장인 정신은 어디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십니까?”
“징을 자꾸 만들다 보니까 우리꺼라는 애착이 생겨서...”
“이 시대 장인으로 사명감이나 긍지 같은 게 있다면...”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전수를 해야 할 낀데 배울라카는 사람도 없고 사명감과 긍지를 가지고 징을 죽을 때까지 만들어야...”
아, 그러나 아저씨는 자꾸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끝내 저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장인 정신이니 사명감이니 하는 소리는 신문사나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만나면서 귀동냥한 얘기입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동안 아저씨 자신은 먹고 살기에 허겁지겁한 세월을 보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 이즈음입니다.
얼마 전 아저씨는 김천의 직지사라는 천 년이나 된 절에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저녁 예불 시간에 맞춰 울려대던 그 웅숭깊은 종소리를 들으며 아저씨는 자꾸 반성을 했습니다.
아저씨가 만든 징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던 소리였습니다. 산사에서 우연히 들은 직지사의 종소리에는 꾸미지 않은 자연의 소리가 담겨 있었습니다. 부처님을 닮고자 하는 사람들의 온갖 소망과 믿음이 담겨 있는 듯했습니다. 아니 그 소리는 모든 인간의 더러운 욕심과 다툼을 꾸짖으면서 어쩔 수 없는 근심거리조차 사라지게 만드는 커다란 힘이 있는 듯했습니다.
직지사 종을 만든 천 년 전의 어느 장인은 지금의 아저씨처럼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얼굴을 내밀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시에서 문화상을 받거나 무형문화재로 지정도 받지 않았습니다.
다시 울음을 잡아가는 아저씨 얼굴이 잠시 조개탄 불빛에 흐려지는 것 같습니다. 쉼 없이 곰망치질을 해 가면서 징을 쳐 보지만 징소리가 아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왜 이럴까. 오늘 따라 정말 왜 이럴까?
갑자기 일전에 어느 교수님한테 들은 얘기가 벼락치듯 생각났습니다. 이름은 잊었지만 중국에 살던 옛사람 누군가는 바른 가야금 소리를 얻기 위해서 스스로 자신의 눈을 대꼬창이로 찔러 버렸다고 했습니다. 간사하고 악하며 헛된 것을 보는 눈을 포기해 버리자 소리를 듣는 귀가 밝아져 가야금의 달인이 되었다는 말이었습니다.
아하, 그걸 왜 진작 몰랐던가?
아저씨도 마음의 눈을 수도 없이 찌르고 또 찔렀습니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오르내리며 잠시 우쭐했던 마음을 찔렀습니다. 문화상을 받고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고 으쓱했던 자만심도 찔렀습니다. 이제 비로소 아저씨의 울음잡기는 끝나고 처음 듣는 듯한 징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징지징 징징 직지사의 종소리처럼 맑고 밝고도 힘찬 그 소리는 아주 오랫동안 밤하늘에 울려 퍼졌습니다. 자다가 부시시 눈을 비비며 한밤중에 듣게 된 그 소리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가슴에 벅찬 감동으로 남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건널목 있는 풍경


땡땡땡 땡땡땡땡... 요란하게 울려대는 타종소리가 귓전을 파고듭니다.
곧 열차가 지나갈 모양입니다. 왠지 오늘따라 건널목지기 아저씨의 동작이 굼떠 보이기만 합니다. 굳이 나이를 따지지 않더라도 허리가 굽어지는 세월의 무게는 어쩔 수 없나 봅니다.
하긴 이십 년 가까이 건널목을 지켜 오다 보니까 어지간히 이력이 붙은 탓도 있지만 곧 건널목을 떠나야 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심란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차단기의 길고 야윈 팔이 서서히 내려와 턱하니 선로의 건널목을 막아 섭니다. 요즈음 들어 철로와 도로가 엇갈린 이곳에 멈춰서는 차량들이 꽤나 많아졌습니다. 선로 아래쪽 마을에 입을 쩍 벌릴 정도로 많은 대규모 주택단지가 들어서는 탓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공사자재를 실은 덤프트럭이나 포크레인, 레미콘 차량의 행렬이 줄을 잇습니다.
땡땡땡 땡땡땡땡... 연이어 귓전을 때리던 타종소리가 멎고 수평으로 놓였던 차단기의 야윈 팔이 힘겹게 들려져 하늘 쪽을 향해 곧추 섭니다. 이제 다음 열차가 지나갈 때까지 한동안 건널목은 분주하기만 합니다. 자장면이 든 철가방이나 가스통을 실은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재생 재질로 만든 종이박스를 잔뜩 싣고 숨이 턱에 찬 누군가의 리어카가 힘겹게 굴러갑니다. 등교길의 아이들은 몇 명씩 무리지어 가볍고도 힘찬 발걸음으로 학교로 향합니다. 개중에는 출근 시간을 맞추느라 허둥거리는 직장인의 모습도 보이고 다소 낡은 영업용 택시의 클클거리는 엔진소리가 친숙하게 끼어들곤 합니다.
하루 예닐곱 번 아니 어쩌면 그보다 많은 열댓 번 상하행선 열차가 지나가는 건널목이지만 이곳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사건들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봄비가 촉촉이 내리던 어느 오후였습니다. 그 날도 여느 날이나 다름없이 사람들의 얼굴은 저마다의 일로 골똘한 표정이었고 더러는 심심해 죽겠는지 선 하품을 하기도 하고, 넘쳐나는 시간을 어쩌지 못해 주리를 틀다가 그것도 아닌 사람은 똥마려운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열차가 지나갈 시각에 맞춰 위험을 알리는 타종소리가 요란하게 땡땡거렸습니다. 아마 봄비에 젖어 그 소리는 자장가처럼 들렸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조금씩 물기를 머금고 땅바닥으로 낮게, 낮게만 깔렸나 봅니다. 뒤뚱거리며 천천히 차단기가 내려지고 봉고차 한 대가 선로 위에 사정없이 얼굴을 들이민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하느님 맙소사! 무엇이 그리고 급했던지, 열차와 부딪친 봉고는 오십 여 미터나 끌려가 휴지처럼 구겨지고 말았습니다. 마침 학원에 갔다 오던 아홉 명의 아이들은 이제 다시는 해맑게 웃거나 조잘거리거나 깔깔거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 사고 후 돌아오는 봄마다 건널목 길을 따라 노란 개나리꽃이 시샘하듯 피고 졌습니다. 하지만 그 날 흩어진 책가방이며 신발주머니, 실내화, 몽당연필의 주인공 얼굴들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가슴에서 지위지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도 안타까운 일은 꼬리를 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누구나 아픈 상처에 붕대를 동여매듯 지나간 일은 쉽게 잊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잊을 만하면 사고 소식은 불쑥불쑥 얼굴을 드러내곤 혀를 날름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엔 먼 객지로 아들과 손녀들을 떠나 보내고 그 외로움을 술로 달래던 할아버지가 술 취한 채 철로를 베고 잠들었다가 생명을 앗긴 것이었습니다,
"우리 아들이 곧 온다고 하더군. 날 데리러 온다고 했다니깐 그래. 이번엔 며늘아기와 손녀들도 온다고 했지. 암 오고말고......"
아래윗동네 누구를 만나건 아들 자랑에 신명나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장례는 아들과 손녀 없이 동네 사람들에 의해 치러지고 말았습니다.
한 번은 사업에 실패한 어느 가장이 열차 난간에 기대어 시름하다가 떨어져 다리 하나를 잃었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슬픔에 지쳐 있던 어느 누나는 열차에 뛰어들어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렇게 안타까운 일만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이제는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국민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은 중학교 진학을 위해 도시로 나갔던 것입니다.
"야야, 부디 편지 자주 하고 선상님 말씀 잘 듣그래이. 그라고 이담에 훌륭한 사람이 될라카몬 부디, 제발 정직하고 씩씩해야 하는기라. 니 밑으로는 뽄보일 동상들이 있다카는 것도 잊지 말그래이......"
이불 보따리와 가방을 꾸려 메고 어른들 손을 잡고 새로운 고장을 향해 떠나가던 그 늠름함과 자랑스러움이라니.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에는 마을의 누군가는 고등학생이 되고 아니 더 커서는 온 마을 어른들의 축복 속에 대학생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따, 이놈아가 누구고? 쩌기 삼거리 떡집 아들 아이가. 내사 몰라 보겠데이. 니가 하마 이만큼 컸더나. 길가다 만나도 인사 안 하고 그냥 가뿌몬 정말 모리겠데이."
그들 중 몇 몇은 알게 모르게 부쩍 커버려 나라를 지키는 군인아저씨가 되기 위해 먼 길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랬습니다. 누군가는 하늘나라로 가고 다치고 하루가 다르게 부쩍 키가 크고 보다 넓은 도시로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건널목지기 아저씨의 생활은 여전히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했습니다.
그래도 십 년도 훨씬 전에는 아저씨의 하루 하루가 마냥 심심하고 밋밋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당시 아저씨의 일이라는 게 기차 들어올 시각에 맞춰 사람이나 차량을 단속하는 일보다는 아이들과의 싸움이 주된 일처럼 보였습니다.
아이들은 철로 위에 못을 놓아두고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열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아저씨가 아무리 말려도 아이들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덜컹거리며 열차바퀴가 지나간 레일 위에서 납작하게 눌린 못들은 예리한 칼이 되고는 했습니다. 대개는 육중한 열차 무게에 눌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잔뜩 눌린 못들이 만들어 내는 형태들은 아이들의 재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아저씨가 보기에는 그런 놀이 자체가 너무 위험한 일이라 기겁을 하고는 했습니다.
'이 녀석들, 게 섰거라, 어딜 도망가느냐......"
때로는 달래고 때로는 혼쭐을 내면서 철로 가까이에서 노는 것을 말렸지만 아이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또 한 번은 멀리 산모롱이로 열차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이는데도 레일에 귀를 갖다대고는 뗄 줄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아저씨는 너무 놀란 나머지 오줌을 다 쌀 지경이었습니다. 호루라기를 불어대고 붉은 나무깃대를 흔들며 쫓아갔지만 세상에 그보다 더 재미있는 일은 없다는 얼굴로 낄낄거리며 달아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이들에게 있어 열차는 막연하기만 하고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앞날에 대한 기대나 희망 같은 것을 실어 나르는 도구였습니다. 아니 장차 커서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무작정 열차가 좋았습니다. 어쩌면 열차를 타고 먼 곳으로 떠날 수 있는 그 언젠가가 좋아 아이들은 무엇인지도 모를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나날이 커갔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은 때로 서로에게 묻고는 했습니다.
"니, 저 열차 타고 끝까지 가면 어디 나오는지 아나?"
"몰라. 아마 바다가 안 나오겄나. 바다 위로는 갈 수 없을 거 아이가."
"아이다. 니는 모른데이. 떠났던 자리 다시 오는기라. 지구는 둥글다 안카더나"
가만있으면 질세라 또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어집니다.
"아이고, 이놈아들아. 우예 그리 모르노. 휴전선 안 나오나. 북쪽땅으론 못 가는기라. 와 언젠가 텔레비에서 철마는 달리고 싶다 카는 거 못 봤더나?"
서로 자기 말이 맞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판결은 늘 건널목지기 아저씨의 몫이었습니다.
"아저씨예, 이 기차가 어디꺼정 갑니꺼?"
이제 아저씨는 어느 누구의 편도 들 수가 없습니다. 무슨 대답이 나올까 맑은 눈동자를 굴리는 아이들 앞에서 가장 어리석은 말이 때로는 가장 현명한 대답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가고 싶은 만큼 가는 거란다. 꿈꾸는 만큼 갈 수 있을거야. 음......, 외할머니가 보고 싶으면 외가댁까지 갈테고 나중에 커서 선생님이 되고 싶은 아이는 선생님 되는 공부를 가르치고 학교가 있는 도시까지 갈테고......"
뚱딴지 같은 대답에 아이들은 피! 하고 무신 말이 그렇노 어른이 그딴 것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도 잠시뿐 구태여 기차가 닿는 곳을 알아야 할 이유도 없고 그런 것은 조금도 중요한 것이 아니곤 했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열차를 타보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좀처럼 맛볼 수 없는 것이어서 먼 남의 나라 일 같이만 여겨졌습니다. 어쩌면 열차를 타보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터무니없는 생각을 몰래 가슴에 키우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먼 곳의 친척어른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기다리거나, 불현듯 먼 곳에 사시는 외삼촌이나 이모님댁이 그리워 지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길고 야윈 팔의 차단기는 내려지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어디로 그렇게 떠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에게 있어 열차가 지나갈 동안 건널목 앞에 멈추어 서 있다는 것은 참으로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물론 겉으로야 씽씽한 얼굴을 하고 기분 좋은 웃음을 짓고 있지만 속마음은 열차를 타고 지나가며 누군가 치켜올린 손 인사에 양손을 힘차게 마주 흔들어 주고 싶은 것입니다. 물론 그런 속마음은 허구한 날 지나가는 열차를 향해 손 흔들어도 마주보고 손 흔들어 주는 사람이 없다 보니까 생겨난 궁리입니다.
마침내 아이들 중 누구 누군가는 언젠가는 저놈의 열차를 타리라, 반드시 잡아타고 멋지게 손 흔들어 보이리라. 혼자 결심 아닌 결심을 하면서 이빨을 앙다물어 보곤 했습니다. 건널목을 열차 타고 지나며 여유롭게 가슴도 쫙 펴보고 입가엔 미소도 지어 보여야지, 하루에도 몇 번씩 다짐해 보지만 그런 기회는 아무에게나 쉬 오는 게 결코 아니었습니다.
아저씨는 그런 생각도 안 드는지 늘 여유로운 모습으로 가볍게 손을 흔들며 건널목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잘 다림질한 제복을 입고 금빛 단추가 달린 모자를 쓰고 반질거리는 구두를 신은 모습이 멋있다는 느낌은 모든 아이들의 공통된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저씨의 하루하루가 제복처럼 멋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년 삼백육십오일 늘 햇빛 좋고 맑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어쩌다 억수 장마지려는지 장대비가 뿌리는 날이면 차단기 앞을 지켜 선 아저씨의 몰골은 금세 후줄근하게 젖어 볼품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또 눈보라가 휘날리는 날은 그대로 살아있는 눈사람이 되어버리곤 했습니다. 어쩌면 아저씨에게 있어 건널목지기 일이란 건널목을 이용하는 모든 사람들의 재산과 생명을 열차와의 충돌로부터 지키고자 하는 약속이며 일종의 믿음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젊은 날을 하루같이 오고 가는 열차와 함께 보내면서 하루가 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아저씨건만 이제는 조금 쉬셔야 할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꼭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올망졸망 모여 장난을 치던 선로가엔 개나리 노란 꽃망울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너무 커버려 소식 없지만 오래 전에 보았던 아이들 중의 하나가 불쑥 물음을 던지는 듯합니다.
"아저씨는 어떻게 여기 오셨어요?"
"응, 본역에서 차량정비 하다 조금 다쳤단다, 건널목 일은 할 수 있겠더라. 그래서 너희 개구쟁이들 지키려고 왔지. 너희들 잘 커서 열차 타고 가고 싶은 곳 갈 수 있을 때까지 말야."
"얼마나 커야 되는데요."
"사실은 키가 중요한 게 아니고 마음이 커져야 하는 거란다. 마음이 큰 사람은 멀리까지 볼 수 있고 넓은 세상에 나아갈 수 있는 거란다."
"마음이 커진다는 건 어떤 거예요."
" 음!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추운 겨울을 잘 견뎌낸 나무들 몸에 돋는 초록 이빨 같은 것이라고 할까? 날마다 푸르게 되고 무성하게 자라는 잎사귀 같은 거란다."
지나간 시절을 되돌아보는 아저씨의 두 눈이 자꾸 침침해 오고 있습니다. 예전 그 좋던 시력으로 칙칙폭폭 증기 폭발음을 내며 먼 산모롱이를 돌아오는 증기 기관차의 모습을 발견해 내곤 맘 설레던 일도 이제는 한갓 추억이 되었나 봅니다. 육중한 몸체로 기적소리와 흰 수증기를 뿜어내던 증기 기관차도 이제는 철도박물관이나 어린이 대공원에 전시용으로나 보관되어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디젤 기관차에 밀려난 증기 기관차처럼 아저씨의 건널목지기 일도 이제는 끝내야 할 때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안경을 벗어 몇 차례 안경알을 닦고 써보지만 흐릿해지는 눈앞은 좀처럼 맑아질 것 같지가 않습니다. 돌이켜보면 철도 일에 몸담은 지 사십여 년이 되었지만 정년퇴직까지의 마지막 이십여 년을 건널목지기로서 보내게 되었다는 게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혹 동네 사람 누군가는 그렇게 얘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명색이 그래도 철도밥을 사십 년이나 먹었는데 하다 못해 역장은 못하더라도 건널목지기로 마쳐서야 되겠느냐고 말입니다. 아저씨로서는 오히려 그래서 더욱 스스로에게 대견한 생각을 품게 된 요즈음입니다. 보다 건강하고 젊은 후배에게 이 건널목 지키는 일을 넘기면서 그래도 자신은 스스로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덧 아저씨로서는 마지막으로 건널목지기 일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밤 열 시. 마지막 열차를 보내고 나면 다음 날엔 본역에 정년퇴임 신고를 하러 가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과 아저씨가 지켜 선 가운데 차단기가 내려지고 땡땡땡 땡땡땡땡... 변함없이 타종소리가 밤하늘에 울려퍼지고 이윽고 열차가 지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아, 아까부터 자꾸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끔벅거리던 아저씨는 마침내 보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그 예전의 장난꾸러기들이 이제는 당당한 청년이 되어 창마다 하나씩의 등불을 켜들고 보란 듯이 마구 흔들어 대는 것을.... 그 하나씩의 등불은 오롯이 아저씨의 몫으로 쏟아지는 지상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선물같이만 보였습니다.
스치는 불빛에 드러난 안경테 속에 언뜻 물기가 비쳤지만 그것도 잠시뿐 아저씨의 환한 미소가 오랫동안 피어올랐습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프레이야 2004-03-17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어릴 적 동네에 이런 건널목이 있었어요. 지금도 있더군요.
옛날 생각에 잠시 젖었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