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네 이발소-[김이듬]

내리막길에서 급정거를 한 건 순전히 한 사내 때문이었죠 흙먼지 뒤집어쓴 머리를 쑥 내밀며 막 땅 속에서 솟아오르는 죽순 같았어요 나는 도로 묻히려는 그 사내를 다독거려 백일홍 가지에 약속을 걸어두고 맞은 편 이발소로 데려 갔어요 육계 머리칼을 뜯어 비눗물에 담그고 문질렀지요 뻣뻣했던 머리칼이 파래처럼 부드러워졌어요 의자에 누워 있던 사내의 튀어나온 눈이 따가울까 봐 나는 출렁이는 젖가슴으로 닦아냈지요 매일 머리를 감겨 달래면 어쩌나 화를 내면 어쩌지 내가 도로 사내의 팔을 부축해서 밖으로 나왔을 땐 어느새 노을지고 백일홍 꿈결같이 졌네요
어디쯤이었을까
나는 사내를 끌어올린 구덩이를 찾지 못하고 두꺼운 이불을 걷어내듯 도로를 헤집는데 사내는 일을 마친 성기처럼 안으로 쑤욱 들어가 얼굴만 내민 석인상이 되었네요



나의 기억에 반쯤 묻힌 당신을 꺼내
하루에도 몇 번씩 닦아드려요
어디쯤에서 잘못되었나 고민하다가
광한루 지나
만복사지 옆 비탈길에서
비뚤하게 다시 만나면 안될까요

.......................................................................................................
*찰나의 스침으로도 억겁의 세월을 두고
문득 이 세상에 사연이나 이유없는 삶이란 게 있을까요?
논밭가에 나뒹구는 도자기 조각 이나
기와편에 새겨진 만복사 삐뚜름한 명문 하나 혹은 목떨어진 불상에 내려쬐는
하오의 햇살 속에서도
지극히 선한 그리움으로 안겨오는
그대여, 꿈결같이 젖은 목소리로 다시 부르고픈 이름 그대여!

바쁘게 정신없이 참 잘살다가도
어느날 미친놈처럼 하 그리 문득 꿈인듯 생시인듯
폐사지를 떠올리거나 아니면 경주박물관 뒤뜰 왼갖 석물들 곁에 라도
왼종일 하루쯤 떠헤메이게 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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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강에 가는 이유 -[장옥관]


사람들은 묻는다, 왜 강에 가느냐고. 인적 드문 적막 강변에 무슨 볼일이

있느냐고. 아내가 싸 준 도시락 들고 집 나서면서 나도 물어본다. 나는

왜 강으로 가는가. 비둘기를 실은 낡은 바퀴 구슬프게 굴러가고 시절을

잊은 시집은 차 바닥에 뒹구는데 부지런한 버스가 부려놓은 씩씩한 공장

지나쳐 나는 왜 날마다 강으로 가는가. 반듯한 교과서 명랑한 군대, 나날의

구름 안색 저리 훤하건만 눈 흘기는 물총새 삐죽이는 자갈 비웃음 받으며

평일 대낮에 나는 왜 강으로 가는가. 곰곰이 생각해봐도 답 찾을 길 없을

때 풀숲 자갈밭에 퍼질고 앉아 밥이나 먹는다. 뜨겁게 끓어올랐다가 식은

쌀밥은 말없음표처럼 촘촘하고 흰 두부의 먹먹함 사이 비쩍 마른 멸치의

서러움을 키 큰 붉은여뀌 목 빼어 기웃거린다. 태풍 매미에 할퀸 제방은

벌건 살점을 드러내고 손발 다 잃은 버드나무 찢어진 비닐을 날개인 양

달고 서 있다. 거센 물살에 떠밀려와 눈뜬 채 제 살점 개미떼에게 떼어

주는 참붕어. 모로 일제히 쓰러진 갈대풀 속에는 누가 옮겨 놓았을까,

붉은 우단 의자 하나. 그 위에 내려온 하늘이 턱 괴고 앉아 물소리를

듣는다. 예나 제나 한결같은 모습은 쉼 없이 부닥쳐오는 입술에 귀

맡겨둔 물 속의 돌멩이. 어룽대는 물빛에 내 낯빛 비춰보고 저물녘

나는 말없이 집으로 돌아온다. 와서는 말하리라. 돌멩이 얼굴에 꽃이

피었네, 능청부리면 짐짓 모르는 척 받아주는 아내의 몸에 찰박이는

물소리는 서럽게 내 몸에 울려 퍼지리라.

....................................................................................................

* 쓸쓸하게
아니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무연히 이 세상 모든 헤메임의 뒤끝을 따라가다
속절없이 깊어가고 아득하고 그래서 더욱 투명하게 빛나던 물소리... 가슴에 담고 돌아오던 그런 시절 그 누구라 없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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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채마밭을 본 적이 있을까-[권혁웅]



내 작은 채마밭을 아십니까, 世上의 변두리에 셋집을 얻어 밭을 꾸몄습니다.
마음의 식물들 싱싱하게 자라 제법 무성하답니다.
이곡(李穀)의 소포기(小圃記)를 읽고 있습니다.
세상이 나를 세상 바깥에 밀쳐두면 세상 역시 나의 바깥에 있어서,
세상과 내가 소외의 불편함으로 아늑할 때 실은 세상이 나의 채마밭인 것이지요.
내 상처가 세상의 화농으로 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 푸른 상추처럼 상처는 뜯어내도 뜯어내도 날마다 돋아났지요.
감자같이 둥글고 울울한 마음 숨기려 해도 줄기를 잡아당기면 뿌리 끝까지 올망졸망한 생각들이 딸려 올라왔답니다.


깨진 사금파리를 밭 둘레에 박아놓았더니 생채기가 뚜렷이 빛나는군요.
우리는 한통속이랍니다.
내 마음의 바깥이 세상의 안이어서 날 끌어안은 세상에 한 시절 기대거나 세상의 바깥이 내 안이어서 팍팍한 가슴 두드리며 살거나......


양파처럼 겹으로 감춘 나를 세상이 벗기려 들 때마다 나는 또 다른 껍질 속에 웅크려 있었어요.


그러나 세상이 밖에서 나를 두드릴 때마다 나 심하게 흔들렸음을 기억합니다.
세상 혹은 그대라는 이름의 산과 들판에 대해서......


파가 울타리 너머 웃자랐군요. 이만 총총.

............................................................................................................
*청도 뿔의 북쪽(角北) 땅에 집 한 채 짓고 시조를 쓰는 행복한 시인을 만나러 간 적이 있습니다.
가창 지나 헐티재 너머 산 첩첩 구름 둥둥 눈썹위에 가을 햇살 쟁쟁한 날
남한산성 반닫이, 까치호랑이 민화, 금강산 장안사 풍경 그림, 제주 동자석, 잘 생긴 조선 질항아리 구경하고, 너른 마당 돌확과 맷돌로 꾸며진 정원에서 한껏 즐거웠습니다.

권커니잣커니,
몇 잔 술에 취하면서
내 마음의 채마밭에도 온갖 상상속의 아욱이나 상추 쑥갓 따위...푸성귀를 심고 돌확엔 수련도 몇 포기 가꾸며 더러 청개구리도 수련 그늘에 몸을 쉬어가는 곳.

언젠가 나이 들어서는
뭐, 아이들 대학만 가고 나면
아니 아, 아니 3년 뒤 5년 뒤 정말 딱 10년 뒤...

세상 변두리에 터밭 하나 일굴 궁리에 몰두했습니다.
임자 없을 때 하늘 만 평 재빨리 헐값에 사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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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송찬호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준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비로소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오후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 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 - 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 - 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
* 내게도 지난 날 빛나는 만년필의 시대, 그 잊혀진 습작의 추억이 있거니
'파카'나 '빠이롯트'나 '몽불랑'의 이름들을 떠올리는 이 가을날의 투명한 햇살이여 눈물 어룽거리는 먼 산자락 굽이 굽이 아련한 능선들이여~

내 푸른 악어는 어느 하늘가 호올로 지쳐간 것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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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자의 노래]-신경림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메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
*그냥 저냥 무연한 타인이 되어 헤메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마음에 등불을 켜듯 사무쳐 그리움속으로 푹푹 빠져만 들고 싶은 그런 날이 있습니다.
혼자이기 때문이겠지요.
외로웠기 때문이겠지요.
이 세상 끝간 데 없이 외진 벌판에서, 그토록 간절한 목소리로 누군가를 불러보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터벅터벅 명사산(鳴沙山) 낙타도 없이 그 무슨 목마름의 언덕을 넘어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 가슴 켜켜이 쌓아둔 때문인지도 기실은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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