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학 지음 / 학이사(이상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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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집에 와 문무학 시집 <홑>을 받아 펼친다.
오랜 인연을 가진 선배의 일곱 번째 시집이라 반가움과 고마움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밀려온다.
그러나 먼저 눈에 든 것은 책의 판형이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눈에 익힌 국판이나 4,6배판이나 신국판이나 크라운판이 아닌 줌안에 넣으면 쏙 들어가는 아담 사이즈였다.
아니 이것은 말 그대로 조선시대 수진본(袖珍本)이나 좁쌀책의 변형이 아닌가. 예전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유생(儒生)들이 사서오경(四書五經)이나 시문류(詩文類)를, 학승(學僧)들은 불경을 조그만 책으로 만들어 깨알 같은 글씨를 적어 소매 속에 넣어 두고 수시로 꺼내 보았다는데.....

그러나 내 눈길을 다시 끈 것은 한국판 하이쿠라고 할까 극서정시라 할까 촌철살인의 지극히 짧은 말로 이끌어 내는 울림과 여운이었다.
어디에서 촉발된 관심이 어떤 연유로 이렇게 색다른 장정과 형식과 내용을 이끌어 내기에 이르렀는지는 몰라도, 참 재미있고 새롭고 단순한듯 툭툭 내던지는 시편들이 편편마다 아름답기 조차 하다.
과문한 탓인지 나는 이런 류의 시로는 부손이나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 몇 편 밖에는 달리 아는 것이 없지만....문무학 시인의 ,홑,에서 또 몇 편을 취해 가슴 저 밑바닥에 갈무리해 두고 수시로 소매 자락 안쪽을 더듬듯 꺼내어 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논>
아버지
놀다 오시면

이팝꽃이
피던 곳

<밭>
호미로
밑줄을 긋던

울 엄마의
책 한 권

<땅>
초록에
젖물려 놓고

하염없는
어머니
...........................................

절창이다!
달리 무슨 구구한 사설이나 설익은 감상 따위 드러내어 밝히고 깨씹으며 해설을 붙이랴.
여섯 해 전 '낱말'이란 시집을 통해 한껏 펼쳐 보였던 시를 읽는 재미가 한층 더 농익어 다시 한 진경(眞景)을 이루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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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석인상(石人象)의 표정

언제부터 우리 옛 돌조각품인 석인상에 눈길을 주었는지 모르겠다. 어느날 우연히, 예비하거나 기다리지도 만나자는 작정도 없었건만 오래된 인연인듯 그렇게 그들은 앉은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날 이후 봄날의 미나리아재비과 할미꽃이나 여름날의 홍백색 패랭이꽃과 자줏빛 줄기 쑥부쟁이거나 가을날의 여러해살이풀 흰색의 산구절초처럼 무심코 지내다 문득 새롭게 발견하는 야생화의 아름다움처럼 그들은 어느새 살갑게 선걸음으로 달려왔다.

그 누가 태무심하고 잃어버린 까무룩 잊혀진 세월이라 했던가. 아무도 눈 주어 말 한마디 건네는 이 없고 애초부터 그냥 거기 있었던 양 치고는 석인상이 건네는 귀엣말은 옹알옹알 너무 많은 사연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동구밖이나 사찰 입구나 무덤앞을 지키던 장승이나 문인석에는 쉬 이름지어 말할 수 없는 다양한 표정이 있었다. 장승들은 낯선 길손을 위한 이정표 구실을 하거나 나쁜 기운이나 질병의 접근을 막거나 성문이나 병영앞에 세워져 공공시설을 지킨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또한 문인석이나 무인석은 무덤을 지키며 고인의 편안한 잠을 위한 구실을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장승은 장승,장생,벅수,수살,돌미륵,할아버지,할머니,신장,당산,하루방,동자석 등 부르는 이름도 많았다. 그 만드는 재질도 소나무,밤나무,오리나무,잡목 등 만드는 사람의 형편에 따라 달랐으며 귀신이나 장군이나 미륵이나 부처나 노인의 모습으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많은 수의 장승들은 썩기 쉬운 나무로 만든 것 보다는 숱한 풍상과 세월의 티끌을 잔뜩 뒤집어 쓴 채 묵묵하게 버텨선 돌로 만든 장승들이 많았다.
따지고 보면 돌이든 나무이든 재질은 차치하고 장승에는 마을 공동체 신앙의 주체로서 병액(病
厄)을 막거나 풍년을 기원하고 각종 불상사에 대비하고 보호받고자 하는 소박하거나 간절한 믿음이 있었다.
 
나는 어쩌다 기회가 닿는대로 많은 석인상들과 만났다. 오래 전 돌을 쪼으고 깎고 다듬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그 어떤 소망과 바램을 품었는지 이제와 알 길 없어도 그것들은 결코 예사로 보고 허투루 대할 일이 아니었다.
 

지난 여름 문화유산해설사 몇 분과 함께 경기도 세중돌박물관을 찾았다. 진작 도록이나 간헐적으로 소개되던 잡지나 신문기사의 내용에 솔깃하여 흥미를 갖고있던 터였다. 언젠가는 한 번 가보리라 오래 벼르던 작정 치고는 막상 현장에 도착하자 왜 이제서야 왔던가 하는 반성과 놀라움과 설레임에 어느 곳부터 눈길을 주어야 할 지 몰랐다. 초행길이라 몇 차례나 길을 잘못 들고 헤매인 뒤끝에 간간히 빗방울도 뿌려 에둘러 힘겹게 찾아간 길이었지만 지성이면 감천이
라는 말을 실감하였다. 온몸에 잔잔하게 가려 두르는 설레임과 흥분을 감추기 힘들었는데 눈부처라는 말의 의미를 실감했다. 벅찬 감동과 가슴 두근거리며 느끼는 눈 호사를 내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석인상들이 내뿜는 매력과 친근감은 아마 원초적인 감성과 타고난 건강성에 단순한 미감과 소박한 마음의 표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실로 꾸밈없는 심성과 순박한 얼굴과 천연덕스런 웃음이 무의식 중에 은근히 묻어나는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색다른 얼굴이면서 시대나 지역적으로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부리부리한 왕방울눈이나 주먹코에 헤벌어진 입이나 큰 귀 하고 어느 것 하나 여느 보통 사람들 하고 닮지 않았다. 그러나 근엄한 얼굴이거나 장난스레 헤식은 웃음을 짓거나 놀란듯한 모습이거나 너그럽고 마음씨 좋은 표정이거나 모두가 다 우리 이웃의 그렇고 그런 잘아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익숙한 몸짓이거나 농익은 목소리처럼 친근감이 들더라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돌조각품들은 알게 모르게 주위에서 참 많이 사라져 버렸다. 무관심이든 지역개발이든 현대화나 해외 밀반출의 이유든 소중한 우리네 그 무엇을 잃고 살아온 세월은 아니었던가 하는 물음을 떠올려보게 된다. 모르긴 해도 세중돌박물관의 수많은 석인상들도 너무 쉽고 대수롭잖게 버려지고 사라져가는 우리 돌조각품들에 대한 애틋한 정과 안타까운 마음에서 수집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하기에 수집품 가운데는 일본으로 밀반출 되었다가 애써 어렵게 이 땅에 다시 돌아온 문인석들도 백여점 가까이 진열되어 있었다.
세중돌박물관에서 만난 돌조각품들은 장승,문인석,무인석,동자석,석탑,부도,돌호랑이,돌로 된 솟대,얼굴이 새겨진 향탁자,기자석,남근석,맷돌,절구,다듬이돌 등 돌로 만들 수 있는 온갖 석물들이었는데 나는 아무래도 얼굴을 새긴 석인상에 더욱 관심이 가고는 했다.
흔히 나무로 만든 장승에 새겨지곤 하던 천하대장군이나 지하여장군이란 글귀 말고도 해학적이면서 여유와 웃음과 간절한 기원과 속내 같은 것을 은연중에 드러낸 다정다감한 모습의 조각품들이 많았다.
석인상들 중 장승이나 문인석들은 궁궐 조례시 조복을 입고 손에 쥐던 물건인 홀을 들고 있었는데 개중에는 전혀 다른 형태로 몸을 표현한 것도 많았다. 어떤 장승은 기자석처럼 아이를 안고 있거나 풍요와 다산의 의미인가 성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도 있고 한바탕 흥겨운 놀음이라도 벌이려는듯 윷을 들거나 심지어 연꽃이나 물고기를 새긴 특이한 것들도 있었다.
그외 제주도 동자석들은 다양한 손모양이 재미있었는데 신랑 신부의 모습으로 꼬꼬재배를 하거나 머리를 땋거나 벙거지를 쓰는 등 원초적인 소망과 풍요와 다산의 의미를 가지는 것 등 우리네 민초들의 상상과 꿈의 여러 표현들이 거기 오롯이 깃들어 있었다.
 
아마 옛 사람들은 돌의 혼을 불러내고 돌의 몸을 빌어 그 위에 따스한 인간의 숨결과 소망과 꿈과 생명을 나타내었나 보다. 오천평이나 된다는 돌박물관을 거닐며 왼갖 기대와 설레임 속 내 상상력은, 돌에도 피가 돈다는 말이 무색하게 말로 다 이를 수 없는 인간들의 염원과 꿈을 엿본 기분이었다.
너무 많은 종류의 다양하고 풍부하게 수집된 석인상들을 본 탓인지 하마터면 나는 지금껏 다른 곳에서 만난 석인상들에 대한 감동을 일상적인 흔하고 단순한 만남 정도로 간단히 여기고 말 뻔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 생각은 점차 바뀌었는데 돌박물관의 석인상들도 좋지만 원래 있던 자리 그대로 오랜 세월을 버텨온 석인상들의 가치가 훨씬 더 크고 귀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느 답사길, 퇴계종택을 방문하고 선생의 산소에서 만나본 동자석과 문인석은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퇴계선생의 유명(遺命)을 따라 묘전비에 관작을 쓰지 않고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간결하게 썼건만 옛 선현의 그윽한 향기와 준엄하고 격렬한 정신의 깊이가 느껴져서였다.
나는 선생의 무덤 앞 보기 드물게 당당한 문인석곁에서 오래 머물렀는데 모름지기 큰 어른의 발꿈치라도 좇아 보려는 조그만 소망과 속내를 그런 식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이번 여름 세 번째 찾은 다산초당 가는 길은 괜히 빌린 옷 입은 것처럼 어색하고 낯설었다. 다산초당 오르는 길 초입의 율동마을은 난개발이 되고 산을 잘라 새로 길을 낸 입구에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기념관이 떡하니 버텨선 까닭이다.
19년 신산한 세월. 긴 유배의 고독과 빈궁 속에서도 오로지 책과 붓에 의지해 견딘 배소(配所)의 공간이 주는 의미는 반감되고, 너무 관광지화 되어 혹여 유배의 절망을 이겨낸 뜨거운 현장의 의미가 퇴색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다산초당, 추사 가 정약용 선생을 보배로이 여겨 쓴 보정산방(寶丁山房) 글씨를 보러 가는 산길 초입에 전라도식 동자석이 한 쌍 있다.
무덤 주인은 다산을 다산초당으로 초빙했던 윤단의 손자이며, 정약용의 제자였던 윤종진이다.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똥그란 눈에 큰 귀를 하고 주먹코에 입은 좁다랗게 시늉만으로 새긴 동자석이다. 모르긴 해
도 다산이라는 큰 선비가 있었기에 동자석 하나도 보통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내가 사는 곳 가까운 경산박물관 앞뜰에는 원래 유곡동 신림사터에서 옮겨왔다는 석탑과 불상,석등,비석,부도와 몇 구의 석인상들이 있다. 안내문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구미'라는 일본인 의사가 반출하여 자신의 병원에 두었던 것이 해방후 병원터에 세워진 경산중학교에 있다가 현재의 자리에 옮겨진 것이라고 한다.
나는 두 어번 마음이 답답하고 하쓸쓸하여 슬그머니 경산박물관 뜰에 가 석인상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온 적이 있다. 미주알고주알 있는 얘기 없는 얘기 무어 그리 속속들이 푸념하고 털어내듯 할 말 다하지 못해도 좋았다. 괜시리 한 번 가만히 쓰다듬어 보고 말이라도 한마디 툭 건네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그냥 무연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시간과 죽음의 흐름에 맡길 수 밖에 없는 인간적인 운명과, 세상잡사에 빠져 허우적이며 집착하는 아집과, 쓰잘데 없는 욕구 조차도 쉬 달래고 위무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돌로 만든 석인상에 애정의 눈길과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딱히 그 특별한 동기를 찾지는 못하겠다. 그렇지만 시간이 가면서 석인상에 바치는 애정과 관심의 정도는 조금 색다른 것이 되기도 했는데 어느 해 고미술품 경매장에서 제주도 동자석 한 쌍을 낙찰받았다. 나는 즉시 오래된 박달나무 다듬이돌의 속을 파내고 동자석을 모셔 두었는데 볼 때마다 갖가지 상상력을 빈 수사(修辭)와 시시 때때로 떠오르는 마음결의 추억 따위를 엿본듯한 기분이다.

제주도 동자석에는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뜨게질실 올올이 풀리고 나달나달해진 털조끼 같은 푸근함이 있다. 의치를 해넣은 말년, 우물우물 대충 씹어 삼키며 볼우물이 패이던 호박엿 같은 환한 미소가 있다. 명절때면 두루 다 모이던 자리 어린 손녀 손자들 등이라도 치고싶게 반기는 정겨움이 있다.
그랬다. 짐짓 무서운 척 화난 흉내로 겁을 주는 척 하지
만 일부러 꾸며하는 표정이야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괜시리 과장하며 어루고 닥달하다가 눈 부릅떠 보기도 하지만 웬걸 그럴 수록 더욱 바투 다가서도록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세월의 물이끼 덧앉고 가는 시간의 뒷덜미에 잡혀 이제는 많이 피곤하고 힘겨운듯도 하지만, 느닷없이 갖가지 신화와 소망스런 꿈과 상상력의 공간을 슬그머니 내어 보이는 석인상이 아니랴.
 

우리 집 현관 출입구 앞, 옛 사람들처럼 사악한 잡귀 들어오지 말라고 까치호랑이 걸어둔 밑에 자리한 제주도동자석도 보통의 여느 장승들처럼 코가 온전치 못하다. 그 예전 코에 돋은 이끼와 돌을 긁어 감초와 함께 달여 먹으며 낙태를 바란 것일까, 아니면 애기 놓고 싶은 마음이 빚은 흔적인가. 우연히 '장승코'라는 시를 읽으며 장승의 또 다른 표정을 하나 상상해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락태약 된다고 저 장승코를
어제밤 비 온 뒤에 또 글거갓소.
오목오목 들어간 고모신 자국
키 자근 녀자가 발버팀 첫소.
웃득하든 그 코가 업서지고도
그 자리가 한치나 패어 드럿네.
캄캄한 밤중 타서 찬 칼을 품고
저 장승 코 베려 달려들 때에
약한 맘 얼마나 발발 떨엇노.
아니다 대담하지 그 처녀 아기
박금(朴錦)의 '장승코'全文
1930년경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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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분아저씨 2007-10-17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blog.naver.com/lmy0142
죄송합니다. 네이버에 '옛 화장용구를 알아보자,라는 제목으로 새로운 집을 짓고 있습니다.
한 달쯤 뒤에는 네이버에 '박가분'카페를 하나 만들려고 합니다.
알게 모르게 찾아갔던 서재에는 앞으로도 더러 들를거구요...그리고 쩝!
죄송스럽고 고맙고...그래요, 쩝!입니다.
 

중국국보대구전 초대전에 다녀왔습니다. 39개 박물관에서 온 한.당나라 국보 325점을 둘러 보았습니다.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에서 기원전 206년부터 실크로드를 따라 떠나는 1200년 동안의 긴 여행을 세 시간 동안에 훑어 보자니 아쉬움과 미진함이 많아 다시 짬을 내어 두 어차례는 더 둘러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5월부터 8월까지 서울역사박물관에서의 전시를 마치고 대구를 찾은 중국 유물을 감상한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가 지극히 어렵습니다. 그냥 대단하네 참 아하 야아~ 이크 내....쩝!.... 밭은 숨결만 내뿜으며 감탄을 연발할 뿐 그냥 온전히 감동과 소름조차 끼치는 전율의 아름다운 물살에 떠밀리며 둘러 본 시간들이었습니다.
그 중 1400년 전 유행하던 메이크업과 패션-비단치마를 입은 여인상(唐나라) 앞에서 오래 머물렀습니다. 마치 당장이라도 은반에 옥구슬 구르는 목소리로 말을 건넬듯 해서 입니다.
여기 (주)솔대에서 발행한 <中國국보전> 도록에 여인상을 소개한 글을 옮기며, 내친 김에 5~6세기의 돌 화장도구와 여인상에 어울림즉한 박물관신문(국립중앙박물관 발행 2007.9. VoL433)에 실린 중국 한대의 "칠기 화장 그릇세트'와 영국 대영박물관 소장의 고개지顧愷之가 그린 '여사잠도'도 소개합니다.


비단 치마를 입은 여인상이다. 머리 부분은 진흙으로 빚어 채색하고 몸은 나무 기둥으로 채색했다. 높게 상투를 틀고 팔은 종이를 꼬아서 만들었으며 두 손은 배앞으로 교차시켰다. 위에는 소매가 좁고 연주문으로 장식한 비단옷을 입었고 바깥으로 노란색 숄을 걸쳤다. 하반신에는 붉은색과 노란색 줄무늬로 된 치마를 입었으며 몸매가 호리호리하다. 눈섭 언저리가 넓고 이마는 화전花鈿으로 장식했으며 볼에는 붉은 분을 발랐다. 얼굴은 사홍斜紅으로 꾸미고 입술은 붉게, 뺨에는 보조개를 그려 넣었다. 전형적인 당나라 여인의 모습이다. 당시唐詩에 보면 당나라 여인들의 화장에 관한 생생한 묘사가 많은데 이 유물이 그 내용들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당은 부와 아름다움을 숭상한 왕조로, 짙고 선정적인 화장이 이 시대 화장문화의 주류였다. 붉은 색 분으로 장식하고 화전을 붙이며 보조개를 그리는 것이 당대 여인들이 가장 선호했던 화장법이었다. 화전은 각종 꽃무늬를 미간에 붙이는 일종의 장식이다. 당의 화전무늬는 비교적 다양한데 특히 매화 무늬가 많다. 이 인형의 이마에 붙인 화전 역시 매화와 비슷하다. 화전의 풍습은 선진先秦시대에 이미 있었으나 당대에 특히 성행했다. 그러나 면엽面? 보조개화장 사홍 등의 화장술은 대략 삼국시기에 등장한다. 양梁 간문제簡文帝 염가편艶歌篇에 나오는 '옅게 보조개 화장을 하고 얼굴에는 사홍을 했다'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화장술을 기술한 것이다. 면엽은 당대에 성행하였
는데 고승高承의 사물기원事物紀原에 실린 바로는 '원세부인遠世婦人이 면엽하는 것을 좋아하였으니 이는 마치 달 모양 같기도 하고 돈 모양 같기도 하고 또는 주황색 연지를 찍은 것과 같아 당나라 사람들도 이를 숭상했다'고 했다. 당시에는 얼굴 가득 종횡으로 화장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리고 사홍은 면엽과 짝을 이루는 화장법으로, 두 볼과 구레나룻 사이에 선홍색으로 초승달 모양을 그려 넣던 것이다.

전하는 바로는 위魏의 문제文帝 조비曹丕가 총애하던 한 궁녀가 어느날 실수로 넘어져 볼을 다쳤는데 피가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상처가 나은 뒤에도 두 군데 흉터가 남았으나 그 궁녀에 대한 문제의 총애는 전과 같았다. 이를 본 다른 궁녀들도 조비의 총애를 받기 위하여 그 상처를 흉내내곤 했는데 이것이 사홍이라는 화장술로 굳어졌다고 한다. 이 인형의 두 볼에 있는 장식도 전형적인 상처 모양의 사홍이다. 이러한 종류의 사홍은 일종의 결함을 추구하는 심미 관념으로, 당 후기에 점차 사라졌다.

이 인형은 고창高昌지구 장웅張雄 부부묘에서 출토되었다. 이 여인상이 출토된 묘 주인 장웅張雄은 본래 하남성 남양南陽으로 대대로 고창에 살았던 권세가였다.


중국 한대 칠기의 표면에는 아름다운 무늬들이 있다. 육안으로 보아서는 그 섬세한 붓터치를 느끼지 못할 만큼 아주 작은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유물 속에 숨겨진 세계이다. 무늬에는 구름, 기운을 표현한 것, 동물, 식물, 산수, 인물, 신화 등 그 내용이 다양한데 이 무늬들은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여러가지 형상들을 이용하여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하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신화의 세계를 신비롭게 보여주기도 한다. 인간세계에서 천당으로, 동식물무늬에 이어 의식을 치르는 인물이 등장하거나 수렵하는 장면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 작은 세계에서 당시의 풍속을 알 수 있고 한대 사람들의 내세관을 엿볼 수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중국실에는 칠기로 된 화장그릇 두 세트가 있다. 고대 중국의 여인들이 화장품을 담아두었던 그릇으로 거울,빗 등과 함께 세트를 이루고 있다. 그 중 칠기 그릇세트는 얇은 금박무늬를 그릇표면에 올리고 여러 번 칠을 씌운 뒤 다시 금박위의 칠을 벗기는 평탈 기법으로 만들어 매우 아름답다. 이 화장그릇 표면의 아름다운 무늬가 자아내는 환상적인 세계를 감상해보는 즐거움이 일품이다. 이 화장그릇의 표면에는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그름무늬가 그려지고 구름무늬를 배경으로 사슴,호랑이,코끼리,새 무늬 등을 붙여 새로운 미지의 세상을 경험하게 한다. 구름을 표현한 가는 붓 선이 유려하여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공간을 조성하고 이 공간에서 사슴이 여유롭게 달리거나 무소가 뿔로 받는 모습도 보인다. 그 외에도 새가 구름무늬 사이를 날고 있거나. 모이를 쪼고 있거나 뒤를 돌아보는 순간을 포착하여 시공간의 접합점에 정지한 듯....감상자로 하여금 시간과 공간을 잊게 한다.
화장그릇을 담아 보관하는 그릇은 가볍고 얇아 아름답지만 단단하지 않은 단점이 있다. 그래서 접촉면이 많은 곳은 견고하게 하고자 금속으로 테를 둘러 보강하였다. 금속테가 둘려진 사이에 문양이 그려져 있다. 둥근 무늬들은 이 공간을 익숙하고도 자유롭게 즐기고 있다.
중국회화작품들이 오름쪽에서 왼쪽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듯이 한쪽을 향해 가지 않고 동물무늬들의 좌우 방향을 적절히 조화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칠기 세트를 담는 가장 큰 그릇을 제외하고는 담는 그릇의 동물 무늬는 우측을 향하게 하고 뚜껑 부분은 좌를 향하게 도안하여 시선이 한쪽으로 쏠리는 것을 방지한 제작자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다. 도안은 계획대로 완성되어 완벽한 작품이 되었다. 끝으로 이 화장 그릇셋트의 쓰임새는 고개지가 그린 여사잠도女史箴圖 중 여인들의 화장과 머리를 정리하고 있는 장면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표면에 금박무늬로 꾸미는 평탈기법은 한대 중기 이후 유행하였다.
- 이정은(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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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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