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 갔더란다!

때로 세상사 답답하고 심심하여 무덤덤한 마음을 갖고자 애써도 시름겨워 어쩌지 뫃할 때 훌쩍 떠나 보는 것도 영 의미없는 짓거리는 아닌듯 하답니다. 내 딱히 어쩌자는 마련도 없이 봄바람날 나이도 훌쩍 지났건만 내닫은 발길이 다달은 곳은 경주박물관이었습니다.

지난 수 년간 크고 작은 몇 차례의 경주박물관 기획 전시 기사에 잠시 솔깃한 마음뿐 한 번도 실천에 옮겨 길을 나서지 뫃한 것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오늘은 대구박물관 도슨트팀의 일원으로 월례행사로 계획된 박물관순례라는 좋은 핑계거리도 있었지만 콧구멍에 바람 한번 넣어 나쁠 것 없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작용한 탓이었습니다.

이야아- 저, 저, 저 노오란 꽃 숭어리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주차장에 차를 대고 밖으로 나서자 마자 발을 헛놓게 할 만큼 그토록 환하고 명랑하고 쾌할하게 안겨오는 축제 같은 향기에 취해 잠시 황홀할 지경이었습니다.

내 기억속, 그 언제던가 제주도 삼방산밑이나 섭지코지 가던 길과 성산 일출봉에서 무더기 무더기 피어나 나를 자꾸 흔들어대던 유채꽃 향기도 떠오르며 함께간 일행을 조금씩 달뜨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박물관 뒷뜰엔 곱게 빻은 은가루 같은 햇살로 짠 봄쉐타 털실의 올이 스물스물 풀리는 듯 했습니다. 적당히 따뜻하고 포근한 기운속에서 만나는 숭복사지 비석받침은 당당하고 힘차보였습니다.

통일신라 시대의 비석받침인데 등에는 두 겹의 귀갑문(龜甲文)을 새기고 짧은 목에는 귀한 구슬목거리를 한 채 머리는 용(龍) 형상을 한 것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석물은 아닌 것이 분명했습니다.
여기 저기 경주 일원의 폐사지와 남산에서 옮겨온 석물들은 볼 때 마다 푸근하고 따뜻한 분위기로 사람을 끌어 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까이 가고자 하고 기꺼이 마음 주어 애틋한 눈길로 마주해 보면 돌에도 피가 돈다는 말이 영 그릇된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파란 츄리닝을 입고 때이른 봄소풍을 나온듯, 그것도 아니라면 야외 수업으로 동무들과 함께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통통 튀고 까르르 발치에 깔리는 것이 보기에 참 좋았습니다.

문득 먼 데서 연식정구를 할 때 나는 탁, 타닥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고 일없고 까닭없이
마냥 훈훈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가슴에 피어나는 듯도 했습니다.

팻말에 새겨둔 설명에 따르면 오른쪽 불상은 월성군 양북면 장항리에서 옮겨온 석조여래입상으로서 여러 조각으로 부서진 것을 상반신만 복원한 듯 했습니다. 촘촘히 새긴 나발(螺髮)의 머리위 커다란 육계를 하고 원만한 얼굴(상호)인데 이마에는 백호(白毫)가 파여 있고 시원스런 눈썹을 하고 있었습니다.

중앙에 보이는 남산에서 발견되었다는 부처머리는 몸체는 사라졌지만 미루어 짐작컨데 상당히 큰 불상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우아한 곡선으로 그어진 눈썹이나 꾹 다문 입과 두툼한 아랫입술과 길쭉한 얼굴 모습이 예사로운 모습은 아닌듯 해 오래 그 앞에 눈길을 주곤 했습니다.
그러나 무어니 무어니 해도 박물관 뒷마당에 모아 놓은 석등 받침에서 느끼는 소감은 말로 다 이르고 표현해낼 재간이 나에게는 없는 듯 했습니다. 이리저리 얽키고 설킨 사연과 그리움과 추억과 아쉬움으로 다가오는 왼갖 궁리와 속짐작으로 마음은 허둥거리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또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생각 갈래 만 갈래 내 살아온 날들이 밀물처럼 출렁거리며 다가오는 듯도 했습니다.

무엇인가, 이제 와 저게 다 무엇인가!
저 폐사지나 이름 모를 절터에서 옮겨져 와 이제는 다소곳 숨죽인 채 아무렇게나 봄햇살 아래 빛바래기 하고 선 돌들이 주는 느낌이 따뜻해 잠시 누구에겐지 모르게 고개 숙여 감사하고픈 마음 조차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그래, 그래......
이 사월 초순의 봄날은 얼마나 크나큰 축복이고 그리움인가.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그립고 안타깝고 아쉽고 무모하던 젊은 날의 뒤안길 돌아 이제는 다만 넉넉하고 화해하는 몸짓으로 살아 가리라. 정녕 우리네 세상 살아가는 일도 저와 같아서 이제는 다만 감사하고 기뻐하고 다소 함께 나눌 수 있는 이 몇 곁에 있다면 얼마나 다행스럽고 소망스런 삶이냐! 하는 마음도 슬그머니 끼어드는 것이었습니다.

뒷쪽에 보이는 삼층 석탑에서 느끼는 감동도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이 석탑은 덕동 댐 공사로 수몰될 경주시 암곡동 고선사지(高仙寺址)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옥개석(屋蓋石)과 탑신석(塔身石)은 여러 개의 부재(部材)를 써서 짜맞추어 놓은 것으로서, 감포가는 길에 우뚝 선 감은사지(感恩寺址) 탑과 거의 같은 시대와 크기와 양식의 탑으로서 통일신라초기의 대표적인 석탑으로 알려진 것입니다. 이 고선사지 탑에는 탑신에 문비형(門扉形)이 새겨진 것이 특이 했습니다.

내 어제 주말도 아닌데 모처럼 일상에서 벗어나 거닐었던 경주박물관 뒤뜰의 석물들에는 차마 말 다 하지 뫃하고 꽁꽁 쟁여두고 숨겨둔 많은 사연들이 군데 군데 있는 듯해 어디다 눈길을 먼저 주어야 할 지 몰라 두리번두리번 조금 허둥거렸던 것 또한 사실이었습니다.

돌로 쪼으고 새기고 파내고 주물러 놓은 옛 석물이 주는 빛바래고 익숙하고 어수룩하고 친근하고 편한 느낌속에서 맞는 눈부처의 호사를 나혼자 즐기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한나절이었습니다.

박물관 실내에서 둘러본 신라기와나 통일신라 토기나 각종 금속공예와 불상이나 조각품 등도 좋았지만 다시 경주박물관에 들릴 기회가 있다면 국은(菊隱) 이양선 박사가 수집하여 조건없이 기증한 기증유물 전시실에 오래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바쁜 가운데도 대구박물관에 근무한 인연으로 애써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박방룡학예실장님의 설명을 따라 잡느라 세 시간의 일정으론 많은 아쉬움이 남는 경주박물관의 하루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양선박사님으로부터 직접 유물 인수 작업을 하셨다는 박실장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 문화재를 진정으로 아끼고 모아 국가에 환원하신 분의 거룩하고 따뜻하고 귀한 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어 많은 감동이 뒤따랐습니다.
모처럼 나선 경주박물관 나들이는 성덕대왕신종 앞에서 죽비소리처럼 사정없이 쏟아지는 큰 울림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종꼭대기에 용 형태로 된 고리인 종뉴(鍾紐)와 음통(音筒)이 있고 몸체에는 보상당초문(寶相唐草文)을 새긴 상대(上帶)와 연꽃으로 치장된 네 개의 유곽(乳廓)과 네 구의 천인상(天人像)이 있다는 사실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1037자의 명문을 통해 종을 만든 주종대박사(鑄鐘大博士)가 박대나마(朴大奈麻)이고 명문을 김필해(金弼奚)가 지었다는 등 등 귀한 금속문 자료가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겠지만, 천 년 넘는 세월을 무사히 견디고 살아 남아 우리 앞에 이 종이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롭고 신비스럽기 까지한 노릇인지 절로 외경심 조차 드는 것이었습니다.

통일신라시대 35대 경덕왕(景德王,742~765제위)이 돌아가신 부왕 성덕대왕(聖德大王, 702~737제위) 을 위해 구리 12만근으로 만들었다가 실패하여 그 아들 혜공왕(惠恭王 7년(A.D 771년)때 완성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물경 30년 세월에 걸쳐 백성들이 괴로움속에서 벗어나고 진리를 깨닫고 복을 받게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또한 그 공덕으로 성덕대왕이 극락에서 편하게 쉬도록 하고자 하는 기원이 깃든 이 종은 실로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신종(神鍾)이라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유물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에밀레종이라거나 봉덕사종이라거나 하는 별칭을 갖고있는 이 성덕대왕신종에 얽힌 이야기는 유홍준교수의 답사기나 남천우박사의 '유물의 발견'이란 책에

자세히 나와있거니, 이 자리에서 무슨 설명과 소감을 따로 덧붙이랴 싶습니다.4월 어느 봄날 무작정 따라 나선 내 소풍은 마냥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박물관 정문 건너편에 피어있던 노란 유채꽃 향기로 마구 문지른 가슴은 얼마나 설레이고 가슴 뛰던 기쁨이었던가. 펄펄 봄도다리 같은 미각조차 불러 일으키며 눈으로 맞는 호사가 있어 진정 스치듯 구르는 석재 한조각에도 애정이 깃들고 이끼낀 세월의 흔적 하나에도 허투루 할 수 없는 의미가 새록새록 묻어나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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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1570년 70평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죽음을 예비하는 당신의 자세는 담담한 가운데 여유롭기 까지 했다는데 기록을 보니 다음과 같다.
1.남들에게 빌려온 책을 돌려주다.
2.예를 갖춘 성대한 장례를 치루지 말 것이며, 큰 비석을 세우지 말고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도산에 물러나 만년을 숨어산 진성이씨의 묘라고 적고 가족관계와 뜻하고 행동한 것과 벼슬한 것을 간략하게 적을 것.
3.여러 유생을 만나보고, 미리 관을 만들도록 하고 제자 이덕홍에게 서적 관리를 맡겼다.
 이황선생의 사적을 기록한 명문은 기대승이 짓고 글씨는 금보가 썼다고 한다.
묘소앞에는 한 쌍의 동자석이 마주 보고 망주가 벌려 서 있었다. 나는 좌우에 시립하고 선 문인석옆에서 한 컷의 사진을 찍었다. 문인석은 조복에 홀을 들고 선 모습이었는데 굳건한 의지와 도저한 정신의 깊이를 가진 선비의 표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안내인은 굳이 선생의 살아 생전 뜻과는 달리 상석과 비석돌과 여러 석물을 치장하게된 사유를 남은 사람들의 뜻으로 돌렸는데 살아 생전 벼슬의 품계에 따른 장사법과 격이 있음인데 그 누가 입을 대랴 싶었다.

 퇴계종택을 찾아가는 일은 이번 선비문화수련원 부설 전통예절교육원 탐방 일정의 마지막 여정이었다.
조금 높다 싶은 대문을 들어서며 보니 대문 위쪽은 그대로 홍살문이었다. '열녀 통덕랑 행 사온서 직장 이안도 처 공인 안동권씨지려' 현판이 판각되어 있었다. 노 종손의 13대 조모라는데 젊은 나이에 청상이 되어 네 따님만 둔 터라 후사를 위해 셋째집에서 양자를 들여 양자 나이 열 셋에 며느리를 보았다고 한다.
 며느리를 보고 고인의 제자들과 신행온 사람들에게 '삼일 입조' 하는 걸 보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고 한다. 삼일 되는 날 열쇠를 반에 받쳐 며느리에게 건네주고 향물에 목욕재계 하고 소복 갈아 입고 초석자리 펴고 대야에 물 한 바가지 떠놓고 피 토하고 돌아 가셨다 한다. 나라에서 특별히 정려를 내리셨다는데, 대를 이어 가문을 지키고자 한 그 서리발 같은 마음을 떠올려 보느니 대단하면서도 가슴이 아려오는 것은 또 무슨 연유인가. 한 여인으로서 보다는 가문과 집안을 지키고 발전시켜야 된다는 그 시대적 상황에 가위 눌린 한 지어미의 지고지순한 전통적 삶살이가, 내 애써 헤아려 짐작컨데 잔잔한 감동과 안쓰러움으로 함께 밀려왔기 때문일 것이다.


홍살문을 지나 추월한수정(秋月寒水庭)앞에서 듣는 종손의 말씀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종손의 연세는 백을 바라본다는 뜻의 망백(望百, 91세)을 한참 지나 백수(白壽, 99세를 이르는 말)였는데 그 정정한 정신과 가문에 대한 책임감인듯 퇴계종택에 얽힌 이야기를 한 마디라도 더 설명하려고 애쓰시는 모습이 예사로 쉽게 볼 수 없는 것이어서 깊은 감동과 울림으로 전해져 오곤 했다.
추월한수정은 풀어 쓰자면 '가을 달과 추운 물이 함께하는 정자'를 이르는듯 한데 퇴계선생의 말년에 스스로 만족하며 유유자적한 생각을 보는듯한 느낌이었다.
종손께서는 전국의 유림 250 종가의 협조로 추월한수정(秋月寒水庭)을 짓게 된 점을 거듭 강조 하셨는데, 돌아와 자료를 찾아 보니 1715년 창설재 권두경(蒼雪齋 權斗經)이 도산서원원장이 되어 종손 이수겸李守謙과 논의하여 영남사림의 모금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도산서원이 도산서당의 기념 건물이라 한다면 '추월한수정'은 퇴계종택 기념 건물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퇴계종택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건물은 퇴계선생태실(退溪先生胎室)이었는데 나는 일부러 태실에 들어가 지극히 짧은 동안이었지만 나름대로의 상상과 여러 궁리로 잠시 머리가 분주하기만 했다.
비교해 보건데 월성 손씨의 양동마을에 있는 회재 이언적선생이 태어난 태실이 그러하듯 여기에도 약간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태실은 안채의 안마당 쪽으로 조금 튀어 나온 모습이었는데 생각 보다는 아주 좁아 두 세 사람이 누우면 꽉 찰만한 공간만을 갖추고 있었다. 이번 도산서원 탐방길에 함께 나선 여러분의 여자선생님들은 태실에서 나올 생각을 안하는 듯 했는데 한 이십년만 더 젊었어도(?) 하면서 나처럼 퇴계선생태실의 기(氣)를 받아 혹 엉뚱한 생각을 한 것은 아니지 기실은 모를 일이었다.

  태실앞의 아담하고 단정한 굴뚝을 보고 나서 안채와 사랑채의 뒷켠에서 오래 내 눈길을 끈 것은 가지런하게 늘어선 고가의 장독대였다. 어디 없이 고가를 방문할 때 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이 곳에도 사람의 손길이 많이 닿지는 못하는 형편 같았다. 잿물로 유약을 한 제대로 된 옹기는 별로 없고 광명단 유약으로 적당히 눈가림한 현대식 항아리들이 빼곡하게 늘어선 탓이었다. 대청위 시렁위에 올려져 있던 조잡한 소반들도 마찬가지였다. 종손이 종가를 지키며 누대에 걸쳐 살아왔다면 고식의 궤나 장롱이나 옛 목물들이 아직 남아 있어 실생활에 쓰이기도 하였으련만, 얼핏 몰래 살펴본 바 옛 가구들은 골동품 취급 상인들이 진작에 다 가져가고 현대식 가구로 다 바뀌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를 탓하고 나무랄 수 있으랴. 옛 가구들이 더러 눈요기감으로 보여질 수 있었으면 하는 내 얄팍하고 이기적인 생각을 지지눌러 죽이고 반성을 했다. 따지고 보면 나부터 벌써 현대적인 모든 문명과 편리함에 젖어 나태한 정신으로 이 시대를 살아 가는 것이 아니던가.
그랬다. 이번 내 선비문화를 찾아간 탐방길은 일견 아쉬웁고도, 매운 회초리로 맞은듯한 정신의 고귀함과 옛 선비정신을 다시금 되새겨 보는 한 계기가 되었다.

돌아오는 버스칸에서 오래동안 사주, 풍수,예절 등을 공부하였다는 송반 조장 송은석님은 퇴계선생의 무덤자리가 좋았음과 퇴계선생태실의 좋은 기를 받고 감을 설명했다. 또 내 뒷자리의 여선생님 한 분은 청마 유치환의 시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노라'를 암송하여 내 젊은 날의 낭만과 분별없음과 무모함의 한 때를 추억케 했었다. 그 누구라 한 때 시인이며 소설가 아닌 사람이 있었으랴! 기회가 허락되었다면 난 아마 정운 이영도 여사의 '눈길에서'란 화답시(?)를 읊었으리. 그리고 또 어느 분이시던가.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는 길'을 준비해 와 들려주신 분은.

이번 도산서원 탐방에 애쓰신 분들의 수고를 기억하며 우리가 전통문화를 찾아서 가고자 하는 길. 그 길도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는 길'처럼 사람 걸은 자취가 적은 그러한 길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어쩌면 먼 훗날 우리는 어디서 한숨을 쉬며 또 이야기 할 지도 딴은 모를 일이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갈라져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것으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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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 정신의 서늘함과 품격을 찾아서

 도산서원으로 가기 전날 밤 나는 잠을 설쳤다. 안동으로 출발하기 전 일천 이동후선생님께서는 '와, 소풍 전날은 설레지 않니껴?' 하시며 인사말을 건네셨는데, 옛 사람의 정신의 깊이와 자취를 엿본다는 은근한 기대와 설레임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하긴 누구라 없이 길을 나선다는 것은 늘 만남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만남은 또 우리로 하여금 새롭게 거듭날 수 있는 한 계기가 되고도 충분히 남을 터였다.
 주차장에 내려 도산서원 홍보관에서 영상자료를 시청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른쪽 강물을 굽어보며 걸었다. 구비구비 이미 흘러간 세월의 흔적은 자취 없어도 옛 사람이 일구고 간 정신의 깊이는 도도한 장강(長江)만 같아서 왜 그리 가슴엔 금빛 물결 은 물결 출렁거리며 하염없이 깊어만 가던 것이랴!

굽이치는 물결
천년인들 다할 날 있으랴?
물길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웅장한 자태를 다투느니,
인생은 물에 떠내려 가는 장승과도 같이
어느덧 흘러가는 것.
누가 있어 저 흐름 속에서
저리도 튼튼한 다리로 설 수 있을 것인가?
퇴계로 돌아오며 '경암'이라 일컫던 바위를 두고 읊은 이황의 시를 떠올리며 시사단(詩士檀)을 옆구리에 끼고 가다 도산서원 앞마당에 서자 나는 어느듯 풍경의 일부가 된 느낌이었다.  
한 아름이 넘는 두 그루의 버드나무를 보면 굳이 안내자의 긴 설명을 듣지 않고 묻지 않아도 홀로 알겠다. 숱한 사람들이 보듬어 안거나 겉터 앉으며 애정을 괴이고 정을 나누어 이미 친숙하고 다정한 의미로 안겨오는 그리움 같은 것을......

  한복 맵시가 유난히 잘 어울리던 저 이름모를 여인은 그 무슨 생각에 저 홀로 골똘한 모습인가. 이황은 '도산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을 노래함'이라는 글속에 '샘의 물이 맑고 달았다'라고 적었는데 그 이도 나처럼 저 70년대의 성역화 작업으로 각본에도 없는 우물을 만들어 놓아 빼았긴, 진정 목 축일 한 모금의 샘물이 그리웁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도산서당으로 오르던 길 마음만 괜시리 허둥거렸다.
퇴계 당신께서 매형이라 인격을 부여하며 다정하게 부르던 매화꽃은 져버린지 오래였고, 내 눈길은 여러 건물에 걸린 현판 글귀의 뜻을 속으로 가늠하고 헤아리기에 바빴다.

'정우당'앞 연못에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
퇴계는 군자의 꽃인 연을 심어 정우당(靜友塘)이라 한 이유를 밝혀 놓았다. 진나라 도연명은 국화를 즐기고 당나라 이백 이래 많은 세인들은 모란을 부귀를 상징하는 꽃이라 하여 좋아 하는데, 당신께서는 연꽃이 진흙속에 살면서도 오염되지 않고 잔물결에 씻기면서도 요염하지 않으며 속은 비고 줄기가 곧아 남에게 의지하지 않으며, 그 향기가 멀수록 맑아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지고 놀 수는 없어 군자라 칭하며 기꺼이 벗으로 삼았음을 진작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 연꽃을 굽어보고 있노라니 연꽃 사이로 숨은 몇 마리 개구리들이 꼼지락 거리고 있어 개구리 저도 당신의 그 큰 뜻을 배우고 싶어 시늉하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도'에 나아가는 문이라는 의미로 읽힌 '진도문'을 들어서자 좌 우에 두 채의 광명실이 있었다. 광명실은 장서실인데 주자의 시 '만권서적(萬券書籍) 혜아광명(惠我光明)과 '역경'에서 취하였다는데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란 말도 있듯이 세상에 태어나 옛 성현의 발뒤꿈치도 밟지 못할지언정 천 권의 서적은 훑어볼 각오를 세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습해(濕害)를 방지하기 위해 누각식으로 지어진 장서실에 쓴 당신의 친필 현판을 뒤로 하고 나아가면 '도산서원'과 '전교당'이라 쓴 현판이 보이는데 '전교당'이나 '진도문' 글씨는 일필휘지로 거침이 없다. 이에 반해 '도산서원' 글씨는 한석봉이 썼다는데 마르고 고장꼬장하고 일견 고결해 보이기 까지 한 것은 조선시대 제일 뛰어난 명필이 썼다고 하는데서 오는 선입견 탓일까.

전교당 뒤쪽에 자리한 상덕사(尙德祠)는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퇴계의 위판과 그의 고족제자 월천(月川) 조목(趙穆)을 모신 사당이다. 나와 함께간 일행은 '상읍례' '알묘레' 체험을 통해 큰 영광을 입었거니 큰 선비의 발자취를 조금은 더듬어 따르고 배우고픈 소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신과 관련된 유물을 보러 올라온 길을 옆으로 비껴 내려 가던 중 부드러운 곡선의 기와 처마 하나 비례와 구성미가 돋보이던 담장 하나에도 그 얼마나 정감이 가던 것이랴. 급하게 찍어온 사진을 보고 있자니 '농운정사'라는 제목의 시가 떠오른다.
항상 도홍경의 시에 나오는
언덕 위 구름의 흥취 사랑하였다네.
스스로 즐길 수는 있어도
그대에게 가져다 줄 수는 없지.
늙으막에 집을 짓고 그 가운데 누웠으니
한가로운 느낌 절반쯤은
들사슴이 나누어가네
  우리는 왜 애써 배우려 안간힘 하는가. 사람다운 사람의 마음가짐과 자세를 즐겨 익히고 닦고 실천하려 함이 아니었던가.
농운정사에는 '시습제'와 '광란헌' 두 개의 현판이 있었다.
저 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양주동선생의 글 가운데 논어 학이편에 그런 글귀가 나옴을 처음 알았었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아아, 그 말씀의 인연을 좇아 이렇게 뒤늦게야 전통예절을 익히려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까지 내 발길이 닿지 않았던가.
시습재와 마주보고 있는 '관란헌(觀瀾軒)은 '물결 흘러가는 것을 감상하는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일찌기 공구(孔丘;공자)는 "흘러가는 것은 모두 이와 같구나! 밤 낮을 가리지 않는구나!"라고 하며 탄식했다는데 물 흘러감과 인생의 흘러감을 두고 공부를 이루지 못했음을 탄식하는 뜻이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해보는 것이다.

'옥진각'에는 당신과 관련된 유물이 있었다.
일년초인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인 '청려장'이나 '혼천의' 팔걸이 역할을 했을 '안석'은 그렇다 치고 내 눈길을 끈 것은 단연 매화(梅花)문양이들어간 의자였다.
퇴계는 도산서당에 매화를 심어 두고 '절우사(節友社)라 이름 짖고 "내 이제 매형(梅兄)까지도 아울러서 풍상계(風霜契)를 만드니/절개와 맑은 향기 흠뻑 알겠네" 라며 매화를 두고 '절조가 배어난 사람'과 '고결한 기품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상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또 서기라고 표기된 '조그만 책상'을 들 수 있겠는데 절에서 쓰던 양 귀가 올라간 서안과 경상의 중간 형태의 것으로서 옻칠이 벗겨지고 세월탓으로 군데 군데 튼 흔적이 역력했지만 그것은 또 그런대로 아름답고 보배스러웠다. 그토록 작고 날렵해 보이는 책상에 앉아 학문을 닦고 진리의 밭을 묵묵히 쪼았을 당신의, 신산하고 고단한 학문의 길 가운데서도 김성일, 유성룡을 비롯해 수많은 훌륭한 제자를 키우는 보람 또한 컸을 것임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도산서당을 나와 이육사문학관에서 나는 또 매화 향기를 보았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광야'라는 시에서 이육사는 매화 향기를 그리며 조국 광복의 꿈을 꾸었다. 참으로 어둡고 암울한 일제 치하에서 지사로서 또한 문사로서 높은 경지를 보여준 그의 시는 오늘을 살아가는 내 가슴에 매운 회초리 되어 죽비소리처럼 울려 오고 있었다.
 이육사문학관을 나와 함께간 일행은 퇴계 묘소에 오래 머물었다. 따지고 보면 내 전생에 무슨 한 가닥 따뜻하고 긴 인연의 끈이 있어 퇴계 이황선생 당신의 묘소에 참배하는 기쁨을 맛보았던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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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게시판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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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대구보건대학 인당박물관에서 5월 20일 까지‘보현 옛 공예 콜렉션-탐미와 서정의 세계’ 특별전을 열고 있습니다. 이번 특별전에는 1800년대부터 광복 전까지 옛 여인들이 애용하던 목가구, 노리개, 여성장신구, 금속공예, 도자기, 생활용품 등이 선보이고 있습니다.

“옛 사람들의 아낌을 받았던 공예품들은 각별한 애정의 눈길이 머물 때만이 살아 있는 생명체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며 “콜렉션한 작품들을 혼자 즐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를 아끼고 전통을 보존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실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창조에 보탬이 되고자 전시회를 마련하게 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박가분자료관의 여성용구들도 언젠가 주변 사람들에게 선보일 기회를 꿈꾸며, 이번 "탐미와 서정" 도록에 청탁받아 실은 '컬렉션과 나'라는 글을 통해 옛 화장용구에 기울이는 박가분의 애틋한 마음과 반가움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어여뻐라, 옛 여인의 치레걸이

이 무 열

내 어쩌다 옛 여인네들의 치레걸이에 담긴 속멋과 그 의미와 마음결을 좇아가는 재미에 푹 빠진 것은 꽤 오래전 일이다.
돌이켜 보니 이십 수 년 전 예천 출장길, 허드레 민속품을 취급하는 고미술상에서 소꿉같이 조그맣고 반달같이 휘어진 얼레빗 하나를 만난 것은 실로 우연이었다. 줌 안에 쥐고 얼마나 매만졌던지 발갛게 손때 묻고 빗살 틈에는 때도 끼어 일견 무심하게 보아 넘길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가 살을 고르고 맨 것인지도 모를 그 얼레빗이 품고 있을 곡진한 사연은 알길 없어도 왠지 정감 있게 가슴에 다가왔던 건 또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다. 아마 어린 시절, 동백기름 발라 윤이 나고 앞가르마 단정하게 쪽진 머리에 비녀 꽂은 외할머니의 정겨운 모습과 따뜻한 목소리를 떠올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기억속의 외할머니 경대는 윗대에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했다.
나무와 나무가 맞물리는 부분을 사개짜임으로 옛 법식에 따라 짜 맞춘 제대로 된 조선시대 목물이었다. 그 치장이랄까 꾸밈을 위해 서랍에는 복을 가져다준다는 박쥐문양의 들쇠를 달았다. 옆면의 부재는 오랜 세월 옻칠이 살아 나뭇결이 선명할 정도로 얼비쳐 보였다. 안정감을 고려하여 조금 두드러진 받침다리와 경대 몸체에는 고추잎과 국수형감잡이를 사용하여 견고한 부착성과 미관을 위한 배려를 하였다. 느티나무의 자연스런 결을 살리면서 단순 간결한 형태의 이 경대는 정작 경대의 윗두껑을 열어 젖혀 놓고 보았을 때 더욱 그 진가를 발휘했다. 유리 뒷면을 깎아 대나무를 조각하고 상단엔 둥그런 달이 떠있는 상태에서 아말감을 올려 물체를 비추어 볼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진작 세상을 버리시고 거울을 보며 문득 홀로 남은 외할머니의 기나긴 봄밤은 어떻게 속절없이 깊어 갔을까. 무서리 내리는 그 가을날의 국화꽃은 외할머니 가슴에 또 어떤 빛깔로 사무쳐 진저리치며 피어났을까.
굳이 외할머니가 아니라도 우리네 옛 여인들은 자르르 손때 묻어 윤기마저 흐르는 경대 앞에서 그 무슨 생각을 하며 단장에 골몰했을까 자못 궁금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대개는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자신을 가꾸기에 온 정성을 괴었으리. 더러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젊은 날의 못 이룬 소망이거나 가슴을 두방망이질 치는 추억에 젖어 아슴아슴 눈시울을 붉히는 시간도 있었으리. 또한 제 나름의 마련된 호사와 한껏 스스로의 만족감으로 넘칠 듯이 가득한 미쁜 사랑을 가만가만 두 손 꼽아 헤아리기도 하였으리라. 경대 서랍에는 일반적으로 분통이나 족집게와 빗이나 장식과 실용의 기능을 위한 뒤꽂이와
비녀 빗치개 등속을 넣어 두곤 했는데, 오밀조밀 고만고만한 것이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대할 수 없이 요긴하게 소용에 닿는 것들이었다.

예천의 출장길 이후 언제부턴가 내 마음은 허둥거리고 바빠지기 시작했다. 출장비에서 애써 여투어 낸 푼돈은 홀린 듯 옛 여인네들의 생활용구들과 바꾸어지기 시작했다.
애써 눈 주어 돌아보고 마음 가 닿지 않고서는 그냥 태무심하고 지나칠 도리 밖에는 없던 것들이 저마다 의미를 갖고 앉은 걸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화접뒤꽂이에는 부부간의 화합과 자손의 번성을 희구하는 여인들의 소담스런 마음이 담겨 있었다. 십장생 수저집에는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으로 동양의 장생사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비녀에 새겨 넣은 모란 문양은 부귀와 명예를 의미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수복문을 담은 베갯모에는 다복과 장수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호랑이 발톱 같은 노리개는 모든 악귀를 물리치는 힘을 상징하여 장신구에 사용하게 된 것도 알게 되었다. 나달나달 닳아졌지만, 뇌문이나 아자문으로 난간을 두르고 겹국화, 벌, 박쥐, 초롱을 금박 물린 제비부리댕기 속에는 그넷줄 매어 창공을 치오르며 마음껏 자태를 뽐내고 싶던 날의 수줍음과 설레임이 보이는 듯 했다.

안동이나 영주, 예천, 봉화, 상주, 의성, 점촌을 거쳐 장안평이나 인사동으로 내닫아 찾고 구하고자 했던 것은 돌이켜 무엇이었던가. 궁벽진 시골이거나 애써 옛 전통과 문화의 한 자락을 쉬 저버리지 못하고 부둥켜안고 안간힘 쏟던 사람들에게서 내가 귀하게 얻어낸 것은 진정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옥같이 흰 살결, 가늘고 수나비 앉은 듯 한 눈썹, 구름을 연상시키는 검고 숱 많은 머리카락, 복숭앗빛 뺨, 앵두빛 입술, 박 속같이 흰 이, 가는 허리, 그리고 백모래밭의 금자라처럼 아기작거리는 걸음걸이와 옥반에 진주를 굴리는 듯 낭랑한 목소리의 여자…….’

우리 옛 선조들이 예찬한 이런 이상적인 여인상은 부덕과 지혜와 건강한 신체와 올곧은 정신을 지닌 이성적인 아내상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상적인 여인상이라고 여겨졌던 이들은 짙고 화려한 화장을 한 반면 대부분의 여염집 여인들은 한 듯 만 듯 옅은 화장(談粧)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특히 정성을 들이고 애정을 품고 만난 여인네들의 치레걸이 중에는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어도 빠져들 듯한 옛 화장용구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특히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후 구워낸 조선시대 청화백자 화장용구는 소담스럽고 앙증스러울 정도로 깜찍해서 내 마음 홀라당 빼앗겨 홀리지 않고 배겨낼 재간이 없었다.

살펴보면 옛 여인들은 얼굴에 분단장하고 눈썹 그리고 연지를 바르되 본래의 생김새를 크게 바꾸지 않는 자연스런 화장을 선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희고 주근깨 없으며 투명한 피부, 즉 옥 같은 피부를 갖고자 애썼던 것이다. 이러한 피부를 가꾸기 위해 미안수를 만들어 사용하고 꿀 찌꺼기를 펴 발랐다가 떼어내는 미안법(팩)을 하는가 하면 오이를 얼굴에 문지르기도 하였다.
옛 여인들의 치레와 단장을 위한 화장품들은 스스로 제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백분의 경우 분꽃을 집 주변에 심어 거둬 그 씨앗을 그늘에서 말리고 맷돌에 빻고 체에 쳐서 만들었다. 연지의 경우에는 홍화(紅花)를 재배하여 꽃잎을 거두어, 이를 말려 빻고 비비고 체에 치는 과정을 반복하여 제조하였다.

기억 컨데 내 유년의 뜰에도 동네 누님들과 봉숭아 꽃잎 콩콩 찧어 백반과 잘 섞은 다음 비닐로 싸고 실로 손톱에 칭칭 동여맨 시간들이 머물고 있다. 그 여름날의 해질녘 노을빛 곱게 물든 것 같던 분홍의 손톱에 피어오르던 아련한 그리움이나 못 다한 소망 같은 것이 수줍은 얼굴로 떠오르는 것이다.
분합이나 유병, 분접시, 분물연적, 향유병, 참빗, 빗치개, 청동거울 등을 수집하면서 내 마음은 늘 숨겨둔 애인을 몰래 만나듯 기쁨과 설렘으로 움달아 두근거리게 했다.
개중에 아끼는 것으로는 고려시대의 청동봉황문모자합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진작 박물관에는 도자기로 만든 비슷한 유물이 몇 점 보이지만 당초문양으로 테두르고 아래, 위 두 마리의 봉황이 은상감으로 새겨져 서로를 희롱하는 모습이 자아내는 신비는 유래가 없도록 아름다운 것이었다.
최초의 근대적인 화장품인 박가분(朴家粉)은 또 어떠한가. 일제 강점기 공산품 1호면서 박(朴)이라는 상표로 등록된 가로 세로 4.5cm에 불과한 이 분통 하나를 위해 삼 년을 소망하고 기다린 보람은 말로 다 이를 수 없는 것이었다. 종이로 만든 그깟 분통 하나 라지만 살아계셨다면 백 세가 넘었을, 어쩌면 내 외할머니의 혼수품 물목에도 있었음직한 그리움과 추억의 시간을 반추해 낼 수 있는 유물이었다.

헤아려 보면 마음이 가고 애틋한 연분을 맺은 유물이 어찌 한두 개 일까 보냐. 월궁경이라 이름 지은 오래된 청동거울은 색다른 것이었다. 서왕모에게 받은 남편 예(?)의 천도복숭아를 훔쳐 먹고 하늘로 달아나 달의 정령인 두꺼비가 되었다는 항아가 있고, 불로장생의 약을 방아에 찧는 토끼와 월계수가 있는 문양이 눈길을 끌었다. 그 문양 아래 이 월궁경을 간직했을 어느 이름 모를 여인이 쇠끌로 새긴 ‘京成女高普’ 라는 글씨에 담긴 사연을 더듬어 궁리해보는 재미도 쏠쏠한 것이었다.

아아, 세월의 뒤안길 돌아 이제는 가고 없는 날의 여인들이 목숨처럼 아끼고 가까이했을 옛 장신구와 화장도구며 생활공예품이여!
솜씨 좋은 조이질로 은을 다듬고 칠보를 올리던 장인들도 죽고 그 연연하게 이어져 온 전통은 단절되고, 가물거리는 등불 아래 졸리는 눈을 껌벅이며 수틀과 마주 앉았거나 금박댕기를 접던 어머니들의 손길을 다시는 보기 어려운 시절이 되고 말았다. 한 땀 한 땀 사랑과 꿈과 소망을 누비고 감치고 박고 이으면서 바느질을 하고 매듭을 매어 혼수품을 장만하던 처녀의 사연도 먼 이야깃거리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시시때때로 마음이 가닿는 상상의 저편에는 부드럽고 긴 머리채 곱게 빗질하고 고운 댕기 드려서 칠보 은비녀를 반태스레 지른 여인 하나 있었다. 경대 앞에서 오랜 분단장 후 칠보단장 화접뒤꽂이 꽂고 쪽진 머리 들어 그 어디 먼 길 가시는가 치마꼬리 살짝 들어 외씨버선 사뿐히 마당을 나서는 상상을 가만히 해보곤 하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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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를 아십니까?

                     

                                    

 거짓말처럼 또 한 해가 가고 있습니다.

 이룬 것 없이 허전하여 마음 어수선한 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무작정 길을 나서본다면 어떨까요. 함께라도 괜찮고 혼자라도 좋답니다. 찬바람 불고 어디라 정 붙일 곳 없어 헤메임만 가득한 날이라면 더욱 제격이겠지요.

 옛 절은 사라지고 건물을 받치던 기단과 석축과 두 개의 석탑만 덩그러니 남아 가을걷이 끝난 들판처럼 저 홀로 깊어가는 곳.

 경주에서  보문단지 지나 추령고개를 치오르고 구불텅구불텅 삐뚤빼뚤 산길과 호수와 너른 들 계곡을 끼고 달리다 보면 마침내 닿게 될 것입니다.

 들리세요.

 댕~ 대에엥 꿈결처럼 오래 잊고 있었던 감포 앞바다 바닷속 종소리가.

 잠시 또 주위를 둘러보세요.

 3층 석탑에 슬그머니 스몄다가 비껴가는 햇빛과 바람과 노을이나 구름이 있어 영 심심치는 않다고요? 그렇다면 제대로 찾아온 것입니다.


 천 년도 전의 일입니다.

 오랜 전쟁을 끝으로 대왕은 돌아가시기 직전 신하들에게 유언을 했습니다.

 ‘이보게. 내 죽거든 화장하여 저 감포 앞바다에 뼛가루로 뿌려 주시게.’

 ‘대왕마마. 어이 그런 분부시옵니까.’

 위로는 고구려 후예 발해가 중원 대륙에 터를 닦고, 대동강 이남에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룬 대왕의 뜻은 흔들림 없이 꿋꿋했습니다.

 ‘아닐세. 내 죽어서라도 이  땅에 왜구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할 것이네.’

 ‘하필 바다에 처소를 마련하라 하시옵니까?’

 ‘명심하시게. 불법을 숭상하고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려는 나의 뜻을…….’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뒤늦게 불교를 받아들인 신라였습니다.  하지만 김유신과 김춘추에 이어 대왕 대에 이르러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아아, 대왕이시여!

 죽어서도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시는 그 큰 뜻을 어이 거역하리오.

 권력의 힘으로 호화롭고 큰 무덤을 만들어도 영원한 안식처가 되지 못함을 진작부터 알고 계시었단 말씀이옵니까?

 문무대왕의 아들 신문왕은 유언을 좇아 불교식 화장을 하고, 대왕의 뼛가루는 동해 입구 바위에 뿌려졌습니다.

 뒷사람들은 이를 일러 대왕바위, 뎅바위, 해중릉, 대왕암이라 불렀습니다.

 대왕의 유업을 기리고 감사하는 마음은 대왕암 가는 길목 야산 구릉에 ‘감은사’라는 절을 짓도록 했습니다.


 “우와. 석탑이 군시렁 군시렁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아요, 아빠. 무어라 설명은 할 수 없어도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 뛰어요…….”

 “그래. 당당하고 뿌듯한 기운이 느껴지는 모양이지. 후련하구나. 여기까지 찾아 온 보람이 있어.”

 감은사에는 동, 서 마주 보고 선 3층 석탑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절은 진작 허물어지고 석탑과  돌로 된 건축 자재들만 나뒹굴었습니다.

 “감은사는 해방된 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굴한 절터란다. 법당있던 자리 섬돌 밑에 특수한 공간과 통로 흔적이 있었다고 하더구나.”

 “아빠 그럼 정말 용이 된 왕이 그 구멍으로 동해바다를 드나들며 왜구를 지켰다는 이야기에요?”

 “그럴 수도 있겠지. 그리고 밀폐된 지하 공간의 환기를 통해 법당 건물을 유지했을 거야. 삼국유사에는 용이 드나들었다는 ‘용혈’을 의미하는 기록이 있다만……하지만 누가 그 옛날의 일을 감히 장담할 수 있겠냐.”


 감은사로 오르는 길은 밤하늘 별빛 총총 석탑에 가득 내려앉는 겨울이 절정이라고 합니다. 노을 끼는 황혼녘이나, 왠지 서운하고 쓸쓸함이 가슴에 가득한 날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말입니다.

 혹 아름드리 느티나무 뒤쪽 탑을 배경으로 사진이라도 몇 컷 찍어 본 경험이 있으세요? 그리운 추억들이 불쑥불쑥 종주먹을 대며 가슴에 두방망이질 칠 지도 모르겠습니다.

 “왜구들이 감은사 종을 훔쳐가다가  대왕암 앞 바다에 빠트렸다면서요?”

 “어떤 사람은 황룡사 대종이라고도 하더구나. 몽고군 침입때 원나라로 가져가려다 대왕암 앞 바다에 빠트렸는데 그 큰 종이 이 곳 개천을 지나갔다고  대종천이라고 한다더구나.”

 “그래요, 아빠. 책에는 토함산과 함월산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양북면 일대의 넓은 들을 지나 대왕암이 있는 동해 바다로 흘렀다고 했어요. 지금은 시냇물이지만 절 바로 앞으로도 큰 물길이 흘렀데요.”

 “상상해 보려무나 얘야. 이 대종천을 따라 용이 된 왕이 이 곳 대웅전 아래 ‘용혈’까지 오르내렸다고.........”


 종에 대한 기억은 오래 이어졌습니다.

 ‘저 봐, 저 소리가 안 들리시는가. 데엥 데에에엥~. 희미하지만 분명 종소리 같은데…….저, 저 저 소리가 정말 안들려?’

 이 곳에 사는 노인들은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또 그 아버지가 들었다는 종소리를 자신이 들은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랬습니다.

 불경이 부처님 말씀을 글로 옮긴 것이고, 불상은 부처님 모습을 새긴 것처럼, 종소리에는 부처님 목소리를 지극정성으로 담았습니다. 종소리는 진리의 둥근 소리를 천지사방에 퍼지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아빠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도 있었다면서요.”

 “그래, 동해 바다의 떠다니는 작은 산에서 구한 피리가 있었단다.”

 절을 짓고 어느 날.

 신문왕은 친히 바다에 가 거북이 머리 같은 산위에서 낮에는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하나가 되는 대나무를 얻었습니다. 이 대나무로 만든 피리는 문무왕과 김유신장군의 원혼이 나라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내어준 보물이었습니다.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질병이 없어지고 가뭄에도 비가 오고 홍수가 지면 비가 그쳐 바람과 물결을 잦게 하는 신기한 것이었습니다.

 “얘야, 옛 이야기 속에는 쉬 지나칠 수 없는 큰 뜻이 있는 걸 알고 있니.”

 “예, 과학으로는 이해가 안가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럴 수도 있겠지. 이곳을 지나 대왕바위가 바라다보이는 ‘이견대’라는 곳도 문무왕이 용으로 변한 모습을 보았다는 곳이란다. 그리고 그 ‘이견대’에서 만파식적이라는 천하의 보물을 얻었다고 알려져 있단다.”


 시간이라는 것은 무심한 것이어서 존재하는 것은 죄다 물이나 바람이나 흙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옛 절터에서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쓸쓸하면 쓸쓸한 대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가만 귀와 가슴을 열어 보신 적이 있으세요?

 시간을 거슬러 오르다 보면, 무언가 손짓해 불러 미주알고주알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고고학자들은 발굴조사를 통해 많은 것을 알아내었습니다.

 감은사는 중문과 탑, 법당과 강당이 남북으로 배치되었습니다. 다시 회랑이 둘러져 중문으로 연결되어 회랑 내부가 사찰 중심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또한 높은 계단 앞으로 못의 형태가 있어 나무배를 이용해 연못을 건너도록 되어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아빠 탑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나도 궁금하구나. 그 옛날 누군가 바라고 빌면서 꼭 이루어지리라는 소망이나 믿음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때로 먼 산 메아리 소리거나 별빛 같은 것도 얼마쯤은 스며있을테고…….”

 “아니 그런 것 말고 말이에요.”

 따져 보니까 40년도 전의 일이었습니다.

 동,서탑 가장 아랫부분 기단부 석재가 아귀가 안맞고 무너질 위험이 있어 서탑의 해체 수리를 한 것이 말입니다.

 문화재 수리는 나라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드잡이기술자에게 맡겨졌습니다.

 ‘드잡이’라는 것은 원시적인 방법으로 전봇대 같은 나무 지주에 도르래와 밧줄을 걸어 설치하고 석재를 차근차근 들어내는 방법입니다.

 3층 지붕돌인 옥개석을 들어내자 몸돌인 탑신 위쪽 면에서 숨겨둔 구멍처럼 ‘사리공’이 나타났습니다.

 문화재 수리 팀은 아연 긴장하며 부드러운 진흙으로 가득찬 사리공 속의 흙을 긁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작업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설렘과 흥분 속에 진행되었습니다. 종일 진눈깨비가 계속되었지만 옷이 흠뻑 젖어도 추운 줄 몰랐습니다.

 아, 나무아비타불 관세음보살!

 천 년 이상 고이 간직되어온 사리장엄구가 현세의 인간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내시다니…….

 청동의 사리함에는 사천왕상과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모습과 공양상이 조각되어 있었습니다. 내부에는 수정으로 만든 사리병이 있고 사리병 안에는 부처님의 몸인 진신사리가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깜작 놀랐습니다.


 발굴작업과 연구는 계속되었습니다.

 대왕암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도 가지가지였습니다.

 ‘문무왕의 뼈항아리가 묻힌 수증릉이 틀림없어!’

 ‘무슨 소리! 시신을 화장하고 뼛가루를 뿌린 곳이니까 ‘산골처’라고 해야 맞는 말이지.’

 궁금증이 날로 더해가고 여러 주장이 오고 가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신문과 방송에 -문무대왕 ‘해중릉’ 발견하다-고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죽은 뒤 오랫동안 장지가 의문시 되었으나 ‘신라오악조사단’ 학자들이 그 전모를 밝혔다며 사람들의 눈길과 귀를 끌어당겼습니다.

 이 일은 누군가 일부러 꾸며 기사거리를 만들고 발굴 성과를 드러내고자 한 잘못된 생각이 숨어있는 듯 했습니다. 이미 알만한 학자는 대왕암의 존재를 다 알고 있고, 해녀들도 가까이에서는 쉽게 물일을 하지 않을 정도로 대왕암에 대한 두려움과 존경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한 번은 대종을 찾자며 문화재관리국에서 조사단을 구성하였습니다.

‘왜구가 종을 약탈해 가다가 바다가 노해서 배가 뒤집혔다니까 그러네. 지금도 비바람이 심한 날은 그 소리가 더 잘 들리곤 하지. 데 뎅데뎅뎅뎅 뎅뎅하고 말이야........’

 감포 앞바다에 오래 살아 온 할아버지의 제보는 조사단을 흥분시키고 여러 타당성 조사를 거쳐 종 찾는 일에 열중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제 ‘나의 잊히지않는 바다’ 라는 비 앞에서 무슨 생각이 드느냐.”

 “비석에 새겨진 고유섭이라는 사람이 누군데요?”

 “그 분은 ‘경주에 가거든 구경거리로 쏘다니지 말고 문무대왕의 위대한 정신을 기려 대왕암을 찾으라’는 기행문과 ‘대왕암’ 시를 쓰신 분이란다.”

 “진작에 돌아가신 사람 같네요?”

 “그래, 개성박물관장을 지내며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 독립운동 하듯 평생을 바친 분이란다.”

 “일제 식민지에 참 용기 있는 분이셨네요.”

 “어허, 연말에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네. 제법이구나. 갖은 탄압 속에서 민족정신이 담긴 문화재를 지키며 그 분도 문무왕 같은 이를 무척 그리워했을 게다.”

 “그러게요. 그 분한테 배운 제자들이 그 뜻을 길이 간직하려고 대왕암이 보이는 이 자리에 비석을 세웠네요.”


 감은사 대종을 찾는다는 소식은 연일 신문과 방송을 오르락내리락 했습니다.

 여러 신문사와 방송국에서는 조사단과 함께 먹고 자며 스킨스쿠버를 동원하여 조사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기상 조건의 악화와 경험 미숙과 무모한 열정과 언론의 기대를 등에 업은 대종 찾기 작업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저기 대왕암이 보이냐. 이곳 감포 앞바다 봉길리 해수욕장에서 한 200메타 정도 거리라고 하더구나.”

 “보기에는 그냥 평범하고 아담해 보이는 바위섬인데요.”

 “가까이 다가가 보면 바위 한가운데가 못처럼 패어 있고 자연암석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기둥모양으로 세워진 모습이란다. 한 변 길이가 3.5메타 정도 되는 못 안에는 거북이 등 모양의 돌이 덮여 있다고 하는구나.”

 “맞아요. 그 돌 밑에 유골 장치가 있을 거라고 말하던데요. ”

 “얘야. 나는 여기 오기 전 평생 발굴 작업을 하고 민속박물관장을 지내신 분이 쓴 ‘발굴이야기’라는 책 한 권을 읽었단다.”

 “미리 준비 하고 신경 좀 쓰셨네요.”

 “허허 그래. 그 책을 읽으며 그 분께 존경을 보내고 감사했단다. 그리고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구나.”


 당시 고고학자의 마음은 대왕암에 잔뜩 쏠려있었습니다.

 신문과 방송 보도에 솔깃한 사람들은 서로 자기 생각이 맞다고 다투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고고학자의 한 마디 지시로 대왕암 가운데 뚜껑돌을 들어 올리면 맞고 틀리고를 가릴 수 있었습니다. 신비의 베일을 벗기고 어서 발굴작업을 마무리 짓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습니다. 천 년도 넘게 이어져 온 신화와 전설의 한 부분을 속 시원하게 세상에 밝혀 진실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아니 아니야. 세상에는 과학의 힘으로 밝히고 알아낼 수 있는 것보다 더 가치있고 아름다운 궁금증과 소망 같은 것도 있는 게야. 그리움 같은......’

업치락 뒤치락 고민하며 스킨스쿠버를 투입할까 말까 하던 생각은 마지막 순간에 접어버렸습니다.

 차마 호기심과 꿈과 기대와 상상으로 채워진 신화와 전설을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여러 사람의 가슴에 어떤 식으로든 파문지고 고동쳤을 신비스런 ‘비밀’을 까뒤집어 밝힌다는 것이 잘하는 일은 결코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대왕암 돌 아랫 부분을 조사했다면 재미없었겠어요.”

 “그렇겠지. 감은사의 의미도 줄어들고 이번 여행도 절반은 잃어버린 그리움 같은 것이 되었겠지.”

 “이제 곧 새 해가 되겠네요. 이맘때면 이룬 것 없어 허전하시다면서요. 나이 들면 늘 살아온 날이 돌아 보인다시더니....... 어떠세요?”

 “오늘 보니까 네가 훌쩍 컸구나. 너와 함께 한 이번 여행이 오래 가슴에 남을 것 같다. 아빠는 이제 나이 한 살 더 드는 쓸쓸함과 세상살이의 고단함에서 벗어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아싸, 아빠 힘내세요 힘! 저기 저 우뚝하고 늠름한 탑 좀 보세요.”

 “아, 감은사 감은사 감은사 감은사 감은사. 아아, 감은사 감은사 탑이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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