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시심(詩心)의 계절이다. 가을 물처럼 시리도록 투명한 마음 위에 들꽃 한 송이라도 담아 두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 같은 그리움의 계절이기도 하다. 그런 가을의 문턱에서 시 한 편을 만났다. 평소 모르던 조향미 시인의 <가을 해후>라는 시였다.

그대 가는구나
지친 울음 마침내 가라앉고
고요한 봇물 비친
산그림자 은은히 깊다
못둑 들꽃에 잠시 앉았다
떠나는 잠자리
하르르 저 결고운 햇살 속으로
그대 아주 가는구나

"하르르 저 결고운 햇살 속으로 그대 아주 가는구나." 수채화처럼 맑고 고운 이 시가 마음에 들어 조향미라는 분이 어떤 시인인가 찾아보았다. 그리고 만난 것이 <길보다 멀리 기다림으로 뻗어 있네>와 <새의 마음>이라는 시집이었다. 시집에는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듯이 <겨울 골짜기>라는 시도 있었다.

가슴 수북이 가랑잎 쌓이고
며칠내 뿌리는 찬비
나 이제 봄날의 그리움도
가을날의 쓰라림도 잊고
묵묵히 썩어가리
묻어 둔 씨앗 몇 개의 화두(話頭)
푹푹 썩어서 거름이나 되리
별빛 또록한 밤하늘의 배경처럼
깊이 깊이 어두워지리

겨울을 노래한 것에는 <동안거>라는 시도 있었다. 세간의 꿈도 헛된 인연도 버히고 싶다는데 왜 조향미 시인의 시들에서는 모두가 가슴 저미는 그리움 같은 것이 묻어날까. 저 아득한 가을을 지나 눈 내리는 겨울 속으로 사라질 풀벌레 울움소리처럼 왜 마냥 안타깝기만 한 것인지---.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차가운 하늘
길은 모두 눈 속에 묻혔고
마을의 마지막 등불도 꺼져
다시 깊고 깊은 겨울이다
바람에 덜컹대는 사립문을 닫아 걸고
한밤내 물결치는 대숲 소리 들으며
가슴 속 무딘 칼 한 자루
푸른 댓잎처럼 벼려
버히리라 저 운수행각 지나온 길
구름처럼 풀어버리지 못한
세간의 꿈도 헛된 인연도
그리고 언 땅처럼 침묵하리라


.......................................................................................................
*고미술품점 "편고재"를 운영하는 이규진님의 글입니다.
고미술네트워크에서 '문화사랑방'을 운영하시는 분인데 우리 것에 대한 애정과 사랑 뿐만 아니라 얼마나 섬세하고 여린 마음을 갖고 계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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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거워짐에 대하여]- 박 상 천

맞는다는 것은
단순히 폭과 길이가
같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오늘 아침,
내 발 사이즈에 맞는
250미리 새 구두를 신었는데
하루종일
발이 그렇게 불편할 수 없어요, 맞지 않아요.

맞는다는 것은 사이즈가 같음을 말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어제까지 신었던 신발은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어요.
맞는다는 것은 어쩌면
조금 헐거워지는 것인지 모릅니다.
서로 조금 헐거워지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편안해지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잘 맞는 게지요.

이제, 나도 헐거워지고 싶어요
헌 신발처럼 낡음의 평화를 갖고 싶어요.
발을 구부리면 함께 구부러지는
헐거운 신발이 되고 싶어요.

........................................................................................................
*더러는 무심하게 때로는 적당히 헐거워진(?) 삶을 살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됩니다.

오늘 내 무료함 한 스푼, 근심거리 서 너근, 왼갖 쓸쓸함 몇 됫박 모아 죄다 모아서 부글부글 끓이고 싶습니다. 땀 뻘뻘 분주한 숫가락질, 그 낡고 오래된 입맛 같은 시간들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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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립화장장 밑 복사꽃밭 ]-유홍준


진주시 시립화장장은 말티고개 너머 선학사 뒤통수에 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인간의 육신을 태워 재災를 만드는 데도 표도 안 나게 그렇게 말입니다. 하기사 그곳은 무無를 만드는 곳이기에 그렇게 없는 것처럼 있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다들 잊고 지내다가 피붙이들의 죽음이 덜컥 찾아오면 그제야 불현듯 기억해내는 곳. 진주시 시립화장장은 그렇게 말티고개 너머 선학사 뒤통수에 숨어 있습니다. 세상의 앞면만을 보고 사는 일상의 사람들에겐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그런 곳에 말이지요.

그 선학산 시립화장장이 화들짝 피어나는 계절이 있습니다. 봄입니다. 헛것인 듯 형해形骸 같은 아지랑이가 가물거리는 봄입니다. 그 때 온통 복숭아밭 천지인 선학산 언덕엔 불붙듯이 복사꽃이 피어납니다. 정말 속곳에 불이 붙어 가슴으로 번지듯 그렇게 환장하게 피어납니다.

저는 어제 붉은 선학仙鶴이 불이 붙은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는 환영을 본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환영의 눈을 씻고 바라보면 복사꽃밭에 늙은 부부 두 분이 거름을 주고 북을 돋우고 있는 걸 확인하게 됩니다. 늙은 농부의 눈 속에도 복사꽃빛이 일렁거리고 형해가 날리지만 그분들은 평생을 그렇게 해 오셨듯이 묵묵히 나무의 발등에 북을 돋우고 나무의 뿌리에 거름을 넣는 일만 하고 있는 걸 바라보게 됩니다. 머리 위 화장장의 죽음이 당신들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듯 그렇게 무심하게 말입니다.

오늘도 시립화장장엔 고통과 회한으로 살다간 사람의 일생을 태워 재를 만드는데 복사꽃밭 늙은 부부는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일만 합니다. 삶과 죽음이 그런 것이라지요. 병풍 뒤에 아버지의 시신을 염殮해 베개도 없이 뉘여 놓고도 먹어야 하고 자야 하는 것. 그런 것이 우리네 목숨이라지요. 끔찍해라. 제가 잘 아는 진주의 시인 한 분은 그렇게 모질게 삶을 모질게 물어뜯다 놓친 틀니를 시립화장장 밑 복숭아밭에서 보았답니다. 세상을 모질게 물어뜯다 놓친 틀니를요.

히말라야삼나무 둥치를 타고 청설모들이 하늘과 땅을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곳. 시립화장장 마당 축대 밑에 얼마나 묵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뽕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인간의 뼛가루를 얼마나 받아 처먹었는지 허리통이 굵다 못해 반쯤 썩어빠진 뽕나무입니다. 어느 초여름 저는 그 뽕나무가 온 몸에 징그럽게 달고 있던 오디를 보았습니다. 아무도 따 먹을 수 없는 오디. 만지면 죽음의 흔적처럼 물이 드는 흉물스러운 오디. 그 오디가 시커멓게 익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그날 저는 살아있다는 것에, 살아간다는 것에 진저리를 쳤던지 모르겠습니다.

그 뽕나무도 그 날 제 온 몸에 종기처럼 달린 천형의 열매에 진저리를 쳤을까요? 양철뚜껑을 해 덮어놓은 화장장 뒤꼍 우물에 비친 저의 얼굴을 제가 들여다보았을 때처럼 말입니다. 아, 그 날! 습진 곳을 찾아 우물 곁에 자라는 머위의 그림자가, 머위잎만한 삶의 그림자가 언뜻 제 뺨에 그늘을 드리웠다가 사라져가는 것을 저는 느꼈습니다. 거미줄처럼 끈적끈적 잘 걷어지지 않는 느낌으로 말입니다.

오늘도 화장장 뒷산 덤불 속에 찌르레기니 박새 같은 작은 새들이 후드득 후드득 날아다닙니다. 마치 형해 한 모금을 물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아니면 어떤 녀석이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독차지하고 물었는지 그것을 빼앗으려고 떼거리로 지랄발광 안달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갑자기 산재사고와 교통사고로 죽어버린 직장 동료 둘을 저는 이곳에서 떠나보냈습니다. 오랜 지병을 앓아오던 집안 할머니를 이곳에서 떠나보냈습니다. 애인이 사는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린 후배를 이곳에서 떠나보냈습니다. 눈자위가 불콰해지도록 소주를 마시고 줄담배를 피워댔던 곳도 이곳입니다.

이제 복사꽃밭에서 일하시던 늙은 부부는 낡은 모자와 머릿수건에 묻은 복사꽃잎을 툴툴 털어내고 늦은 점심 먹으러 갑니다. 참을 만큼 참으며 일하다가 다 늦게 점심 먹으러 갑니다. 어쨌거나 먹어야, 목구멍 가득 메이는 슬픔도 먹어야 사니까요.

산 밑으로 내려가는 늙은 부부의 어깨가 벌레처럼 좁장해 보입니다. 하기사 짐짓 태연하지만 자벌레처럼 저이들도 죽음의 길이를 재며 나날을 사시고 계실 겁니다. 아, 저 양지 바른 언덕엔 캔버스를 펼친 화가 한 사람이 삶과 죽음의 풍경을, 복사꽃밭 내려가는 저이들을 핏물 같은 물감 개어 그리고 있네요.

복숭아, 너무 익어 베어 물면 진물이 뚝뚝 흐르는 복숭아, 손목을 타고 옷 속으로 시액 屍液이 흘러내리는 복숭아, 흐물흐물 농해가는 농해져가는 복숭아, 살 속에 단단하게 뭉쳐진 뼈가 죽음이 남기는 씨앗으로 들어 있는 복숭아……

한 덩이 복숭아처럼 저도 온 몸을 동그랗게 말고 웅크리고 앉아 세상길에 지친 발목의 복숭뼈를 가만히 만져봅니다.

저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합니다. 마치 뜨거운 군고구마를 집어내듯 후후 손가락 끝을 불어 뜨거움을 식히며 주검이 남긴 몇 조각 뼈를 절구통에 옮겨 담던 진주시립화장장 근무자의 흰 목장갑 낀 손길!


.......................................................................................................
* 대구시는 ....시립화장장에서 납골함을 구입할 경우 기존 가격에 비해 60% 이상 싼 값에 구입할 수 .....매점시설을 민간 임대로 운영한 결과, 바가지 가격 등으로 .......대구시설관리공단에 운영을 맡기게 ....백골 납골함의 경우 통상 10만∼15만 원에 팔리던 것을 4만원대에, 15만 원에 판매되던 향나무함은 5만 원대로 ...팔기로 .....화장예약제, 상객관리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시민 서비스를 강화하기로 ..

해마다 복사꽃 필 무렵,
남부정류장 지나 담티고개 가다 왼쪽 켠 숨은 듯 쉬 드러나지 않는
대구시 시립화장장 이모님 마지막 가신....에둘러 쉬운 길 멀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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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 그믐밤]-이기윤

함께 덮고 자던 이불을 내 아이가
돌돌 감고 혼자 잔다 잠결에
나는 또 아버지 이불을 뺏어 칭칭
몸에 감고 잔다

아버지는 혼자 아버지를 덮고 주무신다
아버지라는 이불이 추우신지 몸을 웅크리고
가끔 마른 기침을 하신다

깜짝 잠이 들어버린 뒷마당
또래의 꾀양나무는 하얗게 눈썹이 세어가고
내 나이 한 살이 목에 걸려
잘 넘어가지 않는 섣달 그믐밤

긴 밤 꿈을 꾸며
꿈을 잃어가며 밤새도록 지금 나는
아버지가 되어가는 중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
그 아득한 행간에 누워

........................................................................................................
*또 한 해가 갑니다.
망년회다, 송년회다, 송년의 밤이다, 계추다...
하냥 섭섭해
무어 그리 지우고 싶은 일 그리도 많던지
잦은 술자리 핑계 뒤끝에 보니 이 해도 달랑 이틀이 남았습니다.

우연히 건네 받은,
2005 을유년
"시는 만고 역적이다"-시와 시학 오십호 앞에-고은(詩人)
하늘엔 별, 땅에는 꽃, 사람에겐 詩
'시와 시학사,에서 펴낸 달력의 시를 읽다가

문득 가슴 저며오는 그리움 앞에 잠시 숙연해 졌습니다.
당신 가신지 20년
두 번이나 강산이 바뀌고
아버지라는 키 큰 나무
그 아래 당신 품에 안겨 잠들던 그 때가 문득 그립습니다.

영락없이 나도 아버지가 되어가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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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이란?

동판 표면을 잘 다듬고 문질러 얼굴을 비춰보던 옛 청동거울을 말합니다.

동경의 문양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을 엿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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