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병]-이성복


아직도 나는 지나가는 해군 찝차를 보면 경례! 붙이고 싶어진다

그런 날에는 페루를 향해 죽으러 가는 새들의 날개의 아픔을

나는 느낀다 그렇다, 무덤 위에 할미꽃이 피듯이 내 기억 속에

송이버섯 돋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내 아는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 오기도 한다 순지가 죽었대, 순지가!

그러면 나도 나직히 중얼거린다. 순, 지, 는, 죽, 었, 다

.......................................................................................................
*그해 겨울 제대하고 하릴없이 무우구덩이나 파다가 방구들 등짐 지고 소설책이나 읽던 시간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온 것인가.
이젠 아무 곳에서도 예비군 훈련에 오라거나 하다 뫃해 민방위 훈련을 받던 시절이 있었던가도 기억나지 않는다.
내 공병 일등병 시절, 억압과 굴종과 자유를 향한 안간힘의 순간들 희미한 낮달처럼 감감하다.
왜 새들은 굳이 페루에 가서 죽는가.
요즘은 동기들의 부고가 느닷없이 휴대폰 문자로 뜨기도 한다.
000동기 사망
발인 모월 모일 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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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귀가 섹스쪽으로 타락하고 있다]-함민복



잘 벗겨지지 않아요.
--제비표(?) 페인트

알아서 빨아줘요
--대우 봉(?) 세탁기

구석구석 빨아줘요.
--삼성(?)세탁기

빨아주고 비벼주고 말려주고
--금성(?) 세탁기

우리는 그이가 다 빨아줘요
잘 빨아주니 새댁은 좋겠네
--럭키 슈퍼타이

무엇이, 무엇을 의도적으로 빼는 이 광고에
우리는 무엇을 꼭 집어넣으라고 욕해야 할지

......................................................................................................
* 잠시 허허..
야릇한 연상? 을 읽다 보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늘어지게 한 숨 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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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최영미

달리는 열차에 앉아 창 밖을 더듬노라면
가까운 나무들은 휙휙 형체도 없이 도망가고
먼 산만 오롯이 풍경으로 잡힌다

해바른 창가에 기대앉으면
겨울을 물리친 강둑에 아물아물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시간은 레일 위에 미끄러져
한 쌍의 팽팽한 선일 뿐인데

인생길도 그런 것인가
더듬으면 달음치고
돌아서면 잡히는
흔들리는 유리창에 머리 묻고 생각해본다

바퀴소리 덜컹덜컹
총알처럼 가슴에 박히는데
그 속에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아직도 못다 한 우리의 시름이 있는
가까웠다 멀어지는 바깥세상은
졸리운 눈 속으로 얼키설키 감겨오는데
전선 위에 무심히 내려앉은
저걸
하늘이라고 그러던가

.........................................................................................
*그저께는 동기가 죽어 포항 성모병원에 갔었다.
이 놈의 새끼, 술이나 한 잔 사고 죽을꺼 아이가. 운영하던 섬유회사 부도나고 하는 일 없이 빌빌거리는 옛 친구의 푸념이 늘어졌다. 사는게 정말 사는게 아니네. 새벽 세 시에 들어와 아이들 자는거 다 돌아 보고 쇼파에서 잠들었다는데 아침에 보니 입술이 파랗다고 하데. 그나저나 이 친구 지가 내년 동기회 체육대회때 돈 좀 낼라켔는데..그라고 사람도 좀 모을라카고..먹고 살만하이 인자 가뿌고..어허 참.

모처럼 포항 동기들 오랫만에 그리운 얼굴들 만나도 건강을 챙기느라 몇 잔 술이 남아 돌고 열 두시 넘어 내일 일이 걱정되어 바쁘게 돌아오는 길 . U는 서른 다섯에 현금 6억원 벌고 잘나가다 현재는 거지된 이야기를 하고, J는 과대 광고로 고발당해 벌금낼 궁리에 잔뜩 골머리를 앓고, L은 떨어지는 매출 때문에 매장을 정리하냐 마냐 잔뜩 숨죽이고, K는 돌아올 어음날짜에 신경이 쓰이고....

어제는 모처럼 두 달만에 능산회 선,후배 모임 자리 마치고 동기들 몇이서 만났다. 건축 감리회사 사장은 대학에 입학한 딸 걱정이 늘어졌고 건축과 교수는 설계공모전 출품을 위해 시간이 없다며 손사래를 치고 법원 직원은 내일의 재판을 걱정하며 2차 가는데 난색을 표하고 부도난 통신회사 사장은 관급 공사 얘기에 열을 올리고 민물장어집 주인은 가게처분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두 달만에 만나 우리는 맥주 열 댓병 마시고 1시 넘어 집에 갔다.
사년 정도 터울이 지는 후배들이 1.5KM 정도 접어주고 등반시합을 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여 말어....그래도 우리가 선밴데 술사고 밥사야지..하긴 시합인데 일단 이기고 봐야지..자존심들은 살아서..어쩌구저쩌구... 다음 기약도 없이 모두 열심히 살기 위해 서둘러 술자리를 털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래 이런 풍경 그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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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6-18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가분아저씨, 오랜만이에요. 우리집 아빠도 새벽 한두 시에 들어와 딸들 자는 얼굴 한번 둘러보고 소파에서 텔레비전 켜놓고 쭈그러져 자기 일쑨데... 문득 겁이 나네요. 요즘 부쩍 피곤하다고 하던데... 사는 게 다 그리 변변치 못하네요.
 

[마음의 집 한 채]-이 태 수

집 한 채를 짓는다. 한밤내
밀려오는 잠을 천장으로 떠밀며
마음의 야트막한 언덕, 고즈넉한 숲속에
나지막한 토담집 하나 빚어 앉힌다.

이따금 무거운 마음 풀어 내리던
청솔 푸른 그늘.
언제나 그늘 드리워 주던 그 나무들로
기둥도 서까래도 만들어 둥근 지붕의
집을 세운다. 달빛과 별빛,
서늘한 바람 몇 가닥 엮어
새소리 풀벌레 소리도 섞어
벽과 천장, 방바닥을 만든다.

마음의 야트막한 언덕, 고즈넉한 숲속에
나지막이 앉아 있는 토담집 하나,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깨어 있을
마음의 집 한 채 가만가만 끌어안는다.

.............................................................................................
*경산시 대동 142번지
영남대학교 앞 옛 압독국의 하늘 밑 임당가는 길 초입에는 오래된 기와집 한 채 있었다. 줄레줄레 뒷 집 경계 따라 늘어선 키 큰 플라타나스가 보기 좋았다.
ㄷ자형 아랫채는 블럭으로 쌓고 스레트형 지붕을 이어 학생들에게 방을 놓고, 젊은 어머니는 하숙을 치시고, 한 귀퉁이 폭삭 무너진 토담벽 헛간은 그대로 꽃밭이 되어 꽃잔디 접시꽃 상사화 라이락꽃 매화나무 박태기나무 아무렇게나 심는데로 어울려 철따라 피고지곤 아름다웠다.

벌써 20년도 훨씬 그 전에 마당가 우물물은 달고도 깊어 온 마을사람 저녁도 새벽도 없이 수시로 드나들던, 영남대학교 앞 내 살던 옛 집 아래 텃밭에는 포도가 무시로 익어가고 뒷마당에는 어린 애호박이 조랑조랑 안간힘으로 매달려 커가고 허구한 날 통물을 퍼날라 과일보다는 가지만 웃자란 살구나무도 있었다.

내 마음의 집 한 채,
이제는 3층 상가건물로 변해 학생들 술집으로 변한 그 터에는 아직도
새벽마다 꿩, 꿩 꿩울음 소리 튀어오르고 라일락꽃 향기 그윽한 5월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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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의 꿈

무엇인가 되고 싶은 꿈을 가진 돌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무렇게나 놓인 자리 그대로 깊은 산 속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신세지만 언젠가는 꼭 무엇이 되리라 야무진 꿈을 키워가는 덩치만 커다란 돌이 있었습니다.
때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우쭐우쭐 키 큰 소나무는 아름드리 거목이 되어 궁궐나무로 뽑혀 가 대들보가 되거나 서까래라도 되어야겠다는 야무진 생각을 하느라 점차 나이테를 더해 갔습니다. 분말이 곱고 찰기있는 황토 흙은 이 나라 으뜸가는 도자기가 되어야겠다며 온갖 눈, 비 맞으며 묵묵히 자신을 다스려 나갔습니다.
해 뜨고 지고 달 뜨고 지는 참 많은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천둥 치고 벼락도 때리는 그런 한 시절이 가고 결국 올곧게 잘 자란 소나무는 궁궐은 아니지만 큰 사찰의 배흘림 기둥이 되거나 목어가 되거나 부처님을 모시는 불단이 되어 한 몫을 단단히 하곤 했습니다. 도자기를 꿈꾸던 황토 흙도 하다 못해 둥근 물항아리가 되거나 간장독이 되어 그토록 바라고 소원하던 소망을 어느 만큼은 이룬 것 같아 스스로 흡족한 나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천덕꾸러기가 되어 찾는 이 없는 울퉁불퉁 못생긴 돌은 마냥 선하품이나 해대며 점차 스스로의 존재 가치에 대해 의심을 품으며 주눅이 들곤 하였습니다.
"아니야 분명 어딘가엔 쓰일거야. 아무렴 이 세상에 쓸모없이 생겨난 것이 어딨겠어. 언젠가 쓰일 그날을 위해 내 꿈을 어떤 식으로든지 키워 갈테야..."
날이면 날마다 하릴없이 무언가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도 힘겨운 돌은 이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동네 어귀에 퉁방울 눈 부릅뜬 돌장승이 되면 너무 좋겠어. 나쁜 잡 귀신이 들어오는 것도 막아 주고 먼 길 가는 나그네한테는 이정표 구실도 하면 좋을거야. 아니 아니 성황당 돌무더기라도 되어 나처럼 무언가 간절히 바라며 기도하는 사람들의 이웃이라도 될 수 있으면 참 기쁠거야...."
누구는 쓰잘데 없는 소망이라 하건 말건 묵묵히 스스로의 좋은 쓰임을 기도한 덕인지, 어느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왁자지껄한 목소리로 온 산을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못생기고 덩치만 커다란 돌도 여엉차 끼엉차 여러사람이 목도를 하여 어께에 지고 산 아래로 옮겨갔습니다.
옛날부터 있던 자리를 벗어난 돌은 주변의 다른 돌들과 함께 이제 커다란 용광로에 들어가 뜨거운 불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아, 온 몸이 깨어질 듯 아파. 지끈거리는 두통과 노곤한 통증과 패대기치듯 흔들어대는 울렁임을 견딜 수 없어. 가슴이 뻐개지듯 아파."
몇 번인가 까무룩 잠이 들듯 이승과 천당 사이를 오고간 돌은 어느 순간 자신의 몸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상한 쇳물 형태로 변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허, 이번엔 쇠질이 좋구먼. 구리가 좋아 정말 좋은 놈을 만들 수 있겠어."
구레나루가 성성한 노인의 근육질 몸매와 만족한 듯한 걸걸한 목소리가 나이답잖게 무척 건강해 보였습니다.
노인은 잠시 주위를 휘둘러 보더니 진작에 만들어 놓은 듯 곱돌로 된 거푸집을 가져 왔습니다. 그 거푸집은 일정한 형태의 기물을 만들기 위해 이용하는 것으로, 다루기 쉽고 표면을 곱게 처리할 수 있고 열에 강하여 좀처럼 터지지 않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따라 그 곱돌 거푸집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입니다.
잠시 골똘한 표정이던 노인은 주물을 부어낼 다른 틀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무슨 생각인지 벌집을 뜨거운 물에 녹여 굳힌 밀랍으로 거푸집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정성을 들여 오랜 시간 밀랍으로 주조할 암,수 기물의 형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암,수 두 개의 판을 입구의 구멍만 남기고 고운 진흙으로 완전히 씌워 잘 말렸습니다. 진흙이 마르고 난 뒤에는 그 틀을 불에 구워 속의 밀랍은 녹아 빠져 나오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밀랍이 다 빠져 나온 빈 거푸집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 밀랍으로 하길 잘했어. 섬세하고 복잡한 무늬를 나타내기엔 이게 제격이지. 곡선형으로 만들땐 이게 좋아...."
오랜 세월 무엇이곤 기필코 되리라, 야무진 꿈만 키우던 얼마전 까지의 돌은 아직까지 무엇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자신과 함께 산에서 이 곳까지 실려왔던 많은 돌들이 이제는 예전의 형체를 완전히 벗어 던지고 다른 그 무엇으로 변해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변해야 될 것이 참 많은 모양이었습니다.
"이 주석과 아연도 맘에 드는군. 이번엔 보나마나 꽤 괜찮은 놈으로 될 것 같군."
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밑 형형한 노인의 눈빛이 예사로이 보이지 않습니다. 척 보기만 해도 오랜 이력과 연륜의 때가 켜켜이 쌓여있는 모습입니다.
이제 노인은 천덕꾸러기 울퉁불퉁 못생겨 선하품이나 하던 돌에서 뽑아낸 구리에다 주석을 섞어 무엇인가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어디서 잠시 폭풍이 불어오는 듯 하고 천둥 번개도 내리 칩니다. 잠시 세상이 캄캄하다가 우지끈 신열처럼 뜨거운 불기운을 이기지 못해 살려 주세요, 무조건 잘못 했어요, 다시는 안 그러겠어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누구에겐지 마냥 기도하며 빌고만 싶은 시간이 빨간 혀를 날름거리며 흘러갔습니다.
무거운 정적의 시간이 흐르고 잠시 가쁜 호흡을 고르던 순간도 사라지고 이제 꼬끼오! 세상의 새벽이 열리는 듯한 조심스런 손놀림으로 거푸집을 벗겨 냈습니다.
세상에나, 어쩜 지금껏 그리도 아름다운 모습이 어디에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겨져 있었던지요.
휘늘어진 계수나무 줄기 한가운데 둔 꼭지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전설처럼 하늘나라 선녀의 옷을 펄럭이며 춤추듯 달로 올라가는 항아 아씨가 있습니다. 오른쪽 위편에는 먹으면 죽지 않는 약을 방아에 찧고 있는 토끼가 있고 토끼를 쳐다보는, 달의 정령이 되었다는 전설의 두꺼비도 있습니다. 꼭지를 중심으로 안쪽과 바깥쪽을 가르는 바깥 원 둘레에는 온갖 덩쿨풀을 일컫는 당초문양이 빼곡 들어 찼습니다.
노인은 몇 날 며칠 거푸집에서 주조되어 나온 동판을 다듬었습니다. 그리고는 정성어린 손질 과정을 거쳐 가며 무늬 동판의 뒷면에 빛을 반사하는 재료를 사용하여 연마해 나갔습니다.
이제는 노인의 얼굴이 달 떠오르듯 뚜렸이 동판면에 잘 보이게 되었습니다.
먼 훗날 사람들은 바깥면에 각종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진 이 동판을 고려시대에 만든 청동거울이라 하여 고려동경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날마다 무엇이 되고 싶었던 돌은 드디어 뿌듯한 만족감으로 어쩔줄 몰라 했습니다. 결국 기다리며 스스로의 꿈을 키우는 사이에 자신으로서는 상상하지도 못한 참으로 귀한 그 무엇이 되어, 세상에 쓸모없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몸으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쓸모없어 보이고 아무짝에도 소용없어 보이던 돌의 꿈은 결국 저 아득한 팔백년 전 고려시대에 빛처럼 훤히 피어났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에는 왜 이렇게 방해되는 일이 많은가 모르겠습니다.
이름없는 돌의 꿈과 한 노인의 정성과 혼이 배인 '항아와 토끼가 있는 달나라 궁전무늬 고려동경'은 정작 그 거울의 주인을 만나기도 전에 거울을 주문한 아가씨의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모양입니다.
지체 높은 가문의 그 아가씨는 시난고난 오랜 병 끝에 세상을 떠나면서도 그 구리 거울을 끝내 무덤에 껴묻이로 함께 갖고 가 내세에서라도 마음의 위로를 삼고자 했습니다.
그로부터 사람들에게 까무룩 잊혀진 세월이 흘러 갔습니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땅 어느 농부 하나가 반나마 무너져 형체도 없어진 옛 무덤을 밭으로 만들다가 조그맣고 동그란 구리 거울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구리 거울의 표면에는 옻칠한 것 같이 검고 빛나면서도 비밀스런 사연을 간직한 듯 녹이 시퍼렇게 슨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이 '항아와 토끼가 있는 달나라 궁전무늬 고려동경'은 어떤 연유에서인지 보따리 장사의 손을 거쳐 조마조마 압록강을 무사히 건너고 압록강을 마주한 중국 단동의 한 골동품 가게에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모든 물건에는 각기 그 주인이 있다는 옛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닌 모양입니다. 다시 대구에서 중국 땅 단동을 오가며 장사를 하는 골동품 취급 상인을 거쳐, 마침내 일없이 쓸쓸하여 세상 사는 재미가 별로 없어 하던 한 아저씨 손에 까지 이 구리거울이 들어 오게 되었습니다.
나름대로는 아들, 딸 낳고 키우며 곁을 돌아볼 겨를없이 열심히 살아온 아저씨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문득 자라지 않을 것만 같던 나이를 잔뜩 먹은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해놓은 것도 없이 요즘 들어 사는게 팍팍하고 무료하게만 느껴지던 아저씨였습니다. 새삼스레 유년시절의 기억이 문득문득 그리운 아저씨의 눈에는 결코 쉬 지나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어 그리도 그 동경에 홀딱 마음을 빼앗겼는지요.
혹시 모르지요.
그 사연 깊은 구리 거울을 보고 있노라면 아저씨는 어디서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바람소리 따라 희미한 눈물자국 같은, 안타깝고 따뜻했던 날의 그리운 사람의 목소리를 다시금 불러보고 싶은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청태빛 녹이 슨 구리 거울 문양을 물끄러미 보고 있노라면 돌의 꿈 같은, 무엇인가 기필코 되고 싶었던 날의 맥박이 뛸지도 모르겠고 이름없이 스러져 간 장인의 땀냄새거나 젊은 나이에 죽은 한 처녀의 못다 핀 간절한 소망이 혹시 엿보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그런 것들은 너무 오래된 이야기이고 어른답지 뫃한 생각이라는 마음에 지지 눌러 못내 접어 두고만 싶었습니다. 그럴 수록 가족 다 잠든 잠 안오는 밤 자신도 몰래 구리 거울을 만지작 거리노라면 온가슴 가려두르며 아슴아슴 떠오르는 추억들이 아저씨를 마구 설레게 하곤 하였습니다.
깊은 밤.
아저씨는 그동안 먹고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참으로 오랫만에 책상앞에 앉았습니다.
타다닥 툭 투다다닥....
군대시절 배운 어설픈 닭발타자 솜씨로 모처럼의 상상력에 힘입어 옛 구리 거울이야기를 적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아저씨는 이루지 못해 쓸쓸한 젊은날의 꿈처럼 아득한 기대 같은 것을 다시 생각하고 있을까요. 아니 문득 높으게 일어서서 놓쳐버린 풍선처럼 아슴푸레 옛 사랑의 추억 같은 것을 떠올린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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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심이 2004-06-08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뜻한 동화네요.. 처음에 돌의 이야기보다 아저씨손에 들어온 거울 얘기가 더 재밌게 느껴지네요..잘읽었습니다. 오늘은 이것 하나만 읽고 갑니다. 아껴아껴 읽을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