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화청령문방형경 외




초화청령문방형경(草花??文方形鏡)고려시대 10.3*10.3cm '박가분자료관'소장


-잠자리가 있는 동경-
다양한 형태나 문양의 동경을 접하면서 지금까지 학계에 알려진 바가 없는 새로운 도안을 만났을 때의 설레임과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미술사에 대한 정리와 체계화는 어느 정도 시도되고 이루어졌으나, 동경 문양에 대한 전체적인 조사와 내용 파악은 아직도 미진한 부분이 많아 보이는 가운데 모르던 자료 하나를 보탤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상의 동경에는 특이하게 잠자리 문양이 시문되어 있다. 꼭지를 중심으로 네 마리의 잠자리와 야생의 작고 소박한 풀꽃을 배치하고 있는데 굵은 테를 두른 네 구석 안쪽에도 이름모를 초화문이 보인다.





호접동자청령문방형경(胡蝶童子??文方形鏡)고려시대 10.4*10.4cm '박가분자료관'소장


또 하나의 동경은 지금껏 그 유사한 것 조차도 발견된 적이 없는 완전 새로운 것으로, 고려장인의 독창적인 도안으로 보인다.
꼭지를 중심으로 내구를 세 줄로 두른 안쪽에는 더듬이를 앞세운 네 마리의 나비와 두 마리의 잠자리와 동경 문양에는 처음 보이는 벌 두 마리가 아래, 위로 배치되어 있다.
외구쪽을 보면 두 마리씩의 나비가 동 서 남 북에 있고 네 구석에는 잠자리가 있는데 포도와 옥수수로도 보이는 과일과 새 모양의 문양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동자 네 명이 팔을 아래, 위로 흔들며 다리가 엇갈린 형태로 뛰는 모양이 눈길을 끈다. 나비무늬(胡蝶文)와 잠자리무늬(??文)와 동자문(童子文)은 드물게 고려청자에 시문된 경우가 있으나, 조선시대에 와서야 폭넓게 각종 기물에 응용되는데 이렇게 여러 단위 문양이 하나의 동경에 다 모아서 표현된 경우는 이것이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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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떠나려거든 눈썹도 빼놓고 가라 했거늘 마음이 마냥 설레고 두근거린 것만은 아니었다. 일찌기 한 소년이 소 한 마리 값 훔쳐 집을 나선 이래 속절없이 어언 반세기가 흘렀다. 마침내 일천 마리 소 트럭에 나누어 싣고 고향 집 금강산 통천으로 찾아가던 잔뜩 나이든 사내의 감동적인 모습을 진작 TV에서 엿보았거니, 칠천 만 겨레의 염원도 눈물과 감동 더불어 분단의 벽을 넘었다.
 소떼 방문 후 고성항에서 금강산 가는 바다길이 열린 이래 방문객이 천만을 넘었다고 한다. 반세기 허리 잘린 아픈 세월을 보상이라도 받듯 너도 나도 금강산, 금강산으로 몰려갈 때도 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료다 식량이다 대북지원 사업이다 마냥 퍼주며 끌려가기만 하는 것으로 비치는 일련의 모습들이 왠지 못마땅한 탓이었다. 적어도 남북 적십자회담이나 서해교전이나 핵시설물 처리문제 등에서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저간의 사정이 금강산관광 조차도 허울 좋은 호사와 사치로 밖에는 여겨지지 않은 탓이기도 했다. 북의 태도가 그러할진데 1998년 11월 금강산 방문길이 트인 이래 아무리 아래 윗 집 온 동네 사람들 너나들이로 다 금강산에 간다손 그런 식으로는 가지 않겠다는 얄팍한 자만심 같은 것이었는지도 딴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 시인 있어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고 했던가.
초등학교 시절 익힌 금강산 찾아 가자 일만 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라는 동요거나 누구의 주제런가 맑고 고운 산 그리운 만 이천봉 말은 없어도.... 라는 가곡은 진작 내 가슴 저 깊은 곳에 몰래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만난 정비석의 '산정무한'이나 최남선의 '금강예찬'도 그 시절 그 얼마나 벅찬 감동 지지 누르며 숨가쁘게 징징 달아 오르도록 했던 문장들인가.

 내 어쩌다 좋은 글벗들과 시절의 인연 좇아 대구문인협회 문학 기행 세미나(7.15~7.17)에 참석했거니 바닷길에 이어 육로로 열린 길 위에서 나는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나 쉬 이룰 수 없는 기약처럼 그리운 금강산으로 향했던 것이다.
 시민회관 앞에서 7시에 세 대 버스에 탑승한 130여명은 추풍령 휴게소 지나 만해마을 옆구리에 끼고 화진포 넘어 오후 1시가 되어 고성 아산휴게소에 도착했다. 간단한 식사 후 헌병과 철책이 있는 바깥 풍경에 눈주다가 남측 출입국사무소에서 금강산 가는 수속을 밟고 있자니 조금씩 긴장되고 온 몸 가려두르는 막연한 기대와 미지의 호기심 같은 것이 스멀거리기 시작했다.
 금강통문을 지났다. 금강통문이라는 것은 비무장지대(DMZ) 에서 수색이나 매복을 위해 들어가는 문이라고 한다. 어느새 군사분계선(MDL)이란다. 아아 그 군사분계선이라는 것이 동서로 248km, 200m 구간마다 나지막하게 박아놓은 1292개의 콘크리트 말뚝이라니. 가까이는 700m 길게는 4km 비무장지대를 두고 남과 북이 반세기 동안 총부리를 겨눈 경계가 한갖 높이 1m도 안되 보이던 콘크리트 말뚝이 전부였다니.
 1290번 째 말뚝을 차창밖으로 스치듯 보고 나자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온갖 상념으로 삽삽하다.
 북측 출입국사무소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북한 노래 탓이었는데 가성 섞인 창법이랄까 그네들 특유의 톤이 전하는 아련함과 애수어린 호소력 같은 것이 가슴에
척척 와 감겼다. 어떻게 보면 낯설고 처연하여 알싸한 슬픔 같은 것이 묻어나는 듯도 했다. 그런 생각도 잠시 뿐 군데 군데 서있는, 대체로 시커먼 얼굴에 유독 커보이는 모자를 쓴 북한군의 모습을 곁눈질하며 갖고 간 짐가방을 검색대 앞에 내려 놓았다.
 일행 중 두 사람의 카메라가 문제였다. 금강산 관광시 규정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카메라 렌즈나 본체에 적힌 배율이 160mm 이상은 반입 허용이 안되고 휴대폰이나 심지어 밧데리 조차 소지했을 경우 벌금 10달러란다.
 우리측 안내원인 조장의 설명에 의하면 지켜야할 규칙이 많았다.
 버스 이동중에는 사진 촬영을 해서 안되며....북한군이나 주체사상 찬양의 글에 손가락질 해서도 안되며.....관광증을 접거나 낙서하거나 훼손해서도 안되며.....연두색 펜스를 벗어나서도 안되며.....방뇨를 하거나 휴지나 담배꽁초를 버려서도 안되며....허락된 곳 이외의 사진 촬영을 해서는 더 더욱 안되며......

 버스는 어느듯 숙소로 향했는데 원수처럼 총부리를 겨누었던 지난 세월도 부질없어서 같은 하늘과 땅 우리네 여느 시골과 다름없는 풍경들이었다. 잘 닦인 도로 옆으로 뻗은 철길은 두 달전 경의선과 동해선이 분단 57년 만에 시험운행을 하며 내달린 철길이었다.
 납작납작하고 꽝꽝 눌러놓은 듯 비슷한 모습의 단층 집들은 온통 회색빛이었고, 버스가 달리는 연도를 차단한 연두색 펜스 저 너머 간간 경계 근무를 서는 병사들은 꼿꼿하게 긴장된 모습이었다. 눈주어 자세히 보면 들녘에서 집단으로 농사일을 하고 있는 주민들의 모습은 60년대 우리 아주머니나 아저씨와 할머니들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숙소인 온정리는 사방 바위산으로 둘러 쌓였는데 바특이 바라다 뵈는 가깝고 먼 데 산들의 웅자가 예사로이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가는 날은 날씨가 잔뜩 흐려 수시로 빗방울을 뿌리다가 잠시 개다가 했는데 물안개 끼어 시정거리가 매우 짧은데도 바위산들이 주는 느낌은 이곳이 금강산 초입이라는 사실을 불러 일으키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온정리 구룡마을에서 너 댓명씩 한 방에 묵게 되었는데 숙소로 꾸민 컨테이너는 다소 아쉬운 구석은 있었지만 아무렴 이박 삼일의 일정인데 싶었다. 화장실과 공동 세면장은 따로 떨어져 있었는데 집 나서면 고생이라는데 그 정도면 좋고 자시고 따질 계제가 전혀 못되었다. 각자의 방에 짐을 두고 숨돌릴 겨를도 없이 평양 모란봉교예단 공연장으로 가야했기 때문이다.

 돔식 천장을 가진 건물 앞 바위돌에 깊이 새긴 '금강산 문회회관' 붉은 글씨가 낯설었다. 실내 공연장에 들어서자 예의 그 가성 섞인 쇳소리로 동포 여러분 반갑습니다, 라는 환영의 인사가 있고 교예단의 서커스가 시작되었다.
 사회자는 모나꼬축전에서 최고상인 금상을 받았다거나 국제교예축전에서 금학상, 금사자상을 받았다며 그 때 그 때 연기자들이 펼치게 될 교예의 종류를 설명하곤 했는데 눈 따로 귀 따로 노는 형편이었다. 공훈배우거나 인민배우로 호칭되던 연기자들의 기교가 너무 아찔하여 때로 눈을 순간적으로 감게 하고 나도 모르게 두 손에 힘주고 부르르 떨게 하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거리면서 탄성처럼 낮은 한숨을 내쉬기도 했는데 어깨에 장대걸고 발돋움해서 뛰기나 뒤로 돌며 옆으로 세바퀴 돌아잡기를 할 때는 아닌 말로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교예에 넋놓고 있다가 나는 어느 순간 40년도 전에 아버지 따라 몇 차례 구경한 서커스를 기억해 내기도 했다. 그 시절 때로 덕지덕지 기운 천막 천장 사이로 별이 보이거나 비라도 내리는 날은 가설무대위는 온통 빗물로 어룽지곤 했다. 그래..... 뚱뚱한 아줌마는 누워서 연신 항아리나 나무통을 돌리고, 사방 불길에 휩싸인 쇠봉이 돌아가고, 내 또래밖에 안되는 소녀는 허리가 반이나 꺽여 빛 바랜 추억처럼 덤블링을 넘거나 공중그네를 타고는 했었다.
 그리고 보니 내 대학교 1학년 시절 삐걱이는 목조 계단위 2층 도서관에서 한수산의 '부초'를 읽던 시간도 삼십년 저쪽의 일이 되고 말았다. 그 당시 일월 곡예단떠돌이 서커스 단원들의 뿌리 뽑힌 삶의 세계를 엿보고 느낀 감동은 말로 다 이를 수 없는 것이었다. 기억컨데 주인공 하명의 마지막 대사는 살아가는 순간 순간 늘 우리네 삶을 한번 쯤 되볼아 보게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어딜 가든지 내가 딛고 선 땅이 무대가 아닐까. 하늘이 천막인 게지. 시퍼렇게 살아있는 목숨 어딜 가서든 발붙여 볼테다. 어느 동네든 떨어지면 죽고 다치는 것은 정한 이치일 테니까 말야...."
 기억에 의존한 터라 소설속 문장과는 다를 터이지만 대략 뜻은 그런 정도일 것이다. 온정리에서 만난 교예단의 연기도 그러했다. 어차피 실수하면 다치거나 죽거나 팀에서 밀려날테니 아슬아슬하고 안타까워도 그네들은 또 그네들 나름대로 살아 남고자 하는 안간힘 같은 것으로 하루 하루 주어진 공연을 치루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교예단 공연후 저녁을 먹고 나자 온정리의 밤은 서서히 저물어 갔다. 그날 밤 모처럼 일상에서 놓여난 해방감과 금단의 땅에 왔다는 설레임이 빚어낸 감정의 발산에 대해선 긴 이야기가 필요 없겠다.
 누구는 억병으로 취해 이부자리에 오바이트를 했고 또 누구는 밤새 주사가 넘쳤다거나 가수면 상태에서 자다 깨다가 생시처럼 혹은 오래된 꿈처럼 밤이 깊어가고 어김없이 새벽이 오고 이튿날은 구죽죽이 비가 내렸다.


 더운 우물이라는 뜻의 온정리는 일제시대부터 금강산 탐방의 전초 기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었다. 애써 찾아보면 각종 금강산 탐승 안내 책자와 사진첩이나 엽서를 통해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오죽 했으면 송나라 어느 시인은 '고려국에 태어나 금강산이나 실컷 구경할 수 있었으면!(願生高麗國親見金綱山)하고 글을 남겼을까. 하지만 금강산의 여름은 결코 쉬 넘볼 수 있는 산은 아니었다. 오죽 했으면 한 달 가운데 사십일이 비온다 하고 마누라 팔아 장화 사라는 말이 있을까. 그 말이 하나도 부자연스럽지 않은 것이 새벽부터 내리던 비는 질금거리다가 아침을 먹고 구룡연에 오르기 위해 버스를 타자 사선으로 줄창 빗금을 그으며 간헐적으로 뿌려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익히 아는 얘기지만 봄에는 다이아몬드처럼 빛난다 하여 금강산(金剛山), 여름에는 무성한 녹음이 있다 하여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온 산 단풍이 아름다워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눈 덮인 바위들만 우뚝 뼈같이 솟았다 하여 개골산(皆骨山), 신선이 산다고 하여 선산(仙山). 멧부리 서릿발 같다고 하여 상악산(霜嶽山)....그 이름도 많았다.
 또 금강산의 소나무는 여느 우리나라 산의 소나무와 많이 달랐다. 겨울이면 설해목 현상이라 하여 눈쌓인 가지들이 눈 무게로 인혀 척척 부러지다 보니 위로만 죽죽 뻗게 되는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미인송' '금강송' '황장목' '적송' '홍송' '춘양목'.....등등 부르는 이름도 많았다.
 예전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는데 이번에 우연히 만난 손수용 화백님이 그랬다.
"온정리엔 엿장사가 많나? 왜 신발은 갖고 가서 남 산에도 못가게 하노?"
"신문에 기사 낼 사람이 신문에 나오겠다!"
 어느 수필가 한 분이 그 말을 받았는데 어제 술이 과하여 속앓이 탓으로 산행에 함께하지 못하는 모 기자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대번에 신발을 못찾았다는 말은 핑계로 알아 들었는데 어제밤 그 기자의 낭만적이고 무모하고 길게도 이어지던 술기운에 부대끼며 진저리를 치며 밤을 지샌 때문이었다.


 물 따라 계곡 따라 외금강 구룡폭포 가는 길은 구불텅 구불텅 산자락 에돌아 앞으로 나아갈 수록 점점 더 녹음이 짙어졌다.
목란다리 앙지다리 금수다리 만경다리 거쳐 금강문 앞에서 잠시 호흡을 골랐다. 일찌기 최남선 같은 이도 금강문을 지나며 '에쿠'하는 감탄사를 터트리며 눈앞에 전개되는 광경에 놀라움을 표시하지 않았던가.



 금강문 지나 만나는 옥류동 골짜기는 너무 아름다워 시인은 붓 들어 말 고르고 운율 잡기가 힘들고 화가는 일러 구도를 잡거나 필법을 택하기 힘들었다는 말이 정녕 허투로 지어낸 말은 아닌 듯 했다. 옥류동에서 소정 변관식의 '외금강 옥류동'그림의 현장을 만났는데 먹을 덧칠하고 바위에 주름을 표현했다는 적묵법(積墨法)이나 다양성을 더해준 태점법(苔点法)이라거나 할아버지 모습을 점경인물(点景人物)로 그림에 넣어 현장감을 살린 상황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우의를 입었어도 옷은 척척 몸에 감겨 들었지만 발걸음은 마냥 가볍고 신바람 들린듯 했다. 어느 곳 하나 비 그을 곳 없이 줄레줄레 꼬리에 사람을 달고 등 떠밀리듯 앞으로 나아가며 생각했다.

 서부진 화부득(書不盡 畵不得)이라고 '글로서 다할 수 없고 그림으로서 다 얻을 수 없다'고 옛 사람이 금강산을 두고 이른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라도 느껴 실감으로 맛보고 싶었다.
 그런 생각은 옥류담이나 무봉폭포에서 맛본 감동의 뒤끝에 구룡폭포 앞에 서자 보다 확실해 졌다. 비로소 내가 대구에서 이토록 멀리 금강산 길 뚫린지 석 삼년만에 이제야 달려온 이유가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나는 물소리 퀄퀄퀄 우르릉 쾅쾅쾅 쩡쩡 온 산천 울리던 그 소리의 경계 안에 있었던가 밖에 머물렀던가. 아홉마리 용이 승천한듯 웅장하고 기세찬 구룡폭포 앞에서 내 무슨 말 일러 새삼 그 가슴 벅찬 흥분을 노래하랴. 일찌기 최치원은 구룡폭포를 일러 '만 섬 진주알'이라고 했고 숱한 시인과 화가들이 이 절경을 노래와 그림으로 표현하지 않았던가.
 구 한말의 서예가 해강 김규진이 쓴 미륵불 글씨가 내려다 보이는 관폭정에서 엿본 수필가 이동민선생님의 표정이 그렇게 환하고 밝아보일 수가 없다. 이 분도 모르긴 해도 스스로 만족감에 취해 비룡폭포와 마주한 설레임을 짐짓 숨긴 채 느긋하게 가슴 벅찬 희열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일찌기 전라도 영광 출신의 문인 조운은 구룡폭포를 두고 멋진 사설시조를 발표했는데 나는 애써 그 전문을 되새겨 보았다.
 '사람이 몇 생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 겁이나 전화해야 금강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샘도 강도 바다도 말고 옥류 수렴 진주담과 만폭동 다 고만 두고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안개 풀 끝에 이슬 되어 구슬 구슬 맺혔다가 연주팔담 함께 흘러//구룡연 천 척 절애에 한 번 굴러 보느냐


 구룡폭포를 보고 상팔담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연신 휘몰아치는 빗줄기에 이리 비척 저리 비척 휘둘리면서도 예서 포기하고 말 수는 없었다. 빗속을 뚫고 앞 사람의 등을 떠밀고 뒷사람의 발길에 쫓겨 내닫으며 하다 못해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지닌 분위기에라도 잠시 젖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몇백 개의 철계단을 오르고 몇백 번의 밭은 숨을 내뿜었는지도 모를 즈음 상팔담에 도착했다.
 앞을 가리는 빗줄기와 비안개로 인해 상팔담에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다만 명승지종합개발 지도국 소속의 김원철 부팀장을 만나 인간적인 연민과 갈증을 푸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곧 통일이 되어야 되겠지요?"
 "이렇게 서로 오갈 수 있는 것이 바로 통일이 아니겠습네까."
 "남한 사람들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있나요?"
 "아, 네 송혜교 하고.... 이요원이는 시집가서 인기가 떨어지지 않았겠습네까. 그렇지요. 조용필선생도 내가 잘 압네다."
 서른이 채 안되었을 김원철씨와의 만남은 즐겁고 신기하기만 했다. 우리 일행의 카메라를 능수능란하게 조작하며 구도를 잡아주기도 하고 문인협회에서 왔다고 하자 "능력이 탁월하십네다."며 다음에 오면 지은 시를 보여 달라고 했다. 그는 "선생님 계신 대구에도 한 번 가보고 싶습네다."라고 하며 "통일되면 내 고향 대동강에 모셔서 대동강 소주와 숭어술국을 대접하고 싶습네다."라고 했다.
  상팔담까지 가서 선녀는 못보고 처음 만나는 북한 젊은이, 지도국 동무 김원철씨와 많은 얘기를 나누었는데 박재희 시인은 기어이 배낭을 열어 남한에서 가져간 커다란 사탕 한 봉지를 내밀었다.
 그것은 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친근감이나 애틋함과 다정함이 두루뭉수리되어 우리 식의 속내를 드러낸 방법이었지만 김원철씨는 "이러시면 안됩네다!" 라며 강하게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나는 내 사탕 봉지도 아니면서 기어이 우격다짐으로 "같은 동포의 마음을 이렇게 몰라 주깁니까. 이러시면 정말 섭섭 합니다. 우리 마음이니까 받으세요."라며 생색을 내었다.
 "그러면 고맙게 받겠습니다."라며 우리의 사탕 봉지를 거두어 주어 참 고마웠다. 모르긴 해도 돌아서는 발걸음이 아쉬웠던 게다. 다 못나눈 이야기와 정이 문득 알싸한 아픔과 함께 그리웠던 게다.
 하산하며 금강문에서 본 좌판에는 우리네 슈퍼에서 볼 수 있는 허드레 스넥류와 단물이라고 표현된 쥬스류가 있었다. 몇 군데 좌판이 놓인 곳마다 젊은 여자 판매원이 있었는데 모르긴 해도 판매 목표량이 있는듯 적극적으로 구매를 권유하기도 했다.

 점심은 북한에서 운영하는 목란관에서 먹었다. 나는 미리 정해진 식단인 비빔밥이나 냉면 대신 2달라를 지불하고 '단고기'를 먹었다. 평소 개고기를 즐기는 장하빈 시인은 비빔밥을 먹었는데 나는 '이 사람이 여까지 와서 비빔밥이나 먹고 이래가 좋은 시 쓰겠나....어쩌구 저쩌구 너스레를 떨며 퉁바리를 주곤 했다.
 북한식 보신탕인 '단고기'는 정말 맛이 있었다. 기회가 다시 허락된다면 나는 기꺼이 목란관 식당의 '단고기'를 먹을 것이다. 곰삭은 육질이며 한껏 우러난 육수가 주는 감칠맛이 입안에 살살 도는 향취와 함께 지금은 사라진 어릴적 무쇠솥에 끓인 육계장 맛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는 목란관 식당에서 오분 거리에 있었는데 연락부절로 들고 나는 버스 아무 것이라도 타면 되었다. 그런데 내려가는 길 초입의 신계사 폐사지를 들를 것이냐 바로 삼일포로 향할 것이냐 선택을 해야 될 입장이었다. 삼일포 가는 차편 시간이 빠듯했기 때문이다.
 장하빈 시인과 박재희 시인은 삼일포행을 고집했으나 '어허 여까지 와서 신계사도 안보고 가서 옳은 시 쓰겠나....'하며 내 고집을 피웠다.
 신계사(神溪寺)는 한창 복원공사가 진행중이었다. 일찌기 장안사(長安寺), 유점사(楡岾寺), 표훈사(表訓寺)와 더불어 금강산 4대 사찰의 하나로 꼽히던 명찰이었건만 6.25 전쟁 때 소실된 것을 최근에 남한측의 지원으로 옛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돋을새김으로 기단부 네 면에 표현한 팔부신중이라는 수호신상에 오래 눈길을 주었다. 신계사는 원래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되어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등 고승들이 거처하기도 하고 근세에는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닌 효봉스님의 이야기가 있는 절이라고 하지만 옛 흔적이 남은 것은 3층 석탑 뿐이었다. 하지만 환속한 시인 고은선생과 법정(法頂)스님과 이미 열반에 든 송광사 구산(九山)스님 같은 분들이 다 효봉스님의 제자였다니 내 어찌 쉽사리 지나칠 수가 있었겠는가.


 온정리로 돌아와 저녁 식사후 '예술 속의 금강산'이라는 주제를 두고 펼친 문학기행 세미나는 뜻깊고 보람 있었다.
그림으로 펼친 금강산을 강연하신 이동민선생님이나 시로 오르는 금강산을 소개하신 문무학회장님의 말씀도 새겨들을만 했지만 정작 감동은 예기치 못한데서 왔다.
팔순의 노구를 이끌고 오신 이성수선생님은 몇 해전 얻은 지병으로 한때 꽤 고생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기어이 떨쳐 일어나 이번에 금강산 문학기행에 동참하신 것이었다.


어린 날 금강산이 있다는 말
바람처럼 듣다가
오늘 마침내 이곳까지 와
1931년 금강산 흑백사진첩을 들쳐 보나니.....
오늘에사 오늘에사
너의 맨살을 만져 보는구나.
..............
..............


선생님께서는 금강산에 와 즉흥적으로 느끼신 감흥의 일부를 떨리는 목소리로 읊으셨는데, 문학이란 그런 것이 아니랴. 그토록 오래 품고 가꾸어 온 어린시절의 꿈 같은 소망과 기대를 그 가열한 다스림과 열정의 모습으로 후배들에게 보여주시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세미나 후 만난 북한 가무단의 공연은 건성으로 쉽게 여기고 지나쳤다면 아련한 슬픔이거나 가슴에 젖어오는 애닲음 같은 정서 하나를 놓치고 갈 뻔 했다.
공연 내용 중 아코디언이나 가야금 연주는 알싸한 슬픔의 현을 퉁기고 가듯 축축하게 젖어 들고는 했다. 나는 그네들의 표정 하나 동작 하나라도 더 자세히 카메라에 담기 위해 몇 차례나 무대 앞쪽으로 다가가곤 했는데 나중에는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젊도 늙도 아닌 어설픈 나이에 멋적고 객쩍었지만 시간이 갈 수록 내 행동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두에서 한나로 우린 하나의 겨레
헤여져서 얼마냐 눈물 또한 얼마였던가
잘 있으라 다시 만나요 잘 가시라 다시 만나요
...............
부모형제 애타게 서로 찾고 부르며
통일아 오너라 불러 또한 몇 해 였던가
.................

꿈과 같이 만났다 우린 헤여져 가도
해와 달이 찬란한 통일의 날 다시 만나자


 <다시 만납시다>라는 제목의 잘 있으라 다시 만나요~ 잘 가시라 다시 만나요~ 라는 대목에서 나는 주책없이 눈물을 찔끔 흘렸다. 그 웬 가슴 온통 도려내는듯 절절한 몸부림 앞에서 온전히 무연한 남의 일처럼 노래를 듣고 있을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길에 상봉과 리별 그 얼마나 많으랴 헤여진대도 헤여진대도 심장속에 남는이 있네 아--- 그런 사람 나- 는 못잊어 라는 가사의 <심장에 남은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심장에 남은 사람이 무엇을 의미하든 누구이든 그 깊은 속내와 의미를 몰라도 좋았다. 그냥 댕그러어엉~ 하고 무심한듯 슬픔의 현을 울리다가 스르르으응~ 겨자 먹은듯 눈물처럼 콧등을 찌르르르 울려오던 것이었다.

 금강산호텔에는 놀랍게도 북한 여자 접대원이 있는 가요주점도 있고 홀에서 연주되는 생음악은 물론이고 여러 개의 룸도 있었다. 나는 오며 가며 안보는 척 여러 사람의 북한 아가씨들을 훔쳐 보았는데 과연 자연산 미인들이 많았다. 남남북녀라는 말이 아무렇게나 그냥저냥 나온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가무단의 공연장 바로 옆에는 가요주점이 있었는데 북한 미인들의 자태에 혹하고 낯선 분위기도 작용한 탓이지만 나는 기본이 맥주 다섯병에 7만원이라는 사실도 알아 내었다. 영업은 두 시까지 한다는데 영업후에는 숙소까지 자기들 차편으로 모셔다 드린다고 놀다 가라고 하는데는 잠시 마음이 솔깃하기도 했다. 술을 핑계로 북한 주민들, 그것도 젊고 발랄하고 예쁜 그네들과 이야기를 나누고픈 호기심 때문이었다.


 호기심을 핑계로 거허게(?) 한 잔 하고 싶던 바램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포장마차에서 밤늦게 까지 일행들과 어울렸다. 예총 사무국장인 이기도님의 하모니카 연주는 오랫만에 듣는,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같은 선율이었다. 먼 이북 땅 온정리의 밤 천막 밖에는 소살소살 가는 비 내리고 하모니카 선율은 발목에서 찰랑거리다가 손풍금 소리처럼 공중으로 부드럽게 퍼져 나가다가 마침내 목울대를 타고 등 너머 가고 있었다. 기어이 먼데 산 죄다 불러 모아 산그림자 깔리듯 은은하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언제 오셨던가. 문무학회장님도 왕년의 솜씨를 발휘해 하모니카를 불고 누가 먼저인지 찔레꽃 붉게 피는 자주고오르으음 입에에 무우울고오오~를 불러 재꼈는데 술잔이 몇 순배 돌고 몇 번이나 술병이 쓰러지고 그렇게 밤은 짤랑거리며 깊어갔다.
 '가요 반세기'라는 별명을 가진 박기섭형의 노래를 받아 포항에서 온 이종암시인의 노래가 이어지고 노래 잘 했다고 1달러 팁이 건네지고 영남일보 박종문 기자의 노래를 듣고 다시 난 1달러씩 받고 꽃피는 봄 사월 돌아 오면 이 마음은 푸른 산 저 너머~로 이어지는 '망향'을 불렀다.
 '퍼포먼스'시집을 낸 박진형형은 무슨 노래를 불렀더라? 장하빈형은 바람부는 저 들길 끝에는 삼포로 가는 길 있겠지를 부른 것 같고 권순진 사무국장님은 부지런히 술 나르느라고 바빴던 것 같고....박재희님은 전작이 있던 터라 한껏 흥이 고조된 것 같고 아무렴 그날 우리는 적당히 알딸딸하게 취해 마지막에는 북한 접대원 세 사람의 노래를 열광적으로 박수치며 들었다. 어느 순간 그네들과 어깨를 겯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2박 3일 마지막 밤은 정녕 꿈에 듣는 먼 군가소리처럼 아련하게 깊어갔다.


 금강산 기행의 마지막 날 많은 수의 사람들은 해금강과 삼일포를 둘러보는 쪽 코스를 택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아침부터 비가 찔끔거렸고 만물상 코스가 결코 쉽지 않은데다 날씨가 그래서는 아무것도 못보리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빗속에서 이루어진 산행에 어지간히는 애먹은 탓으로 가벼운 산책코스가 나을듯 싶었을 것이다.
 나는 기꺼이 만물상 코스를 택해 다른 차에 탔다. 우리 일행은 네 사람이었는데 시조를 쓰는 김용주님과 수필을 쓰는 신은순님과 문경에서 오신 시조시인 안용주 선생님이었다.
 만물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온정령이라는 고개를 넘어야 했다. 온정령은 대관령 구비구비 구절양장 아흔 아홉 구비에 일곱구비를 더한 일백 여섯 구비라고 한다. 만물상이란 하늘을 찌를듯 기기묘묘 온갖 사람,귀신,동물의 형상을 한 봉우리들을 말하는 것인데 인간의 상상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자연의 위대함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삼선암,귀면암,칠층암 거쳐 천선대 가는 길은 아찔할 정도로 가팔랐다. 경우에 따라 고소 공포증을 일으킬 정도로 섬뜩하고 아슬아슬하면서도 스릴이 넘쳤는데 산정으로 오를 수록 비가 잦아 들면서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넋을 놓다가 온가슴 가려두르는 황홀경에 잠시 맥박이 빨라지다가 흥분된 감정은 마구 두방망이질 치는데 아뿔사 카메라 든 손에 힘이 쫙 빠진다. 미인은 속살을 천천히 보여 준다는데 너무 서두르고 흥분하며 서두른 탓으로 카메라 밧데리가 떨어져 감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헛다리 짚고 잔뜩 헛물만 켜는 격이었다. 하지만 정상까지 오르며 눈앞에 전개되는 풍경을 어찌 카메라에만 담아두랴 싶었다. 지나고 보면 뜨거운 감동과 그리움 없이는 다시 못 떠올릴 풍경속으로 애써 걸어 들어가 기꺼이 마음에 새기고자 했다.
 누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보고 느끼는 만큼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그리움처럼 뜨겁게 간직하게 되는 풍경임을 천선대(天仙臺 936m)에 오르고 보니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다.
 송강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이적선(李謫仙-이태백을 말함) 이제 있어 의논하면 여산(廬山-중국의 명산)이 여기보다 낫단 말 못하리라고 했다. 정철은 금강산의 절경을 아래와 같이 노래했다.

어화 조화옹(造化翁)이 부산키도 부산하구나
날거든 뛰지나 말며 섰거든 솟지나 말아라
연꽃을 꽂았는 듯 백옥을 묶었는 듯
동해를 박찼는 듯 북극을 고였는 듯
하늘에 치밀어 무슨 말씀 사뢰려고
천만년이 지나도록 굽힐 줄 모르는가

 몇 백개의 돌계단과 쇠계단을 밟고 올라선 천선대인줄 모르겠다. 하지만 문득 눈 들어 알겠다. 산 첩첩 물 청청 구름 둥둥 안개 겹겹한 비구름 너머 그 위에도 또 산이 있음을 비로소 만물상에 와서 알겠다.
 하산길에 하늘문 거쳐 천선대 아래쪽에서 한 모금씩의 샘물을 마셨다. 처음에는 그냥 물맛이 그렇게 달고 시원할 수가 없었다. 힘은 들었지만 무엇인가 이루고 간다는 만족감과 스스로 대견함에 취해 다른 것을 눈여겨 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연히 보고야 말았다. 쫄쫄쫄 나무잎사귀를 타고 흐르는 샘물위 바위에 음각으로 새겨진 크나큰 인삼 뿌리를.
 아마 내가 백 살을 산다면 만물상 천선대 아래 천 년 묵은 인삼물 덕일 것이라고 우스개 소리를 했다.


 2박 삼일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나는 사진작가 서담형이나 시인 장하빈, 박진형,박기섭 제형들에게 은근히 약을 올리곤 했는데 속으로는 어떤지 몰라도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거듭 약을 올리고는 했는데 오늘 이 버스에는 금강산까지 가서 만물상을 본 사람과 보지 못한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금강산까지 가서 만물상도 못보고 시 쓴다고 하는 사람도 있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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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7-25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격스러운 여행 다녀오셨네요. 신선이 노닐던 곳 같습니다.
구룡폭포를 두고 어느 문인이 쓰셨다는 사설시조도 멋집니다.
만물상 천년대 아래 천년 묵은 인삼물을 드셨군요. ^^
박가분아저씨님, 얼굴은 처음 뵙네요.^^ 사진으로나마 풍경들에
흠뻑 홀렸다 갑니다. 부산문협이랑 가까운 곳에 계시네요. 반갑습니다.

박가분아저씨 2007-07-25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부산문협이라구요?
소설쓰는 박명호가 친군데.....

박가분아저씨 2007-07-27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야 다시 읽어보니 너무 흥분한 탓으로 오자도 있고 중간에 뭉텅 끊어 먹어서 다시 고쳤답니다. 오랫만에 반갑습니다.
 
비, 혹은 얼룩말 만인시인선 14
장하빈 지음 / 만인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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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바라기; 저녁에 서쪽 하늘에 보이는 금성(金星)의 별칭. 태백성.
금성;.........저녁에 보이는 별은 '개밥바라기' '태백성' 새벽에 보이는 별은 '샛별' '계명성'

이십 수 년지기 옛 친구의 첫 시집을 받고도 나는 몰랐구나.
'개밥바라기'의 뜻을 한해살이풀 며느리밑씻개나 여러해살이풀 산꿩의 다리나 노루오줌 혹은 두해살이풀 애기똥풀처럼 이름이 특이하거나 이름만큼 남다른 사연이 있는 야생화 정도로 여기는 무심함 뿐이었구나.

아아, 이십년 가까이 어디 드러내 하소연 할 곳도 없는 실어증 앓던, 개망초 같은 세월 내 친구는 절필을 하고 앉은뱅이꽃으로 방안에서만 떠돌던 불치의 아들은 그예 다친 영혼으로 떠나갔구나.

그 해 겨울,
내 전해 듣기론 하양가는 길 물띠미고개 그 낙동강변에는 때아닌 펄펄펄 폭설이 내리고
보이나니, 참척의 아픔을 넘어 그 천진난만 차마 자식을 가슴에 묻는 아비의
지지 누르고 눌러도 끝내 치받쳐 오르는 울음의 불꽃 붉게 타오르나니
아프구나, 차마 너무 아파 한 줌의 그리움 외려 그리도 담담하구나.

"눈 그친 서녘 하늘에 걸린 초롱불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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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화재에서의 강의는 재미없고 고리타분했다.
'선비문화체험'이나 '유교사상이나 유교' 같은 그런 높은 정신의 깊이를 가늠하고 엿보고 애써 배우기에는 내 마음의 곳간이라는 것이 너무 횡댕그레하게 비어있는 까닭이었다. 아니 어쩌면 내 아무렇게나 쉽고 적당히, 고민하지 않고도 그냥저냥 살아온 날들이 너무 하찮고 보잘 것 없어 속으로 찔끔 본색이 드러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열화재(悅和齊)에서 맞는 저녁에는 가는 비가 뿌리기 시작했다.
 바뀐 잠자리 탓인지 마음만 허둥거리던 설레임 탓인지 단잠들지 못하고 새벽녘에 깨었다. 초저녁에 가늘게 내리던 빗줄기가 굵어 지면서 모처럼 시름겹거나 추억도 아닌 것이 그리움처럼 빗소리가 깊었다.
 새벽 세 시에 날 깨우고는 오래도록 찰박거리던 빗소리.
 함께 잠든 두 사람의 숨소리 조차도 적막에 깃든듯 떠내려가는데
 세 시에 시작하여 네 시를 지나 다섯 시에 이르러서도 내 머리밭은 흥건한 빗소리로 젖어 들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안부없는 짝사랑 같은 혹 그런 화답없는 메아리 같던 옛일이 떠올랐다. 처마끝 빗줄기를 그으며 서서 문득 떠올려보던 유년의 꿈이나 손가락 걸어 다짐하던 희미한 옛 맹세 같은 것을 다 기억했다. 내 진작 불혹도 넘어 지천명을 지난 유월 어느 한갖진 잠자리에서 타관을 떠도는 나그네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아, 그런 잠 안오는 긴 긴 밤에 추억을 되새김질 해보는 유월의 어느 밤에 옛사람 유정지(劉廷之)의 시는 왜 그리도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이랴!

낙양성 동쪽에 핀 복사꽃 오얏꽃들아 落陽城東桃李花
바람결에 날려 뉘집에 떨어지는가 飛來飛去落誰家
꽃같은 여인들은 제 얼굴 그럴까봐 落陽女兒惜顔色
지는 꽃 슬퍼하며 긴 한숨 쉬누나 行蓬落花長歎息
금년에 지는 꽃과 시드는 얼굴이여 今年花落顔色改
내년에 피는 꽃을 어찌 본단 말인가 明年花開復誰在
아, 송백도 찍혀서 장작이 되고 巳見松栢0爲薪
뽕나무밭도 변해 푸른 바다된다는데 更聞桑田變成海
옛 사람은 기어이 낙양성 못 돌아오고 古人無復落城東
오늘 산 사람만이 꽃바람 쐬는가 今人還對落花風
해마다 해마다 꽃은 이어 피건만 年年歲歲花相似
해마다 해마다 보는 사람 다르구나 歲歲年年人不同

 새벽에 배운 퇴계선생의 건강법이라는 활인심방(活人心方)도 좋았지만 열화제의 부페식 식사도 좋았다. 모르긴 해도 퇴계집안의 사람이라던 주인 아주머니의 영남지방 사대부가의 음식맛이 감칠맛있게 입에 맞았다. 콩을 발효시킨 집장이나 안동매실로 만든 매실절임이나 국화 화채나 대구포로 만든 술국이 지난 밤 술자리 취기를 가시게 하기에 족했다.

 국학진흥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지어진 한국국학진흥원에서의 강의는 자다 깨다 가수면 상태에서 이루어졌는데 아무렴 어떠하랴. 조상들의 지혜와 지식 뿐 아니라 학문적 열정을 몰래 엿보고 흠모하는 마음을 낸 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애써 자위했다.
 강의후에는 곧장 전시실로 향했는데 사람의 길, 대동의 꿈 '유교박물관' 개관이 의미하는 바 그 깊은 뜻에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열악한 조건 아래 민간에 흩어진 국학자료가 잘 보존된 듯해 고맙고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국학자료 기탁 현황을 보면서 생각했다.
주제별, 문중별, 지역별 전시를 통해 선조들의 학문과 예술세계를 재조명할 수 있는 터전과 노력을 엿보여 줘 그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맙던지 모르겠다.

 달성 도동서원에서 기탁했다는 제례용구인 희준(犧樽)과 용작(龍芍)을 보는 마음은 새삼 스러웠다. 일찌기 분청이나 백자로 된 것들은 본 적이 있지만 고식의 제대로 된 유기 제품은 못보았기 때문이다. 함께 간 일행 한 분은 문화재 칭호를 가진 사람이 만든 유기도 나쁜 구리와 상납이라 불리는 주석을 써 오래되면 녹이 슨다고 했지만 옛 도동서원의 제구는 제대로 된 술항아리와 국자였던 것이다.
 유교박물관 직원의 설명은 분명하고 자세하게 이어졌는데 그 설명을 들으랴 몇 컷 찍으랴 내 몸놀림은 분주하기만 했다. 원컨데 목판 10만장 수집운동을 벌이고 있는 국학진흥원의 목판 수장고인 '장판각'을 보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어 못내 아쉬웠다.
 일반 전시실과 특별 전시실을 거쳐 상설전시실을 나서다가 나는 그냥 스쳐 지나쳤음직한데 우연히 '梅心舍'라는 현판을 보았다. 전시실을 나오다 다시 발길을 돌려 유심히 살펴 보았는데 눈에 익은 추사의 글씨체였던 까닭이다.
 매화는 일찌기 도화(桃花)나 행화(杏花)라는 한자말 꽃 이름도 있지만 복숭아꽃, 살구꽃이라는 순수한 우리 말도 갖고 있다. 그러나 매화를 떠올리면 오동은 천년 늙어도 가락을 잃지 않고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시가 떠오른다.

桐千年老恒藏曲
梅一生寒不賣香


 나는 예전에 골동품 가게를 지나다 매심(梅心)이라고 추사가 글씨를 쓴데다가 매화꽃 조차 그려 넣은 현판을 구해 갖고 있다. 나무 목변에 오른쪽 매양 매(每)글씨는 굳이 조금 크게 쓰면서 파격을 준 추사 김정희의 서체를 보면서 때로 진정 멋을 아는 옛 어른들의 풍류를 미루어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내 일박 이일 '도산서원 선비문화원'의 선비문화 체험도 매화가 상징하는, 추워도 팔지 않는 선비가 지녀야 할 향기를 애써 구하고 지키고자 하는 가열한 몸짓이 아니었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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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7-09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가분아저씨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반가운 페이퍼입니다.^^
저도 얼마전 글벗들과 안동에 다녀왔어요. 유교박물관이 잘 갖춰져있더군요.
설명도 자세히 들었습니다. 퇴계종택과 도산서원도 다시 갔구요.
매화꽃이 그려진 현판, 아주 멋스럽습니다. 소장하시고 계시군요.
 


퇴계(退溪) 녀던 길 좇아

 고인도 날 못 보고 나 또한 고인 못뵈/고인을 내 못 보고/녀던 길 앞에 있네/녀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녀고 어쩌리
-퇴계 이황(李滉)의 '도산 십이곡' 중에서

 녀던 길(예던 길)이란 걷던 길이라고 한다.
 일찌기 퇴계선생은 청량산을 사랑하시어 오가산(吾家山)이라고 하셨다는데 그만큼 즐겨 아끼고 오르내리셨다는 의미일 것이다. 오죽 했으면 유산(遊山)은 독서와 같다고 하셨을까. 어려서는 '청량정사'에서 숙부인 송재 이우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나이 들어서는 '도산십이곡'을 청량산에서 지었다고 한다. 아마 그런 연유로 산에 오르는 것 자체가 인격을 쌓고 마음가짐을 정갈하게 하고 학문을 닦는 방편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청량산 가는 길은 진정 아름다웠다.
 일찌기 옛 성인이 걸어가신 길, 그 정신의 깊이와 학문의 업적을 흠모해 기꺼이 보고 배우고 사랑하고자 나선 발걸음이 가벼웠다.
 산 첩첩 물 겹겹 하고 먼 길
 바특이 바라뵈는 왼 산 초록이 지쳐 산빛 물빛 속절없이 깊어가는데 가슴은 또 왜 그렇게 두방망이질 쳐 두근대던 것이랴
 앞서거니 뒤서거니 괜시리 마음만 바빠 허둥되고 내 저만치 잠시 두고 온 세상은 또 얼마나 멀리있던 것이랴.

 청량산 초입에 자리한 농암 이현보의 종택은 정비가 다 되지는 않은 듯 했다. 안동댐 이후 산지사방 수몰되고 흩어진 유적들을 옮기고 30년 만에 다시 짓고 하느라 마음 고생과 시름 꽤나 깊었겠다.

 농암 이현보(1467~1555)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속세를 떠나 자연속에서 여유롭게 사는 삶을 노래한 강호문학(江湖文學)으로 유명한데 '농암가'나 '효빈가'와 같은 단시를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중국의 노래로 부를 수 있는 악부시를 '어부가'로 재창작한 것으로 더 유명하다.
 나는 이현보의 농암(籠巖)이라는 호가 지닌 뜻에 주목했다. 물소리가 귀먹을 정도로 거센 집앞 냇가의 바위에서 연유했다는데, 어쩌면 세속의 시류와 헛되고 하잘 것 없는 평판이나 이목에 귀막고 살고자 하는 의지가 반영된 것 같아서다.

   농암종택의 가옥들은 최근에 복원하거나 옮겨 지은 것들이다.
 그 중 긍구당은 용케 훼손되지 않고 애써 옮겨온 것인데 몇 백년 고단하고 신산한 세월의 흔적을 많이 갖고있는 건물이라 알 수 없는 애정을 갖게 했다.  특히 긍구당이라는 현판 글씨는 신잠(申潛)공이 썼다는데 단아하고 유연하면서도 한껏 멋이 깃들어 있다. 그 넘치는 풍류가 저 원교 이광사의 글씨체와 방불해 내 멀리서 보고는 잠시 착각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정면 3칸 측면 2칸 반 팔작집 지붕의 외씨버선 같은 날렵한 처마도 글씨체를 닮았구나.


 나는 아무래도 오래된 옛 유물이나 물질문화에 빠져들기를 잘 하는지라 이현보의 신도비에 잠시 마음을 빼았겼다.
 용 모양이었을 비머리는 어디가고 비신만 비석받침을 일컫는 귀부(龜趺)위에 얹혀 있었는데 어느 하세월을 견뎌낸 것인지 알 수 없어도 좋았다.
 늙수구레한 표정의 목을 두른 겹주름이며 쌍꺼풀진 눈이며 헤식은 웃음을 짓고 있는 입이며 목뒤 어깨에 새겨 넣은 다섯잎의 꽃잎이 만들어내는 익숙하고 농익은 친근감은 전혀 낯선 모습이 아니다.
 거북이는 일찌기 미래를 예언하고 신의 뜻을 전달하거나 장수를 상징하기도 하고 지혜로운 동물로 알려져 왔다. 거북이는 우리 민족에게 매우 상서로운 동물인 것이다.

 
 종택에 왔다는 느낌을 갖게 한 것은 두 쌍의 문인석에서도 묻어 났는데, 어느 무덤앞을 지키던 것인지는 몰라도 세월의 이끼 덧앉고 물때 낀 석물이 주는 느낌이 정겹고 따스하다.
 더러는 바람찬 노숙의 시간도 있었으리. 태무심 하고 버려져 곰팡이 돌꽃 피는 잊혀진 세월도 흘렀으리. 돌아보는 이 없고 하릴없이 깊은 산속 새똥이나 찌리다 가고, 이른 봄날의 할미꽃이나 빈 바지랑대 받쳐들듯 섭섭하던 가을날의 안부없는 기다림도 있었으리.
 그러나 자세히 보면 돌에도 따스한 온기와 맥박이 뛰는 것임을 알겠다. 혹 아시는가 그대! 익숙하고 낯익은 모습의 석상 표정에서 이제는 잊혀진 오래된 이야기나 앞니 빠진 외할아버지의 정겨운 사투리나 어릴 때 죽은 동무의 천진한 웃음이 묻어나던 것을......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별채 앞 흰고무신이 주는 느낌은 30년도 더 오래전 어느 봄날의 시무룩한 내 표정같다. 오래 간직한 말 고백하러 갔다 한마디 못하고 발길 되돌려 정처없이 한 사나흘 일없이 싸돌아 다니고프던 날의 숫기없는 망설임같다. 무리한 표정으로 층층대를 올라가 문고리만 만지작거리다 차마 떨치고 돌아서던 후회같다. 옷섶에 방울지던, 단추구멍 쬐그만 그녀의 눈물같다. 기억도 가물거리는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첫사랑 비내리던 필름같다.
 
 아마 농암종택에서 민박을 하는 탓으로 누군가를 위해 마련해 둔 고무신이리라.
 허락된다면, 세상잡사에 빠트린 발목 잠시 빼어 머물 수 있다면, 한 사나흘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달밤을 거닐어 보리. 도산서원에서 청량산까지 이어지는 녀던길(옛길) 되짚어 밤 도와 별 총총 더부러 가 보리.
 새벽 어스름에 피곤하여 처소에 들면 뒤따라온 물소리는 귓가에 출렁이고 개구리 소리는 턱밑으로 일개 소대쯤 지나가리. 일찌기 옛 선비 한 분은 책 한시렁, 거문고 한 벌, 벗 한 사람, 신 한 컬레, 잠을 청할 베게 하나, 바람 통하는 창문 하나, 햇볕 쪼일 툇마루 하나, 차달일 화로 하나, 지팡이 하나와 봄경치 즐길 나귀 한마리로 족했다는데 나는 마침내 나흘 째부터는 뒹굴뒹굴 시집(詩集)이나 몇 권 읽으리. 하잘 것 없고 돈(?) 안되는 화집(畵集)이나 뒤적이며 대책없이 배깔고 엎드려 쓰잘데 없는 공상이나 하리. 오랫만에 안부없어도 좋을 편지나 길게 쓰리.
 

 
 사랑채에는 선조가 친필로 적선(積善)이라고 써준 현판 글씨가 걸려 있었다. 문 들어 올려 들쇠에 걸고 사방 문 다 열어젖히고 밖을 보면 마침내 보리라. 벽력암과 학소대 앞으로 휘어져 흐르는 낙동강 줄기 굽이 굽이 흘러간 물길을.

 사랑채에 딸린 뒷방에서 나는 여러 문집과 책들로 가득찬 책장을 만났는데 만 권 서적 가슴에 품을 듯한 욕심으로 몰래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모르긴 해도 현재 농암종택을 지키는 종손의 서재가 아닐까 짐작해 보았는데, 수백년 이어져 온 학문의 줄기가 현재도 저리 단단하고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보았다.
 농암종택을 뒤로 하고 떠나오는 내내 가송리(佳松里-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는 마을)의 인상은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으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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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게시판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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