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喪家(상가)에 모인 구두들]-유홍준

저녁 喪家에 구두들이 모인다
아무리 단정히 벗어 놓아도
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
젠장, 구두가 구두를
짓밟는 게 삶이다
밟히지 않는 건 亡者(망자)의 신발뿐이다
정리가 되지 않는 喪家의 구두들이여
저건 네 구두고
저건 네 슬리퍼야
돼지고기 삶는 마당 가에
어울리지 않는 화환 몇 개 세워놓고
봉투 받아라 봉투,
화투짝처럼 배를 까뒤집는 구두들
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 신고
담장 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 보인다
北天(북천)에 새로 생긴 신발자리 별 몇 개

...........................................................................................................
*젠장,
삶이란 게 다 뭔지?

아랫 고을 윗 마을 골골 통기온 e-mail 받고 賻儀(부의) 하나 써 들고 문상 간다. 일면식도 없는 이의 죽음을 핑계삼아 돼지고기 놓아라, 소주 떨어 졌다, 국밥 좀 더 다오, 하염없는 주문을 늘어 놓는다. 구두 밑창같이 질기고 힘겨운 하루의 보행 저마다 풀어 놓으며 웬 푸념들이 그리도 많으냐.

누구랄 것 없이 광땡을 쪼으며 비고도리를 꿈꾸고 쓰리 고에 흔들고 피박! 씌우려 화투짝을 때리면 잊고 살아 온 무엇이, 애써 감춰 온 그 무엇이 보이는가.

때로 수취거부가 되어 돌아 온 부음을 읽다 보면 다음은 네 차례다.

밤 깊어 맨숭맨숭 음주단속을 걱정하거나
엉망으로 취한 몸 대리운전을 기다리며
조금씩 자세를 낮추고 담벼락에 오줌을 갈기다 보면
저 북망산천쪽으로 별 보인다
시름 겨운, 채 뫃다한 , 근심 끊이잖는 우리네 사연들 뒤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장미의 내부] - 최금진


벌레 먹은 꽃잎 몇 장만 남은
절름발이 사내는

충혈된 눈 속에서
쪼그리고 우는 여자를 꺼내놓는다

겹겹의 마음을 허벅지처럼 드러내놓고
여자는 가늘게 흔들린다

노을은 덜컹거리고
방안까지 적조가 번진다

같이 살자
살다 힘들면 그때 도망가라

남자의 텅 빈 눈 속에서
뚝뚝, 꽃잎이 떨어져 내린다

..........................................................................................
*그래, 의지가지 없이 순결한 영혼끼리 만나 눈물겹도록 안간힘이구나.
너 외롭고 힘겨울 때 따뜻한 동행이 되리니,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가슴에 흥건히 빗물 고이듯 적조만 가득할 지라도 이대로 무너지진 말자.
깨어진 무르팍 쾡한 눈망울 들어
이렇게 갈비뼈 하나 부등켜 안고
같이 살자, 살아 보자꾸나.
살다 살다 목숨조차 힘겨워
그 때 도망가도 늦지 않을테니...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파란여우 2004-09-06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제 박스안에 시를 넣으시는군요^^. 보기 좋습니다. 같이 살자며 꽃잎 떨어지듯 눈물 흘리는 남자를 아직 못만났으니 그런 심정을 그저 활자 속에서나마 어림짐작 해 봅니다.
 

[한 여자를 보았네]-함기석


나는 보았네
나는 양파 속에서 잠자는 소녀를 보았네
나는 밤하늘을 떠가는 피아노를 보았네
나는 태양을 향해 헤엄쳐 오르는 돌고래 떼도 보았네
나는 얼음의 산정에 알을 낳는 히말라야 수탉들도 보았네
나는 노래하는 구두도 보았네
나는 보았네
손에 손을 잡고 춤추는 집들을 보았네
토슈즈를 신고 빙글빙글 춤추는 산들을 보았네
하얀 스카프를 휘날리며 달리는 바다도 보았네
나는 바다 위의 포도밭도 보았네
그 포도밭에서 구름을 따먹는 어린 기린들도 보았네
나는 보았네
영원히 돌 속에 갇혀 우는 새를 보았네
영원히 물 속에 떠돌며 우는 달을 보았네
나는 보았네
한 여자를 보았네
생이라는 이 거대한 사막의 한복판에서
아름답고 아름다운 한 여자를 보았네
이 모든 것을 보았다는 한 여자를 보았네
이 모든 것을 내게 말해준 한 여자를 보았네
그녀는 눈이 없었네
그녀는 입도 없었네
사람들이 모두 무섭다고 그녀를 피했지만
나는 사랑했네
몇번인가 내 품에서 앵두나무처럼 울던 여자
나의 고해소인 여자
내 눈보다도 내 입보다도 더 그녀를 사랑했네

.........................................................................................................
** 감히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을 빌어
하늘과 땅 바람과 햇빛과 바다와 영원의 이름을 빌어
잘 버무린 추억과 모과향기로 익어간 그리움과 온전히 아문 상처 그토록 빛나던 삶의 이름을 빌어

앵두나무 빨갛고 땡그란 열매 같은, 쪼작쪼작 그 조그만 입술을 오물거리던.......
그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개밥바라기 추억]-장하빈

겨울 금호강가에서 그에게 편지를 썼다
등에 업혀 새록새록 잠들다가
어두운 강물속으로 사라져간 개밥바라기

하얗게 얼어붙은 강 어귀에서
모닥불 지펴놓고 그를 기다렸다

한참 뒤, 폭설 내려와
강의 제단에 바쳐지는 눈발 부둥켜안고
모래톱 돌며 齊(제)를 올렸다

눈 그친 서녘 하늘에 걸린 초롱불 하나

..................................................................................................
*개밥바라기; 저녁에 서쪽 하늘에 보이는 금성(金星)의 별칭. 태백성.
금성;.........저녁에 보이는 별은 '개밥바라기' '태백성' 새벽에 보이는 별은 '샛별' '계명성'

이십 수 년지기 옛 친구의 첫 시집을 받고도 나는 몰랐구나.
'개밥바라기'의 뜻을 한해살이풀 며느리밑씻개나 여러해살이풀 산꿩의 다리나 노루오줌 혹은 두해살이풀 애기똥풀처럼 이름이 특이하거나 이름만큼 남다른 사연이 있는 야생화 정도로 여기는 무심함 뿐이었구나.

아아, 이십년 가까이 어디 드러내 하소연 할 곳도 없는 실어증 앓던, 개망초 같은 세월 내 친구는 절필을 하고 앉은뱅이꽃으로 방안에서만 떠돌던 불치의 아들은 그예 다친 영혼으로 떠나갔구나.

그 해 겨울,
내 전해 듣기론 하양가는 길 물띠미고개 그 낙동강변에는 때아닌 펄펄펄 폭설이 내리고
보이나니, 참척의 아픔을 넘어 그 천진난만 차마 자식을 가슴에 묻는 아비의
지지 누르고 눌러도 끝내 치받쳐 오르는 울음의 불꽃 붉게 타오르나니
아프구나, 차마 너무 아파 한 줌의 그리움 외려 그리도 담담하구나.


"눈 그친 서녘 하늘에 걸린 초롱불 하나"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파란여우 2004-08-24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롱불 하나....마음의 불이 그나마 켜진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요...
 

[단잠을 청하다]-김원국

공사판에 나가 유리 200장을
나르고 돌아온 나는
집에 누워 하나씩 기능점검을 해보고 있다
어깨는 무엇 하러 무겁게 양팔을 이어 붙이고
고통을 자초하는가
10mm 대판 유리의 무게는
어께가 바르르 떨릴 정도의 아름다운 것이었다
고요히 죽음이 찾아올 순간까지
앞으로 몇 번의 공사판을 찾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다가
한결같이 빠르게 삭아 내리는 공사판 일꾼들을 생각해 보다가
칠순이 넘어 人力所를 찾은 김씨 할아버지도 생각해 보다가
(잠이 들었다)
처음으로 우주 정거장에 도킹을 성공하는
무인 우주선처럼 신비하였다
행성마다 유리꽃이 만발하는
그런 계절이었다

..........................................................................
*아파트 공사장 10mm 거실 통유리의 무게는 80~90kg 쯤 나간다고 한다
외사촌 누이, 하루 14시간의 서빙과 허드레 잡일과 설거지의 품삯은 한 달에 90만원이라 한다.
영업용 택시기사 고등학교 동기의 이번 달 부족한 사납금은 15일 일하고도 40만원이 넘는다고 한다

때때로 바르르 떨릴 정도의 힘겨운 삶의 무게에 아름답다! 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잠이 들었다)
그 잠속에서 꾸는 꿈 가운데는 유리로 만든 유리꽃이 피기도 하고, 90만원에서 힘겹게 여투어 낸 아이들 학원비가 있고, 끝내 떨치지 뫃한 개인택시 기사 자격요건을 위한 가없는 희망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