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에서]-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십 수 년이 지나고도 까마득하게 세월을 잊고 살고도 지난 날 홀로 뒤척이던, 잠이 먼 그 밤의 빗소리 잘도 들린다. 돌아서면 잊으리라 이빨 앙다물고 축축하게 젖어오는 가슴을 다치던, 그 날과 그 시간의 물소리 바람소리 여전히 그치지 않는다. 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불러볼 그 이름 그 목소리 그날의 풍경 하나 애써 기억나지 않는다. 세월이 가면 안부없이 세월이 가고 나면 이 곳에 길이 있었던가 우리 어떤 노래를 불렀던가 희미한 흔적처럼 그 모든 추억의 이름을 덮고 어디서 먼 강물소리 들릴 지 모른다. 문득 길을 가다 우연히 흘러 나오는 음악을 듣다 옛날 영화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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